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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길 위의 음악, 국도변의 서정

바람이 분다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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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텅 빈 풍경이 불어온다

시화방조제 밤 풍경

그렇게 하여 어디론가 차를 몰고 달리다가 국도의 변에 문득 멈춰 선다. 꽤 오랫동안 경향 각지를 돌아다녔고 그런 일들을 바탕으로 이렇게 ‘힐링 필링’을 연재하고 있지만, 잠시 틈을 내 조금은 억지스럽게라도 우기고 싶은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내 마음 속의 진짜 힐링 장소가 ‘국도변’이라는 점이다.

이 점, 분명한 사실이지만, 황량하고 쓸쓸한 국도변을 힐링 장소라고 하면 너무 주관적이다. 경향 각지의 산 좋고 물 좋은 곳, 그윽하고 아늑한 곳, 쉬기 편하고 책 읽기 편하고 걷기 좋은 곳을 다 제쳐두고 국도변만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허름한 주유소 하나쯤 있고 언제 재료를 채워놓았는지 모를 낡은 자판기에서 멀건 인스턴트 커피를 한잔 뽑아서 저물어가는 들판을 바라보는 것만큼, 적어도 내게는 마음이 편안한 장소가 실은 달리 없다.

만프레드 아이허가 아니었다면, 11월 초까지 인사동에서 그가 만든 앨범을 주제로 한 ECM 전시회가 열리지 않는다면, 나는 국도변의 서정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혼자서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그 버릇 지금까지 못 고쳐 매달 이렇게 돌아다니지만, 그런 경험의 배경에 ECM의 앨범 표지들에 담긴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 이미지가 있었음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개심사 소나무

국도변을 한참이나 달리다가 문득 멈춰 서면, 흡사 오래전부터 소장해온 음반의 표지를 닮은 어떤 풍경이 내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풍경들 앞에 서면 나는 틀림없이 과거로 여행을 온 듯한 환영에 빠진다. 시간도 멈췄고 공기의 흐름도 멈췄고 차도 멈췄고 나도 국도변에 그냥 멈춰버렸다. 이 아득한 순간들이 나를 어루만진다. 국도변의 황량한 풍경이 나를 감싼다. 나는 시공간의 진공 상태에 빨려들어가 한참이나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를테면 시화방조제가 그렇다. 시흥시 정왕동 오이도와 안산시 대부동 방아머리를 잇는 길이 11.2㎞의 방조제다. 6년 반 만에 준공을 본 방조제다. 1987년 6월부터 1994년 2월까지 벌인 시화지구 간척사업으로 준공됐다. 간척사상 최대로 알려져 있는 10.3m의 조차(조석 현상에 의한 만조 시와 간조 시의 해수면 높이의 차)를 극복한 난공사를 겪었다.

공사 계획 때나 공사 중일 때, 공사 완료 이후에도 이러한 간척 개발에 따른 엄청난 생태계 교란과 환경오염이 문제였다. 실제로 방조제 완공 직후에는 악취와 오염과 환경 재난을 다룰 때 어김없이 시화호 일대가 언급됐다. 그런데 인간의 온갖 노력에 감응한 자연의 위대한 배려로 인해 지금 시화호는 ‘생명의 호수’로 불리고 있다. 천연기념물 201호 큰고니, 천연기념물 205호 노랑부리저어새, 천연기념물 361호이면서 멸종위기야생동물 1급 노랑부리백로 등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호수다.

초가을 이맘때면 저녁 7시 전후의 시화방조제가 거룩하다. 누구는 서해 쪽으로 가서 전어를 먹네, 꽃게를 먹네 하고 소동을 피우지만 설령 그런 여정이었다 하더라도 시화방조제의 안전한 곳에 차를 세운 후 저물어가는 서해를 보라. 전어니 꽃게가 문제가 아니다. 압도적인 하늘에 드리워진 광활한 공기마저 누구도 보지 못한 곳으로 서둘러 휩쓸려간다.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이다.

시화호에서 1시간 남짓 달려가면 서산의 개심사다. 개심사는 가야산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내려오면서 산뜻하게 떠오른 상왕산의 남쪽 기슭에 있다. 백제 의자왕 14년에 창건된 역사를 갖고 있으니 기록상으로는 고찰이다. 그러나 화재가 났었고 이를 조선 성종 6년(1475)에 중창했다고 한다.

서산 개심사의 소나무는 청도 운문사, 합천 해인사와 함께 산중 사람들이 으뜸으로 꼽는다. 그래서 가급적 개심사를 갈 때는, 주차장에서 곧바로 개심사에 이르는 골짜기 길보다는 소나무들이 터널을 이룬 능선 길을 따라 걷는 게 낫다. 능선이라고 해도 20분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다.

근대의 명필 해강 김규진의 예서체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이 늠름하고 그 아래로 사시사철 어느 때나 운치 있는 연못이 장려하다. 심검당(尋劍堂)이라는 요사채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덕분에 ‘나무의 자연스러운 결을 그대로 살린 최고의 건물’로 꼽히는데, 어떤 건축학자들은 그게 일부러 그것을 추구해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산에서 얻을 수 있는 소재가 그런 형태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찌 됐든, 슬기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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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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