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정보 혁명의 그늘 흔들리는 영업·판매직

  • 이나리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1-03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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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을 통한 전자상거래가 기존 유통조직을 뿌리째 흔들며 영업·판매직 종사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 인터넷 차 판매 저지를 선언하고 나선 자동차 3사 판매 노조원들. 무엇이 이들을 불안케 하고 있는가.》
    3월6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의 한 벤처기업 사무실. 20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 굳은 표정의 장정 스물 세 명이 들이닥쳤다. 엉거주춤 일어서는 직원들 앞에서 사내들은 구호를 외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능숙하고 절도 있는 팔놀림이 이들의 이력을 웅변해 주었다. 현대자동차 판매본부 노조 간부진. 이름에 걸맞게 당당한 모습들이었다.

    그에 비해 이들의 방문을 받은 인터넷 벤처 ‘네오플란’의 면모는 언뜻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책상 몇 개에 PC 몇 대, 30대 사장과 더 젊은 얼굴의 열 명 남짓한 직원들. 물색 모르는 사람이라면, 굵직한 투쟁 경력으로 이름 높은 현대 노조원들이 왜 이렇듯 작고 보잘것없는(?) 벤처기업을 찾아 고성 오가는 난상토론을 벌이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을 노릇이었다.

    사건의 원인은 네오플란의 존재 그 자체였다. 네오플란은 자동차 판매 사이트 ‘리베로(www.libero.co.kr)’를 운영하는 전자상거래 전문업체. 사이트를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새 차 및 중고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거래도 중개한다. 그런데 이런 네오플란의 영업 형태에 대해 영업사원들이 ‘새 차 판매는 안 된다’며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현대·기아·대우 등 자동차 3사 판매 노조원들은 ‘인터넷 판매 공동대책위원회’까지 결성했다. 네오플란 뿐 아니라 로고스사이버텍, 코리아카, 제스퍼오토 등 대다수 인터넷 차 판매업체들이 영업 제지 대상으로 떠올랐다.

    6일 이루어진 현대 노조원들의 네오플란 방문은 공대위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인터넷 차 판매의 ‘부당성’을 설득하기 위한 자리였다.



    공대위 이효선 위원장은 “차 값 20만~30만원을 할인해 준다 해서 유통 혁명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판매 업체는 고객과 대리점 사이를 연결하는 일만 할 뿐, 업무 부담은 결국 대리점 영업사원들에게 돌아간다”고 주장한다. 고객들이 할인 받은 비용은 실상 영업사원들의 수당에 보태져야 할 몫이라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말해 인터넷 판매는 “유통 질서를 어지럽히고 영업 사원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비정상적일 뿐 아니라 비도덕적인 거래 행위”라고 못박는다.

    대리점이냐 인터넷이냐

    이에 대한 인터넷 자동차 판매업체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인터넷 차 판매에는 대면(對面) 영업이 없다. 고객을 찾아 이리저리 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영업비용이 절감되는 만큼 차 값을 할인해 주는 것뿐이며, 이와 맞물려 역할이 축소된 대리점(영업사원)의 이윤 또한 감소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어떤 이론보다 인터넷 판매 업체들에 힘을 실어 주는 건 ‘전자상거래는 대세이며 디지털 경제의 핵’이라는 저간의 인식이다. 어느새 정보화, 디지털화는 국가 경제 성장의 유일한 돌파구이자 부 획득의 지름길로 사회적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벤처 창업 열기와 코스닥 활황, 인터넷 산업을 중심으로 숨가쁘게 재편되고 있는 세계 경제 동향은 디지털 국부론이 결코 정부나 언론의 부추김에 의해서 생성된 거품만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대리점 유통이 아날로그라면 인터넷 판매 사이트는 분명 디지털이다. 어느 쪽의 부가가치가 더 클까. 해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높은 인지도 탓에 판매 노조의 집중 공략 대상이 됐던 네오플란. 시내 자동차 대리점 한 곳보다 더 규모가 작은 이 회사는 실상, 사이트 개설 두 달만에 53억 원의 투자자금을 유치한 전도 유망한 벤처기업이다. 내년 4월 예정대로 코스닥시장 등록이 성사된다면, 네오플란은 수천 명의 영업사원을 거느린 그 어떤 오프 라인 판매 조직보다 더 높은 시장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자동차 3사, 4만여 영업 관련 종사자들이 아직 시장 점유율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인터넷 판매 업체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선언하고 나선 이면에는 이렇듯 무너져 가는 대리점 중심, 중개인 중심 유통 체계에 대한 불안감과 위기의식이 내재해 있다. 인터넷을 매개한 1 대 1 마케팅 시대에 매스 마케팅의 유산인 지역별·영역별 유통 시스템은 그 입지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들에게 인터넷 혁명은 장밋빛 희망이 아니라 경제적 추락을 예고하는 절망의 서곡일지도 모른다.

