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호

어디서,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햄버거맛 낸다

  • 박태견 tggpark@yahoo.co.kr

    입력2005-05-06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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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년 밀크셰이크 기기 외판원인 크로크는 캘리포니아에서 햄버거 가게를 하는 맥도날드 형제를 만났다. 맥도날드 형제의 상술을 세심히 관찰한 크로크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무릎을 치고, 이 형제와 계약을 맺었다. 그날 이후 맥도날드는 전세계를 덮는 마이다스의 손이 되었다. 맥도날드의 신화는 메뉴를 단순화하고 모든 공정을 표준화하고, 화장실 운영 규칙까지 만든 매뉴얼을 배포함으로써, 어느 곳에서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햄버거 맛을 낼 수 있게 한 데 있다. 한국 정치는 대통령 일개인의 능력에 따라 융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한국 정치를 맥도날드처럼 표준화·매뉴얼화해, 어떠한 사람이 정권을 잡아도 최악의 경우를 피하게 할 수는 없을까.
    지금 지구촌 어디에선가 다섯 시간마다 하나씩 반드시 새로 가게를 여는 기막힌 프랜차이즈 식당이 있다. 10년 전인 지난 1990년까지만 해도 신규 매장은 15시간마다 하나씩 만들어졌다. 그런데 불과 10년 사이 세 배나 빨라진 것이다. 이런 신규 매장 신설 속도는 전세계 기업 중 넘버 원이다.

    5시간마다 하나씩 매장 열어

    이렇게 놀라운 확대재생산 능력을 자랑하는 프랜차이즈 기업은 다름아닌 M자형 황금빛 아치 문양과 광대 모양의 로날드 맥도날드 캐릭터로 유명한 ‘맥도날드(McDonald’s)’다. 맥도날드는 미국의 상징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상징이자 최대 성과물이다. “미국의 정보원들이 뚫지 못하는 나라에도 맥도날드 영업 사원들을 보내면 모든 일이 성사된다”고 말할 정도다. “미국 자본이 침투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침투하는 두 가지 제품이 있으니, 맥도날드 햄버거와 코카콜라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맥도날드는 최근 한반도 긴장 완화를 틈타 금강산 관광특구를 시작으로 북한에도 진출하는 계획을 적극 추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맥도날드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자. 자화자찬이 대단하다. “전세계 119개국에 2만7000개의 레스토랑을 갖고 있다. 여기서 일하는 종업원 수만 150만 명에 달한다. 확장 속도도 빨라 99년 한 해에만 1790개의 레스토랑이 새로 문을 열었다. 매일 5개씩 늘어난 셈이다. 이 가운데 90% 이상이 해외(미국에서 본 외국)에서 오픈했다. 2000년에도 1800∼1900개의 레스토랑이 새로 오픈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루에 맥도날드 레스토랑을 찾는 고객은 4300만 명. 전세계 인구의 거의 1%에 육박하는 사람이 매일 맥도날드 레스토랑을 찾는 셈이다. 지난 99년에만 385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고, 그중 33억 달러가 이익이었다. 수익증가율도 13%나 됐다.” 자화자찬할 만한 실적이자 대단한 성장세다. 국내에서는 1988년 압구정동에 1호점을 낸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 240개의 점포가 영업중이다. 내년에는 100개를 더 늘릴 계획이다. 매출 신장세도 놀라워, 진출 첫해인 1988년에는 19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액이 2000년에는 2300억원어치에 달해 12년 만에 120배로 늘어났다. 맥도날드의 간판 제품인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감자튀김)는 지상에서 가장 단순한 음식에 속한다. 일각에서는 ‘정크 푸드(Junk Food: 쓰레기 음식)’라고 부를 정도로 영양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별볼일 없다. 심장병을 유발하는 콜레스테롤 수치만 높여주는 그렇고 그런 음식이다. 하지만 전세계 인구의 1%가 매일같이 이 음식을 먹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정크 푸드를 만들건 말건 맥도날드 열풍은 범지구촌에서 더해가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미국이라는 부자 나라가 먹는 음식이라는 막연한 호기심 때문인가. 아니면 밥 먹을 시간도 아껴야 할 정도로 강도 높은 노동을 요구하는 세계 노동환경의 변화 때문인가.



