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여행 정보지였던 ‘미쉐린 가이드’
식당 정보 실으며 미식업계 스타로 진화
한국 미슐랭 레스토랑 34곳으로 세계 19위
별 따내고 40%가 문 닫아
지난해 3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열린 프랑스 미쉐린 가이드 시상식에서 미슐랭 ‘3스타’를 받은 한 셰프가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기뻐하고 있다. [뉴시스]
미슐랭 스타는 그만큼 깐깐하고 권위 있는 평가를 거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우수한 등급인 ‘미슐랭 3스타’는 모든 셰프의 꿈이다. 1스타, 2스타를 넘어 3스타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으니 진정한 ‘요리 계급 전쟁’이다. 국내에선 2023년 기준 안 셰프가 과거 운영한 한식 레스토랑 ‘모수’가 유일하게 3스타를 받았다고 한다.
세계인의 입맛은 제각각이지만 미슐랭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미식가의 ‘바이블’이 됐다. 경쟁이 치열한 요식업계를 뒤흔드는 강력한 존재다. 그렇다면 미슐랭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미슐랭 스타를 만든 건 타이어 제조기업이다. 흰색의 울퉁불퉁한 귀여운 몸매가 돋보이는 마스코트 ‘바벤덤’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타이어 기업 미쉐린사다. 회사명 ‘Michelin’은 원래 프랑스어로 ‘미슐랭’이라고 발음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기업의 한국 법인은 공식 명칭을 영어식으로 ‘미쉐린’, ‘미쉐린 가이드’라고 표기하고 있다.
“자동차 타려는 욕구를 자극하라”
1889년 앙드레와 에두아르 미슐랭 형제가 프랑스 중부 퓌드돔주의 클레르몽페랑에 ‘미쉐린 타이어 회사’를 설립했다. 미쉐린사는 지금은 일본의 브리지스톤, 미국의 굿이어와 함께 3대 다국적 타이어 기업으로 꼽힌다. 하지만 설립 초기만 해도 사정이 달랐다. 자동차 시장 규모가 워낙 작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프랑스엔 자동차가 3000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자동차가 워낙 없다 보니 타이어도 많이 팔리질 않았다.
자동차 소비 인구가 늘어야 타이어도 잘 팔리는데 사람들은 자동차를 좀처럼 타질 않았다. 도로 사정이 나빠 운전하기 위험했다. 지도도 잘 갖춰지지 않아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가기도 힘들었다. 요즘 전기차 충전소 부족이 문제가 되듯 당시엔 주유소가 턱없이 모자랐다. ‘굳이 비싼 비용을 들여 위험하고 불편한 차량 운전을 하느니 마차가 낫다’고 판단하는 이가 많았다.
‘미쉐린 가이드’가 처음 발간된 1900년 당시 에디션. 빨간 표지가 눈길을 끈다. [미쉐린 가이드 인스타그램 캡처]
미슐랭 형제는 이 책에 타이어 제품뿐 아니라 주유소 위치, 도로 법규 등의 정보를 담았다. 실제 1900년 초판 가이드 서문에서 앙드레는 “운전자에게 프랑스 여행에 필요한 모든 정보, 즉 주유소, 자동차 수리소, 숙박 및 식사 장소 등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미쉐린 가이드를 보기 위해 이 회사의 타이어를 찾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차량 수는 3000대도 안 됐지만 미쉐린 가이드는 이보다 10배가 넘는 3만5000부가량이 인쇄됐다. 미쉐린사(社)는 미쉐린 가이드를 들고 자동차 여행을 다니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려 공격적으로 책을 뿌린 셈이다.
미슐랭 스타 내놓으며 요식업계 별이 되다
미쉐린 가이드는 자동차 시장 변화에 맞춰 민첩하게 진화를 거듭했다. 시간이 지나 마차나 기차를 타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찾자 자연스럽게 타이어 시장이 성장했다. 미슐랭 형제는 이제 굳이 미쉐린 가이드에 타이어 홍보 내용을 넣을 필요가 없게 됐다. 1920년부터는 가이드에서 광고가 빠졌다. 대신 자동차를 타고 가볼 만한 좋은 식당과 숙박 시설을 더 많이 소개했다. 이 가이드가 오늘날 미쉐린 가이드의 원형이다. 이때부터 책이 유료로 팔리기 시작했다.
