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제도화 개방화로 대국 꿈꾼다

  • 글: 강현구 중국문제전문가·경제학박사 191710@hanmail.net

    입력2002-11-05 12: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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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이 구 소련의 실패를 겪지 않고 성공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덩샤오핑이라는 위대한 정치가와 그를 뒷받침하는 뛰어난 경제이론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사상의 혼란기에 소모적 갈등을 종식하고 중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했으며 이론가들은 일관성있는 정책으로 그것을 현실화해 시스템화했다.
    제도화  개방화로 대국  꿈꾼다
    7개 학파가 각개약진했던 1984년에서 1992년 사이의 기간은 중국 경제학계의 황금기임과 동시에 극심한 혼란의 시대였다. 7개 학파의 이론에서 알 수 있듯 그 시기는 중국경제학계에 다양한 이론과 논쟁이 폭발했던 시기이다. 당시의 핵심 논제와 그 정리과정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가 가진 정치적 성격을 알아야 한다.

    1992년 벽두부터 당년 88세의 덩샤오핑(鄧小平)은 노구를 이끌고 우창, 선전, 저우하이, 상하이 등을 시찰했다. 생애 최후가 될 것이 분명한 이 시찰길에서 덩은 일련의 연설을 통해 당시 중국 사회를 향해 전면적 정치적 각성을 촉구한다. 이것이 이후 중국 개혁·개방 정책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이른바 남순강화다.

    방향 상실한 중국 지도부

    이러한 덩의 정치적 행보는 당시 중국사회가 갖고 있던 공개된 고민의 산물이었다. 1992년 당시 중국은 국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989년 톈안먼 사태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정확한 방향타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해외언론은 연일 중국의 민주화 열기를 전하고, 심지어 중국의 분열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면서도 정확하게 인민에게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어느 누구도 중국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변화의 초기에는 개혁·개방이라는 구호 하나면 충분했다. 그 말은 곧 지긋지긋한 문화혁명기의 조건 없는 계급투쟁론과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를 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속한 사회적 변화는 인민에게 새로운 지향점을 요구했다. 경제개발을 위한 시장의 논리와 기존 사회주의 사이의 괴리는, 곧 부(富)를 원하는 인민의 요구와 기존 공동체적 가치관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갈등이었다.



    그 당시 권력의 전권을 쥔 당의 대답은 의외로 명쾌했다. 1983년 당 중앙전체회의와 1987년 당 대회를 통해 정립한 틀이 그것이다. 즉 상품경제가 있는 사회주의 계획목표 아래에서의 사회주의 초급단계 이론, 그리고 정부가 시장을 통제하고 시장이 기업을 이끈다는 골격이다.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었지만, 양 체제의 장점만을 모은 언어적인 수사에 불과했다.

    완결되지 못한 이 두 가지 이론은 오히려 혼란을 부채질했다. 이 혼선은 당장 경제현장에 있는 인민뿐 아니라 학생, 지식인, 심지어 당 내부에까지 극심한 사상적 혼전을 일으켰으며, 이는 당연히 사회적 혼란을 증폭시켰다. 1989년 학생들의 봉기와 이에 맞선 해방군의 진압은 이러한 혼란의 불씨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논쟁이 이른바 ‘성사성자(性社性資)’ 논쟁이다. 즉 당시 중국이 걷는 길이 사회주의의 길이냐, 자본주의의 길이냐의 논쟁이었다.

    문제는 논쟁의 성격이 아니라 사상적 혼란을 제어할 힘이 당시 중국 지도부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톈안먼 사태의 여파로 자오쯔양(趙紫陽)이 실각한 뒤 들어선 허약한 장쩌민(江澤民) 체제에 이것의 속시원한 해결을 바란다는 건 무리였다. 결국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군으로 덩이 나선 것이다.