    외판원과 음식점 형제의 만남



    이런 의문에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맥도날드의 50년 성장사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세계 최대 패스트푸드 기업인 맥도날드는 두 사람의 창의적인 음식점 주인과 탁월한 경영능력을 갖춘 밀크셰이크 기기 외판원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이 막 끝난 직후인 1954년의 일이다. 당시 52세이던 밀크셰이크 기기 외판원 레이먼드 크로크(Raymond Kroc)가 자기 제품을 많이 사준 단골고객을 만나기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샌 버나디노에 있는 한 휴게소 식당을 찾았다. 가게 주인은 모리스 맥도날드와 리처드 맥도날드(Maurice & Richard McDonald) 형제였다. 1948년 일반 식당을 인수해 패스트푸드점으로 개조한 이 형제는 독특한 방식으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형제가 운영하는 가게에는 한 번에 5개의 밀크셰이크를 만들 수 있는 기기가 8대나 있었다. 한두 개만 비치하는 다른 음식점과는 크게 대조적이었다. 이렇게 많은 기기를 설치했는데도 휴게소는 언제나 만원이었다. 식당 밖까지 손님들이 줄 서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종업원들도 대단히 바빠, 흰 모자에 흰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들은 쉴새없이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 등을 나르고 있었다. 레이먼드 크로크는 ‘왜 이 집은 유독 이렇게 장사가 잘 되나’ 하는 흥미를 갖고 지켜보았다. 원인은 철저한 효율성 추구에 있었다. 맥도날드 형제는 탁월한 경영자였다. 이들은 수십 가지에 달하던 휴게소 식당의 메뉴를 햄버거·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파이·밀크셰이크·소다수 등 9가지로 줄였다. 설거지 시간 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도자기 접시나 유리컵을 사용하지 않고 일회용 종이제품과 플라스틱제품을 사용했다. 주문을 받은 후 60초 안에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햄버거 생산라인을 공정화했다. 훗날 존 러브는 ‘맥도날드, 아치의 뒤쪽’이라는 책에서 ‘맥도날드 형제는 음식 만드는 과정을 단순화하고 반복적이며 쉽게 배울 수 있는 작업으로 바꾸어버렸다’고 지적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착안해 자동차 생산 효율을 극대화했던 일관 생산방식(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음식 제조과정에도 도입했다는 분석인 것이다. 맥도날드 형제는 햄버거 가격도 최저 15센트로 경쟁사들에 비해 파격적으로 낮춰버렸다. 박리다매(薄利多賣) 전술이었다. 오늘날 맥도날드를 있게 한 각종 경쟁력 요인을 초창기부터 골고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꼼꼼하게 관찰한 끝에, 원인을 찾아낸 크로크는 무릎을 쳤다. “바로 이거다!” 30여 년을 미국 전역을 돌며 밀크셰이크 기기를 팔아왔기에 남다른 경영 안목을 갖고 있던 크로크는 곧바로 맥도날드 형제를 만나 사업제휴를 제안했다. 미국 전역에 맥도날드 체인점을 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맥도날드 형제는 큰 욕심이 없는 평범한 음식점 주인이었다. 지금 가게에서 해마다 10만 달러 정도씩 벌어들이는데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끈질긴 설득 끝에 크로크는 950달러라는 헐값에 맥도날드의 프랜차이즈 사업권을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 대신 체인점으로부터 받는 프랜차이즈 비용을 매출액의 1.9%로 정하고, 이 가운데 0.5%를 맥도날드 형제에게 주기로 했다. 이것이 맥도날드 성장 신화의 시작이다. 프랜차이즈 독점권을 따낸 크로크는 다음해인 1955년 4월15일 일리노이주 데스 플레인스에 최초로 체인점 1호를 개점했다. 그런 뒤, 미국 해안 도시를 따라 본격적인 체인점 개설에 나섰다. 크로크가 프랜차이즈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가장 신경을 쓴 대목은 ‘매뉴얼화’였다.

