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랜스젠더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하리수? 이 땅엔 하리수말고도 수없이 많은 트랜스젠더가 성적 차별과 편견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성이 뒤바뀐 트랜스젠더의 관상은 어떻게 변할까. 60차례 이상 트랜스젠더 수술을 집도한 성형외과 전문의의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국내 최초의 트랜스젠더 그룹 ‘레이디’.
일반적으로 음양과 오행을 붙여 말하지만, 그 이론적 발생은 서로 다르다. 오행설은 한대에 이르러 주역의 음양설과 더불어 생성되고 전개됐다. 동양철학의 기본적 사유구조와 문화유산은 오행의 패러다임을 바탕으로 형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행의 성질은 우리가 흔히 아는 물=수, 불=화, 목=나무, 금=쇠, 토=흙으로 은유적이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음양은 남자와 여자다. 남자는 양기(陽氣), 여자는 음기(陰氣)의 에너지를 갖는 주체다. 남자와 여자는 생체구조상 다른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의존하고 끌어당기는 관계다. 이는 음양이 갖는 본질적 특성이다. 남과 여라는 인간 존재를 음과 양으로 나누면 이해하기 쉽다. 서로 배척하고 융화할 수 없는 모순된 관계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음양은 이 같은 대대(待對)관계를 기본 원리로 한다. 그래서 대대원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구조를 포함한다. 상생, 상극, 상모, 상화의 4대 원리로, 우주의 변화에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주역의 구조 전체를 관통하는 의미를 띠는 대대원리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이 곧 음양이다.
남자, 여자, 트랜스젠더
성별을 표기하는 항목은 통상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지만,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는 항목을 마련해놓은 중학교 홈페이지가 있다. 이 학교는 트랜스젠더 표기와 ‘아바타’ 제공 아이디어가 단순히 학교 홈페이지의 활성화를 위한 것이며 별다른 목적이 없음을 명시했다. 이 홈페이지의 회원으로 가입하려면 남성, 여성, 트랜스젠더로 나뉜 항목에 표기해야 한다.
이에 대해 누리꾼(네티즌)들은 “신선한 발상이다” “범상치 않은 학교다. 한번 방문해보고 싶다”며 학교측의 재치에 감탄했다.
필자는 동성애자이면서 패션디자이너로 유명한 몇몇 인물과 친분을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만 다를 뿐이지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희로애락을 갖고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 또한 지극히 현실적이다.
TV에선 트랜스젠더인 하리수가 여느 여성보다 섹시한 자태를 뽐내며 뭇남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극장가에선 한국 최초의 동성애 영화라며 ‘로드 무비’에 대해 떠들썩한 적이 있다. 몇 해 전 ‘하리수 신드롬’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트랜스젠더라는 용어만 해도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같아야 한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흔드는 것이었다. 하리수가 처음으로 ‘커밍아웃’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초기 생활과 대중매체로의 진입 배경 및 성장과정을 지켜본 필자는 오히려 성적 주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었다. 이는 성적 주체성 장애의 가장 심한 형태인 트랜스젠더가 갖는 일면보다 더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2001년 여름, 하리수는 필자에게 도움을 청하러 왔다. 얼굴의 일부를 고치려는 것이었는데, 보름쯤 후에 성형수술을 하기로 약속해놓고 수술은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2개월쯤 지나 가수로, 배우로, CF모델로 활약하더니 5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언론은 트랜스젠더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 하리수가 누구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만이 그의 외피를 휘감았고 여론은 찬반양론 논쟁보다는 그를 여러 가지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종합선물세트’인 양 치부했다.
하리수를 다룬 ‘인간극장’ 프로그램은 성전환자가 겪는 온갖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하리수의 근황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뭇 강경한 어조로 ‘이젠 그러해야 할 시기가 됐다’는 정도로 성적 측면에서 사회적 성숙이 이뤄졌음을 암시했고, 그의 다큐멘터리도 동정심으로 비약된 측면이 강했다.