    덩이 ‘남순강화’에서 보여준 것은 대정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덩샤오핑의 모험과도 같던 이 순방의 주요 내용은 이른바 ‘삼개유리우(三個有利于) 표준’으로 집약된다. 자본주의의 길이냐 아니냐를 따질 게 아니라 다음 세 가지 방면에서 어떻게 우위를 차지할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첫째 사회주의 생산력의 발전, 둘째 사회주의 국가 종합국력의 강화, 셋째 인민 생활수준 제고.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유리한 것이 곧 현재 중국에 유리한 것이고, 중국이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덩은 특히 이 이론을 당시 경제적으로 가장 활발한 곳인 경제특구(經濟特區)에서 발표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요구하는 많은 인민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면서도 실제적으로는 사회주의 강국의 미래를 강조하는 노련미를 보였다.

    결국 덩의 남순강화는 당시까지 지식인 사이에서 만연하여 중국의 파벌싸움을 심화시킬 위기에 있던 ‘성사성자’논쟁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계획경제 숭배자들에게도 일침을 가하는 이중효과를 거두며 중국의 개혁·개방에 날개를 달아줬다. 이러한 덩의 성과를 순발력 있게 체계화한 것이 앞서 이야기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이론이다.

    중국공산당 제14차 당 대회에서 공식적인 중국의 개혁목표로 확정한 이 이론을 정확히 표기하면 ‘중국특색 사회주의 초급단계’로서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다. 중국특색사회주의란 말 그대로 중국 현실에 맞는 중국만의 고유한 사회주의를 뜻하는데, 일반적으로 쓰는 이 말 뒤에는 초급단계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중국은 지금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있다는 말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의 한 단계를 뜻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대체해야 하는 공산주의는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로 나뉘는데, 이때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공산주의고, 사회주의는 곧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의미한다. 중국은 이 사회주의 중에서도 아직은 낮은 단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초급단계 사회주의에서는 일반적 사회주의 이론을 구현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자본주의적 요소들 또는 시장기제들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중국특색사회주의 초급단계이론의 핵심이다. 이러한 초급단계에서 일반적 사회주의로 넘어가기 위한 체제 모델로 제시한 것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이며, 이것의 주요 기준이 ‘삼개유리우 표준’인 셈이다. 이러한 일련의 이론 체계를 중국에서는 ‘덩샤오핑 이론’이라고 한다.

    위대한 정치가 덩샤오핑

    중국은 이러한 덩의 이론을 바탕으로 개혁·개방 정책에 속도를 높여왔는데, 그것의 정점에 1997년의 ‘소유제 개혁’이 있다. 중국공산당 제15차 당 대회에서 제기한 소유제 개혁의 핵심은 기존 ‘공유제’를, 이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소유제로 전환함으로써 개체·사영기업은 물론 외국기업에까지 안정된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음해 전인대에서 헌법을 개정하면서 완전히 현실화한 소유제 개혁은 안으로는 낡은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장애를 걷어냄으로써 거시조절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 드라이브에 힘을 실어 주었고 밖으로는 중국경제의 투명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상에서 보듯 7개 학파의 논쟁은 현실에서 ‘성사성자’ 논쟁이라는 극히 세속적인, 우리식으로 말하면 ‘빨갱이 논쟁’으로 전화되어 나타났다. 학계의 논쟁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풍부한 이론을 바탕으로 한 고민이라 할지라도, 현실에서는 극히 간단한 문제로 전화되는 것이 중국의 현실이다. 인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중국 경제에 관한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중국이 자본주의로 가느냐 아니면 사회주의로 남느냐는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어떤 경제학자들도 명쾌한 답을 내리기 곤란했다. 7개 학파의 예만 들어도 실제로는 자본주의와 근접한 길을 주장하는 학자군도 존재했으나, 그들이 먼저 목소리를 높여 자본주의로 가자고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이 시기의 혼란은 결국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결국 덩샤오핑은 자신의 생애 최후의 임무인 이 문제에 대한 화룡점정을 위해 남순강화를 강행했고, 그것의 결과로 덩샤오핑 이론이라는 중국 특유의 이론체계를 완성하면서 중국 인민의 가슴에 영원불멸의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이 덩샤오핑의 이론이 덩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중국의 모든 슬로건과 마찬가지로 이 남순강화는 중국 공산당 내 다양한 투쟁의 산물이고, 이는 경제학계의 관점에서 볼 때, 7개 학파의 투쟁 과정에 현실적인 승자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중국의 현실경제는 경제성장률 조정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었다. 이 논쟁의 불씨는 중국 공산당 원로인 천윈(陳雲)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중국의 보수-강경파를 대표하던 그는 연 12.5%에 달하던 경제성장률을 10%이하로 낮추어야 한다며, 결과적으로 경제개혁 속도 조절론을 폈다.

