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ASML은 네덜란드 경제의 ‘메시’” 中도 쩔쩔매는 반도체 장비 절대강자

[조은아의 유로프리즘]

  • 조은아 동아일보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입력2024-04-2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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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 먹는 하마’ EUV에 12년간 ‘묻지마 투자’

    • 반도체 장비 대체불가 1위 업체로 자리 잡아

    • 극우정당 포퓰리즘 정책도 공염불 만들어

    ASML 연구진이 1988년 촬영한 단체사진. ASML [인스타그램]

    ASML 연구진이 1988년 촬영한 단체사진. ASML [인스타그램]

    “무역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도록 보장해 주길 희망합니다.”

    중국 왕원타오(王文濤) 상무부장(상무장관)은 올해 3월 27일 중국 베이징에서 헤오프레이 판레이우언 네덜란드 대외무역·개발협력부 장관을 만나 이런 말을 건넸다. “네덜란드가 자유무역을 견지하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네덜란드를 신뢰할 수 있는 무역 파트너로 본다”는 유화적인 말도 곁들였다. 서방과 흔히 거친 말로 대립하는 중국으로선 자세를 많이 낮춘 분위기다.

    중국을 겸손하게 만든 건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다.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생산 패권을 쥐려는 ‘반도체 전쟁’의 중심에 ASML이 있다. 중국은 독보적 기술 기업 ASML 장비 3대를 사들이려 했다가 실패했다. 미국이 네덜란드에 수송 중단을 요청했기 때문. 이에 중국이 이번에 네덜란드에 “ASML 수출을 허용해 달라”고 읍소한 셈이다.

    ASML은 미국과 중국은 물론 모국 네덜란드 정부마저 애끓게 만들고 있다. 최근 네덜란드 본사를 해외로 이전하겠다는 엄포를 놔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정부는 ASML를 붙잡기 위해 “25억 유로(약 3조6000억 원)를 투입하겠다”고까지 발표했다. 유럽의 작은 나라 네덜란드의 ASML은 이제 세계를 움직이는 ‘작은 거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작은 거인’의 성장

    ASML은 세계 유일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에서 독보적 기술을 갖춘 제조기업이다. 유럽은 물론 미국, 중국, 한국, 일본 등 60곳에 사업장을 두고 있다. EUV를 이용하면 반도체 실리콘 웨이퍼에 5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이하의 극도로 미세한 회로를 새겨 넣을 수 있다. 이전 세대 기계가 굵은 마커 펜으로 회로를 그렸다면, ASML 제품은 가는 아이라이너로 미세한 회로를 새길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실리콘 웨이퍼에 더 많은 요소를 넣게 된다. 반도체 제품이 이렇게 세밀하고 많은 구성을 갖춘 부품을 갖게 되면 동일한 크기로 더 많은 처리 능력을 갖추게 된다.



    이런 점에서 ASML의 장비는 고성능 반도체 제조를 위한 필수 장비로 여겨진다. 미국 인텔, 한국 삼성, 대만의 TSMC 등 세계 3대 반도체 제조기업이 ASML 제품에 의존하고 있다. 최근 챗GPT 등 인공지능(AI)의 부상으로 핵심 부품인 반도체가 더욱 중시되며 기업가치도 오르고 있다. 3월 28일 기준 시가총액은 3818억 달러(약 517조 원). ASML은 덴마크 제약업체 노보노디스크, 프랑스 명품 기업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에 이은 유럽 3위 기업이다.

    ASML은 처음부터 주목받진 못했다. ASML은 1984년 네덜란드 전자 대기업 필립스와 ASM인터내셔널의 합작 투자로 시작됐다. 첫 제품의 실패로 경영이 어려워진 일도 있었다. 필립스와 네덜란드 정부, 유럽연합(EU)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했을 정도다.

