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으로 풀려난 이희진·이희문 ‘헬피엔딩’
범죄자가 오고 싶어 하는 나라
민의 따라잡지 못하는 ‘정치 지체’
민심 되찾으려면 법 감정부터 살펴라
암호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를 일으킨 테라폼랩스 설립자 권도형 씨. [뉴시스]
주식투자 좀 해본 사람치고 이희진 형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2010년대 중반 ‘청담동 주식 부자’라는 별명으로 각종 방송에 출연해 이름을 날린 그였다.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못 갈 정도로 가난했지만 주식투자로 큰돈을 벌어 흙수저 성공 신화를 쓴 주인공. 그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다. 인가받지 않은 투자 매매사를 설립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챙겼고, 투자자들에게 가짜 정보를 제공해 292억 원 상당의 비상장 주식을 판매했다. 2016년엔 무허가 금융기관을 만들고 240억 원을 유치하기도 했다. 자본시장법·유사수신행위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2016년 9월 구속됐다. 대법원은 2020년 2월 징역 3년 6개월에 벌금 100억 원, 추징금 122억여 원을 확정했다.
수백억 원을 해 먹은 사기꾼에게 3년 6개월이라니 이 얼마나 솜방망이 같은 처벌인가. 아니나 다를까 이희진은 만기 출소 직후 ‘깡통 코인’을 발행해 투자자들을 끌어모았다. 허위·과장 광고로 시세를 조종하고 고점에서 매도해 897억 원을 가로챘다. 이들 형제는 2023년 9월 다시 한번 구속 기소됐다. 그러나 이번 보석 석방으로 불구속 재판을 받게 됐다. 이들뿐 아니라 해당 암호화폐 발행사 경영진도 이미 앞서서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 소식을 전한 기사에는 “이러니 권도형이 기를 써서 한국에 오려고 하지”라는 댓글이 달렸다.
대한민국은 호구인가
권도형에 비하면 이희진은 잡범이다. 2018년 암호화폐 업체 테라폼랩스를 설립한 권도형은 2019년부터 암호화폐 테라와 ‘자매 코인’ 루나를 발행했다. 그는 이들 코인이 달러에 1대 1로 가치가 고정된 ‘안정적 코인(스테이블 코인)’이라는 점을 내세워 전 세계에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연 20%의 높은 이자를 약속했다. 그 덕분에 루나는 한때 시가총액이 50조 원을 넘어서면서 세계 10위권 코인으로 발돋움했다. 현실 수요 없는 ‘가짜 돈’과 달러는 결코 같은 값이 될 수 없었다. 이윤 창출 없이 신규 투자자의 돈으로 기존 투자자의 수익을 지급하는 폰지 사기 아니냐는 우려가 대두됐다. 그 우려는 악몽 같은 현실이 됐다. 2022년 5월, 테라와 달러의 교환 비율이 깨지면서 대규모 투매 사태가 발생했다. 개당 10만 원이 넘던 코인이 나흘 만에 1원 이하로 폭락했다. 99.99%가 넘는 하락률이었다. 전 세계 투자자들이 본 피해 규모는 50조 원 이상, 우리나라 피해자만도 28만 명에 달하는 걸로 추산됐다.권도형은 테라·루나의 폭락 가능성을 알고도 계속 코인을 발행하고 투자자를 모았다. 그리고 폭락 직전 싱가포르로 출국해 잠적했다. 11개월간의 해외 도피는 2023년 3월 몬테네그로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현지 공항에서 위조 여권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면서다. 한국과 미국이 모두 그의 송환을 요청했다. 이에 권도형은 현지 대형 로펌을 동원해 가며 한국행을 요구했다. 개별 범죄 형량을 모두 합산하는 미국에서 재판받았다간 자칫 100년 이상의 징역형이 나올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몬테네그로 법원은 2023년 두 차례 그의 미국행을 결정했으나 권도형의 항소로 모두 기각됐다. 그러곤 올해 3월 7일(현지 시각) 그의 한국 송환이 결정됐다. 미국보다 한국의 인도 요청이 하루 일찍 도착했다는 이유였다.
그의 한국 송환이 결정되자 온라인 공간에서는 탄식이 쏟아졌다. 사실 국내 피해자 처지에선 그가 한국에 와 재판을 받는 게 득이다. 2300억 원밖에 안 되는 ‘푼돈’이지만 검찰이 그의 국내 자산을 추징·보전해 놓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법 체계로 그를 단죄한다면 민사소송을 통해 약간이나마 보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럼에도 권도형의 국내 송환을 바라는 여론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몇 푼 안 되는 돈을 보상받는 것보다, 그가 평생 미국 감옥에 갇혀 죗값을 치르는 게 낫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암호화폐를 증권으로 취급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아직 법적 체계가 갖춰지지 않아 일각에선 “무죄를 받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온 세계가 주목할 권도형의 재판에서 정말 무죄가 나온다면 그만한 국제 망신도 없을 거다.
‘다행히’ 그의 한국행은 몬테네그로 검찰이 절차상 문제를 지적하고 대법원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잠정 보류됐다. 그렇지만 씁쓸한 뒷맛을 남긴 건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한국 송환이 결정됐을 당시 테라 코인 가격이 46%나 껑충 뛴 사실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어쩌다 한국은 범죄자들이 재판받고 싶어 하는 호구 국가가 됐나. 검찰총장마저 “우리나라가 ‘범죄자가 오고 싶어 하는 나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하는 깊은 회의에 빠졌다”라고 자조하는 상황이니 이게 일반인들이 법리(法理)에 어두워 생긴 오해는 아닐 것이다. 사법부만의 책임은 아니다. 결국은 정치가 문제다.
