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악재 모두 덮은 ‘정권심판론’
‘예스맨’으로 채우고, 忠言 멀리한 ‘불통 대통령’
무능하고 비전도 없는 정부·여당
文정부보다 더 심해진 ‘진영·이념 정치’
변화·반성 없다면 앞으로도 ‘보수 필패’
4월 5일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부산진구 삼광사를 방문해 대조사전에서 합장하고 있다. [뉴스1]
[영상] 윤석열 심판 그 후
4월 10일 밤에 확인된 것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는 민심이다. 22대 총선에서 정권 심판은 다른 모든 것을 삼켜버린 블랙홀이었다. 야당 후보들의 잇따른 추문과 도덕성 논란, 더불어민주당의 ‘비명횡사, 친명횡재’ 공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재판 리스크’ 같은 야권의 악재를 모두 덮어버릴 만큼 정권 심판 태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민주당과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은 175석을 얻으며 단독 과반을 차지했다. 여기에 조국혁신당이 얻은 비례대표 의석 12석을 합하면 ‘민주당+조국혁신당’ 연합만으로 187석이 된다. 개혁신당 3석, 진보당 1석, 새로운 미래 1석까지 합하면 ‘반윤 정당’의 의석수가 무려 192석이다.
국민의힘은 지역구에서 90석을 얻었다. 위성정당 국민의미래 의석 18석을 합해도 108석에 그쳤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이렇게 큰 격차로 패한 일은 처음 있는 사건이다. 국민의힘(당시 미래통합당)은 4년 전 21대 총선에서도 참패를 당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때는 야당이었다. 대통령 임기가 3년이나 남은 시점에 집권 여당이 이런 참패를 당한 충격은 그 때와는 비할 수 없이 크다.
이제 윤석열 대통령은 길을 잃게 됐다. 임기 5년을 여소야대 국회에 갇혀 무엇 하나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갇혔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다음 대선이 몇 년 남았나. (3년) 확실한가”라며 윤 대통령의 조기 퇴진 가능성을 내비치는 말까지 서슴없이 한다. 단독 과반 의석을 달성한 민주당은 국회의장은 물론이고 주요 상임위위원장 자리도 차지하면서 법안·예산 처리를 주도할 수 있다. 국무총리·헌법재판관·대법관 임명동의안도 민주당의 선택에 따라 좌우된다. 대통령을 제외한 국무총리·국무위원·법관 등에 대한 탄핵소추 의결도 민주당의 뜻에 따라 가능하다. 윤석열 정부는 식물 정부 신세를 면하기 어렵게 됐고, 떠난 민심을 돌아오도록 하지 못하면 레임덕도 시간문제다.
윤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에 등 돌린 민심을 등에 업고 대선에서 승리한 것이 2년 1개월 전이다. 국민의 힘이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둔 건 불과 1년 10개월 전이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박근혜 탄핵’의 늪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기사회생한 보수세력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일까.
일방통행 尹, 보수 정치 말아먹었다
2월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 자격으로 참석한 신민기 녹색정의당 대전시당 대변인이 학교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항의하다 경호원들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있다. [뉴스1]
올해 들어 24차례나 민생토론회를 개최하고 유튜브 생중계를 한 윤 대통령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이 불통이라고 느끼는 것은 언제나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장황하게 하고 듣기 불편한 말에는 귀를 닫아버리는 ‘일방통행’ 모습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항의한다고 굳이 ‘입틀막’까지 하며 끌어내던 광경은 이러한 불통 이미지를 대표하는 장면이다.
스스로 소통의 상징처럼 내보이던 출근길 도어스테핑이 잇따른 설화 때문에 중단된 이후로 대통령과의 쌍방향 소통은 끊겨버렸다. 신년 기자회견은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인지 ‘파우치’인지, 그에 관한 질문이 나올까 겁나서 KBS와의 단독 대담으로 대체할 정도였다. 윤 대통령 주변을 둘러싼 것은 대통령의 뜻을 거역하지 않는 ‘예스맨’들이고, 바른 소리를 하는 정치인들은 배제되고 변방으로 밀려났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 용산에 모여서 국정을 운영하니,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둔감하기만 하다.
