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독도를 알면 대한민국이 보인다

신용하교수의 독도문제 100문 100답

  • 신용하교수

    입력2006-10-25 1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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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 동해안 외딴 섬, 우리 땅 독도가 지난 4월8일 ‘독립’했다. 3월20일 경북 울릉군의회가 ‘울릉군 이(里)의 명칭과 구역에 관한 조례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데 이어 4월8일 울릉군이 개정조례를 공포함으로써 독도는 지금까지의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서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로 행정구역상 지위와 주소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독도는 이제 더는 ‘외딴 섬’이 아니다. 독도 행정독립을 계기로 4월 현재 300명을 넘어선, 독도로 본적을 옮기는 국민들이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독도의 행정구역 독립을 계기로 신용하 교수(서울대·한국사회사)로부터 독도문제에 관한 100문 100답을 들어보았다.》
    Q 1 독도(獨島)는 어디에 위치한 섬인가?

    A경위도상으로는 북위 37도 14분 18초, 동경 131도 52분 22초 지점에 있는 대한민국의 가장 동쪽에 있는 영토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 속해 있었으나 2000년 1월 시민단체들이 제기한 ‘독도리 신설 청원’을 계기로 지난 4월8일 리(里)로 행정 독립해 현재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산 1~37번지로 행정구역상 지위와 주소가 바뀌었다.

    독도는 울릉도로부터는 동남쪽으로 약 92㎞(약 49해리) 지점에 있고, 일본의 가장 가까운 섬인 시마네현 오키도(隱岐島, 玉岐島)로부터는 서북쪽으로 약 160㎞(약 86해리) 떨어진 지점에 있다. 본토에서 볼 때는, 동해안 울진군 죽변(竹邊)항으로부터 215㎞ 지점에, 일본의 시네마현 사카이고(境港)로부터는 220㎞, 에도모(惠曇)로부터는 212㎞ 지점에 있다.

    독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라는 2개의 섬과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36개의 암초(岩礁)로 구성된 작은 군도(群島)다. 동도와 서도 사이는 약 200m인데, 그 3분의 2까지는 수심이 2m가 채 안 되는 연결된 섬들이다. 독도의 총면적은 18만6121㎡(5만6301평 8홉)이고, 산꼭대기 높이는 서도가 174m, 동도가 99.4m이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울릉도와 함께 동해 한가운데 있는 섬이기 때문에, 암초를 중심으로 부근에 서식하는 어류들이 철따라 몰려들어 수산자원과 해저자원이 풍부하다고 외국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지정학상, 국토방위상 중요성은 더 논할 것도 없다.



    Q 2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논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A1952년 1월 일본이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1952년 1월18일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통칭 평화선)을 발표했다. 일본은 열흘 뒤인 1952년 1월28일 평화선 안에 포함된 독도(獨島: 일본 호칭 다케시마·竹島)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하는 대한민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내 왔다. 이것이 ‘독도 영유권 논쟁’의 시작이다.

    Q 3 한국정부는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A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항의를 일축하고, 독도가 역사적으로 한국 고유영토일 뿐만 아니라, 2차 대전후 1946년 1월29일 연합국최고사령부가 지령(SCAPIN) 제677호로서 독도를 한국 영토라고 판정하여 한국에 반환했으며, 또 연합국 사령부가 훈령 제1033호에서 독도를 한국 영토로 거듭 재확인했음을 상기하라고 지적하였다.

    Q 4 그 후 ‘독도 영유권 논쟁’은 어떻게 되었는가?

    A한국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외교문서를 통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는 1953년 6월27일, 6월28일, 7월1일, 7월28일 일본 순시선에 관리 및 청년들을 태우고 와서 독도에 상륙시켰다.

    Q 5 한국측은 일본측의 이러한 행동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A민간인과 정부가 함께 단호하게 대응하여 일본측의 도발을 물리쳤다. 민간인들은 울릉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독도 의용수비대(獨島 義勇守備隊·대장 홍순칠)’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독도에 건너가서 대항하였다. 또한 정부에서도 한국 해양경찰대를 파견하여 독도에 접근한 일본 선박들에게 영해를 불법 침입했다고 경고하고 울릉도경찰서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선박들이 불응하고 도망하자 한국 해양경찰대는 몇 발의 경고 발사를 하면서 이들을 쫓아버렸다.

    Q 6 그 후 일본측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

    A당시 한국정부는 평화선 안에 침입한 일본 어선들을 나포하여 재판에 부치는 등 완강한 독도 수호 의지를 보였다. 이를 본 일본측은 외무성이 앞장서서 독도가 역사적으로 일본 영토임을 증명하려고 다수 학자와 연구자들을 동원해서 문헌자료 조사를 광범위하게 실시했다.

    Q 7 일본측 문헌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였다는 증거가 나왔는가?

    A현재까지는 명백한 문헌자료는 1건도 나오지 않았고, 도리어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문헌만 상당수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독도 영유권 논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Q 8 그러면 왜 최근에 ‘독도 영유권 논쟁’이 격화했는가?

    A1994년에 유엔에서 ‘신해양법’이 통과되면서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전관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약칭 EEZ)을 ‘영해’와 별반 다름없이 설정할 수 있게 된 사실과 관련된다고 본다. EEZ를 선포하려면 기점(base point, base line)을 자기 영토에서 잡아야 하는데, 독도를 기점으로 삼게 되면 200해리 영역이 훨씬 넓어진다. 이에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이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

    Q 9 일본정부는 ‘유엔 신해양법’과 관련해 ‘독도’에 대해 어떤 정책을 세웠는가?

    A일본은 1995년 총선거에서 여당측이 ‘독도(죽도) 침탈’에 ‘탈환’이라는 용어를 적용, 공약의 하나로 내세웠다. 또한 일본정부는 1996년 이케다(池田) 외상이 내외 언론기자들을 모아 놓고 성명을 발표하여 “독도(죽도)는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상으로나 일본 영토이니 한국은 독도에 주둔한 한국 해양경찰대를 즉각 철수하고 (독도에) 부착한 시설물을 철거하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 외상은 뒤이어 주일본 한국대사를 외무성으로 불러 동일한 내용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일본정부는 1996년 2월20일 독도를 포함해서 200해리 배타적 전관수역을 채택하기로 의결하고, 국회에 송부했다. 일본 국회는 1996년 5월에 200해리 전관수역을 채택하기로 의결하고 ‘독도’를 일본 EEZ의 기점으로 취한다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양국의 200해리가 중첩되는 동해에서는 일본 EEZ 구획선을 울릉도와 독도(죽도) 사이에 획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는 1997년도 ‘외교백서’에서 일본외교 10대 지침의 하나로 ‘독도 탈환(침탈) 외교’를 설정하였다.