    ASML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장기간 흔들림 없는 투자다. ASML은 1995년 미국 뉴욕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상장된 뒤 EUV에 주목했다. 회사는 이 기술이 반도체 제조의 미래가 될 것이라 확신했다. EUV는 워낙 어려운 기술이었기에 다른 경쟁 기업들은 선뜻 투자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ASML은 EUV를 고집했다. 첫 견본 기계가 나와 검증을 위해 벨기에의 연구기관에 맡겨진 건 2006년. 상용화는 이로부터 12년 뒤인 2018년에 가능했다.

    ‘칩워(Chip War)’의 저자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이 발간하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서 “개발 과정이 너무 길고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누구도 EUV에 내기를 하지 않았다”며 “(ASML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술에 투자하려는 완강한 의지를 보여준다”고 평했다.

    ASML의 공급망 통제도 성공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일찍이 핵심 기술과 관계된 회사들을 인수해 자사의 울타리 안에서 고유의 기술을 길러냈다. 2013년 미국 샌디에이고에 본사를 둔 광원 제조기업 사이머를 9억5000만 유로(약 1조4000억 원)에 인수한 게 대표적이다. 올해 4월 퇴직한 전 최고기술책임자(CTO) 마르틴 반 덴 브링크는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 “우리의 성공은 그들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인수한 기업들의 기술이 ASML 경쟁력의 핵심이란 뜻이다.

    ‘네덜란드 트럼프’도 ASML 눈치 보는 중

    헤이르트 빌더르스 자유당(PVV) 대표가 2023년 11월 22일(현지 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총선 출구조사 결과 승리가 예상되자 기뻐하고 있다. [AP뉴시스]

    헤이르트 빌더르스 자유당(PVV) 대표가 2023년 11월 22일(현지 시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총선 출구조사 결과 승리가 예상되자 기뻐하고 있다. [AP뉴시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자리 잡은 ASML은 최근 돌연 “본사를 해외로 이전할 수 있다”고 선언해 네덜란드가 발칵 뒤집혔다. 회사가 해외 이전을 선언한 건 네덜란드가 기업 경영에 어려운 환경이 됐다는 판단 때문이다. 무엇보다 반(反)이민정책이 문제가 됐다. ASML의 직원 2만3000여 명 가운데 약 40%가 외국인인데 고숙련 외국인 인재를 영입하기가 어려워졌다.

    네덜란드 반이민의 중심에는 지난해 11월 총선에서 뜻밖의 압승을 거둔 헤이르트 빌더르스 자유당(PVV) 대표가 있다. ‘네덜란드의 트럼프’로 불리는 그는 극단적인 반(反)난민, 반이슬람, 반유럽연합(EU) 노선을 표방한다. 네덜란드에선 고물가, 주거난에 이민자 유입이 늘며 사회 불만이 커졌다. 이에 편승해 반이민 정서가 강해졌고, 변방의 그가 부상했다.

    빌더르스가 이끄는 PVV가 원내 제1당을 차지하며 반이민정책이 탄력을 받았다. 극우 색채가 강해진 의회에선 지난해 말 외국인 고숙련 노동자 급여 30%에 대해 5년간 소득공제 지원을 20개월로 줄이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엔 대학 정원에서 유학생 비중을 제한하는 내용도 담겼다. 이런 기조로 ASML은 회사 경쟁력의 핵심인 인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고숙련 외국인 기술자를 영입하기 쉬운 타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프랑스로 회사를 이전한다는 설까지 나왔다.

    재계의 ‘공룡’ ASML이 이탈 조짐을 보이자 정부는 다른 외국 기업도 떠날까 걱정이다. 앞서 2018년 정부가 배당세를 강화하자 정유기업 셸, 소비재기업 유니레버 등도 이미 영국 런던으로 본사를 옮겼다. 올해 2월 현지 기업가 설문에서는 ‘네덜란드를 사업하기에 매력적인 국가로 보지 않는다’는 답이 44%였다. 1년 전 28%보다 16%포인트 늘었다. ‘네덜란드를 떠날 것을 고려한다’는 응답도 같은 기간 13%에서 20%로 증가했다.

