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友人像’과‘女人像’

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 글: 구광모

    입력2002-11-06 08:3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友人像’과‘女人像’
    2002년 2월2일(수) 오후, 필자는 국회도서관에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책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된 조선어판 ‘朝鮮(조선)’을 읽고 있었다. 월간지 ‘朝鮮’은 조선총독부가 조선통치에 필요한 광범위한 정보 수집과 그 제공을 목적으로 일본어와 조선어로 발간하던 종합 잡지다.

    ‘朝鮮’ 1930년 2월호를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격렬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이 책의 목차에서 총독, 정무총감, 재무국장 등 일본인 최고위층의 정책논설과 함께 이상(李箱)의 장편소설 ‘十二月 十二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월간지에는 이외에도 조선인의 글로 이능화(李能和)의 ‘朝鮮喪祭禮俗史(조선상제례속사)’와 안확(安廓)의 ‘各國(각국)의 綴字論(철자론)과 한글문제’ 등도 수록돼 있었다. ‘十二月 十二日’은 2월호부터 12월호까지 연재되었다.

    소설 제목 ‘십이월 십이일’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파동치는 전율을 느꼈다. 오래 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이상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에 대해 해괴한 욕설을 퍼부은 작품을 썼다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를 향한 기발한 욕설

    이상의 생년월일이 1910년 9월23일이므로, ‘십이월 십이일’을 집필한 1930년 2월이면 그의 나이 만 19세 4개월 남짓한 무렵으로 그가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임명된 지 11개월 정도가 지난 때였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큼지막한 글씨로 9개월에 걸쳐, 십이(12), 십이(12)라는 육감(肉感) 진한 우리 욕설을 숫자로 위장해 소설 제목으로 인쇄해놓은 그의 담력과 기발함에 나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12월12일은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날인 동시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날이며, 주인공이 죽을 날이기도 한 동시에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라고 깨닫는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12, 12로 상징되는 욕설과 함께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라고 절규하는 그의 소설 속의 외침이 천둥소리처럼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상은 원래 숫자와 기호를 사용해 그의 생각과 울분을 상징화하는 기법을 많이 활용한 작가라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나의 아버지(具本俊)는 자주 말씀했다. 시 ‘烏瞰圖(오감도)’에 나오는 “13人의 兒孩(아해)가…”가 그렇고, 이상이 ‘제비’다방 다음으로 개업하려고 간판을 붙였다가 그 의미가 탄로나 허가 취소된 ‘69’다방도 그렇다. 그 외에도 성교를 상징하는 33과 23(二十三: 다리 둘과 다리 셋의 합침) 및 且8(차팔 또는 조팔이라 읽음. 발기한 남성 성기 또는 18과 대칭을 나타냄) 등을 포함해 이상은 시각적으로나 청각적으로 다채롭게 숫자와 기호들을 시어(詩語)로 만들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곧바로 국회도서관 1층으로 내려와서 이상에 관한 도서들을 대출 받아 읽기 시작했다. 고도의 지성과 해학과 풍자로 일제를 비하, 야유하고 암울한 현실에 대하여 울분을 토로한 이상의 외침을 좀더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나는 먼저 이상과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의 관계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날이 나의 당숙(堂叔)인 구본웅 화백의 50주기 기일이어서 내가 11세 때인 1952년 46세에 폐렴으로 운명한 그에 대한 추억과 추모의 정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생후 4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던 구화백은 그의 숙모(朴仁淑)인 나의 할머니를 평생 동안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그는 1929년 결혼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번 이상 우리 집을 찾았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50년 봄에는 두 달 동안이나 우리 집에 와서 살았다. 당시 아홉 살인 나와 키가 비슷했던 그는 나를 데리고 놀기를 무척 좋아했다.

    이상의 전기(傳記)를 담은 여러 책에는 구본웅과의 극적 교우관계가 쓰여 있었다. 시인 고은(高銀)은 ‘이상 평전’에서 “꼽추 구본웅은 그의 문학적 취향과 함께 파리 물랭루주의 난쟁이 화가를 방불케 하고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에 비유되기도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둥근 안경을 쓰고 예리한 감각과 후덕한 입술과 함께 스폰서 기질을 가진 그는 이상과 동세대로서…그를 만나자마자 이상은 특이한 동성애적 우정을 가지고 그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라고 기술했다. 국문학자 김윤식 교수는 ‘李箱硏究(이상연구)’에서 1933년(이상의 나이 23세)의 연보에 “구본웅과 사귐. 금홍과 사귐”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내가 읽은 모든 책은 이상이 구본웅을 처음 만난 때를 1933년경이라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상과 구본웅은 초등학교 동기동창