    Q 10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이러한 공격적 외교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A한국정부 수뇌는 1996년 전반기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측 버릇을 고쳐놓겠다고 단호하게 대응하였다. 아울러 한국정부도 1996년에 ‘유엔 신해양법’을 적용하여 200해리 EEZ를 선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후 한국 EEZ의 기점을 잡는 문제와 관련해 한국 외무부가 독도를 기점으로 취하지 않고 울릉도를 기점으로 취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자 독도학회를 비롯해서 다수의 관심 있는 학자들은 당연히 ‘독도’를 기점으로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정부는 1997년 7월 말 ‘울릉도’를 한국 EEZ의 기점으로 취한다고 발표하고 양국 EEZ 구획선을 한국 울릉도와 일본 오키도(隱岐島)의 중간선을 제의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미 1996년 5월에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 EEZ의 기점으로 취해 발표한 데 반해, 한국 외무부는 1년 2개월 후 한국 EEZ의 기점을 ‘독도’가 아닌 ‘울릉도’로 취한 것이다. 이에 국민과 학계는 경악하였고, 한국 외무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

    Q 11 99년 1월22일 체결된 신한·일어업협정에서 ‘독도’는 어떻게 취급되었는가?

    A일본정부는 대한민국이 1997년 12월3일 IMF의 관리체제에 들어 경제가 취약해지자 이것을 기회로 1998년 1월 일방적으로 한·일어업협정을 폐기해버렸다. 이것은 국제관계에 전례가 없는 매우 비우호적인 조치였다. 한·일어업협정 규정에 따라 그 1년 후인 1999년 1월부터 협정 폐기가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한·일 두 나라가 어업협정을 맺고 고기잡이를 하려면 1999년 1월22일까지는 새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후는 국제법규에 따라 고기잡이를 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신한·일어업협정’ 체결을 촉구하면서 일본정부가 주장하는 한·일 EEZ 구획 제한선인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어느 선을 좌변으로 하고 한국정부가 주장하는 한·일 EEZ 구획 제안선인 울릉도와 오키도 사이의 어느 선을 우변으로 해서 ‘독도’가 포함된 수역을 ‘한·일공동관리수역’으로 설정하자고 제안하였다. 한·일 양측 실무자 대표들의 회담 결과 울릉도 기점 35해리와 오키도 기점 35해리까지를 한·일 양국의 EEZ로 하고 그 중간에 있는 ‘독도’를 포함한 수역을 ‘중간수역’으로 설정하였다. 그 결과 ‘독도’는 ‘중간수역’ 에 포함됐다.

    Q 12 독도가 ‘중간수역’에 포함된 것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조금이라도 훼손한 것인가?

    A그렇다고 본다. 첫째, 울릉도의 부속도서인 독도가 모도(母島)인 울릉도의 수역(한국 EEZ 내의 수역)에서 ‘분리’되어 질적으로 다른 ‘중간수역’에 들어가버렸다. 대체로 침탈 대상을 우선 ‘모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일본의 오랜 전술이다. 둘째, 일본은 ‘중간수역’에 들어간 ‘독도’를 일본 EEZ의 기점으로 잡았는데 한국은 자기 영토이면서도 한국 EEZ의 기점으로 잡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셋째, 불필요한 ‘중간수역’을 설정한 것인데 한국정부가 중간수역의 좌변을 울릉도 기점 35해리 선으로 잡은 것은 일본 EEE기점을 ‘독도’로 잡은 일본의 정책을 묵인한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넷째, 한국정부는 ‘중간수역’에 들어가 있는 ‘독도’와 그 영해(12해리)가 ‘한국 영토’임을 시사하는 표시를 전혀 못했는데, 일본은 ‘독도’와 그 영해(12해리)를 일본 영토와 일본 영해라고 세계에 계속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중간수역’의 성격에 대해 한국정부는 ‘공해(公海)’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는 데 반해, 일본정부는 ‘한·일 공동관리’ 수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 ‘공해적 성격’에 대한 합의가 없이 조인된 듯하다.

    Q 13 일본정부는 과연 ‘독도’를 침탈할 의사가 있는 것인가?

    A98년 11월 일본 해상자위대는 ‘이오지마’에서 ‘독도’를 무력 접수하는 해상훈련을 비밀리에 실시했음을 거의 1년 후인 99년에 일본 신문이 보도했다. 또한 99년에는 일본인들의 호적을 ‘독도(죽도)’에 옮겨 등재했는데, 이것을 호적대장에 등재해 준 것은 일본정부의 행정행위다.

    일본은 한국정부와 한국 국민의 독도 영유 수호의지가 약해져 돌파가 가능하면, 또는 절호의 기회가 오면, 독도를 침탈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97년 일본 외무성의 10대 외교지침에 ‘독도 탈환(침탈) 외교’가 설정되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정부는 독도 침탈계획을 몇 단계로 설정하여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Q 14 일본정부는 독도가 역사적으로, 오랜 옛날부터 한국의 고유 영토임을 모르는 것인가? ‘독도’는 언제부터 한국 영토였는가?

    A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 우산국(于山國)이 신라(新羅)에 병합된 때부터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두 곳(新羅本紀 지증왕 13년조와 烈傳 異斯夫 조)에 기록되어 있다.

    Q 15 혹시 ‘우산국’의 영토는 ‘울릉도’뿐이고 ‘독도’는 우산국의 영토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도 모두 우산국 영토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문헌이 있는가?

    A물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①‘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 ②‘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編) ③‘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기타 여러 고문헌을 들 수 있다.

    Q 16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A원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于山(우산)과 武陵(무릉·우릉)의 두 섬이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며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于山國이라 칭하였다.(于山·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稱于山國.)”

    여기서 우선 주목할 것은 우산도(于山島)와 울릉도를 2개의 섬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섬이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동해의 중요한 지리상 특징 중 하나는 바다 중앙에는 큰 섬이 ‘울릉도’와 ‘독도’ 두 섬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울릉도 주변에는 몇 개의 큰 바위섬이 있는데 이들은 가까워서 날씨가 청명하지 않아도 매우 잘 보인다. 오직 날씨가 청명한 경우에만 조그맣게 서로 보이는 섬은 동해에는 ‘울릉도’와 ‘독도’밖에 없다.

