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한국인들은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변경하는 한편 한국에 대해서도 대북정책을 바꾸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한미 양국의 정책은 각기 독립적으로 수행될 것이고, 동시에 강력한 협조체제 하에서 수행될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더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미국의 동향을 살필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급물살을 타고 왔고, 앞으로 어떤 돌출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남북관계의 기나긴 여정에서 미국 차기 행정부가 보일 성향과 정책만큼 중요한 변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대릴 플렁크(Daryl Plunk) 미 헤리티지재단 아시아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은 미국 워싱턴에서 몇 안되는 한반도문제 전문가들 중에서도 특히 한국을 잘 아는 인물이다. 그는 1978년부터 84년까지 평화봉사단원으로 경남 거창에서 2년간 중학교 영어교사를 했고, 그 후부터 워싱턴의 행정부와 의회 주변에서 줄곧 한국문제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특히 그는 이번 부시 행정부의 핵심 싱크탱크 역할을 한 헤리티지 재단에서 17년째 한국통으로 활동해오고 있다. 보수파 공화당 사람들에게 한반도 문제를 보는 시각의 논리적 틀을 제공하는 일을 해온만큼 그들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부시 새 행정부가 그릴 한반도정책의 밑그림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1월10일 오후, 그가 묵고 있는 서울시내 호텔에서 이뤄졌다.
차기 주한미국대사 후보?
─차기 주한 미국대사로 누가 내정될 것인가에 대해서 벌써부터 이런저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언론에서 거명된 인물들로는 플렁크씨가 몸담고 있는 헤리티지 재단의 에드윈 퓰너 이사장, 더글라스 팔 아시아태평양 정책연구소(APPC) 소장, 레이건 행정부에서 안보보좌관을 지냈던 리처드 앨런, 찰스 카트먼 한반도 평화회담 특사, 토머스 허바드 전 국무부 동아태담당 부차관보 등이 있는데, 일각에선 플렁크씨도 유력한 후보로 꼽더군요.
“(웃으며) 그 얘기 벌써 들었어요? 그러나 결과는 실제로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지 않겠어요? 하지만 각료급 아래 직책은 아직 인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로서야 큰 영광이겠지만, 그렇다고 제가 운동하고 다니지는 않아요(웃음).”
─한국 입장으로는 누가 되더라도 플렁크씨처럼 한국을 잘 아는 분이 주한 미국대사로 오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그러나 사실 미국에서 한국을 잘 아는 분이 많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한국은 매우 중요한 우방임에도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지금 한미관계는 변화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국 자체가 변화 속도가 무척 빠른 나라인데다가 남북관계 또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지 않아요? 이런 일들에 적절하게 대응하려면 차기 미국대사는 한국을 잘 아는 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영호남의 지역정서를 이해할 수 있고, 한국내 반미감정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인물, 한국사회의 위에서 아래까지, 좌에서 우까지 두루 살필 수 있는 인물로 결정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한미행정협정(SOFA) 개정문제, 노근리 사건 등으로 최근 특히 심해진 한국 내의 반미감정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자가 “사실 한국 고위층들은 대부분 친미주의자가 아니냐”고 농반진반 맞장구를 치자 그는 “동의한다”면서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미국인들은 반미감정에 대해서 자칫 잘못 이해하기가 쉽다”고 덧붙였다.
─지금 서울에선 부시 새 행정부의 한반도정책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걱정도 많은 것 같은데….
“제가 지난 1년 사이에 이번이 14번째로 서울에 오는 건데, 한달쯤 전부터 특히 그런 얘기를 많이 듣고 있어요. 그러나 이 자리에서 제가 분명하게 밝히고 싶은 것은, 한국인들은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공화당이 민주당보다 한국에게 훨씬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이건 그동안 제가 만난 한국 친구들마다 해온 얘기입니다.”
그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 면에서의 차이에 대해서 길게 설명했다. 예컨대 공화당은 자유무역의 강력한 옹호자이지만, 철강·자동차·전자 등 미 국내산업에 대한 보호주의 색채도 갖고 있다, 공화당은 또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이며, 부시 대통령은 외교정책에서 보다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추구할 것이다 등….
─공화당이 국제주의자라고 했지만, 예를 들어 부시 행정부가 코소보 등 동유럽에서 미군을 철수시킬 거라는 얘기가 나왔잖아요?
