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총리 겸 노동당 당수였던 고든 브라운. 최근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공직에서 사퇴했다.
영국의 뉴스, 특히 BBC 뉴스는 테러나 사망사고 같은 사건이 아니면 대체로 유쾌하게 보도하는 경향이 있다. 뉴스를 심각하게 보도하기보다 영국인 특유의 블랙유머를 섞어 보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만 명의 영국인이 갈 곳을 잃고 해외의 공항과 거리를 떠돌고 있는 와중에도 BBC 뉴스 화면에서는 소풍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군함 뱃머리에 나란히 앉아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군인과 민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행기 대신 렌터카와 배와 기차를 타고 3박4일 동안 영국으로 달려온 여행객은 “아이고, 영국인이 이 정도 어려움이야 극복 못하겠습니까?”하고 함박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사실 이 사상 초유의 항공 대란은 우리 집에도 약간의, 아니 적잖은 파장을 남기고 갔다. 영국에서 열리는 학회에 출장 왔다가 글래스고에 들른 남편이 그만 일주일이나 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남편은 한 시간에 한 번씩 공항 상황을 체크하며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아이들은 “화산이 한 달쯤 계속 터졌으면 좋겠다”며 그 상황을 즐겼다. 딸 희원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남편을 본 희원이 친구 엄마들은 “어머, 희원이 아빠가 화산재 때문에 한국에 못 가고 희원이네 가족이랑 같이 있더군” “나도 희원이 아빠 봤어. 요즘 희원이 엄마가 그래서 좀 편하겠네” 하면서 유치원 문 앞에서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계 어디나 아줌마들의 화젯거리는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꿀 때가 됐다”

영국의 신임 총리가 된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
항공 대란이 잠잠해지기도 전, 영국은 선거 열기에 들썩이기 시작했다. 4월6일 고든 브라운 총리는 총리공관인 다우닝가 10번지에 모여든 노동당 내각 멤버들 앞에서, 한 달 후인 5월6일에 영국 총리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진짜 선거운동 기간은 한 달에 불과했지만 이미 올해 초부터 영국은 총리선거 무드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BBC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국 언론이 주저 없이 차기 총리로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를 지목했다.
내각제인 영국의 총리 선출 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총 650석인 하원의원(MP·Member of Parliament) 선거를 실시해서, 하원의 과반수인 326석 이상을 차지한 정당이 집권 내각을 구성한다. 그리고 승리한 당의 당수가 총리가 되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를 한 번에 해치우는 셈이다. 그리고 내각의 모든 멤버는 하원의원으로 구성된다. 자연히 권력은 내각에 집중된다. 재미있게도 집권당에 내분이 일어나 당수가 바뀌면 선거 없이 총리가 바뀔 수도 있다. 현 고든 브라운 총리가 바로 이런 경우다. 1997년 노동당의 대선 승리로 집권한 토니 블레어 총리 겸 노동당수가 2007년 노동당의 정책 실패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정권의 2인자였던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Chancellor)이 당수 경선에서 승리해 총리 자리에 올랐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 아니 올해 초부터 영국의 여론은 ‘올해 안에 총리가 바뀔 것’이라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매일 저녁 10시부터 방영되는 BBC 뉴스를 빠짐없이 보는데, 뉴스를 보고 있으면 현 총리가 고든 브라운인지, 데이비드 캐머런인지 헛갈릴 정도로 영국 언론이 입을 모아 캐머런과 보수당을 지지했다. 여론이 보수당 쪽으로 움직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바꿀 때’가 됐다는 점이다. 300년 이상 양당내각제를 유지해온 영국인의 균형감각은 한 정당이 오래 집권하면 본능적으로 다른 쪽 정당으로 기운다. 노동당은 1997년 이래 13년째 집권하고 있는 상황이다. 영국 유권자들의 ‘내각제 DNA’가 ‘이젠 바꿀 때’라는 여론으로 수렴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