    객장 잠식한 사이버 증권 거래

    전자상거래 확산으로 인한 타격이 가장 클 것으로 보이는 직종은 영업·구매·판매직이다. 특히 거래할 ‘실물’이 없거나(은행·증권·보험·각종 예약 업무), 구색을 다 갖춰 놓은 물리적 점포를 만나기 힘들고(서적·CD·농수산물 유통), 표준화·규격화돼 있으며 대리점망을 통한 애프터서비스 인프라가 탄탄한 분야(가전·자동차)일수록 빠른 변화가 예상된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이경전 교수는 “디지털 경제의 확산은 노동 시장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단순히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는 식이 아닌, 경제 네트워크 자체의 변혁이 가져오는 대대적인 구조 조정이다. 특히 산업 간, 기업 대 소비자 간 중개 역할을 해왔던 직종들이 구체적인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에 따른 온라인 - 오프라인 유통망간의 갈등과 반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세계에서 전자상거래가 가장 발달해 있다는 미국도 전체 거래 중 인터넷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한 비율은 겨우 6%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94%는 기존 오프라인 유통망을 대체한 것이다.

    드림커뮤니케이션즈 이지선 사장은 “온·오프라인간 승부는 예상보다 빨리 날 것”이라고 전망한다. 온라인 유통망의 가격경쟁력이 월등히 높기 때문이다. 기업들 눈에 이러한 추세가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자동차건 화장품이건 가전제품이건, 기업마다 업종에 관계없이 전용 쇼핑몰을 만들고 유명 전자상거래 업체와 제휴하며 대리점의 물류센터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실제 ‘시장’에선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먼저 증권 분야부터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사이버 증권 거래는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힘들만큼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미국 언론이 “뉴욕 증권가 중개인들이 한국의 사이버 증시 활황에 곤혹스런 눈길을 보내고 있다”는 보도를 할 정도다. 사이버 증권 거래란 말 그대로 유가증권의 발행 및 유통에 관련된 일련의 과정 중 일부 또는 전부를 사람의 접촉을 배제한 채 인터넷상에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사이버 거래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주식 중개인과 애널리스트들의 입지를 약화시킨다. 뉴욕 브로커들이 걱정하는 것도 한국의 사이버 증시 열풍이 미국에까지 번져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국내 5대 증권사의 총 거래대금 중 사이버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60%를 넘어섰다. 거래 순위 3위를 달리는 삼성증권의 경우, 98년 말 7.1%였던 사이버 거래 비중이 올 2월 말 71%까지 상승했다. 증권사 고객 10명 중 6~7명이 인터넷 상에서 주식을 사고 판다는 뜻이다.

    사이버 거래의 확산은 증권사 직원들의 수익과 근무 환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각 지점에 나가 있는 영업사원들은 매달 월급 외에 적게는 100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 정도의 성과급을 챙겨 갔다. 거래가 활발했던만큼 엄청난 수수료 수입이 발생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성과급을 전혀 받지 못하는 직원도 생겨나고 있다. 한화증권처럼 사이버 거래 고객에 대해서도 영업사원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회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명확한 선을 긋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변하자 지점행을 원하던 직원들도 다시 본사 근무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대신증권 강남지점의 한 영업사원은 “일 줄어들고 월급 봉투 얇아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마음 편할 리 있겠느냐”고 하소연한다.