    제도화  개방화로 대국  꿈꾼다

    1990년대 중국의 시장경제 체제 도입을 주도했던 덩샤오핑(왼쪽)과 자오쯔양

    이 논쟁의 배경에는 ‘성사성자’ 논쟁을 대신한 ‘효율과 공평’ 논쟁이 자리잡고 있었다. 효율과 공평을 둘러싼 논의 역시 사실상 성사성자 논쟁의 쌍생아로 중국사회의 지향점에 대한 고민을 보여주는 갈림길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경제개혁 효과가 가장 빨리 나타난 개방지구와 베이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즉 이농인구의 유입에 따른 도시 빈민층이 양산되면서 중국 사회의 전통적인 사회보장 체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효율과 공평의 문제는 중국의 경제발전과 사회안정을 어떤 방식으로 조화시킬 것인가에 관한,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한국의 성장·안정 논쟁과 마찬가지로 한쪽을 포기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현실에서 뚜렷한 대안을 찾기 어려웠다.

    만일 보수파의 급격한 주장처럼 공평을 중시해 경제 성장률을 조정한다면, 이미 경제발전이 이루어진 대도시에서는 일정부분 효과를 거두겠지만, 대부분의 낙후 지역에서는 막 일기 시작한 경제 건설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면서 중국 경제의 발전 방향을 제시한 것이 콴쑹(寬松)학파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콴쑹학파는 중국 경제의 온건개혁을 주장한 류궈광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조류다. 콴쑹학파는 당시 중국의 경제 현실에 대해 ‘원중치우진(穩中求進)’ 즉 안정 속에 성장 추구라는 정책 방침을 제시하며 경제개혁과 현실적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콴쑹학파의 주장은 이미 1980년대에 제기된 것이다. 1987년 여름 중국사회과학원과 중국 국가체제계획위원회, 국무원발전연구중심 등 중국의 주요 경제단체들이 모여 중국경제의 앞날에 대한 다방면의 토론을 통하여 제기한 ‘3·5·8 개혁 사유방향’을 계기로 형성된 이 학파는 이 건의가 중국 공산당 정치국에 의해 중국경제체제 중기(1988~95) 개혁요강으로 정식 채택되면서 공식화된다.

    당시 이 건의는 류궈광(劉國光)과 장줘위안(張卓原)이 중심이 되어 기초했는데, 당시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이 건의를 정리한 사람이 현재 중국 국가계획위원회 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는 천둥치이다. 이 건의의 핵심은 이른바 원중치우진에 따른 ‘안정 속의 발전계획’이다. 이후 콴쑹학파의 핵심 인물이 되는 이들은 파동을 중심으로 경제의 발전과정을 연구한 류궈광 교수의 이론을 바탕으로 중국경제의 개혁과 안정간에 조화를 유지하려는 방안을 연구, 제시해왔다.