“(잠깐 뜸을 들이다가) 공화당은 국제주의적인 성향이 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력의 역할에 대해서 민주당과는 다른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평화유지 활동도 미국의 국가 안보이익을 고려해서 개입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거지요. 예컨대 코소보의 경우에도 그 지역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중요한지를 먼저 판단해야겠지요. 내 생각을 말한다면, 코소보는 미국의 중요한 국가이익이 걸려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북한에 엄격한 상호주의 적용할 것”
─그러나 한국은 코소보와는 다르다는 말이지요?
“한국은 분명 미국의 핵심적인 국가이익이 걸린 지역입니다.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에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다는 계획이 나오기도 했지만,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공세적인 외교정책, 강력한 국가방위를 선호해왔습니다. 특히 대북정책과 관련해서 공화당의 대북정책은 민주당 때보다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물론 저는 지금 부시 대통령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고,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아직 윤곽이 드러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튼 부시 행정부는 일단 대북정책을 재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갈 겁니다. 의회의 공화당 의원들이 이걸 오래 전부터 주장해왔거든요.”
그는 또 보수계열의 싱크탱크로서 해리티지 재단이 그동안 해온 일을 강조하며, 향후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헤리티지 재단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일례로 헤리티지 재단은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가 나온 이후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는데, 무엇보다 한국 전문가가 아닌 인물이 대북정책을 주도해온 게 큰 문제였다는 것.
“제네바 합의를 협상했던 미국측 대표는 밥 갈루치 국무부 차관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핵비확산 분야의 전문가이지 한국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그런 인물이 협상에 임했으니 제네바합의 자체에 여러 가지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된 겁니다. 그래서 헤리티지 재단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대북정책을 포괄적으로 다룰 고위급 대표를 임명하라고 줄곧 요구해왔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헤리티지 재단은 소위 페리 프로세스가 나오는 데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어요.”
─아무튼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앞으로 어떻게 윤곽이 그려지게 될까요?
“일단 재검토를 거친 후 일부 조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특히 한국의 대북정책, 즉 햇볕정책과 관련해서 많은 한국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부시 대통령이 미국의 대북정책을 변경하는 한편 한국에 대해서도 대북정책을 바꾸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한미 양국의 정책은 각기 독립적으로 수행될 것이고, 동시에 강력한 협조체제 하에서 수행될 것입니다.
사실 한국의 대북정책이 미국의 대북정책과 뉘앙스라든가 특징적인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건 아주 당연한 얘깁니다. 남한은 북한과 맞닿아 있어요. 그런 점에서 서울측이 북한에 대해서 좀더 유연하고 타협적이며 개방적인 정책을 내세우리라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에요.
한편, 워싱턴의 대북정책은 앞으로 보다 엄격한 기준에서 상호주의를 적용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는 상호주의라는 말이 핵심이 될 거예요. 미국은 대북 협상에서 절대적인 우위에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북한은 미국을 원하고 있고, 그 사실 자체가 우리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란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들을 함께 지칭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북한이 정중한 태도로 우리 쪽으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북한이 남한과의 관계 진전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 우리는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돼요. 선제 공격같은 것은 필요없습니다. 부시 행정부가 북한에 대해서 소위 예방적 차원의 사전 공격을 가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부시 행정부가 한반도정책을 재검토하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까?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미국의 외교정책에서 우선순위가 매우 높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중동, 중국, 일본, 아마 그 다음이 한국이 되지 않겠어요? 한국은 경제적으로 미국의 7번째 교역상대국입니다. 또, 독일과 일본 다음으로 많은 미군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어요.”
최근 보도에 따르면, 부시 새 행정부는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지어주기로 한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를 고쳐 경수로 1기 대신 북한 각지에 화력발전소 6기를 지어주는 것을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이 제안을 작년 한·미·일 대북정책 조정그룹(TCOG) 회의에서 이미 제기했고, 부시 행정부가 이 안을 이어받아 검토하리라는 것. 정권교체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새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예전과는 다르리라는 것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북한에 경수로 대신 화력발전소를 지어주자는 얘기는 사실 몇 년 전부터 미국의 일부 전문가들이 제기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사실 경수로 대신 화력발전소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는 제가 쓴 헤리티지재단 보고서에서 처음 나온 겁니다.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서명된 지 2주일이 채 못됐을 때 제가 그 보고서를 썼어요. 그 때부터 저는 ‘경수로는 잘못된 형태의 지원이며, 재래적인 에너지 지원 형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무튼 이 문제도 앞으로 부시 행정부에서 깊이있게 검토되리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결정이 어느날 갑자기 미국 독단으로 이뤄지지는 않을 겁니다. 워싱턴은 반드시 서울과 충분한 협의를 거칠 겁니다.