    애널리스트들의 입지도 많이 축소됐다. 사이버 거래의 특징은 빠르고 간편하다는 것. 컴퓨터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거래가 가능하다. 덕분에 그 날 사서 그 날 파는 데이트레이딩이 급증하고 있다. 이런 거래에는 특별한 ‘시장 분석’이 거의 필요치 않다. 자연히 장기적 기업분석자료를 생산해내는 애널리스트들의 영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3월14일부터 주식매매 업무를 시작한 E*미래에셋증권의 수수료 0.029% 책정은 또 다른 충격이다. 타 증권사의 사이버 거래 수수료가 0.1~0.15%, 창구 위탁 수수료가 0.4~0.5%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공짜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는 사이버 거래의 확산에 힘입어 국내 증권사에도 본격적인 구조조정 및 체질 개선 작업이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수수료 인하를 따라가지 못하는 증권사는 대대적인 인력 감축을 단행하거나 인수·합병을 통해 새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울러 증권사의 수익 모델 자체도 브로커 중심의 단순 중개업에서 파이낸셜 플래너를 중심으로 한 자산 운용 컨설팅 쪽으로 옮겨갈 것으로 예상된다. 창구 업무나 영업 지원 업무에 종사해왔던 직원들로서는 전문직의 범주에서 떨려나와 단순 서비스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심할 경우 실업의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음을 예견케 하는 변화다.

    “불안 못 느낀다면 청맹과니”

    은행권에서도 인터넷 뱅킹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지난해 7월 국민은행이 첫 물꼬를 튼 이후 현재 국내 사이버 뱅킹 인구는 70여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신한은행의 경우 인터넷 대출 신청이 전체 대출 신청의 70%에 육박하고 있으며 사이버 대출 승인율도 60%를 넘어섰다.

    사람들이 인터넷 뱅킹에 몰리는 이유는 편리할 뿐 아니라 창구거래나 자동입출금기 이용에 비해 수수료가 싸기 때문이다. 은행들이 인터넷 뱅킹 고객 확보를 위해 대출 금리 인하, 예금 이자 인상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도 한 원인이다.

    최근 매경인터넷리서치가 30대 이상 네티즌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중 40%가 이미 인터넷 또는 PC통신을 통해 은행 거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네티즌을 대상으로 한 조사인만큼 이 수치를 은행 고객 전체로 확대해 해석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사용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앞으로 5년 안에 은행 대리점의 70%가 사라지고, 직원의 50%가 필요 없어지게 될 것’이라는 모 은행 인터넷 뱅킹팀의 내부 보고서는 과장이 아닌 듯하다.

    조만간 영국의 에크뱅크, 미국의 텔레뱅크나 윙스팬뱅크처럼 ‘무점포 순수 인터넷 은행’도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 비즈니스 위크지의 지적처럼 “새로운 기술이 현재의 금융업을 완전히 변혁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법률과 상징적 장애물들 때문이다. 당신이 금융업에 종사하면서 생존에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며, 현재의 금융기관들도 겉으론 고객 지향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오로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전문가 피터 드러커 역시 “뱅킹은 존재하겠지만 뱅크는 사라질 것”이라 예견했다.

    그 동안 보험업계는 증권이나 은행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이버 태풍’의 영향권에서 한 발 비켜 서 있었다. 지금까지는 인터넷을 통해 보험계약을 신청하더라도 꼭 자필 서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우편으로 계약서를 주고받는 등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월 중 전자서명만으로 사이버 거래를 할 수 있는 전자서명인증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각사간 사이버마케팅 전쟁에도 불이 붙을 듯 하다.

