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라하의 묘지(전 2권)<br>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각권 1만3800원
이제부터는 글을 쓰되 개인에 관한 묘사(…)는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한다. 이는, 들판에 가을이 오면 꽃이 시들어 꽃대에서 사라져버리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사라져버릴 터인즉,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는 보에티우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 그러나 윌리엄 수도사의 풍모만은, 그 비범한 모습이 크게 내 마음을 흔들었기로 여기에다 자세히 그려 남기고 싶다.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에서
2012년 8월 2일. 체코 프라하 엘베 강 옆 요제포프(유대인 구역)에는 신중한 표정의 이방인들이 그룹을 지어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와 유대인 묘지 주위에 모여 있었다. 프라하에는 도시 외곽 카프카가 묻혀 있는 신유대인 묘지와 도심의 구유대인 묘지가 있다. 구묘지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공동묘지라고 하기엔 비좁은 뜰에 포개지듯 촘촘히 세워져 있는 비뚜름한 비석들과 고목의 검푸른 그늘 아래 언뜻언뜻 햇살에 돌올하게 드러나는 비문들이었다. 나는 비석들이 그처럼 겹쳐져 있는 사연과 고목의 이름을 귀국 후, 에코의 소설을 통해 알았다.
프라하와 유대인
프라하의 게토에 이 묘지가 생긴 것은 중세 때였는데, 게토의 유대인들은 애초에 허가된 테두리를 벗어나 묘지를 확장할 수가 없었던 터라 수백 년 동안 무덤 위에 또 무덤을 쓰는 터라 수백 년 동안 무덤 위에 또 무덤을 쓰는 식으로 약 10만 구의 시신을 여기에 묻었다. 그에 따라 비석들은 갈수록 빼곡하게 들어차서 서로 등을 댈 지경에 이르렀고 (…) 비석들에는 그저 딱총나무의 검은 그림자만이 드리워 있었다. (…) 나는 거기에 랍비들이 모여 있는 광경을 상상했다.
-프라하의 묘지 1권 ‘어느 날 밤 프라하에서’ 중에서
2013년 3월 9일 토요일. 나는 파리의 팡테옹 언덕에서 그 아래 모베르 광장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에코와 파리, 그리고 프라하와 유대인의 상관관계를 반추했다. 생각은 지난 2월 파리행 비행기를 타기 전 에코의 ‘프라하의 묘지’(전2권)를 챙기면서 비롯됐다. 1980년 ‘장미의 이름’ 출간 이후, 평균 8년에 한 번 신간을 발표하는 에코의 6번째 소설 한국어 번역본이었다. 제목과는 별도로 파리와 관계가 깊었고, 첫 단락부터 긴 의고체로 파리를 묘사하고 있었다.
어느 행인이 있어 1897년 3월의 그 우중충한 아침나절에 위험을 각오하고 모베르 광장, 또는 무뢰한들이 라 모브라고 부르는 곳(…)을 건너갔다면, 그 행인은 악취 나는 골목들이 얼키설키한 동네의 한복판에서, 오스만 남작의 파리 재개발사업 때 드물게 허물리지 않은 장소 한 곳을 마주하게 되었을 터인즉, 이 동네는 비에브르천(川)을 경계로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오래전에 복개되어 파리의 내장 속에 갇혀버린 비에브르천은 이 동네에서 다시 빠져나와 열에 들뜬 채 신음과 독소를 뿜어내면서 센 강으로 흘러들고 있었더라.
-프라하의 묘지 1권 중에서
일찍이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이 탐했듯, 파리는 세계에서 제일 걷기 좋은 도시. 내 발길은 모베르 광장을 거쳐 고급 레스토랑 ‘투르 다르장’이 있는 센 강변을 따라 걷다가 예술교를 건너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