‘트랜스젠더는 싫지만, 하리수는 좋다’는 여론조사결과가 발표됐고, 심지어 어느 남자 초등학생은 미래 희망직업을 묻는 조사에서 ‘하리수, 트랜스젠더’라고 쓰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한 답변으로 초등학생은 “하리수가 인기가 있고, 뜨니까 나도 희망한다”고 했다. 그러나 트랜스젠더는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면서도 편견 또는 잘못된 상식으로 인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적 소수자와 동성애자의 차이
전세계 대도시에서는 동성애 혹은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들이 차별 철폐를 외치며 자신들의 인권운동 의지를 다지고 기념하는 거리 행진인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가 열린다. 해마다 개최되는 행사이지만, 1969년 6월27일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발생한 뉴욕 경찰과 동성연애자 충돌사건을 추모하는 성격도 띠고 있다. 이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캐나다 토론토 등지에서도 이러한 행사가 열렸다. 그리고 얼마 전엔 유대교·기독료·이슬람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에서도 세계 동성애자 페스티벌이 열려 종교단체와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퍼레이드는 이제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도 열린다. 대학로에서는 트랜스젠더 로커의 삶을 그린 뮤지컬 ‘헤드윅’에 남자배우 조승우를 영입해 흥행에 성공했다. 남성과 여성, 2개의 성만을 인정하는 사회에 제3의 성이 엄연히 존재함을 ‘헤드윅’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것이 작가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성 정체성 장애인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한 다양한 문화의 일부를 소개한 것일까.
트랜스젠더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 개념부터 이해해야 한다. 다음은 트랜스젠더이면서 저술가인 김비와 ‘트랜스섹슈얼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해리 벤저민의 저작에서 발췌한 글이다.
트랜스젠더는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전적 의미로는 ‘성을 바꾼다’는 뜻이다. 즉 수술이나 기타 다른 치료를 통해 자신의(본래의) 성이 아닌 다른 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실제로 수술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심리 검사나 호르몬 검사, 염색체 검사를 통해 수술을 받기 위한 과정에 있는 사람 또한 트랜스젠더 혹은 트랜스섹슈얼이라 부른다.
이 두 단어 사이엔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젠더(gender)’라는 말이 사회적 성, 혹은 정신적 성을 가리키는 반면, ‘섹스(sex)’라는 말은 육체적 성을 가리키는 데서 오는 차이다. 의학적으로는 ‘성전환 수술’을 ‘성을 다시 부여하는 수술(SRS·Sexual Reassignment Surgery)’이라 한다.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완전히 다르다. TV는 트랜스젠더라는 용어를 세상에 알리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수박 겉핥기식의 시끄러운 법석에 불과했다. 동성애의 개념은 실제로 여러 분야에서 혼동되고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트랜스젠더나 여장 남자, ‘게이’라는 말로 그 의미를 혼란스럽게 사용하지만, 이는 분명히 구별돼야 한다.
트랜스젠더는 病 아니다
다른 성적 소수자와 동성애자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동성애가 성 지향점에 관련된다는 점이다. 보통의 이성애자는 성 지향점이 자신과 다른 성, 즉 이성(異性)에 있는 반면 동성애자의 성 지향점은 동성(同性)에게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은 이것은 단순한 지향점에 불과할 뿐, 본질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향점이란 보편성의 개념일 뿐 절대적 개념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전에 방송된 한 프로그램 때문에 트랜스젠더를 ‘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게이(gay)는 남자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말로, 원래는 ‘밝은, 명랑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트랜스젠더가 병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스스로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는 사람도 병으로 치부되는 것에 상당한 반감을 갖고 있다. 병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이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 유전학적·뇌과학적 기질상의 차이점을 논하는 논문이 지금도 수없이 나오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정신과 신체의 괴리에 고통받는다. 어린 시절에는 단순히 놀림받는 것에 지나지 않던 것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정신과 육체의 괴리가 점점 심각해진다. 결국 자신의 정신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견디지 못해 호르몬 치료를 받고 수술을 해서 자신의 정신에 걸맞은 육체를 찾으려 하는 것이다.