    이미 삼성생명은 사이버몰 형태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 6가지 상품을 판매하고 있고 교보생명도 교통안전보험 등 2종류의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삼성생명 e-비즈팀 강인원 차장은 “일단은 인터넷에서 가입 절차까지를 다 끝마치기보다는 웹 상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생활설계사와 접촉해 최종 결정을 내리는 고객들이 많아질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다 해도 보험 영업에서 생활설계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24만 명에 달하는 생활설계사 중 ‘사이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절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보험중개업체 스피드원의 나한택 사장은 “요즘 보험중개사 시험에 도전하는 설계사들이 부쩍 늘었다. 전문성을 갖추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회사 차원에서도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강화함과 아울러, 대면(對面) 상담이 꼭 필요한 법인 고객 유치 쪽으로 회사의 역량을 모아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대해상화재보험 경인대리점 김기섭 점장도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내 보험업계의 여건상 사이버 거래가 단시일 내에 기존 유통 체계를 잠식해 들어가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렇더라도 시대 조류에 역행할 수는 없다. 대리점 차원의 홈페이지 구축이나 소속 생활설계사들에 대한 인터넷 교육 강화 등 다양한 대응책을 구상중이다.”

    가전 대리점 “공멸 위기감”

    가전업계 대리점들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대리점주나 영업사원들 사이에는 “전국 2500여 가전 대리점이 공멸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마저 팽배해 있다. 할인점과 대형 양판점에 밀리는가 싶더니 이젠 인터넷 판매까지 가세해 시시각각 목을 조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LG전자의 경우 IMF 구제금융 체제 전 1600여 개에 달하던 대리점 수는 98년 1300개, 99년 1200개로 줄었고 올해는 1000개 내외까지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지난해 개설한 LG전자 직영 사이버 쇼핑몰 ‘LG나라(www.lgnara.co.kr)’의 매출액은 99년 10억 원에서 올해 최소 100억 원으로 10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서울 가양동에서 삼성전자 대리점을 운영 중인 한 업주는 “매출액 자체도 떨어지고 있지만, 양판점이나 사이버 쇼핑몰과 경쟁하느라 가격을 너무 낮춘 탓에 마진율이 10%도 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순익이 매출액의 1.5%밖에 되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 계속 장사를 해 나갈 수 있겠는가. 요즘은 잠도 안 오고 밥맛도 없다”며 불편한 심경을 토로했다.

    LG전자 쇼핑몰 관계자는 “가전제품의 온라인 판매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대리점들도 자체 인터넷 판매망을 구축하는 등 전자상거래 체제에 적응할 수 있는 자구책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한다. 삼성전자는 아예 기존 대리점을 사이버 대리점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지난해 이미 50개 대리점이 물류 기지로 전환했고 올해도 150개 정도의 점포가 가세할 예정이다.

    취재 중 만난 한 대리점 사장은 “나를 포함해 점주들 대다수가 10년, 20년 씩 이 일만 해온 사람들”이라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나이는 많고, 달리 할 줄 아는 일은 없고…. 그래도 지금까진 어디 가든 사장님 소리 들으며 비교적 안정되게 살아왔는데, 이 노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행업계나 서점 쪽은 이미 ‘사이버 시대’로 돌입한 지 오래다. 지난해 국내 여행 시장의 12%를 사이버 매매가 장악했으며 올해는 그 비율이 20%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교보문고, 종로서적, 영풍문고 등 대형 서점의 인터넷 쇼핑몰 뿐 아니라 삼성물산, 한솔CSN, 알라딘, 인터파크 등 전자상거래 전문 사이트들에서도 책은 가장 인기 있는 상품 중 하나다. 이로 인한 여행사 직원 수 감소, 중소규모 서점의 경영난 가중 또한 인터넷 혁명의 그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나만은, 내 직장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에 사로잡혀 사는 이가 적지 않다. 이른바 ‘신(新) 러다이트족(族)’이다.

    역사적으로 러다이트(Luddite) 운동은 1811~1917년 영국 직물공업지대에서 일어났던 기계파괴운동을 뜻한다. 산업혁명으로 공장에 기계가 널리 보급되자 실직 위협을 느낀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정부와 격한 대치 끝에 살해당하거나 반대로 살인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황한 정부가 지도부에 교수형과 국외 추방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린 후에야 운동은 잦아들었다.

