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의 초상화는 동양의 초상화보다 훨씬 사실적이다. 사진은 셰익스피어(왼쪽)와 흥선대원군의 초상화.
블루오션을 관상에 적용한다면, 얼굴의 인상을 바꾸어 새로움을 추구하게 해주는 성형은 관상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을까. 얼굴이나 첫인상 때문에 경쟁사회에서 패배를 거듭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성형을 인생 역전의 블루오션으로 적용하는 전략적 전환의 꿈을 꿀 수도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꿈의 실현은 어렵다. 얼굴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굴’이란 우리말은 영혼(얼)의 통로라는 뜻을 담고 있다. 멍한 사람을 보면 흔히 ‘얼이 빠졌다’고 한다. 얼굴 모습은 우리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것처럼 수시로 바뀐다. 그러기에 얼굴은 변화무쌍하다. 또한 정직하다. 얼굴에 전달되는 표정과 감정은 단 몇 초 만에 자율신경과 근육, 그리고 혈색에 반영되어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서는 얼굴을 보면서 뭔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수백 권의 관상학 책이나 자료를 뒤지면서도 저마다 해석이 달라 얼굴에 대해 완전한 깨달음을 주지 못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동양의 상학(相學) 책은 천편일률적이어서 어떤 때는 서로 다른 저자의 똑같은 이론을 되풀이해서 읽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관상학에 일정한 원리나 원형이 있다면 제대로 학습되고 이론도 일관돼야 함에도 상학의 여러 체계적 이론엔 오류가 많은 것 같다.
아쉽게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는 무형의 존재가 관상이다. 아인슈타인이 통일장이론을 만들어 모든 자연현상의 신비한 법칙을 수학으로 체계화하려 했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상학 이론도 완성된 것이 없는 것 같다. 다만 일반화해 이야기하는 상학의 통계적 조합에 비춰 지혜를 얻고 그 지혜의 침전물을 모아 일종의 인생 항해 지침서로 삼는 것이다. 알기 쉬울 것 같지만 정말 모를 것이 얼굴이다. 신(神)도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얼굴 때문에 번민해 인간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 손엔 칼, 한 손엔 붓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는 속담이 있다. 서양에도 비슷한 속담이 있다. 하얀 이를 드러내 환하게 웃는 얼굴이나 반쯤 올라온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보면서 온전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그런 웃음을 담은 얼굴엔 누구도 침을 뱉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간단한 감정의 흐름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과 그 표정으로 미뤄 그 사람의 심상을 아는 것이 관상의 기본이 아닐까 싶다.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6초라고 한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는 외모·표정·제스처가 80%, 목소리 톤과 말하는 방법이 13%, 나머지 7%가 인격이라고 한다. 이중 얼굴 표정을 좌우하는 근육을 꼽으라면 그것은 입 주위의 근육일 것이다. 사람의 얼굴 근육은 얼굴 심층에 있는 근육을 포함해 80개인데 수십 개의 근육이 수천 가지의 표정을 만든다고 한다.
우리 몸에서 근육 길이가 길지 않으면서 가장 많이 분포된 부위가 얼굴이다. 물론 섬세하기로는 손의 미세 근육이 으뜸이지만 얼굴 근육은 감정과 표정을 담아내면서 부지런히 움직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혼자서 해부학을 공부하면서 울 때의 근육과 웃을 때의 근육이 거의 일치하는 것 같다고 했다. 천재의 자연스러운 독백이지만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인체를 탐구했는지를 가늠케 한다. 그러한 발견과 스케치 ‘다빈치의 해부도’는 훗날 뒤센 드 불로뉴라는 프랑스 의사의 사진 책자 ‘표정의 메커니즘’에서 증명된다.
필자는 관상과 성형을 주제로 여러 이야기를 펼치면서 일상생활에서 ‘관상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상대방을 정확히 파악해 인간관계에서 성공하기 위함이다’라는 대명제에는 무릎을 꿇는다. 다만 이러한 이론의 정립에 이바지한 여러 분야의 연구적 허세를 마다하고 해부학을 위해 기꺼이 시체를 더듬고 탐구해 진실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에게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