    세종시대에는 울릉도를 ‘武陵島’(무릉도·우릉도, ‘武’의 중국음은 ‘우’)라고 불렀음이 ‘세종실록’에 매우 많이 나온다. 그리고 ‘독도’를 ‘于山島’라고 불렀다. 이 사실은 17세기부터 고지도에서 오늘날 ‘독도’의 정확한 위치에 있는, 울릉도 이외에 또 하나의 섬을 ‘우산도(于山島)’라고 부른 사실에서도 재확인된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이러한 ‘울릉도’(武陵島)와 ‘독도’(于山島)를 ‘우산국’(于山國)이라고 칭했다고 기록해서,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영토로 한 해상 소왕국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산국’이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것은 영토상으로는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에 병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Q 17 날씨가 청명하면 과연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는가?

    A물론 보인다.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는 92㎞(49해리)인데,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해변에서는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도 있으나, 200m 이상의 울릉도 고지에서는 날씨가 청명하면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울릉도의 성인봉(높이 984m)에서는 독도가 뚜렷하게 보여서, 울릉도에서는 이를 관광자원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 울릉도와 독도에서는 날씨가 청명하면 서로 보이기 때문에 울릉도에서 보이는 ‘독도’를 사진기로 촬영한 사람이 많다. 최근에도 울릉도의 김철환씨가 육안으로 독도가 보일 때 사진을 찍어서 ‘신경북일보’(1999년 12월 11일자)에 게재한 적이 있다(사진 참조).

    이 사진에서도 증명되는 바와 같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울릉도와 독도의 “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한 것은 정확한 기록이고, 두 섬이 모두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었다는 기록도 정확한 것이었다.

    Q 18 다른 고문헌 자료에는 어떠한 것이 있으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A‘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있다. 이 책에서는 강원도 울진현 조에 “우산도·울릉도: 무릉이라고도 하고 우릉이라고도 한다. 두 섬은 현(울진현)의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중략) (于山島·鬱陵島: 一云武陵 一云羽陵 二島在縣正東海中. (下略))”고 기록하였다.

    조선왕조는 1481년(성종 12년)에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고, 50년 후인 1531년(중종 26년)에는 이를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면서 증보한 부분에는 표시하였다. 현재 ‘동국여지승람’은 전하지 않으나, 그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순한 관찬 지리서가 아니라, 조선왕조가 영유하는 영토에 대한 규정과 해설서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 책에 수록된 지역이나 군·현과 섬들은 모두 조선왕조의 영토인 것이다.

    즉 조선왕조 조정은 ‘동국여지승람’(및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조선왕조가 통치하는 영토 내용을 규정하고 그 영토들에 대한 내력과 지리적 해설을 정리하여 편찬 간행해서 국내외에 널리 반포함으로써 자기가 통치하는 영토를 세상에 명백히 천명한 것이다. 이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신증 부분이 아닌 원래의 ‘동국여지승람’ 부분에 우산도(于山島: 독도)와 울릉도 두 섬이 행정구역상으로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조선왕조의 영토임을 밝혀 놓았다. 이 자료는 독도가 조선왕조 영토임을 15세기에 명확하게 증명하여 세상에 천명한, 결정적으로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의 이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를 계승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Q 19 그 밖에 독도가 우산국 영토로 이미 서기 512년 이래 한국 영토임을 증명하는 고문헌 자료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A예컨대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軍政編)이 있다. 이 문헌에는,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도와 우산도(于山島)는 모두 우산국 땅(영토)이다.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松島(송도: 마쓰시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자료에서 인용된 ‘여지지(輿地志)’라는 책은 현재 발견되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이를 인용한 ‘만기요람’ 군정편이라고 하는, 조선왕조 정부가 편찬한 책에 인용된 위의 기록은 두 단원에서 ‘독도’가 우산국 영토였고 한국 고유영토임을 증명하고 있다.

    우선 첫째 문장에서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모두(皆)’ 우산국 땅(영토)”이라고 해서, 울릉도뿐만 아니라 ‘우산도(독도)’도 ‘모두’(두 섬 모두) 옛날의 우산국 영토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둘째 문장에서는 “우산도(독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松島(송도: 마쓰시마)다”라고 해서 우산도가 바로 오늘의 ‘독도’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오늘날과 달리 일본은 1870년대 말까지는 조선의 울릉도를 ‘竹島(죽도: 다케시마)’로 호칭하고 독도(우산도)를 ‘松島(송도: 마쓰시마)’로 호칭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모든 학자와 일본정부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위 자료의 둘째 문장에서 “우산도는 왜인들이 말하는 松島다”라고 한 것은 “우산도는 곧 (오늘의) 독도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기요람’ 군정편은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모두’ 옛 우산국 영토임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으며, 또한 ‘독도’가 1808년 이전에 한국에서는 ‘우산도’라고 불렸고, 한국 고유 영토였음을 명백히 증명해주는 것이다.

    Q 20 숙종시대에 안용복(安龍福)이라는 사람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는 데 큰일을 해냈다고 들었는데, 그때의 기록에는 ‘독도’가 조선 영토라는 기록이 없는가?

    A‘숙종실록(肅宗實錄)’에 있다. 안용복은 두 번째로 일본에 건너가기 직전인 1696년(숙종 22년) 봄에 일단의 어부를 이끌고 울릉도에 들어가서 이곳에 침입한 일본 어부들을 쫓아냈다. 이때 일본 어부들이 우리는 본래 ‘松島’에 사는데 고기를 잡으러 왔다고 말하자, 안용복은 “松島(송도)는 곧 于(子)山島(우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고 호통치고 쫓아냈다. 안용복 일행은 이튿날 새벽에 배를 저어 于(子)山島에 들어가 보니 일본 어부들이 솥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삶고 있었다. 그래서 막대기로 이를 두들겨 부수며 큰 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들은 그것을 거두어 배에 싣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 일행은 그 길로 일본 백기주(伯耆州)에 들어갔는데, 이때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와 대등해지려고 ‘鬱陵·于(子)山 兩島 監稅將(울릉도·우산도 양도 감세장)’이라는 직책을 칭하였고,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양도(울릉도와 우산도)가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후인데 혹시 다시 범월하는 자가 있거나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문서를 작성하여 역관과 함께 보내주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실은 ‘숙종실록’ 숙종 22년(1696년) 9월 무인(25일) 조에 상세히 기록되어 우산도가 독도이며 일본에서는 ‘松島’(송도: 마쓰시마)로 호칭되고 있지만 조선 영토임을 잘 증명하고 있다.