    신 러다이트족이란 이에 비추어 디지털 혁명기의 진통을 대변하는 집단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신기술을 이해하거나 적응하려는 노력이 부족하고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 또는 인터넷이 현실 공동체나 기존 체제를 파괴하고 바람직한 가치관을 와해시킬 것이라 믿는 이상주의자들이다.

    이러한 성향은 특히 30대 후반 이후의 중간관리자층에서 많이 발견된다. 이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처럼 지연, 학연 등 ‘인맥’을 통한 영업 비중이 큰 나라에선 사이버 거래가 자리잡기 힘들 것 ▲전자상거래가 확대된다 해도 경제 사정이 호전된 만큼 실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 ▲적어도 내가 회사에 다니고 있는 동안은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지금도 바빠 죽겠는데 일거리가 없어 놀 날이 오겠느냐’는 반응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봤듯 디지털 혁명으로 인한 고용 구조의 변화는 이미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영업사원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동차 업체들은 이미 전용 쇼핑몰 운영 뿐 아니라, 전자상거래 전문 사이트와도 광범위한 제휴를 준비중이다.

    쌍용자동차는 한솔CSN과 사이버 차량 판매권 부여 및 차량 공급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기존 인터넷 판매 업체들이 자동차 제조업체와의 공식적인 권리 위임 계약 없이 사이트를 열어 갈등을 빚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솔 측은 쌍용자동차로부터 차 판매 전 과정을 총괄할 수 있는 전면적인 사이버 판매권을 위탁받았다.

    노조의 ‘단속’을 피해 인터넷 판매업체와 거래하고 있는 한 자동차 대리점 사장은 “솔직히 손해본 것은 없다. 오히려 (전자상거래를) 제대로만 운영하면 지금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영업이 가능하리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회사 쪽도 지금은 대리점이나 영업 사원들 눈치 보느라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조만간 인터넷으로 차를 사는 일이 당연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은행 및 증권사들도 사이버 거래 확대로 생겨날 잉여 영업사원들에 대하여 ▲재교육 실시 후 업무 변경 ▲고용 조건의 전환 ▲인원 감축 등 다양한 방안들을 놓고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증권연구원 노희진 박사는 “일거리가 줄어든 증권사 직원들은 회사가 실시하는 재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파이낸셜 플래너나 컨설턴트 같은 자산운용 전문가로 키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직원이 이 프로그램을 통과할 수는 없다. 미국의 경우 파이낸셜 컨설턴트가 되려면 2년 정도의 교육을 받은 후 일종의 자격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평균 합격률은 40%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은행 쪽도 마찬가지다. 이미 몇몇 시중은행에서는 대리점 축소와 정보화 진전으로 생겨난 잉여 인력들을 전문영업인이라는 이름으로 노트북 하나 들려 점포 밖으로 내보내고 있다. 가만히 앉아 고객을 기다리지만 말고 발로 뛰어 찾아내라는 주문이다. 이 역시 세일즈 감각이 뒤떨어지거나 내근 쪽이 더 적성에 맞는 이들에게는 ‘나가라’는 말과 다름이 없다.

    심화되는 소득 격차

    상황이 이런만큼 노동계 일각에서는 인터넷 혁명으로 인해 실업률이 증가하고 고용 불안이 가중되리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9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지금의 한국처럼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한 비즈니스 리엔지니어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산업 구조 변화는 정보통신 분야를 제외한 전 부문의 대량 해고로 이어졌다. 1991년 105만 명, 1992년 80만 명의 고용 감소가 일어났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의 진전으로 정보통신 관련 업종 및 서비스업에서 신규고용이 창출돼 92년 7.5%에 이르렀던 실업률은 99년 현재 4.2%까지 하락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보고서는 미국의 사례를 들어 “우리나라도 단기적으로는 실업률이 증가할 수 있겠으나 새 경제 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할 경우 장기적으론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 곧 해소될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경제 전문가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노동연구원 허재준 박사는 “미국 경제 호황의 이면에는, 정보통신 관련 전문지식인의 소득은 급팽창한 반면 그렇지 못한 근로자들의 실질 임금은 현상 유지에 급급한 구조적 문제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실업률은 떨어졌을지 모르나 대다수 국민의 삶의 질까지 향상된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도리어 상위 20%에 속하는 계층의 소득이 하위 20%보다 10배 이상 많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신(新) 빈부격차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통계청은 최근 ‘99년 4·4분기 도시근로자 가계수지 동향’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수치가 높을수록 소득불평등이 심함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3204에 달해, 통계청이 이 계수를 파악하기 시작한 79년이래 가장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지니계수가 0.4를 웃돌면 불균형의 정도가 매우 심한 것으로 판단한다.

