
SBS-TV토론에 출연한 오세훈 전 서울시장(왼쪽)과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시민의 이성적 판단을 위한 숙의 공간인 TV토론이 일차원적 이미지 게임이나 권력의 확장 수단으로 사용될 때 미디어 민주주의는 미디어 파시즘으로 전락한다. 서양 속담에 ‘혀는 강철이 아니나 사람을 벨 수 있다(The tongue is not steel, yet cuts it)’라는 말이 있다. 말이 가지는 가공할 위력을 나타내는 메타포(metaphor·은유)다.
필자가 KBS, MBC, SBS의 TV토론 프로그램을 분석해본 결과 “이들 공중파 방송 3사의 TV 토론은 미디어 파시즘의 경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디어 민주주의를 구현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이 도출되었다.
방송 3사의 TV토론을 본 시청자 중 상당수는 이러한 결론에 동의할 것이다. 확실히 방송 3사의 TV토론은 “볼 것 없는 토론” “알맹이 없는 말장난” “질문의 본질을 회피하는 말의 성찬” “말재주꾼들의 경연장”에 그치는 양상을 드러낸다.
기계적 중립에 매몰된 토론 시늉
그래서 횟수를 거듭할수록 TV토론 무용론이 커진다. 시청률도 제자리걸음이거나 떨어지는 상황이다. TV토론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극명한 사례라는 평가가 나올 법하다. 특히 사회자가 기계적인 중립성과 공정성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토론 시늉에 그치는 토론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TV토론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참여 민주주의에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에 관한 논쟁에 일반 공중이 참가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보면 볼수록 짜증나지만 그래도 TV토론이 현대 사회에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실제 TV토론은 공인에게는 사회적 책임을 인식시키고 시청자에게는 알 권리를 증진시키는 기능을 일정 부분 하고 있다.
이러한 TV토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기대는 토론이 이른바 사상의 공론장(public sphere)을 구현할 수 있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버머스에 의하면 공론장은 사적 개인이 모여 공적 문제를 토의하는 공간, 비판적 합의를 형성해내고 국가로 하여금 시민에 대해 책임지게 함으로써 권력에 잠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간으로 설명된다.
환상과 속임수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오늘날 TV토론이 일방적 홍보의 장으로 전락함으로써 공중의 관심을 정치적 행위에서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유사 공론장(pseudo-public sphere)이 되고 있다고 본다. 하버머스는 미디어가 공중을 수동적 방관자로 전락시키고 합리적 의견을 형성할 수 없는 사적이고 파편화된 개인을 만들어냄으로써 여론을 조작한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지금의 TV토론에 적용될 수 있다. TV토론은 시청자에게 공적 문제에 대한 논의에 자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만을 심어주고 있다. 수동적인 대중 시청자를 사로잡는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한다면 토론 프로그램의 일반 참여자들은 정보 전달자의 역할이 아니라 피(被)전달자로서 설득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래서 비판자들은 TV토론 프로그램이 방송사에서 구성해놓은 포맷에 의해 진행될 뿐이라고 말한다. 미디어 파시즘의 연장이라고 보면 된다.
이 같은 관점에서 공중파 방송 3사의 TV토론 프로그램이 사회적 이슈에 대한 공중토론의 기회를 얼마나, 어떻게 제공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하겠다. 이를 사회자, 패널, 진행방식과 토론이슈 영역별로 살펴봤다.
1. 사회자
방송 3사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사회자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사회자는 프로그램의 인상에 큰 영향을 주고 토론의 시작부터 끝까지 요점을 잡아가는 권위자로서 원 샷 프레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자는 패널의 토론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면서 대립되는 견해로 인한 갈등과 인신공격, 말싸움 등을 중재하고 결론을 유도하는 게이트 키퍼(gate-keeper) 기능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정치적 중립성, 전문성이 요구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SBS 시사토론은 김형민 앵커, MBC 100분토론은 황헌 진행자, KBS 심야토론은 왕상한 교수가 사회를 맡고 있다. 이들은 노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적 무난하게 토론을 이끌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론이 과열되거나 발언권 다툼이 심한 경우 그 한계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