    Q 21 그 밖에 ‘독도’가 옛 우산국 영토이며 한국 고유영토임을 증명하는 고문헌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A예컨대, 1908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간행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가 있다. 이 책은 조선왕조의 민족백과사전이라 할 만한 책으로, 1792년 편찬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증보한 책이다. ‘증보문헌비고’에서도 ‘만기요람’ 군정편처럼 같은 자료를 인용해서, “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 땅(영토)인데 우산은 곧 왜인이 말하는 松島(송도)다(輿地志云 鬱陵·于山 皆于山國地 于山則倭所謂松島也)”라고 기록하였다. 즉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옛 우산국 영토인데, 이중에 우산도는 왜인이 말하는 ‘松島(오늘날의 독도)’임을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서를 인용하여 명백히 천명하고 있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독도’를 종래 다른 나라가 점유한 형적(形迹)이 없는 ‘무주지(無主地)’라고 주장하면서 1905년 1월28일 일본에 ‘영토편입’한다며 일본 내각회의에서 결정하고 1906년 3월 말부터는 일본이 한국 영토인 ‘독도’를 침탈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대한제국 정부가 이 ‘증보문헌비고’를 간행한 것은 그 2년 후인 1908년의 일이다. 이때는 일제 통감부가 대한제국 정부를 지휘 감독하고 있던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정부는 ‘증보문헌비고’에서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는 주인 없는 ‘무주지’가 아니라 우산국 때부터 한국 영토임을 기록하여 일제의 독도 침탈시도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를 담았으며, 동시에 우산도(독도)가 우산국의 영토이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밝힌 것이었다.

    Q 22 고문헌 이외에 ‘독도’가 울릉도와 함께 옛 우산국(于山國)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자료는 없는가?

    A우선 ‘독도’를 ‘우산도’라고 하여 ‘우산’이라는 나라 이름을 따서 부른 명칭 자체가 ‘독도’가 우산국 영토였음을 증명해준다.

    한자가 신라에 들어오기 이전에 본래 우산국의 명칭은 ‘우르뫼’였는데, 이를 한자로 바꿀 때 ‘于山’국이라고 하였다. 우산국의 영토인 울릉도가 본도(本島)이고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한 속도(屬島)이므로, 원래는 ‘우르뫼’를 ‘우산도’라고 번역하여 울릉도(본도)를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본도의 명칭이 울릉(鬱陵)·울릉(蔚陵)·무릉(武陵)·무릉(茂陵)·우릉(芋陵)·우릉(羽陵) 등으로 한자 번역되어 정착되자, 그 부속 섬인 독도(물론 당시에는 다른 명칭이었지만)가 ‘우산도’(于山島)의 명칭을 갖게 된 것이 명백하다. 독도가 한국에서 1882년까지 공식적으로 ‘우산도’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던 것은 바로 이 섬 ‘독도’가 ‘우산국’ 영토였음을 다시 한번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Q 23 그렇다면, 일본측에서 일본 고문헌에 ‘독도’가 최초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그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A일본정부가 1960년에 한국 정부에 보낸 외교문서에 따르면, 1667년에 편찬된 ‘隱州視聽合記(은주시청합기)’라는 보고서가 일본 최초의 고문헌이다. 일본정부 외무성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출운(出雲)의 관리(蕃士) 사이토(齋藤豊仙)가 번주(藩主: 大名, 봉건영주)의 명을 받고 1667년(일본 寬文 7년) 가을에 은기도(隱岐島: 隱州)를 순시하면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여 보고서로 작성하여 바친 것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독도를 ‘松島’로, 울릉도를 ‘竹島’로 호칭하면서 언급했다고 하였다. 그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隱州(은주: 은기도)는 北海(북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隱岐島라고 말한다. … 戌亥間(술해간: 서북방향)에 2日 1夜를 가면 松島(송도)가 있다. 또 1日 거리에 竹島(죽도)가 있다. ‘속언에 磯竹島(이소다케시마)라고 하는데 대나무와 물고기와 물개가 많다. 神書(신서)에 말한 소위 50猛일까.’ 이 두 섬(松島와 竹島)은 무인도인데, 高麗(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雲州(운주: 出雲國)에서 隱岐(은기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한즉 일본의 서북[乾] 경계지는 이 州(隱州: 隱岐島)로 그 限(한: 限界)을 삼는다.”

    그러나 위의 기록을 정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 보고서는 항해거리 일수(日數)를 통하여 ‘독도’를 ‘松島(송도)’로, ‘울릉도’를 ‘竹島(죽도)’라고 호칭하면서 ‘독도’를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으면서, ‘독도’와 ‘울릉도’가 모두 조선 영토이고 일본 영토가 아님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Q 24 이 밖에 일본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기록한 고문헌은 없는가?

    A일본측이 현재까지 공개 발표한 고문헌들에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기록한 것은 없다. 도리어 지금까지 알려진 일본 고문헌들에서 ‘독도’를 기록한 고문헌들은 모두 이 섬이 울릉도의 부속도서(섬)로 조선 영토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들이다. 혹시 일본측이 공개하지 않은 고문헌 자료에 그런 것이 있다. 그러나 한·일 간에 고문헌자료 조사를 통해 ‘독도’ 영유권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는 과정에 일본은 조금이라도 일본에 유리할 듯한 일본 고문헌들을 총동원하여 논쟁을 전개해온 사실을 고려하면, 비공개 일본 고문헌들 속에서 ‘독도’가 일본 영토였다는 증명 자료가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고, ‘독도’가 한국 영토였다는 증명자료가 다수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Q 25 일본정부는 최근에 ‘역사적’으로도 ‘독도’는 일본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1600년 전후부터 약 80년간 일본이 면허장을 민간인에게 주어 ‘독도(竹島)’를 실효적으로 지배 점유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측의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인가?