    크로크는 “햄버거는 누구나 만들어 팔 수 있다. 맥도날드는 다른 곳과는 다른 매력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영철학에 따라 만들어진 맥도날드의 캠페인 구호가 그 유명한 “우리는 당신의 미소를 보기를 원합니다(We love to see your smile)”이다. 크로크는 ‘품질’ ‘서비스’ ‘청결’ ‘가치’를 맥도날드의 4대 원칙으로 정해 자신의 경영철학을 구체화했다. 이러한 원칙은 제품 생산과 서비스 과정을 표준화한 방대한 분량의 매뉴얼을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맥도날드 형제가 운영하던 패스트 푸드점에도 매뉴얼은 있었으나 약 30여 가지에 불과해 크로크가 보기에 보완할 점 투성이였다. 크로크는 각종 실험을 거쳐 체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꼼꼼히 기록한 매뉴얼을 만들었는데, 완성된 최종 매뉴얼 항목은 자그만치 5만 가지나 됐다. 크로크는 우선 햄버거 재료로 사용되는 쇠고기의 크기와 무게, 모양을 정확하게 통일했다. 예컨대 지방의 양은 19% 이하, 무게는 1.6온스, 지름은 3.875인치, 양파는 0.25온스 등으로 정했다. 또한 이 매뉴얼에는 햄버거의 고기를 어느 정도 두께로 자를 것인지에서부터 몇 도에서 몇 분 동안 익힐 것이며, 감자를 써는 요령과 두께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밀크셰이크와 아이스크림 제조법도 통일했다. 체인점마다 같은 양의 피클과 겨자와 케첩이 들어간 똑같은 형태의 햄버거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접시에 담아 서비스하도록 했다. 햄버거에 사용되는 고기는 매장에 배달되기 전까지 40가지 이상의 엄격한 품질검사를 거치게 했다. 또한 신선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 햄버거는 만든 지 10분, 프렌치 프라이드는 튀긴 후 7분이 지나면 모두 폐기하게 했으며, 가능한 한 고객이 주문한 지 30초 이내에 제품을 서비스하도록 했다. “따끈하고 신선하게 그리고 곧바로 손님에게(Hot, Fresh, Just for You)”라는 대(對)고객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매뉴얼에는 매장을 열고 닫는 시간은 물론이고, 직원들의 복장과 매장의 밝기, 화장실 점검 요령과 사후 조치 요령까지 매장 운영에 필요한 모든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그는 청결에 매우 신경을 썼다. 식당이 불결하면 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로크는 이에 “청결하게 보여라(Fresh Look)”는 구호를 내걸고, 화장실 전등 점검, 거울의 청결 상태 확인, 휴지 보충, 변기의 물기 확인, 비누 보충, 악취 제거, 휴지통 비우기, 급수 확인, 환기구 점검, 화장실 1차 점검·2차 점검 등 조그만 화장실에서 확인해야 할 사항만 수십 가지에 달하는 매뉴얼을 만들었다. 크로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961년에는 그는 일리노이주 엘크 그로브 빌리지에 있는 한 체인점에 각 체인점의 매니저들을 조직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햄버거 대학’을 만들었다. 이 대학은 현재 시카고의 오크 브룩에 있는 본사로 옮겼는데, 햄버거 대학에서는 프랜차이즈 운영자와 직원들에게 각종 매뉴얼을 교육한다. 각 체인점의 성공사례를 발표케 하고 동시에 새로운 조리법과 냉동방식·저장·서비스 메커니즘 등을 연구 개발하고 있다. 크로크는 이렇게 정한 기준 중에서 단 한 가지라도 어기는 납품 업자와는 거래를 끊었다. 프랜차이즈 경영자들도 이 기준을 어기면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덕분에 시작은 좀 더딘 듯했지만 곧 세계 최대의 패스트푸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누가 만들어도 똑같은 맛