화력발전소 안은 북한도 이득을 볼 수 있는 방안이라고 봐요. 사실 정치적·외교적 측면을 떠나서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북한은 경수로에서 생산된 전력을 타 지역으로 보내는 송·배전 설비 능력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경수로를 지어봤자 쓸모없는 것이 돼버릴 가능성이 많아요. 또, 북한에 핵기술을 이전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뜨거운 이슈가 될 소지가 커요. 경수로 자체는 남한이 건설하지만, 그 라이선스는 미국이 갖고 있거든요.”
“남북대화가 미북대화에 앞서야”
─지금까지 많은 한국인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겠지만, 작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의심할 나위없이 역사적이고 긍정적인 진전이라고 봅니다. 그런 일을 성사시킨 김대통령에 찬사를 보냅니다. 저는 한국정부 초청으로 김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참석했었지만, 97년 12월 선거 다음 날 김대통령이 한 연설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그 때 김대통령은 ‘서울은 북한을 다루는 데 있어서 선도적인 자리를 되찾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김대통령이 미국에 머무르던 1983년부터 그분을 알고 지냈습니다. 그때 그분이 미국에 온 지 1주일이 채 못 됐을 때 만났던 것 같아요. 그 후 우리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눠왔는데, 그래서 저는 그 분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어요.
클린턴 행정부의 한 가지 문제는, 제네바 합의에 서명하는 일에 너무 열중하느라 서울을 뒷자리에 앉게 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서울과 평양 사이에 미국이 서는 구도는 평양이 원해 오던 바로 그 구도예요. 이렇게 됐기 때문에 1994년부터 작년 6월 정상회담 전까지 남북한 간에 실질적인 협상이 이뤄지지 못했던 겁니다. 클린턴 행정부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바로 그것, 남북대화를 6년간이나 지연시켰다는 점입니다. 김대통령은 당선 후 이런 상황을 바로잡고, 서울이 다시금 앞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 앞자리를 양보하는 것에 대해서 미국인들은 불만이 없나요?(웃음)
“아니오. 이건 제 생각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공화당원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해요. 우리는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에서 평화에 이르는 길은 평양과 워싱턴 사이에 나 있는 게 아닙니다. 서울과 평양간에 나 있는 겁니다. 물론 미국은 중요한 부분이지만, 긴장완화는 전적으로 남북간의 대화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겁니다. 바로 이 점을 클린턴 행정부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실수를 저지른 겁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현 시점에서 볼 때 솔직히 말해서 정상회담의 결과가 약간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건 전적으로 평양 탓입니다. 김정일은 실제적인 긴장완화를 위한 조치를 조금씩 조금씩 해나갈 수밖에 없는 처지이거든요. 제한적인 이산가족 상봉, 문화교류, 금강산 관광…, 이런 일들은 물론 바람직한 일들이지만, 아직 충분하지는 않아요. 우리는 군사문제를 논의하고, 1991년 총리급회담에서 합의했던 내용을 실행에 옮기는 단계까지 가야 합니다.”
“남북기본합의서 실천돼야”
─한국의 일부 전문가들 중에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반비례 관계, 서로 상충적인 관계가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다시 말해서 미국과 한국, 일본은 모든 카드와 지렛대를 다 갖고 있어요. 북한은 냉전시절의 경쟁에서 이미 졌습니다. 북한이 남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거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서 진전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게 있는데, 레이건 시절에 미국은 남북한 교차승인 구도를 지지했었습니다. 기억하세요? 소련과 중국이 서울 정부를 승인하면, 미국과 일본은 북한정부를 승인하겠다는 게 당시 미국의 정책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모스크바와 베이징은 오래 전에 서울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문제가 없는 겁니다. 물론 연락사무소 등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미북관계 정상화도 남북대화 진전에 연계돼서 진행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몇몇 한국 전문가들은 6월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주변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두 지도자가 사상 처음으로 만났다는 건 패러다임의 변화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남북관계의 의미있는 진전은 매우 더디고 점진적으로 이뤄져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예컨대 90년대 초반 남북 총리급회담에서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됐을 때에도 사람들은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됐다고 했습니다.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들 했어요. 그런데 그 후 어떻게 됐어요?
