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최대의 도시, 재작년까지만해도 이 나라의 수도였던 ‘알마티’(Almaty)는 ‘사과의 할아버지-사과의 원조’라는 의미인 ‘알마아타’(Alma Ata)에서 유래하였다. 이 사과의 고장은 서울에서 비행기로 불과 6시간의 거리에 있다. 여기에서 다시 서쪽으로 6시간 정도 가면 파리나 프랑크푸르트에 도달한다. 말하자면 알마티는 서울과 구라파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지정학적 전략적 중요성은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는데도 일반인들은 이 나라를 잘 모른다. 소련 해체에 따라 탄생한 신생독립국이며, 아직 대외경제 규모가 작고 관광 산업도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동과 서를 이었던 실크로드의 ‘천산 북로(초원로)’를 껴안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발전잠재력이 매우 크다. 그만큼 중앙아시아 지역정세를 주도할 핵심국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잇는 21세기 신실크로드를 구축해나갈 것이다. 또한 이 나라에 몸담고 있는 고려인들도 상당한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카자흐스탄과 더욱 긴밀한 우호·친선협력관계를 쌓을 필요가 있다.
광활한 국토, 풍부한 자원, 다민족 국가
카자흐스탄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연상한다. 인도 면적과 비슷한 광대한 국토, 다민족 국가, 동북쪽 알타이 산맥과 동남쪽 천산산맥의 만년설, 광활한 초원과 사막, 유목민이 살아온 땅, 서쪽의 카스피해와 철갑상어, 극히 낮은 인구밀도, 풍부한 지하자원, 죽어가는 아랄해,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의 비극과 환경 재앙, 바이코누르 우주사업기지 등이다.
카자흐스탄은 북쪽으로 러시아, 동북쪽으로 중국, 남쪽으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 둘러싸인 중앙아시아의 거대한내륙국이다. 국토면적이 272만㎢로 한국의 27배이다. 석유·천연가스를 포함하여 각종 지하자원이 많다. 흔히 “원소주기율표상의 거의 모든 원소가 상업적으로 채취될 수 있을 만큼 풍부하게 부존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구가 적고 국토 대부분이 초원 내지 불모지다. 북부지방은 겨울에 영하 40。까지 떨어진다. 강우량도 넉넉하지 못하여 메마르다. 그러나 소위 ‘실크로드 천산 북로’로 불리는 지역에는 겨울의 풍부한 적설량과 만년설로부터 일년 내내 녹아 내리는 수자원을 가지고 있어 비옥한 목초지와 경작지가 있다. 그래서 이곳을 ‘실크로드 초원로’라고 부르며, 더 메마른 천산산맥 남쪽 루트를 ‘실크로드 오아시스로’라고 부른다.
카자흐스탄은 130여 민족이 어울려 사는 대표적인 다민족국가다. 1991년 독립당시 1700만이던 인구가 지금은 1500만으로 줄었다. 인구유출 때문이다. 러시아계 160여만명, 게르만족 60만명, 우크라이나 33만명, 타타르 7만, 백러시아 6만, 유대인 1만 명등이 줄었다. 몽골, 중국 등지에서 카자흐족이 흘러들어왔으나 빠져나간 인구에 견주면 아주 적다. 그래서 1994년 시점에는 카자흐 45%, 러시아 36%, 우크라이나 5%, 게르만 4%이던 인구 구성이 지금은 카자흐 53%, 러시아 30%, 우크라이나 4%, 게르만 2.5%로 바뀌었다. 게르만족과 유대인의 경우, 독일 또는 이스라엘로 귀화한 숫자보다 이들의 감소 숫자가 적은데, 이는 독일인, 유대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민족, 흔히 ‘고려인’으로 부르는 우리 동포는 10만명 정도이다. 인구 규모로는 9번째로 전체 인구의 0.7%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이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민족문화에 대한 끈질긴 애착, 그리고 한국의 국제적 위상 향상으로 이들의 존재는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카자흐 민족의 생성과 역사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역은 8세기부터 터키인이 정주하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부터는 몽골인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카자흐’는 유랑자라는 의미고 ‘스탄’은 땅 혹은 나라라는 의미다. 결국 역사적으로 유목민 나라였던 것이다.
15세기 중엽 몽고 발흥과 더불어 이지역 북쪽 시르다리아강 유역에 살던 카자흐 민족은 천산(天山)산맥 북부지역(지금의 카자흐스탄과 중국 신장성의 경계)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카자흐스탄 중앙 초원지대로 진출하였다. 18세기 후반 제정러시아가 진출하기 시작하였으며, 1860년대에 전 카자흐스탄 지역이 러시아경제에 편입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베리아철도 부설(1891~1904년)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1916년 대러시아 반란, 1917년 반소 폭동이 있었으나 1918년 소련은 이 지역을 무력으로 완전히 장악하고 소비에트정부를 세웠다.
1925년 카자흐스탄자치공화국으로 개칭했다가, 1936년12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편입했다. 1991년 구소련 해체과정에 국명을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변경하고 91년 12월16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우랄-알타이어 계통인 카자흐말을 국어로 규정하고 러시아말을 공용하기로 헌법상 규정하였다.