1월 2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도서관 대강당에서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및 참석자들이 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및 명품백 진상 규명을 위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뉴스1]
무엇보다 윤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친하지 못했고, 민주주의를 불편해하는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나타냈다. 평생 검사로 지낸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시끄러운 과정을 싫어했고 검찰총장 시절 모습대로, 상명하복 원칙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사회는 진즉 다원화되고 복잡해져 섬세한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구시대의 단순하고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국정을 운영하니 퇴행적 성격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권력이 귀를 닫아버리고 불통이 돼 권위주의 시대의 리더십으로 되돌아간 모습은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국민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압도한 이번 총선에서 여당에는 가급적 윤 대통령이 보이지 않고 ‘한동훈 대 이재명’ 구도로 선거를 치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이종섭-황상무’ 논란과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따른 의정 갈등으로 다시 윤 대통령이 전면에 서게 됐다. 여기에 윤 대통령의 앙숙인 조국 대표가 만든 조국혁신당까지 참전하면서 정권 심판 선거로 급변한 것이다.
보수 결집으로 정권심판론 잠재우기 불가능
국민의힘의 참패는 집권 세력이 방향을 잃은 데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20대 대선 당시 윤 대통령의 득표율은 48.56%로 이재명 대표의 47.83%보다 불과 0.73%포인트 앞섰다.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여소야대 환경에 따라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외연 확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윤 대통령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예외 없이 내치는 길을 택했다. 윤 대통령은 ‘친윤’의 성을 쌓고 ‘비윤’을 성 밖으로 몰아냈다. 안철수, 나경원, 이준석, 유승민같이 중도확장성을 가진 인물이 친윤이 아니라는 이유로 줄줄이 밀려나거나 쫓겨났다. 그래서 국민의힘은 한동훈 개인에만 의존하는 선거를 치러야 했다. 이재명-김부겸-이해찬의 3인 선대위로 지지층의 결집을 극대화한 민주당과 대비된 모습이다.
국민의힘이 수도권에서 완패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윤 대통령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났던 안철수, 나경원, 이준석 같은 후보가 생환한 결과는 의미심장하다. 민심은 정권심판론을 선택하면서도 윤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아 미운 털이 박혔던 인물은 뽑아주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니 윤 대통령이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업자득이다.
총선을 앞두고 중도확장 노선을 분명히 하지 못한 국민의힘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지지층의 표만 갖고 선거를 이길 수는 없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중도층의 지지를 얻어야 함은 선거의 기본 상식이다.
한동훈 비대위 역시 이러한 방향성을 분명히 하지 못한 채 내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한동훈 위원장은 ‘이념 보수’와는 거리를 두고 ‘실용 보수’의 길을 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보수층 결집을 위해 ‘종북세력 척결’ 같은 구호를 내걸면서, 다시 이념 보수의 면모를 나타냈다.
한 당시 위원장은 윤 대통령과 함께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는 참석하면서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엔 참석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예방했다. 모두 보수층 결집을 의도한 행보로 해석되지만 중도층엔 다시 이념을 갖고 좌우를 나누려는 과거 시대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졌다. 보수 결집으로 정권 심판 여론을 진정시키는 것은 숫자의 논리로 따져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론조사에서 정권심판론 우세가 계속되자 한 당시 위원장은 전면에 이·조(이재명-조국)심판론을 내걸었다. 정권심판론이 우위를 점한 판세에서 또 다른 심판론으로 맞대응하는 것은 ‘야당의 방식’이지 여당에 어울리는 전략이 아니다.
정권 심판 여론에 대해선 겸허하게 몸을 낮추고,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담대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여당이 가진 강점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야당을 ‘범죄 세력’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심판을 호소하는 것은 ‘검사의 방식’이지 ‘정치인의 방식’이 아니다.
과거엔 보수정치가 낡고 부패하기는 해도 경제는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근래 들어선 미래 먹거리를 찾는 데에 별 관심도, 비전도 없다는 평을 받는다. 문재인 정부가 민심을 잃은 것이 부동산정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정책 실패 때문인데, 국민의힘도 특별히 나은 비전과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제 구실 못하는 보수, 피해는 오롯이 국민에게
4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의 국회의원선거 개표상황실에서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당 관계자들과 함께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 발표를 보고 있다. [뉴스1]
윤석열 정부 들어 보수우파 진영이 보인 모습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다를 바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선을 그으려는 순혈주의가 높다란 진입장벽이 됐다. 지지자로 돌아설 수 있는 중도우파층까지도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며 강성 우파 지지자들끼리만 똘똘 뭉친다.
문재인 정부의 진영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합리적 보수정치의 등장을 기대하던 사람들이 이러한 분위기에 질려서 다시 떠나갔다. 한동훈 위원장이 선거 기간에 ‘황상무 사퇴, 이종섭 귀국’이라는 요구를 꺼내자 보수 진영에서 영향력 있는 강성 유튜버들은 “좌파에 휘둘린다”며 맹비난했다. 민주당 진영에서 ‘개딸’ 팬덤 정치가 변화를 가로막고 있듯 보수우파 진영에서도 이념에 갇힌 강성 팬덤들의 큰 목소리가 중도층을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
총선을 앞두고 보수우파 진영에서 열광적 반응을 모은 영화 ‘건국전쟁’ 열풍도 총선에 득보다는 실로 작용했으리라 판단된다. 열성적 우파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복권시킨 영화를 보고 “감격했다”는 칭송을 SNS에 앞다퉈 올리며 이승만 띄우기에 나섰다.
