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12년, 지배구조 문제 산적
4년 반 동안 109억 원 털려도 몰라
“개입 적절” vs “관치 금융”
이런 구상이 곧장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이해관계자들의 반발 때문이다. 이후에도 때마다 ‘농협 개혁’의 단골 메뉴로 등장했지만 진척되지 않았다. 2008년 세종증권(현 NH투자증권) 인수 비리 의혹 등을 계기로 논의가 본격화했고, 결국 18년 만에 오랜 숙제를 풀게 됐다.
농협금융지주가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출범한 지 벌써 12년이 됐지만 여전히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 예로 농협중앙회장이 교체되면 덩달아 계열사 대표이사들이 물갈이되는 양상이 반복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중앙회장의 입맛에 맞는 인물들이 요직을 꿰차고 있다는 비판도 이어진다. 농협금융지주 내 임원후보추천위원회가 존재하지만 농협중앙회가 지분 100%를 보유한 상황 때문이다.
3월 14일 강호동 농협중앙회장이 서울 중구 농협중앙회 본관에서 열린 ‘2023년도 우수 농·축협 시상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뉴스1]
잘못된 관행이 이어지며 비판이 나왔다. 특히 올해 강호동 신임 농협중앙회장이 취임하면서 그간의 관행이 또다시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이에 금융 당국이 나서서 이런 관행을 뜯어고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이목을 끌고 있다.
4년 반 동안 ‘사고’ 피해액 100억 원↑
3월 7일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은 농협금융지주와 농협은행, NH투자증권에 대한 수시 검사와 정기 검사를 진행했다. 농협금융의 지배구조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계기가 있다. 농협금융지주의 핵심 계열사인 농협은행이 3월 5일 공시를 통해 100억 원대 배임 사고가 발생했다고 밝힌 것이다. 농협은행은 해당 직원을 형사 고발했고, 향후 인사위원회를 열어 징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농협은행 영업점 직원 A씨는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109억4733만 원 규모 업무상 배임을 일으켜 대기발령 조치됐다. A씨는 한 영업점에서 중소기업 대출 업무를 담당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은 그간 금융사고 발생 방지를 위해 꾸준히 내부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지배구조상으로 이를 명문화하는 방안 등을 주문해 왔다. 이런 와중에 다시 한번 대형 사고가 터졌다는 것은 금감원으로선 모기업인 농협금융지주와 농협은행을 들여다볼 명분이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농협은행이 4년 반 동안 배임 사고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내부통제 부실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기 때문이다.
농협은행에선 이와 같은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2021년 7월부터 1년간 은행 고객으로부터 18회에 걸쳐 약 2억 원을 편취해 주식투자에 탕진한 직원이 적발된 바 있다. 2022년 신용카드 결제 대금 약 3억 원을 상환하기 위해 전산을 조작한 직원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농협금융지주의 핵심 비은행 계열사 NH투자증권의 경우 대표 선임 과정에서 잡음이 발생했다는 점이 금감원이 나선 이유다. 3월 초 NH투자증권은 임기가 만료한 정영채 NH투자증권 대표의 후임으로 윤병운 NH투자증권 부사장을 내정했다. 이 과정에서 농협중앙회와 농협금융지주의 의견이 갈렸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3월 31일 이석준 농협금융지주회장이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금융지주회장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금감원은 금융회사가 아닌 농협중앙회가 손자 기업인 NH투자증권의 인선에 목소리를 낸 것이 합당한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간 농협중앙회가 농협금융지주의 자회사 인선에 개입해 온 사례 등을 따져 지배구조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는 계획도 밝혔다.
“금감원 개입, 시기 적절”
이복현 금감원장은 3월 21일 한 간담회 이후 기자들과 만나 농협금융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는 것에 대해 “계열사에 대한 지주회사의 적정성을 보고 있다”며 “합리적 지배구조와 상식적 수준의 조직문화가 있으면 좋겠다는 게 금융당국 공통의 생각”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이 구분돼 있다고는 하지만 농협 특성상 그것이 명확한지는 조금 더 고민할 지점이 있다”며 “자칫 잘못하면 금산분리 원칙과 내부통제, 규율통제 같은 것들이 흔들릴 여지가 있어 챙겨봐야 한다는 취지”라고 말했다.금감원은 이번 검사를 통해 중앙회가 과도하게 농협금융지주로부터 농협지원사업비(명칭 사용료)나 배당금을 받는 건 아닌지 살펴봤다. 이로 인해 농협금융 계열사들의 자산건전성 등이 위협받는 게 아닌지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업계에서는 윤석열 정권의 실세로 여겨지는 이 원장이 4월 총선이 끝난 만큼 본격적으로 농협금융을 압박할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금감원이 이번 개입을 통해 농협의 오랜 관행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먼저 개입이 시의적절했다는 점에선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있다. 농협이 신·경 분리를 한 핵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독립된 경영으로 금융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니만큼 명분도 충분하다고 분석된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중앙회장이 바뀐 시점에서 금융지주 경영에 개입하기 전에 금융당국이 먼저 나선 것으로 보인다”며 “특히 올해 이석준 농협금융지주 회장의 임기가 사실상 종료하는 만큼 시기상으로 개입이 적당한 시점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금감원이 최근 지속적으로 “관치금융”이라고 비판받는 점은 걸림돌로 여겨진다. 금융권의 반발에 부딪힐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실제 이번 정부 들어 금융당국은 신한금융지주와 KB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의 회장 인선 과정에 모두 목소리를 내면서 비판받은 바 있다.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금감원이 그간 금융지주의 지배구조 개입, 상생금융 등 금융회사의 경영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이런 점이 부각될 경우 농협금융의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하더라도 논란이 다시 빚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