    이상과 구본웅은 어릴 때부터 경복궁 서쪽 동네에 이웃해 살던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나는 즉각 두 분의 연보(年譜)를 도서관에서 확인해 보았다. 두 분 모두 신명(新明)학교 1921년도 졸업생이 틀림없었다. 나는 당숙의 아들들(具桓謨·相謨·橓謨)에게 전화를 걸었다. 특히 그의 셋째 아들은 서산과 신명학교 동기동창인 이상호(李相昊)라는 분으로부터 “우리 셋은 같은 반이었는데 구본웅은 글씨를 잘 썼고 김해경(金海卿·이상의 본명)은 말을 잘했고 나는 공부를 잘했다”는 말을 직접 들은 적도 있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상보다 네 살 많은 구본웅은 몸이 불구이고 약해서 초등학교를 다니다말다 하는 바람에 이상과 같은 반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꼽추인 구본웅을 따돌렸다. 그러나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 있었다. 항상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김해경(이상)이었다. 당시에 동급생 중에는 구본웅보다 몇 살이 더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상은 젖비린내 나는 아이로 취급받았으며 적지 않은 급우들에게 존대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졸업 후에도 이상은 구본웅에게 계속 존대어를 쓰며 4년 선배로 깍듯이 예우했다. 그래서 구본웅과 동갑인 이상호가 초등학교 졸업동기인 것은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았지만, 이상과 구본웅이 동기동창이냐고 묻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서산 구본웅은 1906년 3월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불행은 태어나는 순간 시작되었다. 그의 어머니 상산(商山) 김(金)씨는 산후병에 시달렸다. 산후조리를 위하여 그녀의 친가가 있는 황해도 연백으로 구본웅을 데리고 갔지만 그녀는 4개월 후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래서 구본웅은 동네사람들에게 젖동냥을 다녀야 했고 허약한 체질로 어른들의 애를 태웠다. 그런데 젖을 얻어 먹이고 집에 돌아와서 대청마루로 오르던 하녀 복실이가 등에 업힌 두 살 무렵의 구본웅을 댓돌위에 떨어뜨렸다. 돌 위에 떨어진 그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에 오랫동안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 1년이 지나 아버지 구자혁(具滋爀)은 아이의 척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치료를 위해 즉시 서울 본가로 돌아왔지만 구본웅은 곱사등이가 되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구본웅 계모와 이상 부인의 애증 관계

    구본웅이 네 살 때 변동숙(卞東淑·1890년 생)이란 분이 계모로 들어왔다. 만 19세의 그녀는 잠사(蠶絲)학교를 졸업한, 당시로는 고학력 인텔리였지만 결혼 적령기에 들었을 때 그녀 집안의 살림이 기울었다. 그래서 어린 아들 하나 있는 양반 출신 부자에게 시집간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녀가 양육해야 할 아들이 불구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몹시 당황했다고 한다. 변동숙은 잘생긴 용모에 성격이 괄괄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지배력이 뛰어난 전형적인 마님 타입이었지만 남편과 구본웅에 대한 정성은 지극했다.

    그녀의 아버지 변국선(卞國璿)은 늦게 첩을 두었다. 본부인 소생이 구본웅의 계모가 된 변동숙이며 소실의 소생 1남2녀 중 장녀가 훗날 이상과 결혼한 변동림(卞東琳 1916년 생)이다. 이런 관계이다 보니 변동림은 26세나 더 많은 이복언니 변동숙을 생래적으로 좋게 대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장인(丈人·변국선)댁 살림을 돕고 있었기에 친정과 이복동생들에 대한 변동숙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다. 변동림이 폐병이 심한 6살 연상의 이상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구본웅의 계모인 변동숙은 이를 극구 만류했다. 그녀는 이상이 동경으로 갈 때 구본웅이 이상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은 묵인했지만, 이복동생 변동림의 동경 유학을 지원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상이 죽은 후 변동림이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화백과 재혼한다고 했을 때 그에게 본부인이 있는데 첩살이하는 꼴이거나 본부인을 내쫓는 악행을 저지르는 것 아니냐며 변동림의 머리채를 잡아 뒤흔들 정도로 그들의 혼인을 극력 반대했다. 이에 흥분한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며 김향안(金鄕岸)으로 이름을 바꾸고 김환기와 동거에 들어갔다. 몇 년 후에 그들은 본부인을 내쫓고 정식으로 결혼했다.

