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호

정치의 비참한 현실, 시민의 자업자득이다

[김세연의 다른 관점] 세계관의 교체, 인간 중심 시대 마감해야

  • 김세연 前 국회의원

    입력2024-04-13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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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장기 이후 맞이한 초고속 노화

    • 비참한 정치 현실, 우리의 자업자득

    •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세계의 조건

    • 흑백 이분법 아닌 총천연색의 시각

    • 낡은 관념의 노예에 미래 맡겨서야

    4월 1일 경기 안양시 동안구 한 인쇄업체에서 직원들이 인쇄된 제22대 총선 투표용지를 분류하고 있다. [뉴스1]

    4월 1일 경기 안양시 동안구 한 인쇄업체에서 직원들이 인쇄된 제22대 총선 투표용지를 분류하고 있다. [뉴스1]

    뭔가 심상찮다. 우리가 알던 세상이 아닌 것 같다. 왜 이럴까. 한 시대가 저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다음 시대는 아직 동트지 않은 것 같다. 짧게는 산업혁명 이후부터, 길게는 인류 역사가 기록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어진 역사의 챕터가 넘어가고 있다고 상상하고 현실을 보자. 제도, 국가 또는 문명 같은 거대하고 추상적 구조물도 만들어질 당시의 문제의식, 문제 해결 능력, 정합성, 완결성이 환경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손질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피로와 모순이 누적돼 언젠가는 수명이 다해 붕괴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체제와 질서를 맞이하는 것은 역사의 섭리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자. ① 정치의 궤도 일탈, 중도통합적 정치인들의 절멸 사태, 양심과 염치의 실종, 저질화, 상호 악마화, 분노와 복수의 화신 사이의 대결 구도 고착 ② 행정의 보신주의, 선민의식, 승진 지상주의 ③ 법원, 검찰, 경찰 등 법질서 유지 및 수호 기관의 파당화, 정치화 ④ 자신의 국가를 스스로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이 돼버린 듯한 좌파 세력 ⑤ 극단적 유튜브 채널에 세뇌되고 세상 바뀐 줄 모른 채 충성을 받아줄 다음 군주를 찾아 헤매는 보수 세력. ⑥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직역 분야에서 공고화된 기득권과 그 성벽 바깥에서 고사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 세계사의 기적이라는 초고속 성장을 성취한 국가에서 성장기 이후에 맞이하는 초고속 노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지금 시기가 문명 자체가 달라지는 대전환기라면 어떨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사례를 거론할 필요도 없다. 대전환기에 과거 패러다임에 오래 갇혀 있을수록 자신과 후손의 운명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왕을 향해 상징적인, 궁극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왕국과는 달리 시민이 주권자인 공화국에서는 그 책임을 시민 스스로 져야 한다. “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한테 뭐라 그래?” 유의 항변은 무의미하다. 법에서는 무지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진다. 정치에서도 무관심과 무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주권자 스스로 져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제사회적 여건 악화는 적시에 필요한 과제를 수행하지 않은 정치인과 공무원의 책임이다. 그런데 공동체 운명을 좌우하는 최종 의사결정 영역인 정치의 비참한 현실은 유권자·시민·주권자, 즉 우리의 자업자득이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이 연재의 첫 번째 글에서 주장했듯이 모든 것에는 수명이 있다. 수명이 다하면 종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성숙한 자세다. 그렇다고 해서 자포자기하듯 그저 종말로 끝내자는 얘기가 아니다. 새로운 탄생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는 것이 성숙한 시민주권자, 아니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더욱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다가올 세상을 앞두고 무엇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바로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그럼 잠시 과거를 돌아보자.

    역사 속에서 철학과 사조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이해, 그리고 기술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진화해 왔다. 신본주의가 지배하던 중세 시대에는 신에 대한 믿음이 사회와 문화의 중심을 이뤘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이 모든 지식과 삶의 영역에서 절대적 권위를 행사했다. 실은 인간이 해석하고 전달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신의 뜻과 세계관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가 종교적 텍스트와 교리에 의해 좌우됐다. 교회는 지식과 도덕의 최종 해석자로 기능했다.



