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항제련소가 길 옆으로 보이는 충남 장항의 국도.
독일 뮌헨에 거점을 둔 세계적인 재즈 음악 레이블 ECM의 설립자이자 프로듀서인 만프레드 아이허. 그가 왔다는 소식에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를 만나러 인사동에 갔다. 그가 준비한 전시회를 보러 무작정 간 것이다. 11월 3일까지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리는 ‘ECM 전시회,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그것을 마냥 기다릴 수 없었다.
개막 첫날, 9월이 오기 바로 전날에 나는 인사동으로 휘적휘적 걸어가서 내 젊은 날의 감각과 취향에 강렬한 화인(火印)을 남긴 ECM의 레코드와 사진과 기록을 보러 갔다. 오직 그걸 보러 간 것인데, 그곳에 개막에 맞춰 내한한 만프레드 아이허가 있었다. 그를 한참이나 보았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저 친구는 누군데, 나를 응시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다가가지 않았다.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투명하고 섬세한 ECM 음악

ECM 전시회 포스터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시적인 요소’다. 그러한 시적인 요소가 있다면 클래식, 재즈, 민속음악이라는 구분 없이 다 훌륭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어떤 장르의 음악이든지 그 음악을 만든 작곡가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가 모두 자신만의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ECM의 역할은 바로 그러한 독창성을 잘 발현해내는 것이며, ECM의 아티스트들은 그러한 독창성을 표현하는 것에 탁월하다.”
그가 만든 마스터피스에 비하면 지나치게 정답에 가까운 대답이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일 만했다. 사실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음반에 다 들어 있다. 키스 자렛, 팻 메스니, 랠프 타우너, 얀 가바렉 같은 섬세한 재즈 음반이나 기야 칸첼리, 아르보 패르트, 지외르지 쿠르탁 같은 현대의 비극을 담은 클래식 음반에 그의 대답은 이미 다 들어 있다. 나는 그것을 30년 가까이 들어왔기 때문에 말로 질문하고 말로 대답하는 것은 어쩌면 번거로운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다음의 대답은 잊기 어려웠다. 누군가가 “급변하는 음악시장 환경에서 음반이 가지는 의미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 때부터 음악을 접했다. LP판의 비닐, 재킷, 잡음, 그리고 판을 꺼낼 때의 느낌까지 내게 그 모든 것은 하나의 음악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의 경험을 했고, 따라서 그러한 경험이 지닌 가치를 안다. 책을 읽었을 때 물론 책 안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책을 처음 쥐었을 때의 느낌, 책장을 넘기는 소리, 이 모든 것이 독서의 경험에 포함되지 않는가. 음반에 실린 곡과 곡 사이에 쉬는 타이밍에도 내가 전하고 싶은 것이 담겨 있다.”
어디론가 떠나게 만드는 소리
바로 그점일 것이다. 중3 때였던가, 아니면 고1 때? 그 무렵 키스 자렛의 걸작 앨범 ‘My Song’을 접한 이후 불멸의 ECM을 여태 들어온 것은, 단 한 곡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앨범 전체에 흐르는 어떤 이야기와 질감 때문이었다. 그가 만든 거의 모든 앨범에는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이 묻어 있었고, 그것을 견디거나 벗어나기 위해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자의 상실감이 배어 있었다. 그가 만든 앨범의 표지 디자인은 그 자체로 탁월한 감각이 작동한 섬세함의 극치라서 그 안에 담긴 음반의 곡들을 듣지 않고서도 당장 그 앨범의 냄새며 색깔이며 온도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관여한 음악을 들으면 그 순간 아무 미련 없이 떠나고 싶어진다. ‘힐링 이전의 힐링’이다. 여행을 통해 뭔가 재충전한다든지 하는 일말의 계몽도 없다. 그냥 떠나버리게 만든다. 실제로 나는 그가 만든 음반들을 듣다가 목적지도 없이 떠난 적도 있고, 무슨 일로 어디론가 가게 되면 마치 음악을 듣다가 그냥 뛰쳐나온 것처럼 억지로 그렇게 마음을 먹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