    외국을 여행하던 사람이 식사를 하려고 하는데 그 지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때 맥도날드 햄버거를 찾는 경우가 많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에서는 똑같은 맛의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름을 내건 두 개의 가게에서 맛이나 서비스에 큰 차이가 있다면 고객은 불만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네트워크 조직으로 이뤄진 기업은 표준화된 시스템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한 크로크는 철저한 매뉴얼화를 통해 어느 맥도날드에 가도 똑같은 맛을 맛보게 했다. “맥도날드 체인점은 다른 음식점들과는 달리 주방장이 바뀌어도 그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고객의 믿음을 얻는 데 성공했다. 솜씨좋은 주방장에 의해 손님을 끄는 것이 아니라, 매뉴얼화된 정교한 시스템을 작동시켜 손님을 끄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맥도날드를 있게 만든 최대 경쟁요소였던 것이다. 이는 ‘황제경영’으로 압축할 수 있는 한국 재계와 정치권이 결여한 경쟁요소이기도 하다. 1955년 맥도날드가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할 때 이미 미국에는 무수한 프랜차이즈 업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A&W, 데일리 퀸, 테이스티 프리즈, 빅 보이, 인트라 버거킹(훗날의 버거킹) 등등. 그러나 맥도날드는 철저한 매뉴얼화를 통해 이들을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후에 등장한 웬디스, 하디스 등 숱한 신흥 패스트푸드 업체들과의 경쟁에서도 압도적인 차이로 선두를 고수할 수 있었다. 99 회계연도(1999년 4월부터 2000년 3월 사이) 맥도날드의 미국 내 시장 점유율은 43.1%였다. 경쟁기업인 버거킹은 19.6%였고, 웬디스는 12.2%, 하디스는 4.9%, 잭인더박스는 4.0%에 불과했다. 맥도날드의 매출액도 해외시장 덕분에 385억 달러로 전년 대비 13%나 증가했다. 크로크는 훗날 자서전 ‘갈아 만들다(Grinding It Out)’에서 “내가 맥도날드 체인점에서 원한 목표는 완벽한 표준화였다. 그 밖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고 토로했다. 맥도날드 성장 신화의 키 포인트는 매뉴얼화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맥도날드를 있게 한 요인을 매뉴얼화 하나로 압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성장 신화를 일군 또 다른 키 워드는 프랜차이즈 파이낸싱과 부동산 사업이다. 단기간 내에 프랜차이즈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 내에 체인점을 내겠다는 파트너를 최대한 많이 끌어모으는 게 관건이다. 크로크는 체인점을 내겠다는 파트너와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크로크가 체인점을 내주는 조건으로 요구한 로열티는 매출액의 1.9%에 불과했다. 훗날 크게 올랐지만 초기에 가맹점에서 받은 권리금도 단돈 950달러에 불과했다. 초기에는 프랜차이즈 사업에서 수익을 못 올리더라도 단기간에 미국 전역으로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른 프랜차이즈 업체들과 비교할 때 대단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결과 1955년 일리노이주에 1호점을 내고 불과 3년 뒤인 1958년에는 가맹점 수를 97개로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위기가 도래했다. 지나친 확장 전략에 따라 프랜차이즈 사업의 수익률이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1960년 맥도날드 체인점의 매출은 7500만 달러로 급증했다. 그러나 순이익은 겨우 15만9000달러였다. 임원들에게 임금을 주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맥도날드 형제의 약속 위반이 뒤따랐다. 뒤늦게 프랜차이즈 사업의 경이로운 성장세에 놀란 맥도날드 형제는 딴마음을 먹었다. 이들은 크로크와 맺은 계약을 위반하고 별도로 프랜차이즈 사업권을 팔기 시작했다. 심지어 프랜차이즈 경쟁업체에게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수도 있는 심각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였다. 고민하던 크로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다. 1961년 그는 뉴욕의 자금업자를 통해 연금과 대학기금에서 270만 달러를 대출받아 맥도날드 형제에게 주고 계약을 끝냈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재정난으로 고통받던 크로크는 맥도날드 매출액의 1%를 빌려온 연기금에 대한 이자로 지불하게 되었다. 재정난으로 고민하던 크로크가 찾아낸 것은 파이낸싱을 이용한 프랜차이즈 부동산임대업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재정 담당이던 해리 손느본이 내놓았다.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입주할 땅을 미리 싸게 사둔 뒤, 이를 임대해주고 임대차익을 거두자는 발상이었다. 이럴 경우 프랜차이즈 가맹자들은 초기에 막대한 부동산 구입비용이 들지 않아 좋고, 맥도날드 본사는 짭짤한 임대수익을 올리는 장점이 있다. 크로크는 손느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1956년 프랜차이즈 부동산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수년간 치밀하게 사전 조사를 한 뒤 1960년대부터 본격적인 영업에 들어갔다. 이 사이 그는 작은 비행기와 자동차를 이용해 체인점이 들어서기에 적당한 땅을 찾기 위해 전 미국을 샅샅이 뒤졌다. 이들 후보지역은 대부분 미개발지역이어서 땅값이 헐했다. 크로크는 맥도날드의 신용으로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이 후보지들을 대거 매입했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희망자들에게 20년간 장기임대해 줬다. 임대조건은 간단했다. 해마다 매출액의 1%를 달라는 것이었다. 부동산사업으로 맥도날드는 일거에 만성적 재정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맹점에서 꼬박꼬박 임대료가 들어오니 안정적 수입원이 생겨 좋았다. 두 번째로 가맹점이 생긴 후 그 일대 땅값이 크게 올라 자산가치도 높아졌다. 따라서 이 땅을 담보로 유가증권을 발행해 자금을 돌릴 수 있었다. 부동산 임대사업 실시 후 맥도날드는 더욱 가파른 성장을 거듭해 1965년 맥도날드 가맹점은 미국 44개 주에서 770개로 늘었다. 매출도 1억7000만 달러로 급증했다. 시쳇말로 ‘꿩 먹고 알 먹고’였다. 크로크는 프랜차이즈 부동산 임대업을 통해 얻은 이득의 상당 부분을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을 위해 재투자했다. 미국 전역을 상대로 기업 이미지를 통일하기 위한 대대적 광고전략을 펼친 것이다. 한 예로 1967년 맥도날드는 전국적인 광고를 위해 판매액의 1%를 쏟아부었다. 판매액 1%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으로부터 받은 임대료 전액에 해당하는 것이다.