독립 직후 서방세계의 관심은 카자흐스탄 영내에 배치된 SS-18미사일에 장착된 핵탄두 1400여기와 전략폭격기 TY-95MC 40대에 비치된 240기의 핵미사일 해체문제였다.
카자흐스탄은 독립과 동시에 미국, 러시아, 중국 다음으로 세계4위의 핵무기 보유국이 됐던 것이다. 그후 미국의 대규모 경제원조와 기술 지원, 그리고 러시아, 영국의 안전보장, 중국 및 프랑스의 불가침 보장 등을 기초로 카자흐스탄은 핵무기 폐기와 이전에 동의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핵무기급 핵물질이 카자흐스탄 영토에서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현재 가동 중단 상태지만 카스피해 연안 도시 악타우에 세워진 군사 목적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에는 이미 생성된 많은 양의 플루토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원자로 해체 문제와 플루토늄 처리 문제는 국제적 현안이다.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는 구소련 시절 세계 최대의 핵실험장이었다. 이 지역에서 1949년 최초의 핵실험 이후 총459회 핵실험이 있었고, 이중 113회는 대기중에서 실시되었다. 이로 인한 인근 주민들의 참상과 환경 재앙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해자를 지원하고 피폭 지역을 복구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인도적 관심과 지원이 계속되고 있으나 결코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 중남부에 위치한 바이코누르(Baykonur) 로케트 발사기지는 아직도 러시아의 우주계획이 실행되고 있는 현장이다. 우주정거장 ‘미르’호도 1986년 여기에서 올라갔으며, 공급품과 교대 우주인도 계속 이 곳에서 보내졌다. 지난 4월 초에도 미르호 수리 및 과학실험 등을 위하여 우주인 2명이 소유즈 로켓을 타고 ‘미르’우주정거장 28번째 승무원으로 이 기지에서 날아갔다. 이는 소련 해체 후 기능 정지 위기에 놓였던 ‘미르’를 민간자본 참여로 자본주의적 생명연장술을 시술한 것이었다. 그 결과 미르호 수명은 2~3년 연장되었고, 그 동안 우주촬영, 기타상업용 실험이 추진될 예정이다.
미르호에는 아직도 27개국에서 제작한 11.5톤의 과학·기술장비가 탑재되어 있으며, 지금까지 1만6000회의 과학실험이 진행됐다. 바이코누르 기지는 이제는 러시아가 카자흐스탄으로부터 빌려쓰는 형식으로 이용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의 기지임차료 지불연체 및 수차례의 로켓 발사 실패로 안전과 환경측면에서 양국간 갈등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이 나라에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원자력·우주과학분야 과학자·기술자들이 많고 상업적인 인센티브만 제공된다면 활용 가능한 기술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카자흐스탄 공화국
1989년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임명한 콜빈(Kolbin) 공산당 제1서기가 반소 소요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당시 총리 나자르바예프가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 91년12월 대통령에 당선된 그는 작년 1월 재선되었다. 그의 임기는 2006년1월까지다. 1991년12월 러시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3개 슬라브계 공화국 정상이 소비에트연방 종식을 선언하고 ‘슬라브연합(Slavic Union)’을 창설하자, 나자르바예프대통령은 이에 대응하여 중앙아시아 회교5개국 정상회담을 주도하고 이들을 설득하여, 11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CIS)을 출범시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는 구소련 해체 시점에 슬라브 계통 연합과 터키·이슬람계인 터키연합이 대결구도로 치닫는 위험한 상황을 방지했다. 또한 유럽 대 아시아 축의 대결구도가 벌어지는 상황도 막았다. 21세기 목전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진영 몰락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이루어낸 정치외교적 성과는 세계 역사가 기억해야 할 20세기의 위대한 업적이다.
그는 계속 활발한 정상외교를 펼치고 있으며, 중앙아시아 지역안보협력 구축에 각별히 노력하고 있다. 아시아신뢰구축회의(CICA)를 제창하여 주도하고 있으며, 중국과 러시아를 포괄하는 ‘상하이 5국 체제’를 이끌고, 4월 말에는 도빈스클럽과 공동으로 ‘유라시아 경제정상회의(Eu rasia Economic Summit 2000)’를 알마티에서 개최하였다. 그는 소탈한 성격, 유연한 사고, 개방과 민족화합, 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추구하는 탁월한 정치지도자이다. 만능 스포츠맨이어서 CIS지도자 중 유일하게 골프도 치며 스키 실력도 선수급이다.
또 나자르바예프대통령은 90년(11.23 ~11.30)년과 95년(5.15~18) 두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 사회에 대해서도 호의와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내륙과 카스피해에 풍부한 석유·가스 자원이 있다. 기타 다량의 철 및 비철금속과 농축산물을 대량 수출할 수 있는 광활한 땅도 있다. 특히 한반도 면적의 2배 정도 되는 카스피해에는 현재 400억 배럴의 석유매장이 확인되고 있으며, 많게는 2000억 배럴까지도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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