반복되는 ‘비정상의 정상화’
자본시장법 등 위반 협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에 벌금 100억 원, 추징금 122억여 원이 확정된 이희진 씨. [뉴스1]
150억 원을 해 먹고 징역 15년. 연봉으로 계산하면 10억 원이다. 이러니 ‘사기공화국’이라는 개탄이 끊이지 않는다. 어디 사기만 그런가.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한 손정우는 고작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의 부친은 자식의 미국 송환을 막기 위해 아들을 돈세탁 혐의로 추가 고발했다. 죄가 추가되더라도 한국에 있는 게 낫다는 것이다. ‘돌려차기 사건’에서 봤듯 보복이 두려워 사는 곳을 떠나야만 하는 강력사건 피해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는다. 남을 도우려다 쌍방 폭행으로 입건돼 억울하게 처벌받은 의인들의 사연도 마찬가지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처벌의 예방효과를 따지고, 가해자 인권 챙기는 동안 국민의 법 감정과 법률 사이 괴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멀어져 버렸다. 정경유착이나 부정부패만 비정상이고 적폐인 건 아니다. 사회를 움직이는 시스템이 사회 구성원의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상황도 비정상이요 적폐다.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필딩 오그번(William Fielding Ogburn)은 급속하게 발달하고 축적되는 과학기술과 부를 의식·예절 등 비물질적 문화가 따라잡지 못하는 현상을 두고 ‘문화 지체(cultural lag)’라고 설명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민의를 정치가 좀처럼 따라잡지 못하는 ‘정치 지체’ 현상에 빠져 있다.
국민이 느끼는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은 투표나 여론조사를 통해 표출되곤 했다. 역대 정부는 그런 문제들의 해결을 약속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추진된 ‘비정상의 정상화’라든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이 대표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내건 ‘카르텔 척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 이들에게 투표한 유권자들은 그런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폐단을 뿌리 뽑고,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불합리한 문제들을 풀어주길 말이다. 그런데 정작 뚜껑을 열었을 때 그런 노력은 보이지 않았다. 대개 상대 진영을 탄압하는 데만 골몰했다. 국민의 요구와 정치적 대안의 불일치는 거대한 무당층으로 나타났다. 2022년 여름 정부는 코인·주식 투자 실패로 빚더미에 오른 청년을 구제하겠다고 발표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정말 청년층 표심을 잡고 싶었다면 예산 쏟아부어서 그런 이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권도형·이희진 같은 사기꾼들 형량을 50년, 100년으로 늘리겠다고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하기야 국민의 목소리를 들을 의지조차 없는데 제대로 된 처방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2023년 봄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흥행했다. 학폭 피해자의 사적 제재를 핵심으로 하는 그 드라마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로부터 1년 전엔 소년법과 형사미성년 제도를 다룬 ‘소년심판’이 있었다. 학폭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지만 가해자들이 ‘앞날이 창창한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큰 처벌을 받지 않는 현실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더 글로리’ 속 사적 제재에 대한 열광으로 나타났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정치권이 정쟁적 현안은 사법 체계를 흔들어가며 추진하면서도 정작 이런 일에는 법리를 따져가며 논의를 일축하는 게 의아할 뿐이다.
소신과 강단
윤석열 대통령은 2월 KBS와 진행한 대담을 마무리하며 “따뜻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잘못 짚은 것 같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지기(知己)부터 안 되니 지지율이 40%를 돌파하지 못하는 것이다. 누구도 윤 대통령에게 약자를 보듬는 따뜻함이나 자애로움을 기대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에게 표를 준 유권자 중 상당수는 그가 검사 시절 보여준 소신과 강단을 기대하고 표를 주었을 것이다. 의대 증원 논의 초창기 나타났던 지지율 반등이 그런 민심을 보여준다.윤석열 정부에 남은 시간은 앞으로 3년. 21대 국회보다 ‘매운맛’인 22대 국회에서 야당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선거 전부터 “3년은 너무 길다”며 스스럼없이 탄핵을 주장해도 아무런 역풍이 없었다. 이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국민의 지지를 다시 회복하지 않는다면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에 미래는 없다. 국민이 원하는 바를 기민하게 수용하고 반영하는 방법밖엔 답이 없다. 어설프게 대파 가격 따지는 것보다 국민의 니즈(needs)를 먼저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정부 여당이 진정 민심을 되찾고자 한다면 국민의 법 감정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왜 사기꾼들은 항상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고, 학폭 피해자들이 고개 숙이고 다녀야 하며, 나를 방어하고자 했던 행동이 쌍방 폭행이 되는가. 어째서 부당하게 이득을 편취한 사람들은 유죄판결을 받더라도 호화 생활을 누리는데 피해자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야 하는가. 항상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인권에 앞서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은 무엇 때문인가. 그동안 답답한 법리에 묻혀 외면받았던, 보통 사람들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이런 감정들을 하나씩 해소해 나갈 때 국민도 다시 한번 지지를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