지금 김정일은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성급한 개방이 체제를 붕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김정일은 매우 서서히, 점진적으로 나올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총리급에서 대통령급으로 한 단계 올라오는 데에 10년이 걸렸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다음 단계, 즉 남북이 군사문제를 논의하는 단계까지 가는 데에는 몇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비무장지대에서 양측이 병력을 철수하고, 군사정보를 교환하고, 군사당국간에 교류하고, 궁극적으로 병력감축까지 이어지는 데에는 또 몇 년이 걸릴지 몰라요. 물론 그 사이에 북한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한·미·일 공조체제는 앞으로도 계속 중요한 과제가 되겠지요. 이와 관련해서 요즘 몇몇 사람들은 김대중 정부와 부시 새 행정부 사이에 인적 네트워크가 약하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저만 해도 개인적으로 김대통령 뿐 아니라 한국 정부 각료와 중진급 국회의원들을 여러분 알고 있습니다. 또, 김대통령과 측근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헤리티지 재단을 방문해왔고, 그 때마다 민주당이건 공화당이건 의회 지도자들이나 행정부 인사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지금까지 한·미·일 공조는 아주 잘돼왔어요. 그 점에서는 클린턴 행정부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물론 잘될 겁니다.”
─그렇지만 김대통령은 최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은근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김대통령은 1월 초 미국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자신의 햇볕정책을 계속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곧 워싱턴을 방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저도 그 보도를 봤지만, 한국 언론과는 조금 다르게 해석합니다. 저는 김대통령이 말 그대로 일관된 메시지, 즉 미국이 북한의 문호를 여는 데에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란다는 취지라고 봅니다.”
─하지만 몇몇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선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의 독주에 대해서 미국이 어느 정도 불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미국측은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남북관계가 정말로 진전되고 있다는 시그널로 본다, 이런 얘기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한미관계에 대한 그런 걱정들은 과장돼 있어요. 미국의 정책결정자들, 특히 의회 쪽에는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해서 다소간 비판적인 사람들이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김대통령의 대북정책 기조에 대해서 워싱턴은 우려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작년 6월의 정상회담은 너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김대통령이 그걸 성사시켰고, 이제 그걸 진전시킬 책임은 김정일에게 있습니다. 워싱턴에는 남한이 북한에 너무 많은 것을 준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넓게 보면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북한이 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오도록 달래는 일입니다.”
─한미 양국의 대북정책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북한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겁니까(웃음)?
“가장 시급한 목표는 역시 긴장완화가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왜 미국이 37000명의 군인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매년 20억 달러 이상의 예산를 한국에 지출하겠어요? 미국도 이 곳의 상황이 개선되어서 주한미군의 대부분을 철수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한 가지 관심사는, 한국과 군사관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동북아에 미 군사력을 계속 주둔시키는 것입니다. 동북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은 미국의 국가이익에도 중요하지만, 지역적 이익에도 부합되는 일입니다. 미국이 지역의 안정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일반론적인 생각이지요. 만약 아시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면 일본의 재무장, 중국의 군사력 강화 등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어요.”
“NMD는 엄포용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중(對中) 관계도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넓게 보아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하부구조(sub system)가 아니냐, 이렇게 인식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지난 몇 년 사이에 미중관계가 ‘전략적 동반자관계’라고 할 정도로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미국의 대중 정책에는 불투명한 측면이 많은 게 아닌가…, 이를테면 중국을 21세기 미국의 최대 라이벌로 인식하는 시각 말입니다.
“나는 미국의 한반도정책이 대부분의 경우 미국의 대중정책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두 가지는 긴밀하게 연결되지만, 통상적인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정책을 수행할 때에는 중국을 하나의 요소(component)로 인식합니다. 상부구조, 하부구조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부시 새 행정부의 대중정책와 관련해서 부시 당선자는 대만에 대한 안보공약을 준수하겠다고 말했고, 중국에 대해서는 클린턴이 말했던 ‘전략적 파트너’ 같은 용어가 다시 나올 것 같지는 않아요. 사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은 미국의 군사적 적대세력이었고, 중국의 군사력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증강되고 있습니다. 이건 앞으로 미국에게 큰 도전이 될 거고요. 만약 중국이 아시아의 패권을 추구하면서 미국을 이 지역에서 축출하려고 한다면, 미중 관계는 정말 심각해지겠지요.”
─부시 행정부는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무릅쓰고 정말로 국가미사일방위(NMD)를 추진할까요?
“부시 당선자는 추진하겠다고 말했어요. 물론 북한이나 중국이 좋아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건 미국에게는 원칙의 문제입니다. 북한이 됐든 혹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어떤 잠재 적국이 됐든, 미국은 NMD가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건 합리적인 결정입니다. 또, NMD는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입니다.”
