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리공원에 있는 박인환의 묘. 묘비 모양이 색다르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박인환이 일생 동안 출간한 유일한 시집 ‘선시집’(1955년)에 실린 ‘목마와 숙녀’는 시대에 따라, 또 필요에 따라 각색되고 윤색되면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필자는 1955년에 나온 ‘선시집’ 원본을 어렵사리 찾아 원문 그대로를 옮겨봤다.
-木馬와 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바아지니아·울프의 生涯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主人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少女는
庭園의 草木옆에서 자라고
文學이 죽고 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木馬 소리를 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바아지니아·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誌의 表紙처럼 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선시집, 1955.10.15, 산호장)
국립도서관에서 찾은 ‘선시집’ 원본은 박인환이 정한모(1923~1991·당시 시인이자 휘문고 교사. 후에 서울대 교수, 문공부 장관)에게 준 증정본인데, ‘鄭漢模 雅兄. 朴寅煥’이라는 고인의 친필이 남아 있다. 시인 장만영(1914~1975)이 경영한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에서 출판된 선시집은 원래 양장본으로 나왔으나 간행 후 인쇄소에 불이 나 책을 받아본 이가 별로 없다고 한다. 정한모 소장본은 양장본이 아니라 당시 새로 인쇄된 일반 판형이지만 현재 고서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 귀중본. 만약 박인환의 손길을 직접 느끼고 싶다면 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가 ‘정한모 문고(일모문고)’를 찾으면 된다. 그곳에서 1983년 강계순이 쓴 박인환 평전인 ‘아! 박인환’도 만날 수 있는데, 그 책에도 강계순의 친필 사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