    최근 반이민정책으로 기업들의 원성을 산 빌더르스는 결국 4월 13일 총리로 취임하지 못할 것 같다고 선언했다. 네덜란드에선 총선 1위를 차지한 당이어도 홀로 원내 다수당이 될 수 없다. 빌더르스도 연정을 구성해야 총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정당들이 연정 구성을 극도로 꺼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엔 극우에 대한 반감은 물론 최근 기업들의 반발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 작전’ 가동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 [AP뉴시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 본사. [AP뉴시스]

    빌더르스가 연정을 구성하지 못해 기존 마르크 뤼터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ASML을 붙잡을 ‘베토벤 작전’을 가동했다. 한 장관은 현지 언론 RTL뉴스에 “베토벤과 ASML은 아름다운 것을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며 작전명을 베토벤으로 정한 이유를 설명했다.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독일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네덜란드 출신이다. 네덜란드는 아름다운 명곡을 남긴 베토벤을 독일에 빼앗겨서일까. 아름다운 기술의 ASML만은 타국에 넘기지 않겠단 의지가 작전명에서 드러난다.

    네덜란드 정부는 3월 28일 재원 규모 등 베토벤 작전의 구체적 방침을 발표했다. 25억 유로를 투입해 ASML 본사가 있는 에인트호번 일대 주택, 교육, 교통, 전력망 인프라를 개선하기로 했다. 교통 혼잡을 해결하기 위해 이 지역 고속도로, 철도 등을 새로 짓고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해 에인트호번 공대에도 투자한다.

    그간 ASML은 “에인트호번을 ‘기술 허브’로 키우기 위한 정부의 인프라 투자가 실패했다”고 불만을 표했다. 기업의 불만을 고스란히 반영해 대책을 마련한 셈이다. 정부는 또 법인세 인하, 세금 감면 등 각종 세제 혜택을 위한 법안을 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정부는 이런 계획을 밝히며 “ASML이 법상, 회계상, 실제 본사를 네덜란드에 유지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베토벤 작전의 존재를 3월 초 처음 알린 지 한 달도 안 돼 정책 내용을 구체화했다. ASML을 붙들려는 강한 조바심이 느껴진다. 예산 25억 유로는 중앙정부뿐 아니라 에인트호번 주변 지방정부들도 함께 마련하기로 했다. 국민 기업의 이탈을 우려해 여러 주체가 ‘원팀’으로 합심해 속도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란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정부는 지원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미키 아드리안선스 네덜란드 경제기후정책 장관은 현지 매체인 ANP통신에 베토벤 작전을 발표하며 “ASML은 네덜란드의 ‘메시’”라고 한껏 치켜세웠다. ASML이 네덜란드 경제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세계 최고 축구선수로 꼽히는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와 맞먹는다는 얘기다. 그는 “이런 스타 선수는 본인만이 아니라 팀 전체를 (네덜란드로) 데려온다”고도 했다. ASML이 네덜란드 경제에 일으킬 파급효과가 막대함을 강조한 셈이다.

    美·中의 ASML 줄다리기

    ASML은 메시 같은 글로벌 플레이어답게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러브콜과 회유를 연이어 받느라 정신이 없다.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3월 중국을 방문한 바 있다. 이때 중국은 통상 미국을 거칠게 비난하던 것과 달리 나긋나긋한 톤으로 수출 허용을 촉구했다. 다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뤼터 총리에게 “인위적으로 기술 장벽을 만들고, 산업과 공급망을 차단하는 것은 분열과 대립을 초래할 뿐”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에 동참하지 말라는 요구였다.

    이번엔 미국이 중국 수출을 방해하려는 모양새다. 로이터통신은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조만간 네덜란드에 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ASML이 중국에 일부 도구라도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네덜란드와 일본은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에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ASML도 미국의 말만 고스란히 따를 수는 없는 상황이다. 중국 시장이 워낙 큰 편이기 때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ASML이 중국 시장을 포기할 경우 기업의 시장지배력이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중국 경쟁 기업이 ASML 기술을 빼내 자체 제작하기 시작하면 큰 시장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ASML은 이미 지난해 4월 중국인 등 직원 6명이 2015년 미국 지사에서 발생한 영업비밀 유출 사건에 연루됐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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