    이들의 주장은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의 상황인식에 영향을 끼쳤으며, 덩은 이러한 이론적 근거에서 개혁을 지속하면서 안정을 추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보듯 당시 보수파의 경기억제론은 중국경제에 대한 충분한 검토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중국의 경기 과열 문제는 1995년에 가서야 조절된다. 또한 천윈은 이 과정에 그릇된 주장을 함으로써 자신이 평생 혁명가이자 당료로서 쌓아온 업적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중국의 현실 경제는 콴쑹학파의 이론과 정책 주장이 현실에서 힘을 얻는다. 특히 당시 심각했던 중국 경제의 과열 문제를 해결하고 연착륙에 성공해 안정적인 성장기조를 유지하게 되는 1996년 이후 콴쑹학파는 비로소 중국 경제의 오랜 비과학적 관행에 종지부를 찍고 현대적인 의미의 ‘거시조절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주룽지(朱鎔基)의 등장과 맞물린 이 시기는 중국 정부가 일련의 개혁 드라이브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던 시기인데, 이 과정은 앞서 얘기한 당 대회를 통해 확정된 개혁 방침과 소유제 개혁 등 제반 법적환경이 정비되면서 폭발적인 추동력을 얻게 된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경제의 시대구분은 중국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선 1978~79년의 조정기, 이후 1980년 이후에서 남순강화까지 자본주의 도입기, 그리고 제 3단계에 속하는 남순강화 이후의 이 시기는 중국경제가 혼란의 시기를 벗어나 안정적인 성장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따라서 현재의 중국 경제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순강화 이후 1990년대 중국 경제의 주요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경제성장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시기는 고성장, 주기의 부동성, 경제실력 향상의 3가지 특징을 갖는다. 이 시기는 1992년의 14.2%를 최고점으로 이후 연착륙 과정에 들어가지만, 당시 세계에서 유례없는 고성장을 구가하며 중국의 등장을 전세계에 알렸다. 경제 주기 또한 부동의 주기를 그리면서 경제수치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 있어서 중국경제의 실력이 급격히 향상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시기는 중국이 연착륙에 성공하면서 생긴 안정성을 기반으로 아시아 경제위기의 광풍을 이겨내면서 아시아의 경제리더로 부상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경제를 공급 중심으로 보았을 때 과잉과 결핍이 공존하면서 중국 경제에 구조적인 모순을 심화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농업·공업 분야와 개인 소비재, 그리고 고가치 소비재의 세 분야에서는 생산이 과잉됐다. 그러나 공공재 특히 사회기반시설과 복지 분야에서는 심각한 결핍 현상이 존재하는 기형적인 상황이 계속되었다.

    또한 현실 경제에서는 총물가 수준의 지속적 하락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 문제는 아직까지 근본적인 변화가 없어 일부에서는 이 상황을 디플레이션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이 과정에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했는데 특히 도시부문에서의 실업뿐 아니라 농업부문의 실업도 지속적으로 늘어나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이론적으로 실업의 원인이 생산저하와 화폐 공급저하라 했을 때 중국의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인데, 중국 경제학계에서는 이 부분을 화폐유동성 부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특히 천둥치 교수는 신용 결핍과 현대 경제에서의 단기순환 문제를 언급하면서 경제 정책자들의 인식전환을 강조했다. 이것이 이후 중국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는 유효소비 진작으로 정식화된다.

    이후 중국정부의 경제정책은 일관되게 유효소비를 진작시킨다는 전략을 보인다. 이를 위해 중국정부는 1996년 이후 공공주택 제도의 폐지와 사유주택 및 경제실용주택 제도의 도입, 공공교육 제도의 개인부담 원칙 전환, 공공의료의 의료보험 전환 등 굵직한 자본주의적 제도 개혁을 단행한다. 이와 함께 이자율의 지속적 인하, 이자세 도입 등 꾸준한 소비진작 조치를 취했다. 몇 차례의 공무원 월급 인상조치도 이러한 정책의 일부였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진작책이 농민보다는 도시민 위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따라 도시민의 소비는 어느 정도 진척되었지만 농촌은 여전했다. 심각성을 느낀 정부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 농산물가격 정책과 고소득 농산물의 장려 등 농민 소득의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의 소비가 정체되었을 때 유효수요 향상은 요원하다는 것이 중국정부가 내린 결론이었다.

