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핑구스는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 레르미타는 프리오라토 지역에 터전을 잡았다. 스페인 와인 지도는 스페인 와인의 시장점유율이 낮은 우리나라 애호가들에게 무척 낯설다. 하지만 이런 곳들이 대표적인 생산지이니 그 위치와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북서쪽에 위치한 리베라 델 두에로는 리오하 다음가는 명산지다. 리오하는 스페인 최고의 생산지다. 원산지 등급인 DO(프랑스의 AOC에 해당)보다도 한 단계 높은 DOC 지역으로 한동안 유일하게 이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고급 와인의 명성이 주변에 비해 약하고 리베라 델 두에로, 프리오라토 등 경쟁 산지에 신흥 명문 양조장이 우후죽순 설립돼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면서, 리오하는 점점 구시대의 생산지로 퇴색하고 있다. 리오하가 침체되는 동안 리베라 델 두에로와 프리오라토는 실질적인 간판 생산지로 진화했다.
1982년 DO로 지정된 리베라 델 두에로 지역에는 로마시대에 포도밭이 조성됐지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 즉 국토회복 운동인 레콘퀴스타(Reconquista) 시기인 10~11세기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오랫동안 버려진 이곳을 다시 소생케 만든 이는 다름 아닌 중세의 수도사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작은 마을 시토에서 시작된 시토파 수사들은 수도원 클로 드 부조에서 포도밭 개간에 힘썼고, 밭의 토양 차이에 눈을 떠 엄청난 양조의 비밀을 체득했다. 이를테면 클로 드 부조는 유럽 와인 양조의 ‘싱크 탱크’였던 셈이다. 수도사들은 교황청의 부름을 받아 유럽 방방곡곡으로 근무지를 옮겨 다닐 때도 근엄한 종교 수칙뿐 아니라 양조 기술도 함께 전수했다.
신규 유입 세력, 핑구스
리베라 델 두에로에도 시토파의 손길이 닿았다. 12~13세기 수도사들이 이곳으로 부임해 밭을 조성하고 주변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석회암 토양에 조성된 셀러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유서 깊은 지난 시절의 추억을 어루만질 수 있다. 피레네 산맥이 지형적으로 가로막고 있음에도 수도사들을 막을 순 없었다.

핑구스
리베라 델 두에로는 이 순례 길 중간에 위치하는데, 순례자들이 몇날 며칠을 걸어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긴 지역이다. 리베라 델 두에로에는 사실 1980년대까지 베가 시실리아밖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전통과 품질, 그 어떤 척도를 갖다 대도 스페인 최고의 와인으로 평가받는, 그래서 스페인 국왕도 고객이라는 베가 시실리아는 리베라 델 두에로의 간판 양조장이다.
하지만 그 위상은 가우디의 건축처럼 생뚱맞게 높은 첨탑으로서 존재했다. 즉 베가 시실리아를 빼면 별로 내세울 게 없다는 얘기다. 이 점은 스페인 와인산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러나 원산지로 등록된 이후 외부에서 투자자금이 몰려오고, 전문가들이 정착하면서 리베라 델 두에로는 최고급 산지의 모양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해발 800m 고원에 있는 리베라 델 두에로의 포도밭에서는 포도가 쉽사리 익질 않아 11월에도 수확할 수 있다. 산도 높은 포도 템프라니요를 충분히 무르익힐 수 있는 조건이다. 핑구스는 이런 신규 유입된 세력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