    이복자매 간의 이러한 애증 관계는 구본웅의 계모와 김환기 화백이 모두 죽은 후 되살아났다. 시인 겸 화가인 김향안이 다시 이상의 부인 변동림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녀는 구본웅의 계모가 된 이복언니 변동숙을 근거 없이 깔아뭉개는 폭언을 많이 했다. 심지어 1980년대 중반에는 유명문학지에 “언니는 학교에서 낙제를 하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아 어머니가 그것을 말리려 했고 집안의 평화가 언니 때문에 깨진다고 생각되어 나는 언니를 싫어했다”는 기고문을 싣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은 결혼 전에 그녀의 친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결코 친아버지의 소실과 그 자녀들이 사는 집에 함께 기거한 적이 없었다. 나이 차이로 보아도 변동숙이 학교에 다닐 때에 변동림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또한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전 영문과를 중퇴한 변동림과 마찬가지로 이복언니 변동숙도 머리가 뛰어나게 좋은 편이었다. 변동숙은 엄청난 소설 애독자로 특히 구운몽, 옥루몽, 삼국지 등은 거의 외울 정도로 수십 번씩 탐독했다고 친척들에게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곁에서 지켜 보아온 필자도 그녀의 뛰어난 기억력, 유창한 화술은 물론 소설 구절들을 적절히 인용하는 재주가 탁월함에 언제나 탄복할 정도였다. 변동숙은 변동림이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꾼 뒤 더 이상 이복동생을 상면하지 않았고 1974년에 구본웅의 장남인 구환모(具桓謨)의 자택에서 향년 84세로 타계했다.

    구본웅은 신명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경기중·고등학교의 전신)에 응시했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필기시험 결과는 상위권에 들었지만 면접과 사정회의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구본웅은 면접시험에서 “우리 학교는 정신적 신체적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최고의 영재들만 선발하고…” 운운하면서 경멸의 눈웃음을 짓던 한 선생님 얼굴을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다. 소년 구본웅은 한동안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울분과 좌절, 허탈감에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그는 결국 사립학교인 경신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경신고보는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해서 다른 학교들보다 분위기가 자유롭다고 소문이 났었다. 당시 교장선생님 쿤스(한국이름 군병빈)는 장애인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교장선생은 구본웅을 만날 때마다 공부를 잘하고 글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린다며 칭찬을 해주었고 항상 자상하게 대했다. 이런 환경에서 구본웅은 매학년 1등을 했다. 학교 공부뿐 아니라 문학서적을 새벽까지 탐독했으며 매주 토요일에는 YMCA에 있는 고려화회(高麗畵會)에 나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에게서 서양화를 배웠다.

    1919년 11월22일, 고려화회의 개강일에 사생상(寫生箱 스케치 박스)을 들고 춘곡 선생님을 찾아온 젊은 여인이 있었다. 갸름하고 둥그스름한 계란형의 흰 얼굴에 서글서글하고 맑게 빛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춘곡에게 인사를 드리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보통 키에 뛰어난 미인이랄 수는 없으나 세련된 자태와 재기가 넘치는 얼굴이 만 13세의 구본웅에게는 매우 인상적으로 보였다. 춘곡은 그녀가 동경에 유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고 한 달에 한 번씩 실기를 지도할 나혜석 선생님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학생들의 소묘하는 모습을 둘러본 후 구본웅에게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의 굽은 등을 두드리며 열심히 하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수업이 끝난 후 한 수강생이 그녀가 3·1독립만세사건 이후 체포되어 5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지난 늦여름에 풀려나 이번 학기부터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나가는 만 23세의 노처녀 선생이라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다음 달에 다시 만난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선생은, 구본웅에게 이제 막 그림공부를 시작해 테크닉은 배워야겠지만, 그림에 창의력과 에너지가 담겨 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간 신체적 불구로 인한 고통과 좌절, 따돌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소년에게 재능이 있고 발전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그녀의 격려와 칭찬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구본웅이 중학교 2학년 때인 1922년 6월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조선미전 또는 鮮展)’가 영락정 총독부 상품진열관에서 개최되었다. 그는 고려화회의 선배들과 함께 조선미전 구경을 갔다가 진명여고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한 남학생을 보았다. 이상이었다. 그들은 함께 고희동의 유화가 걸려있는 곳으로 갔다. 그 그림 앞에는 날아갈 듯한 한복을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돌아설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구본웅은 무엇에 끌린 듯 그녀 근처로 다가갔다. 그녀가 드디어 돌아섰다. 아! 기생 채경이었다.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한 처지지만 1910년대에 서울에서 제일간다고 소문났던 그 유명한 채경이 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그림에서 돌아서자마자 갑자기 가슴 아래로 나타난 이상한 꼽추에 놀랐던 것 같았다. 그녀는 춘곡 고희동의 ‘美人圖(미인도)’들에서 자주 보던 바로 그 미인이었다. 채경은 그림 속의 모델이 아니라 바로 구본웅의 머리 속에 각인된 이상적인 미인이었다. 한참 후 이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상도 채경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연상의 기생에 넋을 잃어버렸다.