    A일본정부가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라고 드는 것은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일본 어업가 오오다니(大谷甚吉)와 무라가와(村川市兵衛) 두 가문에 1618년에 내준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와 1661년에 내준 ‘송도도해면허(松島渡海免許)’다. 이 두 개의 ‘도해면허(渡海免許)’는 얼핏 보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의 점유권을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가졌던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용을 보면 도리어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더욱 명확하게 증명해 주는 자료다. 왜냐하면 이 두 개의 ‘도해면허’는 ‘외국’에 건너갈 때 허가해 주는 ‘면허장’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대한 쟁점이므로 그 자초지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1592∼98년) 전후에 울릉도는 일본군(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울릉도 공도·쇄환(空島·刷還) 정책, 즉 울릉도를 비워두고, 거기에 들어간 백성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 직후 일본 백기주(白耆州)의 미자(米子)에 거주하던 오오다니(大谷甚吉)라는 사람이 월후(越後)라는 곳을 다녀오다가 태풍을 만나 조난하여 ‘울릉도’에 표류해 닿았다. 오오다니가 울릉도(죽도)를 답사해 보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지만 수산 자원이 풍부한 보배로운 섬임을 알았다. 이에 오오다니는 이 섬 울릉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울릉도는 당시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울릉도(죽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막부(幕府)의 허가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울릉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외국(外國)의 영토이므로 국경을 넘어 외국으로 건너가 고기잡이를 해도 월경죄로 처벌받지 않으려면 막부의 공식 허가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오오다니는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들과 친분이 두터운 무라가와(村川市兵衛)와 함께 1616년에 죽도도해면허(竹島渡海免許)를 신청하고 허가를 받으려고 운동하였다.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의 관리로 당시 백기주(白耆州) 태수(太守) 직을 맡고 있던 송평신태랑광정(松平新太郞光政)이 1618년에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가문에 ‘죽도도해면허’를 내주었다.

    Q 26 그러면 당시 오오다니와 무라가와 두 일본인이나 ‘도해면허’에 관련된 자들은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섬)임을 인지하고 있었는가?

    A물론이다. 오오다니(大谷) 가문과 무라가와(村川) 가문이 1661년 ‘송도도해면허’를 신청하기 직전에 그 신청을 논의하는 과정에 1660년 9월5일자 오오다니 가문의 구산장좌위문(九山庄左衛門)이 무라가와 가문의 대옥구우위문(大屋九右衛門)에게 보낸 편지에 “장차 또 내년(1661년…인용자)부터 竹島之內 松島(울릉도 안의 독도)에 귀하의 배가 건너가게 되면”이라고 하여, ‘송도도해면허’를 막부에 신청한 근거가 이미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1618년에 받았으므로 “울릉도 안의 독도(竹島之內松島)”에 월경하여 건너가는 ‘송도(독도)도해면허’는 송도(독도)가 죽도(울릉도) 안에 속한 섬이므로 신청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또한 이 무렵 6월21일자로 오오다니 가문의 구산장좌위문이 무라가와 가문의 대옥구우위문에게 보낸 편지에 “竹島近邊松島(울릉도에 가까운 변두리 독도)에 도해(渡海)의 건”이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에 가까운 변두리 독도”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받은 두 가문은 ‘송도(독도)도해면허’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구산장좌위문이 1660년 9월8일자로 필사해서 무라가와 가문에 보낸 편지에는 독도(송도)를 “竹島近所之小島(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에 소선(小船)으로 도해(渡海)하는 건”이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 가까운 곳의 작은 섬, 즉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인지하였다.

    Q 27 일본측이 조선정부 몰래 일본 어민 두 가구에 울릉도와 독도에 국경을 넘어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해도 좋다고 허가하는 면허장을 내주고,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독도 근해에 출현해도 조선정부와 조선 어민들은 그대로 방관만 했는가?

    A조선정부는 처음에는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독도 출어(出漁)나 ‘죽도도해면허’ ‘송도도해면허’ 같은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어민들과는 충돌했다.

    조선 조정이 울릉도에 대해 섬을 비워두고, 거기에 들어간 국민들을 육지로 돌아오게 하는 ‘공도·쇄환정책’을 실시했다 할지라도, 울릉도·독도 연해에는 수산자원이 풍부하므로 동해·남해안 조선 어부들이 조정 몰래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1663년(숙종 19년) 봄 동래·울산 어부 약 40명이 울릉도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일본 오오다니 가문에서 보낸 일단의 일본 어부들과 충돌하였다. 수적으로는 우세했으나 울릉도가 조선 영토였으므로 일본 어부들은 조선 어부대표를 보내면 협상하겠다고 대응하다가 안용복(安龍福) 박어둔(朴於屯)이 대표로 나서자 이 두 사람을 납치하여 일본 은기도(隱岐島)로 가버렸다.

    안용복은 은기도 도주(島主)에게 울릉도는 조선 영토임을 지적하면서 “조선사람이 조선 땅에 들어가는데 왜 납치하여 구속하는가” 하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그의 상관인 백기주(伯耆州) 태수(太守)에게 안용복 등을 이송하였다. 안용복은 백기주 태수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강조하고,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사람인 자기가 들어간 것은 일본이 관여할 일이 아니며, 앞으로는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일본 어부의 출입을 금지시켜 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백기주 태수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도쿠가와 막부에서 오오다니 가문에 ‘죽도(울릉도)도해면허’를 승인하여 국경을 넘어 울릉도에 건너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오는 것을 허가하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에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등을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의 막부 관백(關白: 執政官, 여기서는 장군)에게 이송하였다.

    그러나 안용복은 막부 관백의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이므로 자기를 납치하여 구속한 것은 부당하며, 도리어 일본 어부들이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들어간 것이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은 안용복을 심문한 후 백기주 태수를 시켜서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厚待)한 후 조선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석방된 안용복이 귀국 길에 장기(長崎: 나가사키)에 이르니 장기주 태수는 대마도 도주(島主)와 결탁하여 안용복을 다시 구속해서 대마도에 이송하였다. 안용복이 대마도에 이르니 대마도 도주는 백기주 태수가 막부 관백의 지시를 받고 써준 문서를 빼앗고, 도리어 안용복을 일본 영토 竹島(죽도: 울릉도)를 침범한 월경 죄인으로 취급하여 묶어서 1693년 11월 조선 동래부에 인계하면서 앞으로는 조선 어부들이 일본 영토인 죽도(竹島)에서 고기잡이 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때부터 울릉도를 ‘竹島(죽도)’라고 부르면서 이 기회에 울릉도(및 부속도서 독도)를 침탈하려는 대마도 도주의 외교활동이 시작되었다.