정신은 여자인데(뇌의 어느 부위가 특이하게 여성에 가깝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몸은 남성이고 성기도 남성일 때 그 괴리감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러한 고통이 평생 지속된다면 누군들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 사람의 정상적인 삶을 괴롭히는 것을 병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정말 끈질기고 치명적인 병이다.
이제 트랜스젠더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트랜스젠더와 크로스 드레서(이성 복장자, 트랜스베스티즘, 트랜스베스타이트)의 차이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트랜스베스타이트(transvestite), 소위 크로스 드레서(cross-dresser)는 이성의 복장을 즐기는 취향일 뿐, 자신의 성에 대한 혼란은 없다.
다양한 성 스펙트럼
크로스 드레서는 동성애자일 수도 있고, 이성애자일 수도 있다. 여성 복장을 좋아한다고 해서 동성애자라고 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크로스 드레서와 트랜스젠더 사이에 어느 정도 개념적으로 혼합되는 부분이 있고 당사자마저 개념을 섞어 이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과와 토마토를 놓고 생긴 것이 비슷하니 똑같은 과일이라고 치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트랜스젠더임을 고백해 화제가 된 가수 지망생 류나인.
결국 외과적 시술을 통해서라도 육체적 성을 정신적 성에 맞춰 바꿔야 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트랜스젠더다.
정신적으로는 분명 여성(혹은 남성)이다. 단순히 동성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신을 트랜스젠더라고 믿거나, 여자의 옷을 입고 싶고, 화장을 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구만을 느끼며 트랜스젠더라고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정확한 진단이 이뤄져야 한다. 일단 심리 검사와 염색체 및 호르몬 검사, 그리고 환자와의 지속적 면담을 통해 트랜스젠더인지, 동성애자인지, 트랜스베스타이트인지 판단하게 된다.
혼재된 성을 가지고 태어난 한 사람이 자신에게 적합한 성, 이 사회에서 자신의 삶을 누리기에 적합한 성으로 확정하는 작업을 거쳐야 하는 트랜스젠더는 인간의 성 스펙트럼의 다양성 중 일부 혹은 소수자일 뿐 결코 국외자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인간의 염색체 지도가 분석되고 인간의 생성과 발달의 오묘한 진리를 연구하면서 함께 진행돼야 할 분야가 있다면 바로 인간의 다양한 성 스펙트럼에 대한 원인과 치료 분야일 것이다.
해부학적 차이를 가진 두 가지 성의 전통적인 구분 대신에 그들에겐 인간의 성이 10개 혹은 그 이상으로 구분되는 분화의 개념이 있으며, 그것은 각각의 개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염색체상의 성, 유전학적인 성, 해부학적인 성, 법적인 성, 생식기적인 성, 배아단계의 성, 호르몬적인 성, 심리학적인 성, 그리고 나중에 나타나는 사회적인 성이 바로 그것들이다.