    US스틸을 능가하는 주식 가치 총액

    그 당시에 이러한 광고비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으로서는 전무한 비율이었다. 이에 앞서 1963년에는 체인점 운영자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패스트푸드 업계 최초로 광대 모양의 캐릭터 ‘로날드 맥도날드’를 채택, 광고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렇게 적극적인 광고전략을 펼친 결과 1999년 말 현재 맥도날드의 브랜드 가치는 262억 달러(인디펜던트사 조사)로,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비싼 브랜드 파워를 보유한 기업이 되기에 이르렀다. 크로크는 적극적으로 가맹점을 도우면서도 초기에 자신이 선매입한 부동산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일정한 지역 내에서는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마음대로 점포를 늘리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이런 제한을 두지 않으면, 보유중인 부동산의 가격 관리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지금 미국 내에서 영업중인 맥도날드 프랜차이즈 가맹점 땅의 40% 이상을 맥도날드가 소유하고 있으며, 1985년에는 맥도날드 부동산의 유가증권 가치가 41억6000만 달러를 돌파해, 그 이전까지 미국 내 최대 부동산 보유기업이던 백화점 업체 시어즈를 앞질렀다. 맥도날드의 프랜차이즈 부동산 임대사업 전략은 프랜차이즈에 가입한 개인들의 점포 소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피자 헛의 경우 무려 700개의 매점을 보유한 점주도 있으나, 맥도날드의 최대 점주가 보유한 매점 수는 50개에 불과하다. 이런 점포의 파편화는 맥도날드가 단기간에 전세계로 사업을 확산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자그마한 자본만 있더라도 맥도날드를 차릴 수 있기 때문에 소규모 자본을 가진 많은 외국인들이 앞다퉈 자국 내에 점포를 내겠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 성공신화의 둘째 키 포인트는 파이낸싱을 이용한 부동산 임대사업에 있었던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맥도날드는 미국 내 최대 패스트푸드 기업으로 단단히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1972년 맥도날드는 미국 내에 2200개의 체인점과 10억 달러의 매출액을 자랑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미국 인구 9만 명당 1개꼴로 가맹점이 세워진 것이다. 1974년에는 맥도날드의 상장 주식가치 총액이 미국의 최대 철강기업인 US스틸을 앞지르기에 이르렀다. 서비스업이 제조업을 능가하는 최초의 성과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크로크는 이 정도 성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세계로 돌렸다. “나는 시장이 성숙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제는 세계를 염두에 두어야 할 때다.” 크로크가 “해외시장에 1만2000개의 체인점을 세우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하며 한 말이다. 1971년 맥도날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대국이었던 까닭에 미국 문화에 대한 반감이 만만치 않은 독일과 일본에 진출했다. 그리고 1977년에는 마침내 샌드위치 본고장으로 패스트푸드의 종주국임을 자부하는 영국에까지 진출했다. 미국의 뒷마당격인 남미에도 당연히 진출했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와 중국의 시장경제 체제 도입 그리고 우루과이라운드 체결에 따른 아시아를 비롯한 개도국의 시장개방으로, 맥도날드는 더욱 성장했다. 당초 크로크가 정한 목표를 크게 초과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 2월1일 오픈한 모스크바의 맥도날드 체인점은 판매 개시와 더불어 “1인당 최고 10개 이상 팔지 않습니다”라는 판매 제한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선풍을 일으켰다. 모스크바의 맥도날드 점포 앞에만 연일 3만여 명의 시민이 장사진을 쳤다. 햄버거 한 개 값은 1.6루블,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000원이다. 소련인의 평균 수입으로 따져보면 결코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으나 ‘부자 나라 미국인들이 먹는 음식’이라는 호기심 때문에 인산인해 행렬은 멈출 줄 몰랐다.