건국전쟁을 만든 김덕영 감독은 “또다시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건국전쟁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건국전쟁을 덮어버리기 위해 파묘로 분풀이를 하고 있습니다”라며 1100만 명 관객을 돌파한 영화 ‘파묘’에 느닷없이 ‘좌파 영화’라는 낙인을 찍었다.
‘건국전쟁’ 관객이 100만 명을 넘자 흥행에 고무된 가수 김흥국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생애를 담은 다큐 영화 ‘그리고 하얀 목련이 필 때면’을 제작해 올해 7월 개봉하겠다고 밝혔다. 영화를 영화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보수우파의 이념운동의 기폭제로 삼는 이런 광경은 100만 명 우파를 결집시킬지 모르지만, 200만 명, 300만 명 중도층에게 ‘보수 정치가 이기면 저런 광경이 판칠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민주당이 이끈 진보 정치는 사실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그들이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에 기본적으로 무능함은 문재인 정부 5년을 거치며 질리도록 지켜본 일이다. 이념에 따라 시장을 찍어 누르던 정책은 대부분 실패해 민심 이반을 낳았다.
과거의 진보는 그래도 도덕성에선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이번 총선 기간에 불거진 도덕성 논란의 대부분은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쪽에서 나왔다. 무슨 문제가 터져도 윤 대통령이라는 ‘거악(巨惡)’이 더 나쁘니, 우리에게 뭐라 하지 말라는 듯한 오만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김준혁의 온갖 막말, 양문석의 사기성 대출과 부동산투기 논란 등 문제에 대해 민주당 지도부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모습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결과가 나왔으니 대체 윤석열 정부가 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 됐을까 하는 탄식이 나오는 것이다. 정권 심판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묻지마 투표’로 함량 미달 후보까지도 모두 당선된 사태의 피해는 결국 그런 국회를 인내하고 지켜봐야 하는 국민의 몫이 된다. 염치없는 내로남불 정치인들이 당당하게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은 무능하기 이를 데 없는 보수세력이다.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대표하는 보수세력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한 데 따른 피해는 국민의 몫이 됐다.
변화해야 다음 기약할 수 있다
앞 일이 더 문제다. 190석 안팎을 차지한 야권의 의석은 정권 심판의 태풍이 잦아들고 나면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비대증’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국회 권력도 너무 비대해지면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사용됨은 이미 21대 국회에서 나타났다. 이는 법칙과도 같은 정치의 속성이다.22대 국회엔 야당의 강경파가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그러니 야당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21대 국회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복수혈전’에 매달리는 정치도 답이 아님을 민심이 생각하는 시간이 올 것이다. 지금은 윤 대통령이 싫다는 생각에 모인 민심이지만 최소한의 균형을 잃은 역학관계가 드러내는 정치의 문제도 차츰 국민의 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물론 아무리 야권이 수의 힘을 앞세워 막나가는 정치를 한다 해도 보수정치가 그것을 견제할 자격을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면 막을 길은 없다. 윤석열 정부 2년을 거치면서 보수 정치는 단순하고, 무식하고, 이분법적 과거 이념에만 갇혀있는, 비전 없는 세력으로 폄하되고 말았다. 사회를 이끌 한 날개가 이런 시선을 받게 된 상황은 정치 구도의 균형을 붕괴시킨다는 점에서 여러 우려를 낳는다.
보수는 무엇보다 더 국민의 신뢰 회복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선거에서 민주당의 승리가 상식처럼 되고, 보수정당의 승리는 이변으로 꼽힌다. 4050세대의 콘크리트 지지에 맞서기에 보수의 정치적 서사는 너무도 구태의연하고 시대를 쫓아가지 못한다. 새로운 보수의 내용이 갖춰지고 새로운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는 구조적 변화가 따르지 못한다면 ‘보수 필패’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다.
정치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 민심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출렁인다. 승자는 겸손과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고, 패자는 성찰과 변화의 노력을 할 때 다음 번 승리를 기약할 수 있다. 2026년 6월엔 지방선거가 실시되고 2027년 3월엔 대통령선거가 있다. 오늘날 참패한 보수는 다음 선거에서 어떤 모습으로 국민 앞에 나타날지 고민해야 한다. 와신상담의 시간이 필요한 때다.
신동아 5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