    Q 28 그렇다면 이때 대마도 도주는 도쿠가와 막부와 어떠한 관계였으며, 대마도 도주의 요구에 조선의 조정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A도주는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 도쿠가와 막부의 지배에 속해 있었으나 일본 중세의 특징인 봉건성으로 약간의 지방분권적 권리도 갖고 있었다. 조선 세종 이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외교 교섭은 대마도 도주만이 공식 창구로 공인되어 왔다. 이때 대마도 도주 종의륜(宗義倫)은 울릉도를 침탈해서 대마도 주민을 이주시키고자 하여 자기가 막부 정권을 대신한다고 전제하면서 정관(正官) 귤진중(橘眞重)을 사절로 임명해서 안용복·박어둔을 부산에 호송하는 길에 조선정부에 문서를 보내서, 마치 울릉도가 아니면서 그와 비슷한 별개의 일본 영토인 ‘竹島(죽도)’가 있는 것처럼 문구를 만들어서 이제 이후로는 竹島에 조선 선박이 출어(出漁)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터이니 귀국도 (조선 어민의 출어를) 엄격히 금지해 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해온 것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안용복 등을 가둔 채, 집권한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우의정 민암(閔) 일파의 온건 대응론과 남구만(南九萬)·유집일(兪集一)·홍중하(洪重夏) 등의 강경 대응론이 대립하였다. 당시 실세인 좌의정 목내선과 우의정 민암은 국왕 숙종에게 온건 대응론을 건의하였다. ‘숙종실록’(1693년 11월 丁已(18일)조에는 강경 대응론과 온건 대응론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접위관 홍중하가 하직 인사를 하고, 좌의정 목래선·우의정 민암이 홍중하와 함께 청대하였다.

    홍중하가 아뢰기를 ‘왜인이 말하는 ‘竹島(죽도)’는 바로 우리나라의 ‘울릉도(鬱陵島)’입니다. 지금 상관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버리신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미리 명확히 판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만약 저들의 인민이 들어가서 살게 한다면 어찌 뒷날의 걱정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목내선·민암은 아뢰기를, ‘왜인들이 民戶(민호)를 옮겨서 들어간 사실은 이미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이것은 300년 동안 비워서 내버려둔 땅인데, 이것으로 인하여 흔단(端: 틈새의 발단)을 일으키고 우호를 상실하는 것은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고 하였다. 임금이 민암 등의 말을 따랐다.”

    이에 목내선·민암 일파는 대마도 도주에게 예조를 시켜 다음과 같은 온건 대응의 회답서를 보냈다.

    “우리나라가 동해안의 어민에게 외양(外洋)에 나갈 수 없도록 한 것은 비록 우리나라의 경지(境地)인 鬱陵島(울릉도)일지라도 역시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의 왕래를 허락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에 있어서랴. 이제 이 고깃배가 귀국의 경지인 竹島(죽도)에 들어갔기 때문에 잡아보내오는 번잡함에 이르고 멀리 서찰까지 보내게 했으니, 이웃나라 사이의 친선의 우의에 감사하는 바이다. 바다백성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삼으니 물에 표류해 가는 근심이 없을 수 없지만, 국경을 넘어 깊숙이 들어가서 혼잡하게 물고기를 잡는 것은 법률로 마땅히 엄하게 징계해야 할 것이므로, 지금 범인들을 법률에 의거해서 죄를 부과하고, 이후에는 연해 등지에서 규칙을 엄격하게 제정하여 이를 신칙(申飭: 단단히 타일러 경계함)하게 할 것이다.”

    조선 조정이 대마도 도주에게 보낸 이 회답문서는 온건대응에 매달린 나머지 일본측이 주장하는 ‘竹島’(죽도)가 곧 우리나라 영토인 ‘鬱陵島’(울릉도)인 줄을 잘 알면서도 모른 체해서 “귀국(일본)의 경지(境地) 竹島(죽도)” 운운하고 ‘죽도’에의 조선 어부들의 고기잡이 왕래를 엄격하게 다스려서 벌주어 그 결과를 알려주겠다고 회신한, 굴욕스러운 외교문서였다. 만일 “우리나라 경지 울릉도”라는 문구가 포함되지 않았더라면 울릉도를 ‘竹島’라고 부르면서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 문서를 조선 조정이 외교문서로 승인하는 증거 문서가 되는 회답문서를 만들어 보내준 것이다.

    Q 29 당시 조선 조정은 그렇게 나약하고 국토 수호 의지도 없었는가? 온건 대응파의 결정을 비판하는 세력이 없었다는 말인가?

    A그렇지 않다. 먼저 사관(史官)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관들은 “왜인들이 말하는 소위 竹島(죽도)는 곧 우리나라의 鬱陵島(울릉도)인 바 울릉도의 이름은 신라와 고려의 역사서적에도 보인다”고 지적하고, 울릉도와 죽도는 1島2名(한 섬의 두 이름)인데 왜인이 ‘울릉도’의 이름을 감추고 단지 ‘죽도(竹島)’만 내세운 것은 우리나라 회답서에서 ‘귀국(일본) 경지 죽도’ ‘죽도 어채’를 금단하겠다는 문구를 증거 삼아 뒷날 울릉도를 점거할 계책이라고 분석하면서, 자기 강토를 다른 나라에 주는 것은 불가하니 곧 명확하게 밝히고 판별하여 교활한 왜인으로 하여금 다시는 울릉도 점거의 생심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이 의리에 당연하거늘, (온건 대응파) 일부 신하들이 두루 신중함이 지나쳐서 울릉도를 점거당할 근거 문서나 만들어 주고 울릉도에 들어간 죄 없는 바다백성들에게 죄를 주자는 말을 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무신들은 일본이 울릉도를 가지면 가까운 시기에 동해안에서 왜구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국왕에게 아뢰면서 온건 대응파를 비판했다.

    정계 원로인 남구만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역사서적들과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면 울릉도는 신라시대부터 조선 영토이고 울릉도를 일본에서는 ‘竹島(죽도)’ ‘磯竹島(기죽도)’라고 했는데, 조상이 남겨준 우리 영토에 다른 나라 사람을 용납해서는 안 되니, 지난번 대마도 도주에게 보낸 모호한 회답문서는 회수하고 새로운 회답서를 만들어 보내자고 간곡하게 건의하였다. 국왕 숙종은 거센 비판여론에 당황하여 남구만의 건의를 채택해서 남구만을 영의정에 임명하고, 지난번 회답문서는 취소하여 회수함과 동시에 새로운 회답문서를 작성하여 대마도에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1694년(숙종 20년) 음력 8월14일자로 새로 만들어 보낸 회답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 강원도 울진현에 속한 섬이 있어 ‘울릉(鬱陵)’이라 이름하는데, 울진현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 우리나라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란 책에 기재되어 역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어서 일의 족적은 매우 명료하다. 이번에 우리나라 해변의 어민들이 이 섬에 갔는데 뜻밖에 귀국 사람들이 스스로 국경을 침범하여 넘어와서 서로 대치하여 마침내 도리어 우리나라 사람을 구집(拘執)해서 강호(江戶)에 넘겼다. 다행히 귀국의 대군(大君)이 사정을 밝게 살펴서 노자를 많이 주어 돌려보내 주었다. […]