    개도국 등 신흥시장에서도 맥도날드의 열풍은 대단했다. 1994년 6월 쿠웨이트에 처음 식당을 열었을 때에는 입장하려는 차들이 장장 7마일이나 늘어서는 일대 장관이 연출되었다. 1970년대 해외 진출을 본격화한 이래 맥도날드의 연중 매출 신장률은 평균 21%였다. 현재 맥도날드의 전체 매출액 중에서 55%가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일 정도다. 맥도날드의 해외 진출 전략은 기대 이상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해외 진출방식은 미국에서의 사업확장 방식과 동일했다. 철저한 매뉴얼화에 따른 제품과 서비스의 균일화와 선진 파이낸싱을 이용한 프랜차이즈 부동산 임대업이었다.

    이와 함께 또 하나 비장의 무기인 ‘현지화 전략’이 주효했다. “적어도 음식은 각 지역의 고유한 맛을 살려야 한다”는 게 맥도날드의 기본 전략. 맥도날드사는 이에 “생각은 글로벌하게, 행동은 지역 현실에 맞게(Think globally, Act locally)”를 사시로 내세운 뒤 각국의 전통 미각에 맞는 신상품 개발에 열중했다.

    예컨대 유대국가 이스라엘에서는 정갈한 비프 스테이크를 개발했다. 쇠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에서는 채소 햄버거를, 말레이시아에서는 바랄 비프 스테이크를 개발해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필리핀에서는 맥스파게티 국수를 개발했다. 노르웨이의 맥도날드 체인점은 북해산 연어를 이용한 연어 샌드위치 맥럭을 개발했다. 맥주의 나라 독일의 체인점에서는 세계 최초로 맥주를 판매하기도 했다.

    체인점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수렴

    한국 맥도날드의 경우도 새 메뉴 개발에 열중해 1997년 한국의 전통 메뉴 불고기를 버거에 적용한, ‘불고기 버거’를 개발했다. 불고기 버거는 당시 전체 매출의 35%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히트를 했다. 맥너겟의 경우도 퍽퍽한 닭 가슴살을 싫어하는 한국인의 입맛을 고려해 쫀득쫀득한 닭다리살의 함량을 높였다. 한국 맥도날드는 무엇보다 원재료의 70% 이상을 국내에서 조달함으로써, 한국인의 거부반응을 최소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이와 같은 현지화 전략의 성공은 미국에서의 영업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크로크는 햄버거의 크기와 함량 등에 대해서는 엄격한 매뉴얼화를 추진하면서도 신제품 개발에 관해서는 체인점 운영자들의 아이디어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탄력적인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맥도날드의 대다수 신제품은 체인점에서 개발 아이디어가 나왔다.

