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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스트로 다니엘 바렌보임, 그의 ‘영원한 그림자’ 뒤 프레

마에스트로 다니엘 바렌보임, 그의 ‘영원한 그림자’ 뒤 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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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렌보임과 뒤 프레. 두 음악 신동의 결혼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슈만과 클라라처럼 지고지순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내는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고 서서히 근육감각이 마비되어갔지만, 남편은 다른 음악가와 딴살림을 차렸다. 뒤 프레가 죽은 뒤 생전 그의 첼로 연주는 듣는 이의 눈물샘을 조용히 자극하지만, 바렌보임은 문명과 민족 간 화합과 평화를 역설하며 힘차게 세계를 돌아다닌다. 사랑은 가도 음악은 남는가.
마에스트로 다니엘 바렌보임, 그의 ‘영원한 그림자’ 뒤 프레
20여 년 전 여고 시절에 필자는 첼로 연주곡 LP판을 생일선물로 받은 적이 있다. LP판 표지에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금빛의 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앳된 연주자의 얼굴이 크게 실려 있었다.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1945~1987)’라는 첼리스트였다. 선물을 준 사람은 뒤 프레의 일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기억이 난다.

“신동으로 불릴 정도의 당대 최고 연주자였는데,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어느 지휘자와 결혼했어. 뒤 프레는 무명인 남편의 지휘를 받으며 열심히 연주했지만 너무 혹사를 당해 불치병에 걸렸다더군. 그런데도 그 지휘자는 조강지처 병간호는커녕 다른 여자들 속에서 젊음을 만끽했어. 병마에 지친 뒤 프레는 쓸쓸하고 외롭게 죽었고 말이야.”

그래서일까.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엘가의 첼로협주곡 E단조는 너무나 구슬펐다. 더구나 이 곡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1857~1934)는 작곡가 중에서 손꼽히는 애처가가 아닌가. 그가 작곡한 곡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랑의 인사’는 그가 아내 엘리스에게 청혼한 것을 기념해 바친 곡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앨범을 녹음한 1965년은 뒤 프레가 클래식계 최고 스타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20세의 전도유망한 때였다.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1942~)을 만나기 전이었고, 사랑을 알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의 암울하고 슬픈 첼로 선율은 자신의 비극적 미래를 예언한 듯 슬프다.

뒤 프레의 남편 바렌보임은 갈등과 분쟁, 테러로 얼룩진 지구촌에서 문명·민족 간 화합을 역설한 대지휘자로 유명하다. 지난해 8월 15일 비무장지대(DMZ) 내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공연장에서 베토벤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해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1984년 파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한국을 처음 방문했고, 한국의 불고기와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친한(親韓)파 지휘자이기도 하다.



그는 분쟁 지역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스페인 출신의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웨스트이스턴 디반(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다. ‘소리는 말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믿음으로, 갈등과 대립을 풀기 위해 세계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평화 콘서트를 연다. 바렌보임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평화의 메신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념과 용기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삶을 반추해보면 이 말은 진실일 거 같다. 아픈 조강지처를 버리고서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사람이 바렌보임이다. 뒤 프레는 명예와 목숨을 걸고 세계 평화를 위해 앞장서는 대가의 아킬레스건이다.

뒤 프레를 괴롭힌 ‘다발성 경화증’

뒤 프레라는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은 그가 프랑스인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영국인이다. 옥스퍼드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했다. 만 5세 때 첼로 활을 처음 잡으면서 일찌감치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미 대가의 반열에 오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의 마스터 클래스와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를 사사하면서 대형 연주가의 면모를 갖추어나갔다. 1961년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공식 데뷔를 한 뒤 프레는 세계 공연장을 다니며 많은 이에게 첼로 연주가 주는 내면의 깊은 울림을 전했다. 10여 년의 짧은 전문 연주 경력에도, 그의 연주를 담은 음반은 세계 음악애호가들 사이에 카잘스, 로스트로포비치 같은 수준으로 인식됐다.

음악계의 샛별로 자리매김하던 1966년에 처음 만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바렌보임은 그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만난 지 6개월 만에 이스라엘에서 유대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제3차 중동전쟁(6월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전쟁 중 결혼식도 그렇지만, 23세의 매력적인 첼리스트와 26세의 천재 피아니스트의 결혼은 슈만과 클라라 이후 음악계 최대 사건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아름다운 음악가의 결합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결혼은 각자의 작품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음악적 정서는 더욱 깊고 섬세해졌고, 표현력은 풍부해졌다. 따로 혹은 함께 연주활동을 하면서 레퍼토리를 더욱 광범위하게 넓혀나갔다. 행복한 시절, 이들 부부는 지금은 대가가 된 최고의 신예들과 함께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A장조 ‘숭어’를 연주했다. 일반적으로 피아노 5중주는 피아노, 제1바이올린, 제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인데, 이곡은 제2바이올린을 더블베이스로 교체해 더욱 중후한 음색으로 탈바꿈했다. 특이하게도 지휘자 주빈 메타가 더블베이스를 맡고, 이츠하크 펄먼이 바이올린을, 바이올리니스트 핑커스 주커만이 비올라를 연주하는 ‘별들의 향연’이었다.

연주는 탁월했고, 공연 실황에서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밝게 연주하는 새색시 뒤 프레와 왼손에 반짝이는 결혼반지를 낀 새신랑 피아니스트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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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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