    제도화  개방화로 대국  꿈꾼다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중국은 놀라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오성홍기와 자본주의의 상징인 맥도널드 간판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이 시기 중국 경제정책은 ‘거시조절’로 축약된다.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거시조절 정책의 목표는 민간부문의 활성화를 통한 유효수요 진작으로 집약된다. 구체적으로 보면 1996년에는 통화거시조절에 대한 기본 정책의 전형이 마련되어 화폐 및 단일이자 정책이, 1997년에는 진일보한 재정정책 및 수출, 세수 정책이 수립되었다. 또 1998년에는 한결 심화된 화폐 및 재정정책이 마련되어 정부 투자의 확대 및 부동산 정책 변화가 이루어졌고, 1999년 종합 재정·화폐정책이 실시되어 실업자 및 무소득자의 기본 생활비 보장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과정에 콴쑹학파는 진일보한 재정정책, 특히 화폐정책을 핵심으로 하는 여러 정책과 미국 이자율 수준 이하로의 이자율 유지, 그리고 기업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며 당시의 급박한 상황들을 합리적으로 헤쳐나가는 데 성공했다.

    특히 아시아 금융위기의 풍파 속에서 중국이 경제성장의 유지와 개혁의 지속적인 추진, 그리고 대외적으로 인민폐의 안정이라는 세 가지 정책 목표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데는 상술한 콴쑹학파의 정책 방침과 더불어 중성정책(中性政策)과 웨이탸오(微調·미세조정)의 공로가 컸다.

    원중치우진 정책의 구체적인 실현 방안으로 제시된 중성정책은 자율적인 시장경제, 즉 정부의 직접적 명령이 배제된 상황에서 정부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수단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다. 계획경제 시대와는 다른 조건하에서 경제의 과열 또는 침체를 막고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기 위해선 정부가 중성정책을 통해 재정 및 화폐정책이 긴축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 극단적이지 않은 온건한 수단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거시조절의 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나아가 실업을 통제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경제 총량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공급관리와 수요관리를 결합해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총량의 평형과 구조조정을 결합시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치유해야 한다는 것이 중성정책의 핵심 이론이다.

    이것은 당시 중국 사회에 대한 콴쑹학파의 관점을 확연히 나타내는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콴쑹학파는 개혁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안정을 중시하는 유파다. 콴쑹이라는 용어 자체가 느슨하다, 온건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콴쏭학파는 온건한 개혁과 느슨한 정책의 수행에 큰 비중을 두었는데 이것이 원중치우진 방침과 중성정책으로 나타나게 된다.

    조정 필요성 제기된 중국경제

    당시 중국 사회는 ‘성사성자’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내용적으로 사회주의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세력간에 격한 대립이 있었다. 이른바 보수파로 표현되는 계획 위주의 사회주의 정책 옹호자들은 경제성장 유무를 떠나 구체제를 옹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보수파라고 표현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분류일 뿐 사회 개혁에 있어서는 급격한 방법을 이용하더라도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강성파였다.

    반면 개혁파로 분류되는 세력 중에서 자본주의적인 시장경제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들, 예를 들면 체제변혁파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사상적 급진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개혁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집단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상대적인 온건파에 속했다. 아이러니한 일인데 그것은 그들이 주로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 경제학계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미국적 합리주의에 익숙한 그들이 사회적 안정을 해치면서까지 경제적 급진 개혁을 주장한다는 것은 그들의 학문적 근원상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한 개혁과 느슨한 정책 수행을 주장한 콴쑹학파의 주장에 중국의 지도부가 귀를 귀기울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개혁의 필요성과 현실적 안정이 조화된 그들의 주장은 다른 어떤 학파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저 온건과 느슨함만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앞에서 보듯 중성정책은 성장과 안정, 물가와 실업이라는 너무 많은 토끼를 잡으려는 포석이었다. 급변하는 세계경제 정세 속에서 그 과제는 단순히 느슨한 정책의 나열만으로는 얻을 수 없었다. 특히 경기 과열이 계속되고, 인플레이션과 실업의 위험에 직면하면서 중국 경제는 조정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그것의 구체적인 방안은 연착륙의 시도였고, 이를 위한 조정의 필요성에서 웨이탸오가 제기되었다.