    그러나 우리나라 백성들이 고기잡이한 땅은 본시 ‘울릉도(鬱陵島)’로서, 대나무가 많이 나기 때문에 혹 ‘죽도(竹島)’라고도 칭하지만, 이것은 1島(하나의 섬)에 2名(두 가지 이름)이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1島 2名은 비단 우리나라 서적에 기록되어 있는 바일 뿐만 아니라 귀주인 역시 모두 알고 있다. 이제 이번에 온 서찰 가운데 ‘죽도’를 귀국의 땅이라고 하고 바야흐로 우리나라 어선의 왕래를 금지해 줄 것을 바라면서, 귀국인이 우리나라의 경지(境地)를 침섭(侵涉)하고 우리나라 백성을 구집(拘執)한 실책은 논하지 않고 있다. 어찌 성실한 신뢰의 길에 결함이 있다고 아니할 것인가.

    장차 이 말의 뜻을 깊이 읽어서 동도(東都: 江戶: 지금의 도쿄로서 여기서는 막부 장군을 지칭)에 전하여 보고하고, 귀국 해변 사람들에게 신칙(申飭)해서 울릉도(鬱陵島)에 왕래하지 말게 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단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상호간의 우의에 더없이 다행일 것이다.”

    조선 조정과 강경 대응파가 작성하여 대마도에 보낸 이 새로운 회답문서는 ‘울릉도=죽도’의 1島2名임을 들고 ‘울릉도=죽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하게 천명함과 동시에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죽도’에의 왕래하는 것을 엄중히 금단해 줄 것을 요구한 당당한 외교문서였다.

    Q 30 일본의 조선에 대한 공식적 외교창구인 대마도 도주는 조선정부의 위와 같은 당당한 외교답서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A그렇게 쉽게 원상태로 돌아가려 했겠는가? 대마도 도주는 조선에서 정권이 교체된 줄도 모르고 다시 귤진중(橘眞重)을 동래부에 보내 ‘우리나라 울릉도’라는 표현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귤진중은 강경 대응파의 새로운 회답문서를 받아 보고는 돌아가지 않고 또다시 새 회답문서를 고쳐 써달라고 조르면서 온갖 방법의 시위를 다하였다. 여기서는 번잡하여 그 주고받은 말과 문서를 다 소개하지 않지만, 1693년부터 1695년까지 3년간 치열한 외교논쟁이 전개되었다.

    대마도 도주 측은 조선에 대한 유일 합법의 일본 외교담당임을 자처하였고, 심지어 동래에 와 있던 귤진중은 끝까지 조선이 ‘竹島(죽도=울릉도)’를 조선 영토라고 고집하고 조선인의 일본 영토 ‘죽도’왕래를 금지하지 않는다면 임진왜란과 같은 대병란이 있을 것이라고 위협까지 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강경 대응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끝까지 의연하게 국토 수호의 의지를 명확히 천명해서 일본측의 무례한 도발을 강경하게 성토하고 훈계하였다.

    Q 31 그렇다면, 1693∼1695년 ‘울릉도=죽도’ 영유권을 둘러싼 조선과 일본의 외교논쟁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A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잘 해결되었다. 일본측에서는 조선과 외교를 담당하던 대마도 도주 종의륜이 1695년에 죽고 그의 아우 종의진(宗義眞)이 도주가 되었다.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1693년에 안용복을 송환할 때 후대하면서 죽도(울릉도)가 일본영토가 아님을 명백히 했다. 막부는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대마번의 번주 종의륜이 안용복을 송환하면서 죽도(울릉도) 획득의 공격외교를 행하는 것을 무리한 공격이라고 여겼는데, 조선측의 울릉도(죽도) 수호의지가 매우 강경하다는 것을 듣고 종의륜의 무리한 공격외교가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우호를 불필요하게 해치지 않을까 하여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때 마침 종의륜이 죽고 그의 아우 종의진이 도주가 되자, 종의진은 1696년 1월28일 도쿠가와 막부 장군에게 새해 인사 겸 새 도주 취임보고를 하러 에도에 올라가게 되었다. 막부 장군은 백기주(伯耆州) 태수 등 4명의 태수가 나란히 앉은 자리에서 울릉도(죽도) 문제에 대하여 대마도 신주 종의진에게 조목조목 날카롭게 질문하였다. 종의진은 죽도(竹島)가 조선의 ‘울릉도’이고 그것이 조선의 영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막부 장군은 대마도 신주 종의진과의 질의·응답을 종합하여 참조한 후, 다음과 같은 명령하였다. 그 요지는 ①죽도(울릉도)는 일본 백기(伯耆)로부터 거리가 약 160리이고 조선으로부터는 40리 정도로 조선에 가까워 조선 영토로 보아야 하며 ②앞으로는 그 섬에 일본인들의 도해(渡海: 국경을 넘어 바다를 건너는 것)를 금지하며 ③이 뜻을 대마도 태수가 조선측에 전하게 하고 ④대마도 태수는 돌아가면 형부대보(刑部大輔: 대마도의 재판 담당관)를 조선에 파견하여 이 결정을 알리고 그 결과를 막부 장군(관백)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이 명령에 따라 울릉도(죽도)와 그 부속도서는 ‘조선 영토’로 일본측에 재확인되었고, 1618년의 ‘竹島渡海免許(죽도도해면허)’와 1661년의 ‘松島渡海免許(송도도해면허)’는 자동적으로 취소되었으며, 일본 어민들은 조선 영토인 울릉도(죽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우산도: 송도)에 건너가 고기잡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 1696년 1월의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결정은 3년간 끌어온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을 일단 종결한 것이었다.

    Q 32 그러면 대마도 번주는 1696년 1월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위의 결정과 명령을 즉각 수행하여 조선측에 통보했는가?

    A즉각 통보하지 않고 시일을 끌면서 그해 연말에야 통보하였다. 그 사이에 안용복이 즉각 활동을 재개하여 조선정부는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생각과 결정을 대마도의 공식 사절이 오기 전에 알게 되었다.

    Q 33 안용복은 또 어떠한 활동을 했는가?