─가령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전략방어구상(SDI)을 추진했었습니다만, 일각에선 그게 당시 기술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고 속뜻은 다른 데에 있었다, 즉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의 SDI에 대응해서 엄청난 돈을 쏟아붓게 만듦으로써 결국 붕괴까지 이르게 한 전략이었다는 분석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점에서 NMD가 일종의 SDI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얘기예요. 지금의 NMD는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핵강국의 공격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겠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제가 그 분야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NMD로는 적의 대규모 핵공격을 막을 수가 없어요. NMD는 기본적으로 테러리스트 그룹이나 불량국가가 발사하는 한두 발의 미사일을 막자는 겁니다. 아직 완전히 개발되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장래에 기술적으로도 가능해질 겁니다. 그리고 충분히 말이 되는 얘기예요.”
─현재 미북 관계의 가장 큰 현안은 아무래도 북한 미사일 문제일텐데요.
“미사일 문제는 미북관계의 진전을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산입니다. 북한이 미국까지 사정범위로 두는 미사일 개발 능력을 갖고 있는 한 미국은 결코 안심하고 있을 수 없어요. 그렇다고 미국이 미사일 포기의 대가로 북한에게 수억 달러를 지불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행정부나 미 국민들도 그렇지만, 예산 지출에 권한을 쥐고 있는 의회가 결코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을 겁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클린턴 대통령의 평양방문 얘기가 나왔을 때 이미 양측 사이에 최대 현안인 미사일문제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합의가 이뤄져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이 좌절된 뒤 그 내용을 부시 새 행정부가 승계받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민주당 행정부가 대북 협상에서 어떤 합의점에 도달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걸 얻기 위해서 노력은 했겠지요. 아무튼 저는 클린턴 대통령 방북에 매우 비판적이었어요. 지금까지 북한과의 협상에서 우리가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결코 서두르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클린턴 방북과 관련해서 제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북한이 사전에 모종의 약속을 해주고 나서 정작 클린턴이 방북했을 때 그 약속을 뒤집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그건 시기적으로 전혀 적절하지 못한 계획이었어요.”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는 것과 관련해서, 한국에서는 평화협정이 남북간에 체결돼야 한다는 주장인데 반해 북한은 미북간에 평화협정을 주장해왔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국과 북한 간에는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을 겁니다. 한국전쟁 때 미국은 북한에 대해서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고, 당시 전쟁 당사자는 유엔이었어요. 기술적으로 말하면 현재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미 군사력도 유엔군으로 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문제의 해결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부적인 사안에 따라서는 유엔이 관여할 부분이 있는 등 타협이 필요하겠지요. 그렇지만 관건은 남북이 서명하는 평화협정이라고 봐요. 그리고 여기에 미·일·중·러 등 주변국들이 이를 보장하는 협정을 맺는 형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미북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은 클린턴 시절에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일입니다.
제네바 합의가 남긴 문제점 중 또 하나는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과 양자간 협정을 맺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준 거라고 봐요. 이 때문에 북한은 94년 이후 정상회담 전까지 남한을 무시해왔던 거구요. 94년 제네바 합의가 서명된 얼마 뒤에 제가 뉴욕에서 북한 외교관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북한과 미국은 다음 단계로 평화협정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급격한 변화는 없다”
─최근 남북관계와 관련해서 한국 내의 분위기를 잘 알고 계시지요? 일각에선 남북대화보다 남남대화가 더 어렵다고 할 정도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 상황이랄까, 혼란감이 심한데…. 제3자로서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한국의 그런 분위기는 아마도 이데올로기보다는 정책과 더 깊은 관련이 있겠지요. 김대중 대통령은 다수의 지지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이 아닙니다. 부시 당선자와 마찬가지 입장이지요. 그래서 부시 대통령에 대해서 거의 자동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김대통령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러나 김대통령이 지금 북한을 다루고 있는 방식은 그가 10년 전부터 꾸준히 얘기해오던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김대통령은 1995년 헤리티지재단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햇볕정책의 대체적인 내용에 대해 연설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김대통령은 한국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에 대해서 매우 일관된 입장을 견지해왔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김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정치적인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봐요. 김대통령이 남북관계에서 정말로 긍정적인 진전을 이뤄내면, 그런 비판들은 사그라질 겁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10년 전만 해도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기를 바랐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거꾸로 공화당의 집권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국인들은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앞에서 얘기했듯이 공화당은 민주당보다 훨씬 나은 한국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인들도 금방 그걸 깨닫게 될 거예요. 다시 강조하지만 정책의 급격한 변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