    웨이탸오는 미세조정의 의미로 중성정책에서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정책 조정 수단이다. 이 정책 수단은 1988년의 경기 과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어 1993년의 경기 과열에 대한 처방 가우데 주요 정책 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경제의 거품을 걷어내는 긴축정책이 필수적인데, 긴축정책은 개별 산업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정책입안자의 입장에서는 특정 산업의 발전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장기적인 긴축정책과 단기적인 부양정책의 필요성간에 모순이 존재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중성정책에서 미세조정이 필요했고 이를 콴쑹학파가 주도적으로 나서 극복하게 되었다.

    이 시기 콴쑹학파의 주장 외에 주목해야 할 것은 효율·공평 논쟁을 잠재운 둥푸렁(董輔仍) 교수의 주장과 앞서 언급한 우징롄 교수의 국유기업 민영화 논의다.

    둥푸렁 교수는 류궈광 교수와 동렬의 인물로 1927년 저장성 전하이(鎭海)에서 태어났다. 1950년 우한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1953년 모스크바 경제대학에서 부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59년부터 중국과학원 경제연구소에서 봉직하면서 소장을 역임했다. 이 과정에 둥교수는 순야팡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데, 앞서 얘기한 8대 신위의 수위를 차지하는 인물이 바로 둥교수다. 중국 내에서뿐 아니라 1985년 옥스퍼드 방문학자를 시작으로 세계은행 등에서 근무하면서 중국 밖에서도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둥교수는 효율·공평 논쟁이 막바지에 이른 1999년 ‘경제연구’를 통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효율과 사회주의의 공평의 결합체라는 독특한 의견을 발표하면서 지난한 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또한 그의 저작물 ‘중화인민공화국 경제사’는 중국 경제사 연구의 결정판으로 평가된다.

    우징롄 교수는 국유기업 개혁에 일종의 이정표 구실을 했는데, 별호가 우스창(吳市場)인 우교수는 중국의 국유기업 민영화에 기본적으로 찬성하면서 특수한 경우에만 불가 입장을 밝혔다. 즉 인민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자연 독점산업, 즉 전기, 상수도, 교통 등의 분야와 국방과 관련된 산업, 그리고 국가가 일정기간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는 분야의 국유기업은 민영화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 이는 눈앞의 경제적 효과에 치중한 국유기업의 무조건 매각론을 반박하며 인민의 이익에 충실할 것을 호소하는 애국적 시장론이었다.

    이렇듯 중국 경제학계는 일관된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각 시국에 따른 논쟁이 과열될 때면 원로들이 직접 나서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중국 경제의 흐름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확립을 중심으로 중국특색의 거시조절 체계라는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중국특색의 거시조절 체계’는 중국특색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해당하는 중국 경제정책의 정식화를 의미한다.

    경제대국이자 개발도상국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 중국 경제학계의 현 시기에 대한 인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의 현재를 이해하는 척도는 중국의 공식 구호인 ‘중국특색 사회주의 시장경제’다. 언뜻 보면 경제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철학적·정치적인 표현이다. 즉 중국의 현체제가 특성을 가지고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설명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다.

    여기서 전형기(轉型期), 즉 체제전환기라 표현되는 중국 개혁·개방기 경제정책의 특성을 체계화할 수 있는 개념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최근 중국 경제학계에서 제기된 ‘중국 특색 거시조절체계’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이 표현은 중국특색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다음과 같은 지향성을 갖는다. 먼저 계획경제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바꾸고, 동시에 계획관리에서 거시조절 방향으로 바꾼다는 것. 현재 중국은 자신만의 특색을 갖는 ‘거시조절체계’를 형성하였다는 것이 중국 경제학계의 평가다.

    중국특색 거시조절체계는 중국이 처한 기묘한 상황에서 출발한다. 먼저 중국은 체제모형 전환기에 있는 국가다. 전형기에 있어 계획경제 시대의 모순과 그 잔재가 남아있고 새로운 체제에 대한 혼란과 모색이 공존한다. 또한 중국은 세계에서 성장이 가장 빠른 국가지만 아직은 개발도상국에 불과하다. 이러한 중국경제의 이중지위는 계속성장의 문제와 안정성장의 문제를 동시에 제기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다. 성장하는 인구 대국인만큼 중국경제는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중국은 만성적 유효수요 부족이라는 모순과 노동력 과잉에 따른 실업 문제에서 폭발 가능성을 동시에 안고있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이 안고 있는 세 가지 구조적인 문제로 직결된다.