고객 반응을 지켜보던 미쉐린사는 가이드에서 레스토랑 분야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에 레스토랑 점수를 매기는 ‘미슐랭 스타’를 1926년부터 도입했다. 처음에는 ‘1스타’만 있었다. 이후 레스토랑을 더 세부적이고 광범위하게 다루면서 1931년 ‘2스타’ ‘3스타’를 추가했다.
미쉐린사는 별점의 질도 높였다. 권위 있는 별점 심사를 위해 미슐랭 스타 검사관을 1933년부터 뒀다. 검사관 제도는 90년 넘게 내공을 쌓은 셈이다. 익명의 검사관들은 긴 세월 노하우를 이어온 덕에 세계적 수준의 맛 감별사로 인정받고 있다.
별점 등급 제도는 발전했지만 기본적으로 1930년대 도입된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1스타’는 ‘들러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다. ‘2스타’는 ‘돌아서라도 갈 만한 가치가 있다’, ‘3스타’는 ‘특별히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미쉐린 가이드는 기본은 지키면서도 변주도 이뤄냈다. 미슐랭 스타 외에 ‘빕 구르망’이란 제도를 1997년 도입한 것. 빕 구르망은 적당한 가격에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이른바 가성비 좋은 식당에 수여한다.
별은 셰프가 아닌 레스토랑에 주어진다. 셰프가 별을 받은 레스토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도 새로 별을 받을 수 있다. 기존에 받아둔 별은 기존 레스토랑에 남는 식이다.
미쉐린 가이드 측에 따르면 검사관들은 익명으로 현장을 방문해 음식을 평가한다. 이 회사가 배포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평가의 5대 기준은 ‘사용한 재료의 품질’ ‘풍미와 조리 기술의 완성도’ ‘요리사의 요리 개성’ ‘비용 대비 가치’ ‘방문할 때마다 유지되는 일관성’ 등이다.
그렇다면 미슐랭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이 많은 국가는 어디일까. 시장조사업체 월드포퓰레이션리뷰에 따르면 올해 발표 기준 프랑스가 680곳으로 가장 많다. 그다음으로 일본(539곳), 아랍에미리트(420곳), 이탈리아(381곳), 독일(332곳), 스페인(267곳) 등의 순이다. 한국은 34곳으로 19위였다.
요식업계 암행어사 ‘미슐랭 검사관’의 세계
미슐랭 스타는 이제 잘 알려진 맛집의 가이드가 됐지만 스타를 결정짓는 검사관의 세계는 미스터리하게 남아 있다. 미쉐린 가이드는 공정성을 위해 검사관이 누구인지, 어떻게 어디를 방문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리지 않고 있다.
미쉐린 가이드의 공식 발표와 국내외 언론에서 실제 검사관을 경험한 이들을 통해 미스터리한 감별사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얼핏 생각하면 미슐랭 검사관만큼 행복한 직업이 있을까 싶다. 예약을 해도 가기 힘든 고급 레스토랑을 끼니마다 찾아 식사를 즐기고 평가의 대가로 돈도 받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에서 한 셰프가 음식을 준비하고 있다. [미쉐린 가이드 인스타그램 캡처]
하지만 실제 검사관들의 삶은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가 2019년 한 미슐랭 스타 검사관을 익명으로 취재한 바에 따르면 초임 검사관은 혹독한 수습 과정을 거친다. 선임 검사관과 짝을 이뤄 몇 달간 식사를 따라다니며 어떻게 평가하는지 배워야 한다. 검사관들은 한 달에 최장 3주간 출장을 가고 1주일에 최대 열 끼까지 외식을 해야 한다고 한다. 다양한 식당을 평가하고 한 식당도 여러 번 찾아 한 차례의 식사 평가가 부정확하진 않았는지 검증해야 하기 때문.