    르네상스 시기에 접어들면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예술, 철학이 재발견됐다. 이로 인해 인간의 가치와 잠재력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고 이는 점차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한 인본주의 사상으로 발전했다. 인본주의 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능력을 중시하며 과학적 탐구와 비판적 사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확대했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혁명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특히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우주론은 교회의 지구중심설과 대립돼 이단으로 규정되고 탄압받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 출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건 중 하나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이었다. 지식과 정보의 대중화가 가능해지면서 이전에는 교회와 귀족이 독점하던 지식을 대중에게 폭넓게 전달할 수 있게 됐다. 인쇄술의 발명과 확산은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는 다양한 사상과 문헌의 유통을 가능하게 해 인본주의 사상이 광범위하게 확산했다. 또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탐구가 활발해지며 근대 과학과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이어졌다.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은 교회와 권위 있는 종교기관의 저항을 받았다. 이러한 저항은 새로운 사상과 과학적 발견이 기존의 종교적 교리와 충돌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인본주의의 부상은 교회의 절대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종교개혁과 같은 중대한 사회적 변화를 촉발했다. 그렇게 한 시대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기본으로 하는 휴머니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화석연료의 과잉 소비로 기후위기를 맞아 기존의 인간 중심 세계관,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는 지구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살아가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했다. 이에 따라 생태론적 세계관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으나 생각만큼 행동이 잘 따르지는 못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2024’가 열린 2월 28일(현지 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라 그란 비아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E&의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 로봇 ‘아메카’를 관람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사진공동취재단]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 2024’가 열린 2월 28일(현지 시간)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라 그란 비아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E&의 인공지능(AI) 휴머노이드 로봇 ‘아메카’를 관람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사진공동취재단]

    다음 시대에는 어떤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 지향점은 크게 다르나 각각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에 등장한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물리적, 인지적 한계를 과학기술을 통해 넘어서려는 사상이다. 이 운동의 핵심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고, 지적 능력을 향상하며, 일반적인 인간의 경험을 넓히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구체적으로는 유전공학, 나노기술, 인공지능과 같은 분야에서 혁신을 통해 질병을 극복하고, 노화 과정을 늦추며, 인간의 지능을 향상할 가능성을 모색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지지자들은 트랜스휴머니즘이 인간의 운명을 자연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손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보며, 기술 진보를 통해 인간 본연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인류에게 가져올 윤리적·사회적 영향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고민하며 새로운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예를 들어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술적 혜택이 제공될 수 있을까. 기술이 인간의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러한 질문은 트랜스휴머니즘 사상이 직면한 중요한 과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미래를 그려나갈지, 인간으로서 우리의 한계를 어디까지 넓힐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반면 기술 진보에 힘입어 인간의 수명이나 능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인간중심성이 대폭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점을 기억하자.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을 넘어 인간과 기술, 자연 사이의 경계를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이다. 이 사상은 인간이 유일한 주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 주변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심지어 인공지능과 같은 비인간적 존재들도 존중의 대상이 된다.

    이런 포스트휴머니즘 시각에서는 인간과 자연, 기술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으며, 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고 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술 발전이 우리 사회와 문화, 심지어 우리의 정체성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탐구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나 로봇과 같은 기술이 인간의 일을 대신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노동’을 어떻게 정의하고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의 권리와 가치를 어떻게 인정하고 존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포스트휴머니즘적 관점은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등을 구분하는 전통적 이분법 세계관에 도전장을 내민다. 인간이 지구 생태계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새롭게 고민하게 만든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해답을 모색한다. 결국 포스트휴머니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다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고하게 하며, 모든 존재와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는 단순히 인간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을 넘어선다. 더 넓은 생태계와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된다.

