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공거사 최근환 씨.
10대 시절 읽던 무협지의 배경이 그리웠는지 필자는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여러 명산을 답사했다. 무협지의 무대인 중국의 산은 도대체 어떤 산이란 말인가? 무당권법의 창시자인 장삼봉이 수련한 명산인 무당산(武當山)은 산 전체에 토(土) 기운이 흘러 사람을 품어주는 형세였다. 소림사가 있는 숭산(崇山)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바위의 암기(岩氣)와 계곡물, 그리고 토기(土氣)가 어우러진 산이었다. 가장 인상이 강하게 남은 산은 화산(華山)이었다. 화산은 2200m 높이의 바위산인데, 산 전체가 거의 화강암으로 이뤄진 금기(金氣)의 산이다. 북한산 인수봉 같은 거대 바위 봉우리가 하늘 높이 쭉쭉 뻗어 있다. 오악 중에서 가장 험한 곳이 화산이라는 게 중국 무림계의 정평이었다. 무협지에 보면 ‘화산논검대회’라는 게 나온다. 정파와 사파의 고수들이 모여 최종 승부를 겨루는 무대다. 화산에는 불교 사찰이 없다. 도사들이 산 전체를 전세 냈던 도교의 산이다. 그래서 화산은 무술(武術), 양생(養生), 기공(氣功), 비약(秘藥)과 관련이 깊다.
현장이 최고의 스승
화산 입구에 도관이 있다. 이곳에 그 유명한 수공(睡功)의 대가이자 송(宋) 태조를 감복시킨 대도사였던 진단(陳·#55055;)의 거처가 있다. 그가 머문 곳은 동굴이다. 진단이 동굴에서 100일 동안이나 잠이 든 상태로 내공을 쌓았다는 전설이 구전된다. 이 도관이 실존했던 화산파(華山派)의 본거지였는데, 필자가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도사들의 커리큘럼 가운데 독특한 과목이 있었다. 바로 표주(漂周)라는 것이다. 주유천하 과목이다. 도사 지망생이 고급과정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과목이 표주였다고 한다. 3년가량 돈을 지니지 않고 빈손으로 천하를 돌아다녀야 한다. 돈을 가지고 여행하면 유람이 되지만 돈 없이 여행을 다니면 공부가 된다. 각 지역의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고, 약초나 특산품은 무엇이 있는지, 어디에 명당이 있는지, 물류의 흐름은 어떤지, 그 지역의 토호와 터줏대감은 누구인지, 과거 그 지역에 어떤 역사적 사건이 있었는지 등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 없이 천하를 떠돌아다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네 가지 기술을 갖춰야 한다. 의술(醫術) 역술(易術) 학술(學術) 무술(武術)의 사술(四術)이 그것이다. 어느 동네에 가든지 아픈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도사는 배낭 안에 침통과 간단한 약초 몇 가지를 넣어 가지고 다니다 환자를 고쳐준다. 환자 고쳐주면 밥도 주고, 여비도 준다. 역술도 필수적이다. 자기 팔자에 관심 없는 사람 있는가? 누구든지 자기 운명에 관심이 있게 마련이고, 자녀 결혼 앞둔 부모는 신랑 신부의 사주와 궁합을 보게 마련이다. 학술은 천자문이나 동양고전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어느 동네에 가서 오랫동안 머무르기 위한 방편으로는 서당 훈장 노릇이 딱 좋다. ‘하늘천 따지’ 하면서 아이들 가르치면 월사금이 들어온다. 표주를 다니다 보면 깡패나 악당을 만날 수 있다. 이때는 한방 때려줘야 하는 것이 도사의 임무다. 도관에서 사부와 선배에게 배운 권법(拳法)을 테스트하는 기회다. 화산파 도사들이 주유천하(漂周)를 하기 위한 밑천은 이 같은 네 가지 술법이었다. 그러나 이는 복이 많은 도사의 경우다. 어떤 사람은 인연을 만나지 못해 사술(四術)을 갖추지 못한 채 강호에 나간다. 그야말로 바람을 반찬으로 삼고, 이슬을 이불 삼아 덮고 자는 ‘풍찬노숙’이다. 그러자니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갖은 고생을 겪는다. 맨 땅에 헤딩하듯 표주하는 과정에서 사술을 익히는 수도 있다. 강호에서 사술을 익히는 팔자라고나 할까. 필드야말로 최고의 선생 아니던가!
강호에서 四術 익힌 만공거사
만공거사(滿空居士)는 강호에서 사술을 익힌 인물이다. 지난 25년간 한국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주유천하를 실천했다. 이름은 최근환(崔根煥·52). 지방 국립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필자는 전국을 유람하면서 수많은 기인과 도사,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를 만나봤지만, 만공거사만큼 표주의 원론적 개념에 부합하는 길을 걸어온 사람은 보지 못했다. 나도 물론 주유천하를 해보기는 했지만, 지갑에 신용카드와 현금을 가지고 다녔기에 그렇게 큰 고생을 하지 않은 편이다. 법학을 공부한 먹물이 수중에 돈 없이 돌아다녔으니 그 체험의 강도가 필자보다 훨씬 강하다. 돈이 없어야 깊은 체험을 한다. 깊은 체험을 해야 세상을 보는 통찰이 생긴다. 돈이 없어야 사람들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는 원래 화산파 도사 지망생도 아니었는데, ‘25년 표주’를 하다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반도(半道·50%)를 통하게 된 인물이다. 무골(武骨)에 가까운 건장한 체격이지만, 사람의 성격과 체질을 보는 눈은 예리하기 그지없다.
▼ 세상을 돌아다녀보니까 어떻던가?
“고해(苦海)다. 성인의 말씀이 틀리지 않다. 고통의 연못 혹은 강이 아니다. 고통의 바다다. 왜 바다라고 하겠는가? 그만큼 삶의 고통이 크고, 넓고, 깊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 없고 집에 우환 없는 사람 없다. 재물이 있으면 있는 대로 고민이 있고, 없으면 없는 대로 고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