    사생상(寫生箱)을 부러워한 이상

    1923년 봄에 군병빈 교장은 학년별로 한 명씩 우수한 학생을 뽑아 부상으로 카메라를 주었다. 3학년 대표로는 물론 구본웅이 뽑혔다. 카메라가 아주 귀하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부상으로 받은 사진기는 미국 교회에서 기증한, 그 당시로는 매우 고급품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상을 받은 학생들에게 직접 사진기 작동법을 가르쳐 주고 사진을 찍어서 가져오면 인화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구본웅은 너무 신이 났다. 일요일이면 시내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남대문역에서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뀐 뒤의 경성역 간판도 찍었다. 일본 순사와 헌병도 숨어서 찍었다.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는 기생도 찍었다. 숙부를 따라 YMCA에서 열린 윤심덕 음악회에 가서 윤심덕과 반주자와 청중을 찍었다. 필름을 다 써서 교장실을 찾아가니 교장선생님은 필름을 새로 주셨다. 며칠 후에는 인화된 사진들을 주시며 그가 찍은 사진들이 구도도 좋고 내용도 아주 좋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는 더욱 신이 나서 열심히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2년 뒤에 들은 사실이지만, 군병빈 교장은 사진을 두 장씩 인화하여 한 장은 미국에 우송했다. 이렇게 모아진 사진은 미국 기독교계와 미국 정부가 조선의 생활상과 시설 등을 파악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 일로 훗날 교장선생님은 간첩 혐의로 일본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제2회 조선미전’이 전년도와 같은 장소에서 1923년 5월에 개최되었다. 서양화 분야에서는 나혜석과 김창섭이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4등에 입상했다. 고희동은 제1회 때 조선인 입상자가 없었던 데 항의하는 뜻으로 아예 출품하지 않았다. 이번 조선미전에는 알몸(누드) 작품이 나왔다고 해서 전람회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첫날 기자들에게 공개했을 때 알몸 작품의 촬영을 금지한 것이 오히려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부풀려 놓았다. 구본웅과 이상은 둘째 일요일 오후에 전람회장에 갔다. 구본웅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이상은 구본웅의 사생상(스케치 박스)을 들어주었다. 이상은 사생상을 무슨 보물상자처럼 껴안았다. 너무나 가지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예상대로 누드화인 김관호(金觀鎬)의 ‘湖邊(호변)’ 앞에는 남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가운데만 가린 여인이 호숫가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여자들은 그 앞에서 얼굴을 돌리고 지나갔다. 작품 옆에는 ‘촬영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이상은 순사 몰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이상이 옆을 막아주고 구본웅은 무릎을 구부려 ‘호변’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구본웅의 키가 작은데다 주변에 어른들이 둘러섰으며 이상이 또 막아주었기 때문에 순사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악동 같은 눈웃음으로 서로를 축하했다. 그런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가 여자 알몸 그림 앞에서 왜 서성거리노. 까만 상자 들고 뭐하는 짓이고? 빨리 가그라. 이놈” 하는 어느 노인의 소리에 그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꼬마라는 소리에 구본웅은 들떴던 기분을 잡쳐버렸다. 꼬마라는 단어는 그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자기도 만 열일곱 살이 넘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런 친구의 화난 모습에 이상은 자기에게 한 말이라고 구본웅을 위로했다.

    닭똥칠쟁이로 놀림받던 서양화가

    1919년에 발족한 고려화회가 1923년 말 고려미술회로 확대되었다. 춘곡 고희동은 회원들에게 1924년 6월1일부터 21일까지 개최될 ‘제3회 조선미전’에 모두 출품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구본웅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경성제1고보에 낙방한 이후 관(官)에서 하는 것에는 학교고 전람회고 간에 근처에도 안가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열등감보다는 거부감이고 좌절감보다는 적개심이었다.

    ‘제3회 조선미전’ 심사결과가 발표되자 언론들은 “고려미술회가 조선미전의 권위를 독점했다”고 보도했다. 서양화에서 조선인 입상자 8명 중 6명이 고희동, 나혜석, 이종우를 비롯한 고려미술회 교사급이었다. 교사가 아닌 회원도 10명이나 입선했다. 고려미술회는 이러한 성과를 자축하기 위하여 10월21일부터 110점을 진열한 ‘제2회 회원전’을 개최했다. 구본웅도 ‘폐허’를 처녀 출품했다. 미술비평가 안석주(安碩柱)는 고희동과 구본웅을 포함하여 9명의 작가들이 전문가의 눈길을 끈다는 비평문을 발표하면서, ‘폐허’는 “석탑과 나무 따위가 열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독특한 풍경화”라고 평했다. 구본웅은 그림을 배운 후 처음으로 성취감에 취했다. 여기서 얻은 자신감은 다시 열정으로 불타고 집요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구본웅의 아버지 구자혁도 드디어 아들에게 서양화가의 길을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1920년 3월13일자 ‘매일신보’에서 오려낸 임장화(林長和)의 글과 1920년 7월7일자 동아일보에 난 변영로(卞榮魯)의 글이었다. 유미주의자 임장화는 “예술은 현실을 시화(詩化)하여 고통을 공상화하며, 비애를 색채화하며, 미를 종교화하며, 사람을 시화(詩化)함이 아닌가”라고 예술의 신비주의와 순아한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또한 시인 변영로는 미술평론을 겸한 듯 “(우리나라의) 수묵채색화가들이 모두 위대한 선인들을 복사하고 모방할 뿐”이라고 꾸짖으면서 “현금 프랑스 파리 살롱 회화전람회를 보라. 분방한 상상력과 선인의 방식을 무시한 대담한 표현력과 창조력의 결정이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서양화가는 닭똥칠쟁이로 놀림을 받았다. 그래서 구본웅의 아버지는 그림 취미가 있는 외아들에게 닭똥칠을 평생의 직업으로 훈련시키다니, 하며 허탈해 했다. 구본웅은 아버지의 그 표정을 평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1925년에는 YMCA청년학관에 미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화 연구기관으로 고희동이 설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연구소가 문을 열자 적극적인 성격의 김복진(金復鎭)이 사실상 연구소를 주관하게 되었다. 정관(井觀) 김복진은 일본 유학중에 ‘일본제국미술전람회(약칭 일본제전 또는 帝展 또는 제국미전)’에 입선했고 귀국해서는 ‘제4회 조선미전’ 조소분야에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최고상인 3등상을 수상하며 당시에 조선 최고의 미술비평가로 떠오르고 있었다. 구본웅은 문학가 김기진의 형이자 조선 최초의 조각가 김복진의 인간적 매력과 뛰어난 예술적 능력 및 솟구치는 정열에 이끌렸다.

