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첫해인 1962년 첫 해외시찰을 떠났다. 당시 ‘후진국 경제개발계획의 모델’이었던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대만, 일본 등 5개국과 선진국 미국, 국제경제기구인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GATT(관세무역일반협정)를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나는 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그 나라 역사책을 읽었다. 동아프리카, 서아프리카 제국을 방문할 때는 서울에서 이들 나라의 역사책을 구할 수 없어 한 권으로 된 아프리카 역사책을 읽는 것으로 대신한 적도 있다.
한국이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세계최강 4개국과 경쟁하고 때로는 협상하며 더불어 살아야 하는 지정학적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 한국의 지식인과 정책결정자들은 자기의 전공이 무엇이든 이 네 나라의 역사책 한 권 정도는 읽어야 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한 해에도 수십만명이 이들 나라를 찾는 지금, 과연 역사책 한 권 제대로 읽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미국의 역사가 짧다고 해서 아예 무시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미국의 산업과 정치를 이해하려면 역사책을 읽어야 한다. 물론 이에 앞서 한국역사를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연찬(硏鑽)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세계역사에서도 대제국을 이룩한 나라들뿐 아니라 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민족과 문화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스위스, 폴란드, 핀란드, 아일랜드, 베트남, 이스라엘 등의 역사 읽기도 권장한다.
내가 이렇게 각국의 역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한국경제학자들, 특히 한국의 책임 있는 이코노미스트들에게 한국경제의 위치 진단과 비전 설정에 있어 내생적, 외생적, 실체적 진실에 좀더 충실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경제 성장의 실체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국내 시장도입·구축과정, 가격 현실화 과정에 대해 간과하거나 생략하고 있다. 모두가 1962년 제1차 5개년계획으로부터 한국의 근대경제성장이 시작됐다고 합창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1942년 11월 당시 ‘우파(右派)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독립된 대한민국의 토지는 물론 무역, 육·수상 운송, 영화, 출판까지 소기업을 제외한 모든 기업을 국유화하도록 규정했다. 이것이 1940∼50년대 한국의 ‘상식’이었다.
그러다 60억달러의 미국원조(1인당 수수액으로는 이스라엘 다음인 세계 2위였다)와 이를 조건으로 한 15년에 걸친 가격현실화(외환율, 비료, 교통, 통신, 에너지 가격) 그리고 민영화가 추진되면서 비로소 시장경제 기반이 서서히 구축됐던 것이다. 그러니 한국의 시장 인프라가 1962년부터 자생적으로 구축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 시장의 효율성에 대한 지식부터 시장 메커니즘 구축에 이르기까지 자생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 한국경제의 경쟁력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제철과 조선, 자동차산업 정도다. 하지만 이들 사업분야에는 선진국과 국제기구의 돈이 지원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시장기능을 강조하는 IMF(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IFC(국제금융공사) 그리고 미국 정부가 처음부터 반대한 사업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반도체기술의 ‘대부’격인 나시자와(西澤潤一) 전 도후쿠대학 총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에서는 나를 포함해 관민(官民) 모두가 삼성의 반도체 진출을 극력 반대했었다. 1980년대 중반 이병철 회장이 ‘중요한 미래사업이라면 나라를 위해 삼성은 망해도 좋다(事業報國)’고 말하며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반도체 진출을 결심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산업의 총체적 경쟁력은 단순히 단기자본 시장의 기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나라의 경제정책과 발전전략은 그 나라의 총체적 필요, 사회적 필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우리의 양심과 도덕성에 충실할 때
1997년 외환·금융위기를 통해 우리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 즉 자기는 자기 스스로가 가장 잘 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에도 ‘예측기술’에 능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보편적 경제원리에 충실한 이들은 환율, 단기외채비율, 국제거래를 제대로 할 수 없는 한국금융의 능력과 글로벌 스탠더드와 동떨어진 기업 거버넌스(관리), 경제기반의 비효율과 부패를 감당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실상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펀더멘털(기초경제지표)이라는 숫자에 마취된 경제 기술자들과 OECD 가입, 1인당 소득 1만달러에 미친 정책결정자들의 여론몰이와 사실은폐 그리고 무디스와 S&P 같은 한국의 역사와 경제사, 심리는 모른 채 단기 자본거래 이익에 충실한 ‘권위’ 있는 신용평가기관들의 ‘한계’가 위기를 재촉했다.
양심과 도덕성에 충실하면 자기는 자신이 가장 잘 알게 돼있다. 자기의 무지와 한계는 뒤로한 채 무디스나 S&P가 위기 이후에 자행한 신용등급 떨어뜨리기나 IMF와 세계은행이 2000원대의 환율과 30%의 금리를 만든 원죄에 대해서만 그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먼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실체를 충실히 알고 생존전략을 추진해야 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한 더 큰 원죄를 따져야 할 것이다.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자문 및 회계그룹 앤더슨의 회계부정과 단기돈벌이에 천착해온 최고경영진의 편법경영행태, 엔론, 시티그룹, 월드 콤타이코, 프랑스의 비방디, 독일의 홀스만, 일본의 유키진(雪印)과 도쿄전력의 부정과 은폐, 세계기업경영의 황제로 추앙받던 잭 웰치의 염치없는 탐욕 등을 보면서 우리는 가장 올바르고 궁극적인 벤치마킹은 자기 양심, 자기 정직, 자기 성실, 자기 절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벤치마킹이 아니라 벤치메이킹이 더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기술의 효율보다 정직의 효율이 더 높고, 보편적 도덕과 인륜에 충실하는 것이 무기나 완력보다 사회통합과 안보에 더욱 효과적인 것이다.
외국경제기술자들은 한결같이 한국경제를 낙관한다. 당연하다. 일본의 장기침체와 비교해볼 때 1997∼98년 위기 이후 1999년부터 우리나라의 성장실적은 단연 돋보인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경제위기에 처했던 인도네시아, 타일랜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터키 등과 비교하면 격이 다를 만큼 성숙해 있다. 또 R&D나 IT에 대한 투자비율이 현저히 높고 중국이라는 장기성장 시장이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문명충돌에서는 비켜나 있다.
이들 눈에는 한국의 부패나 정치혼란, 사회해체 현상조차도 다른 문제국들에 비교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지난 10월 뉴욕에서 만난 월 스트리트의 한 금융인은 “한국에는 집중적으로 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성향이 있기에 낙관한다”고 했다. 우리가 단점으로 여기는 ‘쏠림현상’ ‘들쥐현상’ 조차도 이들에게는 장점으로 보이는 것이다.
당분간 세계의 자본은 중국과 한국으로 유입될 것이 분명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외환위기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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