    자연과 기계와의 동등 공존

    증기기관, 내연기관 시대를 지나 인류 역사 진보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이 중요한 열쇠가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일견 서로 모순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고 변증법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두 개념은 인간의 물리적·지적 한계를 초월하려는 욕구와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바탕으로 한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위기는 기술적 해결책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트랜스휴머니즘의 기술적 진보와 포스트휴머니즘의 철학적 통찰을 결합해 인간이 다른 종과 자연 그리고 기술과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기후변화, 생물다양성의 감소, 자원 고갈, 사회적 양극화 등 다양하다. 이러한 위기는 인간의 활동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기술의 발전을 적극 활용해 인간 수명을 연장하고 지적 능력을 향상하며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자연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반면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 간의 경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비롯한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기술이 인간과 자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는 도시계획, 지속 가능한 생산 및 소비 패턴, 다른 종과의 공존을 존중하는 윤리적 기준의 정립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쓰일 뿐 아니라 인간이 다른 종과 자연, 기술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술 발전을 적극 추구하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와 자연,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진정으로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살펴본 다음 다시 한번 우리를 엄습하고 있는 현실을 돌아보자. 우리는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고 있는가. 과거의 원인이 누적돼 현재 나타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이미 다가온 미래를 위해 내놓아야 한다. 실은 앞선 시대의 고정관념에 얽매인 채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인구 소멸로 폐교된 경북의 한 중학교 분교.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인구 소멸로 폐교된 경북의 한 중학교 분교.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흑백 이분법 구도로 세상을 보면 단순해서 편리하다. 그러나 원리주의와 근본주의에 빠져 비현실적·시대착오적 해법을 내놓거나 복잡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지 못해 끝없는 투쟁의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흑백이 아니라 총천연색으로, 진위의 절대적 구분이 아니라 정도의 상대적 차이로, 스펙트럼 상의 분포로 세상을 보며 타협할 준비를 하자. 저출산 현상이 심각하다고 사람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이민 개방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근시안적·단세포적 해법이 될 것이다. 인구가 급감하는 와중에 지방 소멸의 운명을 피하기는 어렵다. 모두 다 예전 모습대로 살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토 권역별 거점 역할을 담당할 광역시라도 살려내는 과감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노동과 고용 즉 소득이 증발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하고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지, 이때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을 분담할 기계인간(인공지능과 로봇)들과 정서적 교감을 나눌 반려동물들과는 어떻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크게 과장하면 우리는 불타기 시작한 지구에 살고 있다. 앞으로 생명 유지에 필수인 공기와 물을 안정적으로 확보·공급할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해수면 상승에 따른 해안선 변경에 대비해야 한다.

    지구 지표면에서 주로 생활해 온 인간의 활동 영역이 크게 우주공간과 가상세계로 확장될 것이다. 활동 영역의 확장과 교통수단의 발달이 이뤄질 때 국제질서가 크게 재편된다. 우주 개척 레이스가 시작되는데 이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의 본격 도래와 함께 인간의 삶은 지금의 휴대전화 단말기 화면 차원을 넘어 몰입도가 훨씬 강화된 가상세계 속으로 급격히 옮겨갈 전망이다. 시각, 청각 이후에는 촉각, 후각이 결합돼야 가상세계 속에서 현실감이 극대화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한 시대가 마무리될 때 그 마감의 모습이 대개 아름답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자연재해, 질병, 전쟁, 또는 혁명의 형태가 되기 쉽다. 지금의 국가가 수명을 다해 간다면, 우리는 다음 국가를 미리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 실존하는 개인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를 위해 국가를 교체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역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충실한 준비 과정이다. ‘슬로모션 혁명’이라 이름 붙여도 좋고 붙이지 않아도 좋다. 그렇게 해서 30~50년 후에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면 최선이고 만들어지지 않아도 좋다. 지금의 문제가 무엇인지, 이를 위해 도출된 문제 해결 방법이 과거 패러다임에 근거한 퇴행적 형태인지, 새로운 환경 변수를 감안해 다가올 세상에 맞게 설계된 것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 사회 구성원들이 치러야 할 물리적·경제적·정신적 고통과 비용, 만족과 효용 사이의 격차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현재도 이해하지 못하는 낡은 관념의 노예들에게 미래 설계를 맡겨서는 곤란하다. 인간은 대개 추억에 빠져 자기 젊은 시절의 방식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인지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다. 새로운 세상의 설계는 다음 세대에 맡기고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이해 못하는 자들은 제발 이쯤에서 그치고 물러날 줄 알기를 바란다.

    *이번 호로 ‘김세연의 다른 관점’ 연재를 마칩니다. 기성과 다른 시각에서 매번 중요한 어젠다를 제시해 온 필자와, 그간 성원해 준 애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세연
    ● 1972년 출생
    ●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졸업
    ● 제18·19·20대 국회의원
    ● 여의도연구원 원장
    ●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 저서 : ‘리셋 대한민국’(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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