    만 20세가 된 구본웅의 가슴은 신체적인 좌절과 분노를 딛고 일어서고 싶다는 에너지와 결연한 각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고희동과 나혜석과 이종우 식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화풍(畵風)은 또 다른 좌절과 한계를 체험하게 할 뿐이었다. 그는 새로운 화풍과 기법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김복진의 조소 분야가 그에게 섬광처럼 강렬한 메시지를 주었다. 조소에서는 작가 자신의 관점과 자아의식으로 가득 찬 주관적인 표현이 가능할 것 같았다.

    김복진의 제자들도 사부(師父)의 영향을 받아 한결같이 사실적이고 정적인 형태의 예쁜 작품 만들기에 열중했다. 처음에는 구본웅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조소의 기본 기술을 어느 정도 터득한 1926년 겨울에 들어서면서 그는 사실적인 조소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점토로 남자의 머리부분을 자신이 만들고 싶은 대로 표현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김복진 식의 전통적인 조각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본웅은 일본에서 간행된 책을 보고서, 인상주의 시대의 천재적인 조각가 로댕이 모든 형체를 주관적인 대상으로 파악하여 대담하게 변형시키는 기법을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스스로 깨쳤다.

    1927년 새해에 접어들면서 구본웅은 작품의 눈과 입과 코와 귀를 멋대로 대담하게 변형해 가면서 습작을 계속했다. 누구의 얼굴을 보고 시작했는지 그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작품의 얼굴은 제멋대로 변형되었다. 폭발적인 감성을 정착시키면서 넘쳐흐르는 힘을 표현하려 노력했다. 한 줌의 흙덩어리를 중심을 향해 힘차게 붙여 갔다. 그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좌절과 분노와 초극이라는 내면성을 분출시켰다. 이 과정에 혼돈으로 시작하여 질서에 이르는 조형미가 나타났고 격동에서 안정에 이르는 감동적인 조형의 흔적들이 표출되었다. 강한 터치와 대담한 변형은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단순화된 처리와 두텁고 거친 재질감은 생명감을 더했다.

    그는 계속해서 남자의 두상을 습작으로 만들었다. 흙으로 빚어서 물건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원시적인 기쁨이 몰려왔다. 곧이어 단순히 만든다는 차원을 벗어나 예술성을 높인다는 원초적 충동이 거세게 밀려왔다. 그때 갑자기 작업실을 같이 쓰고 있던 서양화가 이창현(李昌鉉)의 다급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거의 탈진해 쓰러진 구본웅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필명 ‘이상(李箱)’이 탄생한 배경

    동광학교를 거쳐 1927년 3월에 보성고보를 졸업한 김해경은 현재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진학했다. 그의 졸업과 대학 입학을 축하하려고 구본웅은 김해경에게 사생상을 선물했다. 그것은 구본웅의 숙부인 구자옥(具滋玉·당시 ‘조선 중앙 YMCA’ 총무)이 구본웅에게 준 선물이었다. 해경은 그간 너무도 가지고 싶던 것이 바로 사생상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자기도 제대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감격했다. 그는 간절한 소원이던 사생상을 선물로 받은 감사의 표시로 자기 아호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상(箱)’자를 넣겠다며 흥분했다.

    김해경은 아호와 필명을 함께 쓸 수 있게 호의 첫 자는 흔한 성씨(姓氏)를 따오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기발한 생각이라고 구본웅이 동의했더니 사생상이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니 나무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서 찾자고 했다. 두 사람은 권(權)씨, 박(朴)씨, 송(宋)씨, 양(梁)씨, 양(楊)씨, 유(柳)씨, 이(李)씨, 임(林)씨, 주(朱)씨 등을 검토했다. 김해경은 그중에서 다양성과 함축성을 지닌 것이 이씨와 상자를 합친 ‘李箱(이상)’이라며 탄성을 질렀다. 구본웅도 김해경의 이미지에 딱 맞으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기는 아호의 발견에 감탄했다.

