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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슬 머금은 배추 밤하늘 별빛에 물들다

강원 평창·강릉 고랭지 배추 수확 현장

새벽이슬 머금은 배추 밤하늘 별빛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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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조합장은 “배추는 기상 여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 작물이다. 특히 7, 8월 평균기온이 20도 이하의 선선한 날씨에다 밤낮 기온 차가 커야 잘 자라고 수분 증발량도 적어 맛이 있다”며 “고랭지는 그런 기후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라 배추 재배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고랭지 배추 작황은 국민 가계와 직결된다. 그래서 배추밭엔 농업 관계자들의 방문이 잦다. 이상욱 농협중앙회 농업경제 대표이사가 7월 3일 평창의 고랭지 배추 포전을 방문한 데 이어, 8월 16일엔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평창의 배추 출하 현장을 방문했다.

‘꿀통 배추’ 없이 작황 좋아

1시간 후 추 차관 일행이 가고 나서 기자는 배추 출하 작업에 뛰어들었다. 시퍼런 배추가 빼곡히 들어찬 밭이 마치 꽃밭 같다. 겉잎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한 포기씩 다듬은 뒤 한 상자에 6포기씩 채워 넣는다. 배추를 가지런히 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선지 상자 밖으로 잎사귀가 삐져나오기 일쑤다. 겉은 괜찮아 보여도 속은 짓무른 이른바 ‘꿀통 배추’는 찾아보기 힘들다. 배추가 무름병에 걸리면, 군데군데가 하얗게 물러져 땅바닥에 쓰러지거나 뿌리 부분이 누렇게 된다.

한 줄 한 줄, 밭이랑마다 차례로 거둬들이니 힘이 꽤 든다. 사실 배추 밑동 절단 작업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이건 해가 뜨기 전에 해야 한다. 밑동이 잘린 배추가 강한 햇볕에 노출되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잎사귀가 퍼지고 생기를 잃어 신선도와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



수확에 이어지는 상차(上車) 작업. 고랭지 배추는 2~3kg인 김장용 배추보다 크기가 좀 작다. 그래도 대략 한 포기에 1.5kg쯤 되니 6포기들이 상자 무게만 10kg이 넘는다. 어랏차차!

한데, 아무리 용을 쓰며 열심히 상차 작업을 해봐도 뭔가 미진하다. 한 번 더 와서 수확 및 출하의 전 과정을 겪어봐야 마음의 허기가 가실 듯하다. 결국 다음 날 새벽을 기약한다. I´ll be back!

배추밭 주인은 염동근(51) 씨. 염 씨는 이날 자신의 배추밭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출하 작업을 농협이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염 씨는 고향 유천리에서 25년째 3만3000여㎡(1만 평) 규모의 고랭지 배추밭을 가꾸고 있다. 모두 농협과 계약재배하는 물량이다. 전량 계약재배를 시작한 건 6~7년 전. 그는 “3.3㎡(1평)당 8700원에 농협과 계약했는데, 산지 수집상에 팔 때보단 조금 낮은 단가지만 정식 후 30일이 지나면 농협이 직접 포전을 인수해 방제(防除), 시비(施肥), 양수, 제초 등 배추 생육 작업 전체를 맡아주므로 안심이 된다”며 “매년 작황과 관계없이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되니 배춧값의 극심한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데다, 판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농민 처지에선 속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또 “이론상으론 3.3㎡당 평균 12~13포기가 생산돼야 하지만, 잘해야 보통 7~8포기 나온다. 게다가 배추는 날씨에 민감해 수확 시기도 잘 조절해야 한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언론이 고랭지 배추 작황이 안 좋네, 가격이 비싸네 하고 보도할 때면 많이 서운하다”며 “한여름 장마와 폭염을 이겨내며 길러낸 고랭지 배추가 그만한 값어치를 한다는 것을 꼭 좀 알려달라”고 덧붙였다.

올해 고랭지 배추의 포전 거래 가격은 7월 출하분이 3.3㎡당 7500~8500원, 8월 출하분이 1만~1만2000원이다. 지난해보다 10% 정도 올랐다.

‘배추고도(高道)’ 안반데기

오후 2시. 이왕 내디딘 걸음, 단순한 포전보단 파노라마로 펼쳐진 광활한 배추밭을 굽어보고 싶다. 내친김에 ‘구름 위의 땅’으로 통하는 속칭 안반데기 마을로 향한다. 유천리에서 차로 40여 분 달려 다다른 곳. 평창군과 강릉시 경계에 위치한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다. 해발 1100m 백두대간 고원지대에 자리한 산비탈 오지. ‘배추고도(高道)’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국내 최대 고랭지 채소재배단지다. 세칭, 하늘 아래 첫 동네. 굽이굽이 골을 이룬 배추밭 물결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빙빙 돌아가는 하얀 풍력발전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너른 구릉은 온통 푸른 하늘과 맞닿은 초록 배추밭. 남도나 제주도의 아기자기한 녹차밭과는 또 다른 푸릇함이다. 모진 여름을 버텨낸 배추들이 나날이 몸집을 불리며 부드럽고도 촘촘하게 등고선을 그린다. 수확을 기다리는 것이다. 잎을 살짝 만져보니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었다. 보들보들, 좋은 감촉이다.

멀리 운무(雲霧)에 감싸인 산들 위로 두둥실 구름이 떠간다. 가히 장관! 전국 어디에서나 산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산 속 배추밭은 그렇지 않다. 강릉 사투리로 수도권에서 ‘가차운’ 곳이 아닌데도 왜 사진작가들이 계절을 불문하고 출사지로 이곳을 즐겨 찾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안반’은 떡메를 내리칠 때 밑에 받치는 오목하고 평평한 통나무 판을, ‘데기’는 둔덕을 뜻하는 ‘덕’의 강릉 사투리다. 조합하면 지형이 ‘안반처럼 평평한 둔덕’이라는 의미다. 요즘은 ‘안반덕’으로 불린다.

피득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옥녀봉(1146m)과 북쪽의 고루포기산(1238m)사이에 198만4000㎡(약 60만 평)의 고랭지 배추밭이 독수리 날개처럼 펼쳐진 안반데기는 평창의 육백마지기, 태백의 귀네미마을 및 매봉산고랭지채소단지와 함께 강원도를 대표하는 4대 고랭지 배추밭 중 하나다.

안반데기는 우리나라에서 주민이 거주하는 가장 높은 마을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20여 농가가 감자와 배추를 재배한다. 감자도 배추도 사라져 안반데기가 헐벗은 살갗을 드러내는 겨울이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맹추위와 폭설 때문에 주민들은 아랫마을로 내려간다. 봄이면 다시 올라와 감자와 배추를 심고 살아간다. 삶이란 그렇게 질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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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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