유전학적인 성과 어느 정도 동등한 의미로 여겨지는 염색체상의 성은 최초로 인식되는 근본적인 성이다. 그것은 성과 젠더를 결정짓는 첫 번째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유전학적인 성에 관한 연구가 미흡하고, 더욱 많은 것들이 밝혀져야 한다. 그때까지는 정신적 성에 대한 이상이나 성적 일탈을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관상학적으로 ‘이것이 트랜스젠더다’라고 말할 수 있는 표식이나 근거는 없다. 분명한 것은 여자도 남자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틀림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젠더는 벨트 위에 존재하고, 섹스는 벨트 아래에 존재한다’고.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차등이 항상 정확하고 영속적인 것일 수는 없다. 생물학, 특히 유전자학의 발전과 더불어 남성과 여성의 경계는 이미 어느 정도 허물어졌다. 이제 이분법적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한 지배적인 생식기의 유무 판단만으로 한 사람의 성을 결정하는 일은 최소한 과학의 세계에서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생물학적) 차이는 어느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도 없앨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므로 신체구조와 기능이 다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술로 일부 구조를 변경하거나 기능을 수정할 수는 있다. 음양오행론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성기 성형에서 각선미 성형까지
SRS(성을 다시 부여하는 수술)는 단순한 한 가지 수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식기 성형, 성대 수술, 가슴 성형, 얼굴 성형, 각선미 성형, 엉덩이 성형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대개 전신마취를 하는데 한꺼번에 이 수술을 다 하지는 않는다. 물론 필요에 따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지만, 호르몬 치료만으로는 남자의 얼굴이나 골격을 여자처럼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성기 절단만으로 완벽한 성형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술은 호르몬 치료를 한 지 2년 정도 되면 시작할 수 있다. 질 성형의 경우 고도의 집중력과 테크닉이 필요하다. 수술 실패는 대부분 질 협착과 깊이가 문제가 된다. 필자에게도 일본에서 수술받은 환자가 단순한 커팅(cutting)에 따른 잘못된 수술로 질 재건 및 성형을 위해 찾아온 적이 여러 번 있다. 태국의 경우엔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SRS 수술비가 저렴한데 더욱 놀라운 것은 태국에선 SRS가 국가 장려산업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 다만 그곳의 수술 후 관리나 실패율을 보면서 차라리 우리나라에서 수술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교적 영향으로 이런 수술을 꺼린다. 일부 대학병원이나 몇몇 병원에서 근근이 이 수술을 담당하고 있어 수술 사례 자체가 아주 적은 편이다.
대다수 환자는 가족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혼자서 수술 결정을 내리고 철저히 외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그래서 적절한 심리치료와 수술 후 관리를 해주지 않으면 여성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 수 없고, 남성으로서도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수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수술을 결정하는 데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재빨리 완전한 처치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닌 SRS 수술은 수술의 전과 후가 도무지 모호하다.
왜 수술하는지를 트랜스젠더에게 직접 물어보면 수백 가지 이유를 덤덤히 말하지만 그들은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그들로서는 완전하지 못한 삶이라도 심한 정신과 신체의 괴리를 참으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조금은 낫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아이들 장난처럼 ‘나 여자 되겠다’ ‘나 남자 되겠다’는 식의 선택이 절대 아닌 것이다. 이유 없는 무덤은 없다.
하리수의 사주
트랜스젠더의 몸짓과 체상(體相)이 따로 있는 것일까. 그들만의 언어나 목소리가 따로 있는 것일까.
이는 앞으로 연구돼야 할 미개척 분야다.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의 몸짓과 관상도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변화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주장해온 관상이 항시 변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특히 수술을 하면 체상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다. 체모의 분포도 변하고 피부색도 변하고 체형도 변한다. 심지어 목소리도 변하는데(목소리 성형으로 소리를 여성처럼 변하게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성대의 탄력성은 아마도 호르몬이나 다른 내적 요인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하리수가 나타나면서 사주를 감정하는 사람들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고 한다. 하리수를 과연 남자로 보고 사주를 풀어야 하느냐 여자로 보고 풀어야 하느냐다. 사주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사주와 운이 반대로 흐르기 때문에 남녀가 가려지지 않는 상황에서 사주를 본다는 건 논리에 맞지 않다고 한다. 결국 운의 흐름과 현 상황을 고려해 아무래도 여성이라는 쪽으로 손을 들어줬다는데, 이는 사주도 관상과 함께 변한다는 극명한 예다. 하리수를 남성으로 본다면 엔터테이너로서 그의 성공을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필자는 많은 트랜스젠더의 마음을 읽어가면서 수술을 집도하고 트랜스젠더인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삶에 드리워진 아픔과 사랑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언젠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갖가지 오해와 편견에 대한 나름의 진실을 말할 기회를 갖고 싶었다. 억압과 소외는 그들이 단지 소수이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 아니다.
모든 성적 소수자와 장애자 중에서 인류를 구할 치료약을 발견하거나 인류의 삶을 한층 더 발전시킬 인물이 나와 인류를 구하는 길이 그들의 위상을 올리는 길이요,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는 부당함을 극복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을 사회적 약자나 외톨박이가 아닌 인간으로서 사회의 편견에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