    이상은 아호의 동기와 필명의 유래에 대해 비밀로 해달라고 구본웅에게 요청했다. 그렇게 부탁한 이상은 앞으로 아호의 유래를 묻는 사람들에게 각기 다르게 설명하고는 속으로 낄낄거리며 재미있어 할 것이 틀림없었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는 달리 예술계에서는 오히려 모호하고 다의적(多義的)인 것이 덕목(德目)임을 17세 소년 이상이 이미 알았던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몇 년 후에 소설가 박태원(朴泰遠)이 아호의 유래를 묻자 이상은 익살스럽게 대답했다. 건축과 졸업 후 부감독으로 나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건물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자기를 이씨인 줄 알고 이씨의 일본식 발음인 이상으로 잘못 부른 것에서 생겨났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즉흥적인 아호의 유래는 즉시 시인 김기림(金起林)과 서정주(徐廷柱) 등에게 전해졌다. 몇 년이 더 지난 후에 그의 아내 변동림에게는 최상 최선의 목표라는 뜻으로 이상(理想)을 나타내는 음을 따라 만들었다고 알려주었다.

    통설로 자리잡은 ‘신(新) 이씨론’

    이상은 스캔들을 일으키고자 하는 일종의 다다(dada)적 행위로 자신의 아호를 활용했다. 변동림의 주장이 맞냐 또는 ‘이씨’설이 맞냐 하는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당대의 문필가들에 의해 전해진 이씨설(李氏說)이 정설로 알려져 왔다. 그럼에도 구본웅은 이상과의 약속대로 그가 사망한 뒤에도 침묵했다. 그러나 구본웅은 그의 숙모(朴仁淑)에게 숙부(具滋玉)가 그에게 준 사생상을 이상에게 선물했다는 사실과 그의 제일 친한 친구인 이상의 아호가 바로 그 사생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숙부와 숙모가 필자의 할아버지이고 할머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1950년대 말 할머니로부터 사생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상이라는 이상한 아호에 관해 우연히 들었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문학계는 1972년에 이르러서야 경성공업 제8회 졸업생 앨범에 이상이라는 아호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졸업 후에 지어졌다는 이씨 이론의 근거가 무너졌다. 그렇다고 해도 변동림의 주장을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과 상징성이 모자랐다. 결국은 졸업 후가 아니라 재학 시에 실습차 또는 예비 직책을 맡아 공사장에 나갔다가 이상으로 불린 것이 아호의 동기가 되었다는 ‘신(新) 이씨’이론이 통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어떤 시인은 이상이란 발음이 ‘정상이 아닌 상태’라는 이상(異常)과 부합되며 상(箱)자가 풍기는 현대성, 그리고 의식이 상자 속에 속박되고 있다는 근대적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어떤 학자는 김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세속적 꿈이 아니라 김씨로부터 자유로운 자신만의 혈통을 세워 오직 예술적 에너지만으로 충전된 새로운 자아의 자장을 만들려는 이상(理想)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작가는 상(箱)은 상자를 말함인데 갇힌 자의 절규를 뜻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하여튼 이상은 지금도 지하에서 낄낄거리며 좀더 이상하고 좀더 기발한 풀이와 주장이 횡행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상은 구본웅의 아호인 서산(西山)에 비하여 자신의 호가 얼마나 위대한 상징성을 함축하고 있는가에 대해 어깨를 으쓱대며 우월감을 표시하곤 했다. 구본웅의 선산과 별장이 있는, 구파발과 북한산성을 지나서 인수봉이 정면으로 올려다보이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효자리 사기막골 일대의 별칭인 서산을 아호로 지은 것은 바로 양반과 부르주아 근성을 과시하는 것 아니냐고 가끔 비아냥거렸다. 그래도 구본웅은 그런 이상이 밉지 않고 대견스럽기만 했다. 그는 ‘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뜻과 이미지가 그의 처지를 상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상과 목표로 추구하고 싶은 향념에서 그렇게 정했다고 응수했다. 서산에 낙조를 이루며 해가 넘어가면 곧 이어 달이 뜨고 별이 지면 다시 태양이 떠오르는 순환의 멋진 시작과 생명력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서울의 동쪽에 있는 산이 아니고 오히려 서산이 아니겠느냐고 동의를 청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름달이 뜰 서울 속의 서산(西山)인 인왕산을 쳐다보았다.