    맥도날드의 간판 상품으로 각국의 경제지표를 비교하는 잣대로도 사용되는 ‘빅맥’도 체인점에서 만든 작품이었다. 1967년 피츠버그 체인점 운영자인 짐 델리가티는 새로운 메뉴로 고기를 두 겹으로 넣은 햄버거를 만들어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이것이 바로 빅맥의 원조였다. 현지 체인점 운영자들이 내놓는 아이디어는 일리노이주에 위치한 햄버거 대학으로 수렴돼 각종 실험과 여론조사를 거쳐 맥도날드의 표준상품으로 채택되어서 세계 전역으로 보급된다.

    영업 일선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수용하는 탄력적 현지화 전략이 맥도날드 성공 신화의 또 다른 비밀이다.

    최대 고객인 어린이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앞서 개발한 것도 맥도날드가 세계시장에서 성공을 거둔 한 요인이었다. 한 예로 맥도날드의 ‘토이(toy·장난감) 마케팅’은 패스트푸드업계의 ‘교과서’로 통할 정도다. 다양한 장난감을 세트메뉴와 곁들여 판매한 토이 전략은, 어린이 고객을 폭발적으로 끌어들여 경쟁업체들도 잇따라 이를 도입했다.

    맥도날드는 토이 전략을 펼치기 위해 세계 최대 애니메이션 업체인 디즈니사와 장기계약을 맺었다. 해마다 발표되는 디즈니사의 애니메이션과 아동 영화에서 개발되는 캐릭터를 이용하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중인데, 최근에는 달마시안의 102마리 강아지 캐릭터를 이용한 판매전략을 펼쳐 짭짤한 재미를 보았다.

    맥도날드의 창업주 레이먼드 크로크는 1977년 아들처럼 여기던 보좌역 프레드 터너에게 회장직을 물려주었고, 터너가 다시 1990년 전문경영인인 마이클 퀸란에게 회장직을 물려주었다. 이러한 경영진의 변화에도 맥도널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가공스런 팽창행진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해온 맥도날드도 최근 상당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번 위기는 경쟁업체에게 선두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앞서 밝혔듯이 경쟁업체들은 맥도날드를 따라잡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맥도날드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환경문제와 반미감정에 따른 견제심리 및 기피심리의 확산이다.

    인스턴트 식품인 까닭에 유해환경 물질을 많이 사용하는 맥도날드는 그 동안 환경문제로 여러 차례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대표적 예가 1980년대 중반 미국의 여러 환경단체로부터 제기된 스티로폼 유해논쟁이다.

    당시 맥도날드는 햄버거 포장물로 연간 7000만t의 스티로폼을 사용하던 세계 제1의 스티로폼 소비 회사였다. 그런데 ‘유해 폐기물 정보교환을 위한 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가 스티로폼 생산에 사용되는 염화불화탄소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맥도날드 햄버거를 유해물질로 규정,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맥도날드는 스티로폼 포장재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다음에는 맥도날드가 햄버거 용지를 성실히 수거하지 않는다며, 햄버거 포장지 쓰레기를 우편물로 맥도날드 회장에게 보내는 운동이 벌어졌다. 맥도날드는 이 압력에 굴복해, 1988년 포장재를 수거해 단열재를 만드는 재활용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1994년에는 맥도날드의 햄버거용 고기에서 발암물질이 발견됐다는 영국 소비단체의 고발로 한동안 시달렸다.