    우선 중국 경제의 지속적인 안정성장에 대한 의문이다. 다음으로 구조조정이 연착륙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중국은 현재 금융기관,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문제뿐 아니라 소유제개혁 등 체제개혁을 위한 전 사회적인 구조조정의 난제를 안고 있다.

    끝으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두 방면의 격차다. 계층간 격차와 지역간 격차는 사실 중국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고민이다. 계층간 소득격차를 표시하는 지니계수를 보면 현재 0.4로, 20년 전 0.1~0.2보다 훨씬 높다. 특히 이 문제는 구조조정을 통한 실업과 맞물리면서 심각한 빈곤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빈곤이 도시에서는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농촌에서는 전면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더하다.

    이러한 조건 아래 ‘중국특색 거시조절 체계’로 공식화되는 중국경제의 당면 정책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제도와 정책의 변화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는 개혁·개방의 실효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과거 동유럽의 예를 보면 제도의 변화를 정책의 변화가 못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즉 하드웨어는 급격히 변하는데도 구태의연한 소프트웨어가 잔존해 개혁의 효과를 반감시키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에 반해 중국의 개혁은 제도와 정책의 변화가 발을 맞춤으로써 성공의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총량 조절정책과 구조조정의 문제가 상호 결합되어 진행된다. 중국 경제개혁은 총량에서의 성장 문제와 내부적인 구조조정 문제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성장이 구조조정을 방해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조조정이 경제성장을 방해하는 상황은 더욱 심각함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개혁은 성장과 구조조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평가된다.

    셋째, 다른 국가에 비해 실업문제에 대한 통제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다. 사실상 중국의 실업문제는 정책 외의 문제다. 즉 중국에서는 어떤 정책적 처방으로도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중국은 도시실업률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실업이 전체 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며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중국의 실업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중국에서의 실업문제는 국가의 존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중대한 문제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실업문제는 해결보다는 통제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넷째, 중앙정부의 거시조절 과정에 지방정부 및 국유기업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중국은 거대한 국가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정책수행에 있어서 지역간, 산업간의 불균등 문제는 1차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특히 국유기업이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할 때 신중히 조정되어야 한다.

    다섯째, 현재의 거시조절 단계상 재정·화폐정책이 정부의 계획과 지도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중국은 현 단계에서 정부의 적극적인 간여가 필요한 나라다. 상당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덜 성숙된 시장상황에서 안정적인 성장과 균형을 위해서는 정부의 적극적인 계획과 지도가 요구된다.

    뛰어난 지도자, 능동적 경제학자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중국은 개혁·개방의 항해를 시작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현실 인식에 기반하여 중국특색의 거시조절 체계라는 현실 정책의 시스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비록 처음에는 인민들의 춥고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당위에서 시작했지만, 결국은 중국 내부의 다양한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의 위상을 명확히 하고 미래의 목표를 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 과정에 치열한 고민과 열띤 논쟁들, 때로는 전 사회를 뒤집어 놓는 아픈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중국의 경제학계는 문제를 한 발 앞서 제기하고, 그 해결 방안을 위해 고민하는 능동적인 자세를 보였다. 특히 체제모형을 둘러싼 7개 학파의 고민들은 중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조망과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다양한 논의의 창을 열어놓음으로써 중국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러한 다양한 논의에서 올바른 노선을 집어내고, 그것을 현실화시킨 일관성 있는 지도자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의 후계자들이 앞선 자의 노선을 더욱 발전시켰다. 결국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나아가 그것을 시스템화했다는 점은 칭찬 받아 마땅하다. 아니 세계경제계에 유례가 없는 대역사를 이루어 낸 셈이다.

    중국경제의 힘은 바로 이런 메커니즘에서 나온다. 세계가 중국경제의 힘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도자와 그 배후세력이 음모나 꾸미고 개별적 이익집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만들고 개방하는 시스템. 이것이 중국 경제의 진정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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