    ‘友人像’과‘女人像’
    1927년 봄에 구본웅은 이상을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 제과점에서 만났다. 지금까지 ‘메이지’ 또는 ‘모리나가’ 같은 최고급 제과점에 갈 때에는 항상 그의 아버지나 숙부를 따라 갔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된 뒤 이제는 어른으로 행세하고 싶은 마음에 두 사람은 그 곳에 마주앉았다. 그들이 커피와 곰보빵을 들며 한참을 떠들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정월 나혜석이 들어왔다. 구본웅은 놀라서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옆에 있는 이상은 홍당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월은 남편(金雨英)이 만주지방 안동현 부영사의 임기를 마치고 이번 봄에 귀국해서 동래에 있는 시가에 있는데 곧 세계일주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녀는 ‘제6회 조선미전’에 출품하기 위하여 며칠 전에 상경했다며 우연히 구본웅을 만난 것을 무척 반가워했다. 작년 말에 둘째 아들을 낳아 2남1녀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만 31세인 그녀의 얼굴과 몸매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을 휘어잡는 매력과 교태가 넘쳐흘렀다.

    구본웅은 한때 미술을 가르쳐준 나혜석에게 이상을 소개하며 그가 미술과 문학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과자와 빵을 사러 왔는데 자기도 커피 한잔 마시고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뜻밖에 그들은 동석하게 되었다. 그녀는 구본웅에게 동경이나 파리로 유학을 가보라고 격려했다. 이상에게는 너무 미남이라 그를 따라다니는 여자가 많겠지만 일부일처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덕담을 하면서 그의 등을 자상하게 두드려 주었다. 그때 이상의 얼굴에는 번갯불이 내려친 듯 전율이 스쳤다. 이상은 그녀에게 화답하듯 작년에 정월이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내가 어린애 기른 경험’ ‘생활개량에 대한 여자의 부르짖음’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경력과 구심’ ‘미전 출품 제작 중에’ ‘내 남편은 이러하외다’ 그리고 소설 ‘원한’을 읽었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월은 어떻게 그런 것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느냐며 이상의 기억력과 독서량과 정보력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상 김해경이라고 했지요? 아호가 무척 멋있는데….”

    “몇 년 전에 ‘신여성’에 발표하신 ‘강명화의 자살에 대하여’라는 글에 쓰신 정월(晶月)이란 아호를 보고 글과 아호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일이 있습니다.”

    이상이 그답지 않게 가느다란 목소리로 응답했다.

    “아! 그 글도 읽었어요? 이상!”

    이상은 서산에게처럼 자기에게도 말을 낮추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럼 그렇게 하자. 김해경 군. 서산도 강명화에 관한 글을 읽었니?”

    “저는 읽지 못했어요.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말씀해 주세요. 정월 선생님.”

    기생 강명화의 죽음

    강명화는 기생이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고 당신은 나하고 살면 사회와 가정의 배척을 면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사랑을 위하고 당신을 위하여 한 목숨을 끊는 것이 옳소”라는 유서를 남겼다. 1923년 6월15일 ‘동아일보’는 ‘康明花(강명화)의 자살’이란 제목 하에 10일 하오 11시경에 약을 먹고 11일 하오 6시 반에 고개를 땅에 박고 별세하였다는 간단한 기사를 내보냈다. 나혜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20시간 가까이 죽음을 향하여 고통하고 신음했을 것을 생각하니, 전신이 벌벌 떨리고 소름이 쭉 끼치고 눈앞이 아물아물했다고 묘사했다.

    나혜석은 기생의 처지와 사랑을 연민의 정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강씨의 자살 동기에 동정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기생 강씨는 비운을 견디다 못해 정조(貞操)의 순수함을 보이기 위해, 자기 정신의 결백을 드러내기 위해, 세태에 분노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했다고 정월은 이해했다. 그러나 정월은 자살 행위에 대해서는 맹렬히 비판했다. 정월은 동기가 어떻든 자살은 생명의 존귀와 그 생명 역량의 풍부를 자각한 현대인이 취할 방법이 아니며,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고 할 때 연애의 철저함과 정조의 순수함과 정신의 결백함이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정월은 우리 여자들이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삶을 펼쳐 나가자고 외쳤다.

    “서산! 그리고 이상! 기생이나 선비나 부자나 백정이나 모두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우리가 빨리 만들어야 해. 물론 여자나 장애인이나 노약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세.”

    그때 이상이 엉뚱한 말을 했다.

    “서산은 기생 채경이를 좋아해요.”

    “춘곡 고희동이 그렸던 모델 채경이 말이야?”

    정월이 물었다.

    “아니에요. 선생님. 이상이 괜히 그래요. 저는 저의 몸에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에 예쁘고 건강한 여자면 누구든지 좋아해요. 이상은 재능이 탁월한 여자가 첫째 조건이고 다음으로 아름다움이 중요하대요.”

    “내 목숨은 헐값이 아니다”

    그 말에 이상의 얼굴에는 홍조가 번지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재능이 있는 여자라면 바로 난데…”

    정월의 농담에 이상은 자신의 생각을 들킨 듯 눈알까지 빨개지고 말았다.

    “선생님은 혹시 자살하고 싶은 충동이 드신 경우는 없으세요?”