    환경운동 단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85년 아예 ‘맥도날드 반대 행동의 날’을 정하기도 했다. UN이 정한 세계 식량의 날인 10월16일이 되면, 이들은 맥도날드 제품의 환경오염 문제를 비롯해 영양가·인권 등을 총체적으로 거론하며 맥도날드를 골치 아프게 하고 있다. 2000년 10월에 발표된 ‘맥도날드 반대 행동의 날’ 행동 문건은 맥도날드가 직면한 난관이 어떠한가를 잘 보여준다.

    “올해 2000년 10월16일은 UN이 정한 세계 식량의 날(UN World Food Day)이다. 이날은 또한 올해로 16번째로 맞이하는 전세계 맥도날드 반대 행동의 날이기도 하다. 즉 식량의 날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맥도날드에 타격을 입히는 날로 만들자는 것이다.

    맥도날드는 전세계로 유통망을 확장시키면서 칼로리는 높지만 영양가가 낮은 쓰레기 같은 음식(이른바 Junk Food)을 생산하고 소비시킴으로써 인류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정크푸드의 타깃으로 삼는 광고공세를 펼쳐, 어린이를 소비자로 만드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맥도날드는 아르바이트로 고용하는 종업원들에게 지불하는 시간당 보수가 적기로 유명하다. 이것은 분명한 노동 착취지만 힘없는 아르바이트생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일을 해야 하는 형편이다. 또한 맥도날드는 그들이 재활용품을 사용하고 분리수거를 한다고 주장해온 것과 달리 전세계의 환경을 마구 파괴해왔다.

    무엇보다 맥도날드는 전세계로 시장을 확대시켜, 대규모 자본이 모든 인민을 철저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동물보호론자들도 맥도날드가 무분별하게 저지르는 동물에 대한 살육을 비판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식량의 날을 맞이하는 전세계의 의식있는 운동가들은 맥도날드에 반대하는 투쟁을 역시 전세계적으로 조직해왔다. 작년의 경우 전세계 23개 국가, 345개 도시에서 425건에 달하는 맥도날드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이를 통해 시민들과 노동자들에게 맥도날드의 해악을 알리고 이를 올바로 고쳐나가기 위해 시위를 하는 것이다.

    올해도 역시 맥도날드가 침투한 전세계 곳곳에서 맥도날드 앞에서 피켓을 들고 전단을 나눠주며 구호를 외치는 운동가들이 온세계의 맥도날드 매장을 뒤덮을 것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 전략에 따라 나날이 확산되는 반미감정도 맥도날드의 확장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충돌이 10주째 계속되자 아랍 세계에서는 반미감정이 고조됐다. 이슬람 종교지도자 등은 “미국 제품을 사면 그 돈은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죽이는 총탄이 된다”며 미국 관련 제품 불매운동을 벌여왔다. 그로 인해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수십 개의 맥도날드 분점들이 위기를 맞았다.

    2000년 말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의 맥도날드 분점들은 팔레스타인 어린이 돕기 운동을 벌였다. 이슬람교의 성월(聖月)인 ‘라마단’ 기간 동안 한 세트당 26센트씩을 적립해 팔레스타인 아동병원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한 것. 이런 운동을 벌이지 않고는 불매운동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럽의 맥도날드 체인점들은 값싼 미국 농산물 유입으로 피해를 본 유럽 농민들의 습격을 받는 곤욕을 치렀다. 맥도날드가 가장 먼저 진출한 중남미에서는 1979년 엘살바도르의 게릴라들이 맥도날드 가게를 폭파한 뒤 “제국주의 미국에게 치명타를 가했다”고 발표할 정도였다.

    미국의 세계 전략과 괘를 같이해

    이에 굴하지 않고, 맥도날드의 마이클 퀸란 회장은 “우리의 꿈은 지구촌의 음식서비스 산업을 완전 지배하는 것”이라는 야심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맥도날드의 가공스런 경쟁력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맥도날드의 세계적 팽창이 미국의 세계화 전략과 맥을 같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맥도날드의 향후 팽창 여부는 미국의 세계화 전략이 성공하느냐에 따라 운명을 같이할 공산이 크다. 최근 미국의 세계화 전략이 다른 국가들로부터 일국 이익 중심의 패권주의라는 강한 저항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맥도날드의 앞날은 지금과는 다른 불확실성에 빠져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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