    빈부격차 심화는 미국뿐 아니라 정보통신 중심 지식 산업이 득세하고 있는 선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갖춘 소수의 사람들, 이른바 e-엘리트층에 부가 집중되는 반면 대다수 근로자들에겐 최소한의 일자리와 임금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임금 격차 심화에 대해 실물 경제에 밝은 전문가들은 ‘경제 논리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당연한 현상’이라 말한다. “임금이란 노동의 대가다. 근로자가 회사에 기여한 만큼 받는다면 그것이 곧 정당한 액수다. 미국 애플 컴퓨터 CEO 스티브 잡스는 지난해 연봉 외에 약 2700억 원 상당의 주식과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20억 달러에 불과했던 회사의 시장가치를 160억 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린 공에 비하면 결코 많은 액수가 아니다.” 이화여대 경영학부 김성국 교수의 설명이다.

    다시 미국의 예로 돌아가, 1997년 정보기술 생산분야 종사자의 1인당 연간 평균 임금은 약 5만3000달러로 전체 평균 3만 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스톡옵션, 우리사주의 ‘신화’도 이들 소수의 ‘지식창조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5%가 95%를 먹여 살린다?”

    혹자는 이를 ‘5:95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상위 5%가 나머지 95%를 책임진다, 혹은 상위 5%에 95%의 부가 집중된다는 뜻이다. 미래학자 스탠 데이비스는 ‘80:20 이론’을 주창한 바 있다. 90년대 제조업의 총 매출이 전체 경제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0%였다면 2010년엔 50%로 줄어들고, 이익 창출 면에서는 50%가 20%로, 증권 시장에서의 시가 총액은 80%에서 20%로 각각 감소할 것이란 예측이다. 반면 정보통신 관련 산업의 경우 매출 비중은 20%에서 50%로, 이익 비중은 50%에서 80%, 시장가치는 20%에서 80%로 증가할 것이다. 요컨대 디지털 경제에 적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 정보통신 관련 업종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약간의 조정기를 거쳐 신빈곤계층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강수돌 교수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소득 불균형만큼 심각한 것이 고용 불안정”이라는 지적이다. “정보통신 관련 인력은 심각한 부족 현상을 빚고 있는 반면, 영업직을 비롯한 대다수의 직종에선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일자리는 적고 사람은 많으니 회사는 자꾸 더 낮은 임금, 회사 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고용 계약을 요구한다. 비정규직 확산, 노조의 단체협상 기능 약화, 단순하고 기계적인 업무의 반복은 근로자의 삶의 질을 한 단계 아래로 끌어내릴 것이다.”

    정보 혁명은 약인가 독인가

    우리나라의 고용 구조가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각종 통계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노동부 중앙고용정보관리소에 따르면 지난 한해 정규직 상용근로자는 613만8000명으로 그 전해(620만 7000명)보다 약간 감소한 반면, 임시·일용직 근로자는 596만 6000명에서 689만 3000명으로 크게 늘었다. 이중 상당수는 각종 매장, 대리점 등지에서 근무하는 판매·영업직 사원들이다.

    그러나 고려대 이경전 교수는 “아직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경제체제가 직업 소멸을 불러와 실업자를 양산할지, 아니면 정반대의 성과를 거두게 될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점”이라고 말한다. 다만 각종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듯 빈부간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만큼 그에 대한 정부, 기업, 개인 차원의 다양한 대응책이 요망된다.