별점이 한 번 주어졌다고 평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동료의 평가 검증이 남아 있다. 2차 검사관은 1차 검사관이 준 별점이 적합한지 재차 확인한다. 검사관들이 평가하는 건 맛만이 아니다. 각 검사관은 평가 식당이 선정되면 첫 1주일간 이 중 최소 8곳을 방문해 셰프, 스타일, 역사, 메뉴 등을 조사한다. 식당에선 분위기와 웨이터의 태도까지 관찰한다. 맛뿐 아니라 서비스의 멋도 중시한다는 얘기다. 레스토랑 업계에서는 미슐랭 스타를 받은 모든 레스토랑엔 꼭 ‘아름다운 화장실’이 있다는 말이 있다.
검사관의 별점 심사가 엄격한 만큼 검사관 채용도 엄격한 절차를 거친다. 미쉐린 가이드의 전직 검사관이었던 크리스 왓슨 씨는 세계적인 요리 블로그 ‘럭시트’에 2021년 2월 28일 게재된 인터뷰에서 채용 단계를 소개했다. 채용의 첫 단계는 음식 관련 문제 풀이였다. 그는 음식 관련 질문 150~200개를 1시간 반 안에 적어냈다고 한다. 그 뒤 부편집장과 다른 직원들의 인터뷰를 거쳤다. 마지막 전형은 편집자와의 점심 식사. 그는 “당시에는 미슐랭 2스타였지만 지금은 3스타로 오른 ‘라 탕트 클레어’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벅찬 질문을 잘 견뎌냈다”고 회고했다.
미쉐린 가이드사가 홈페이지에 공개한 검사관 인터뷰에 따르면 검사관들은 대부분 식음료 및 호텔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이들이다. 이들의 평균 근무 기간은 약 5년. 그 이상 근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보통 심사 경험을 자산으로 삼아 요식업 등에서 활용한다.
‘양날의 별’인가
미슐랭 스타는 레스토랑의 홍보 효과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대니얼 샌즈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경영대 교수는 최근 ‘전략경영저널’에 발표한 ‘양날의 별’이란 논문에서 새로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의 구글 검색 빈도는 3분의 1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2000~2014년 미국 뉴욕에서 개업한 식당 중 뉴욕타임스(NYT) 미식란에 소개된 식당들을 조사한 결과다.
하지만 이 중 미슐랭 스타 식당의 40%가 문을 닫았다. 이코노미스트는 “손님의 기대가 높아지고, 거래업체들이 미슐랭 스타 획득을 계기로 더 높은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미슐랭 스타는 셰프들의 꿈이지만 비판도 받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미쉐린 가이드는 식당들의 창의성을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스타를 이미 받은 식당들은 스타를 잃지 않게끔 기존의 방식을 유지하고 혁신을 시도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FT는 “미쉐린 가이드는 너무 프랑스적이고 다른 문화권 음식에 대한 판단을 내릴 권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논쟁이 있다”고 소개했다.
미쉐린그룹에 미슐랭 스타는 타이어 제조라는 본업을 벗어난 일탈의 성과다. 이 기업은 미슐랭 스타와 같은 또 다른 일탈의 역사를 낳으려 노력하고 있다. 주력 사업은 타이어, 미쉐린 가이드 사업이지만 의료, 항공우주, 고분자 복합 재료 분야 등에도 투자한다. 이 기업은 향후 7년간 타이어를 제외한 비주류 분야에서 매출액의 20~30%를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내놨다.
최근 들어 유럽 자동차산업의 침체로 공장 폐쇄 등이 거론되고 있지만 2022년엔 매출이 목표치를 크게 초과하기도 했다. 당시 연 매출이 280억 유로(약 41조7500억 원)로 전년 대비 20.2% 성장했다. 타이어 외 분야에서의 매출은 전체의 5% 미만이었다. 이 비중을 점차 키우는 게 기업의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