    A안용복은 1696년 봄에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울릉도와 독도(우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울릉도·독도를 수호하려고 하였다. 이때 안용복은 1696년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 독도가 조선 영토이고, 울릉도·독도에서 일본 어민의 고기잡이 도해(渡海)를 금지한 사실을 알고 행동했는지 모르고 행동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안용복은 이전부터 대마도 일본인들과 통교가 있던 인물이고 일본어도 능숙했으므로,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결정을 미리 알고 출발했을 가능성도 높다.

    안용복은 1696년(숙종 22년) 봄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중 뇌헌(雷憲), 글을 잘하는 이인성(李仁成), 사공 유일부(劉日夫), 유봉석(劉奉石), 김길성(金吉成), 김순립(金順立)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에 들어갔다. 과연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해 있으므로, 앞서 쓴 바와 같이 안용복은 “울릉도는 본래 우리 영토인데 어찌 감히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가. 너희를 모두 묶어 마땅하다”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松島(송도: 우산도, 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거짓말로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자 안용복은 앞서 쓴 바와 같이 다시 “송도(松島)는 곧 우산도(于山島)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고 하느냐(松島卽子(于)山島 此亦我國也 汝敢往此島)”고 꾸짖고 이들을 쫓아냈다. 안용복 등이 이튿날 새벽 배를 타고 우산도(于山島: 독도)에 들어가 보았더니 일본 어부들이 솥을 걸어 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안용복 등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면서 큰 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 모두 배를 타고 돌아갔다고, ‘숙종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 등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隱岐島: 玉岐島)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는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큰 소리로,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 울릉도·우산도(독도) 등의 섬을 조선 땅으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가기에 이르렀는데, 일본은 정해진 격식이 없이 또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은기도 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伯耆州)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에 안용복 등은 분격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지금의 시네마 현)로 향하였다. 안용복 등은 스스로 ‘울릉·우산 양도 감세장(鬱陵·于山兩島監稅將)’이라고 칭하고 백기주 태수에게 사람을 보내 통고하니, 백기주 태수가 인마를 보내 맞이하였다. 안용복은 위의(威儀)를 갖추어 백기주 태수와 마루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중간 계단에 앉았다. 백기주 태수가 일본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니,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인용자)의 일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 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횡침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 도주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백기주 태수가 이를 허락하으므로 안용복은 이인성에게 상소문을 지어 관백에게 정납케 하였다.

    당시 대마도 신·구 도주는 안용복의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죄를 감추고 있었다. 그 하나는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백기주 태수에게 명령하여 써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조선땅이라는 문서를 빼앗아 없애고 도리어 일본 땅 죽도(울릉도)에 조선 어부들의 침범을 엄금해 달라고 문서를 위조한 죄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역상 조선측이 막부에 보낸 물품의 도량형을 속인 것이다. 조선은 쌀 15두(斗: 말)를 1섬으로 한 것을 대마도 도주는 7두를 1섬으로 했고, 조선은 베(布) 30자(尺)를 1필로 보냈는데 대마도 도주는 20자를 1필로 했으며, 조선이 보낸 종이 1묶음(束)을 대마도 도주는 3묶음으로 나눠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이때 마침 대마도 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머물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므로 이 상소를 올리지 말아달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울릉도·독도를 침범했다가 안용복에게 쫓겨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울릉도와 우산도…인용자)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대마도 도주…인용자)가 혹시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국서를 작성하여 역관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兩島旣屬爾國之後 或有更爲犯越者 島主如或橫侵 竝作國書 定譯官入送 則當爲重處)”는 약속을 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등에게 식량을 공급해주고, 파견수행원을 정하여 호송해 주었으며, 화폐도 가지고 가라고 주었으나 안용복·뇌헌 등은 완강히 사양하고 귀국하였다.

    Q 34 안용복이 제2차로 일본을 다녀온 후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정식 외교 교섭과 논쟁 종결의 문서 교환이 있었는가?

    A있었다. 도쿠가와 막부 관백(장군)이 1696년 1월28일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 어부들 울릉도·독도에 고기잡이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이 재확인 결정을 대마도 도주가 대마도 형부대보(刑部大輔)를 조선에 보내 조선정부에 알리고 외교 교섭을 마친 후 그 결과를 막부 장군에게 보고하도록 명령하자, 대마도 도주는 돌아와 이 외교절차를 천천히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대마도 도주는 대마도에 돌아오자 곧바로 공식 외교사절을 파견하지 않고 대마도에 들어와 있는 동래부 조선역관에게 1696년 말에야 이 외교문서를 필사해 가도록 하면서, 먼저 막부 장군에게 조선정부가 보내는 감사의 서한을 대마도 도주를 경유하여 보내도록 권고하였다.

    조선 중앙정부가 울릉도·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고 일본인이 국경을 넘어 이 섬으로 고기잡이 가는 것을 엄금하겠다는 일본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외교문서(대마도 도주가 대리 작성)를 접수하여 읽은 것은 1년 후인 1697년 2월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측에 회답문서를 보낼 것인가 접수만 할 것인가를 논의하다가 감사 서한은 보내지 않고 일본의 결정은 알았으니 우의를 돈독히 하자는 일반 외교서한만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예조참의 이선부(李善溥)와 일본 대마주 형부대보(刑部大輔) 평의진(平義眞) 사이에 두 차례 외교서한이 오고간 후에, 1699년 1월 일본측으로부터 조선측에 조선의 답서를 에도의 막부 장군에게 잘 전달했다는 최후의 확인 공한이 도착하여 외교 절차가 모두 종결되었다. 이로써 일본 대마도 도주가 장기주 태수와 결탁하여 조선의 울릉도·우산도를 탈취하려고 시작한 울릉도·독도 영유권 논쟁은 1696년(숙종 22년) 1월 도쿠가와 막부 장군이 울릉도·독도가 조선 영토이며 일본 어부들의 월경 고기잡이를 금지한다는 재확인 결정에 따라 논쟁을 완전히 종결하였고, 이에 관한 외교문서의 교환도 1699년 1월 최종적으로 모두 끝냈던 것이다.

    Q 35 1696년 1월의 도쿠가와 막부 장군의 결정이 혹시 울릉도만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인가, 아니면 독도를 포함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인가?

    A물론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조선 영토로 재확인한 것이다. 당시에는 조선측과 일본측 모두 울릉도와 독도의 가치를 오늘날보다 낮게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측도 울릉도 주민이 몇 번 왜구에게 노략질을 당하자 섬을 비워 사람들이 살지 않도록 하는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했다. 일본측도 울릉도를 비옥하지 않은 작은 섬 정도로 저평가했다. 이러한 형편이므로 울릉도의 부속도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