    그중 대리점·영업직 붕괴 현상과 관련해서는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략이 과도기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이브리드 전략은 말 그대로 온라인 유통과 오프라인 유통을 병행하는 것을 뜻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포츠화 메이커인 나이키사. 온라인으로는 고가 제품을 판매하고 오프라인에서는 중저가의 대중적 제품을 판매하는 전략으로 매출 증대에 성공했다.

    “하이브리드는 특히 미국에서 각광받고 있는 방식이다. 지난해 상반기, 온라인 판매를 병행한 업체의 매출 신장률이 오프라인에만 매달린 업체의 두 배에 달했다는 통계도 나와 있다. 소비자는 온라인 사업자에 대해 아직도 일말의 불안감을 갖고 있다. 자체 점포를 갖고 있는 업체라면 고객들의 불신을 효과적으로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파이언소프트 이상성 사장의 설명이다.

    따라서 현재 대리점을 운영하고 있거나 또는 영업사원으로 근무 중인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쌓아온 유통 관련 노하우를 전자상거래와 효과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와우북’은 국내 최대의 온라인 컴퓨터서적 전문 판매점 사이트다. 이 회사의 황인석 사장은 17년간 컴퓨터 서적 유통에만 종사해 온 출판 영업맨 출신이다. 83년부터 7년 동안 종로서적 컴퓨터 매장에서 일했고, 1990년부터는 강남에서 컴퓨터 전문 서점을 운영했다. 몇 년 전 우연히 미국의 서적 전문 전자상거래 사이트 아마존에 들어가 본 후 줄곧 인터넷 상에 컴퓨터 서적 전문판매 사이트를 개설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와우북이다.

    황 사장은 “네티즌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구매 심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 유통 전문가라면 인터넷 상에서도 얼마든지 성공 신화를 일굴 수 있다”고 자신한다. 국내 최대 인터넷 경매 사이트 ‘옥션’의 이금룡 사장도 삼성물산에서 잔뼈가 굵은 유통 전문가다. 역경매 사이트 ‘예쓰월드’의 김동필 사장 또한 삼성전자 마케팅 담당 이사 출신. 전자상거래에는 어중간한 정보통신 전문가보다 디지털 마인드를 갖춘 유통 전문가가 훨씬 유리하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경제적 패자 될 정보빈곤층

    그러나 ‘오직 인터넷만이 살 길’이라며 무작정 새 사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다. 벤처는 말 그대로 모험(venture), 정글의 법칙이 난무하는 시장 안착률 6%의 배타적이고 협소한 경쟁자유지역이다. 대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있을만큼의 실력을 쌓거나, 택배업 등 전자상거래 확산의 여파로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려볼 수도 있다. ‘규모의 경제’에 부응하기 위해 대리점 간 합병을 시도하는 것도 생존을 위한 한 방법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심화되고 있는 빈부 격차 해소의 책임을 개인 또는 기업에만 지울 수는 없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특히 그것이 지금의 상황처럼 디지털 경제로 전환하는 데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부작용이라면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더욱 절실해진다.

    현대경제연구원 채창균 연구위원은 “우선 간접세 비중을 낮추는 대신 직접세 비중을 높이고, 그중에서도 사업 소득 또는 자산 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 근로소득에 대한 과세와 형평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안전망 확충이다. 시장경제질서 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패자’를 위해 최저 한도의 복지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 격차 문제와 관련해 특히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부분은 이른바 ‘디지털 격차’ 해소다.

    인식 부족 또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인터넷이나 PC와 접할 시간이 적은 사람들은 디지털 경제 속에서 정보빈곤층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 경제적 약자가 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근로자 재교육의 책임 기업에만 돌릴 수는 없게 된 상황인 만큼 정부 차원, 혹은 민관 협동이 새로운 직업훈련 시스템 속에서 정보 격차 해소와 관련된 효율적인 대책들이 생산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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