    이상이 물었다. 이상은 얼마 전에 자살 충동을 느꼈다며 구본웅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좌절하거나 심한 상처를 입었을 때 절망한 사람은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되지. 특히 예술가들치고 자살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예술가란 현실적이지 않은 저 높은 이상에 목표를 설정하고, 그 이상에 도달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달성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에 절망하며 사는 인간이지. 그래서 자살 충동이 많을 수밖에 없어. 그러나 우리 목숨은 결코 그렇게 헐값이 아니야. 내 목숨이되 내가 끊을 아무 권리가 없는 것이지. 내 몸은 결코 내 소유가 아니야. 우리 어머니 것이고 우리 조상의 것이며 내 사회의 물건이지. 내 생명이 계속되는 최후까지 내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야지. 남과 같이 행복하고 만족한 생활을 못하기로 크게 자포자기할 것이 무엇이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또한 이것이 행복이 아닐지….”

    나혜석은 그들의 화제가 자살 충동 이야기로 바뀐 것을 의식했는지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기생이나 천민 중에도 나보다 더 재능이 있고 똑똑한 여자가 많을 것이야. 그들에게 더 아름답고 순결한 사랑도 있을 수 있고…. 기생이나 작부가 되면, 남자들과의 성 관계는 밥 먹는 일이나 다름없는 비감정적이고 일상적인 것에 불과할 거야. 그들에게는 직업상의 특성을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식사와 성교는 동물의 본능적 행동이야. 물론 사회와 제도를 위하여 인간은 절제되고 규제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정조와 신분에 대해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할까. 언젠가 군들이 그런 여자들을 만나면 기생 강명화처럼 좌절과 상처를 입지 않도록 유념하게. 제도와 관행도 자네들이 나서서 개혁해야 하네. 우선 우리부터 실천하는 용기와 헌신이 있어야 해. 기생도 천민도 떳떳하게 선비의 본부인이 될 수 있고 사람다운 사랑과 순결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빨리 와야 하네. 어느 누구도 차별받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는 그런 사회 말이야.”

    나혜석은 조혼과 축첩 등에 관하여도 쉴 새 없이 자기 의견을 털어놓으며 그들을 교육하려 했다. 그녀는 교사와 예술가 그리고 모범생과 모험가 사이를 숨돌릴 틈 없이 오락가락했다. 숙녀로 보이다가 어느새 투사로 바뀌고, 교태를 부리다가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도 했다.

    “정월 선생님. 선생님 속에는 여러 모습이 함께 나타나는 것 같네요. 자아가 여럿이라고나 할까요?”

    이상이 조심스럽게 정월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래! 이상. 바로 보았다. 사람에게는 자아가 하나뿐이 아니지. 누구에게도 일관된 하나의 자아는 없어. 사람들이 하나라고 오해할 뿐이지.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양식은 시시각각 변하게 마련이지. 한 몸뚱이 속에 악하고 착한 온갖 면이 함께 있는 거야. 어느 면이 얼마만큼 언제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범죄인도 되고 영웅도 되고 호인도 되고 악인도 되고 샌님도 되고 탕아도 될 수 있는 것이야.”

    이상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혜석은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면서도 일어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이 화제를 바꿨다.

    “정월 선생님은 그림으로 나타내는 자아와 글로 나타내는 자아가 서로 다르신 것 같아요. 그림으로 보면 매우 서정적인 분 같으신데, 글로 보면 매우 투사적이세요. 그렇죠?”

    정월은 대답 대신에 그렇다고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상의 비범한 눈빛에 오히려 끌려들어가는 듯했다. 이상은 말을 이어갔다.

    “저는 요즘 시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물론 습작이지요. 그런데 선생님. 조선어로만 글을 써야 될까요?”

    “일본어나 영어나 불어로도 쓸 수 있으면 더 좋지.”

    정월의 이러한 답변에 구본웅은 이의를 달았다. 조선에서 일어로 시와 소설을 쓰면 현재는 물론 후세에까지 친일파 문인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월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가설일 수 있겠지만 편협한 생각이야. 편협한 여론에 밀려 창작력을 소실하면 안되지. 우리가 조선 사람만을 위해, 또는 조선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은 영원한 것이고 국가나 사회라는 벽을 뚫고 갈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야. 이상에게 어학 능력만 있으면 일어고 영어고 중국어고 러시아말이고 간에 모든 언어와 예술수단을 다 동원하여 표현하게.”

    이상의 얼굴은 점점 더 밝아져 갔다. 이상은 이미 일어로 시를 많이 습작해 놓았다고 밝혔다. 앞으로 적어도 5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도록 어학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월 선생님. 조선어는 영어나 중국어나 일본어에 비해서 세련도가 많이 떨어져요. 개념화할 수 있는 어휘도 너무 적고 쓰임도 잘되지 않아요.”

    오늘에야 진짜 문학도를 만났다

    구본웅은 이상의 발언에 놀랐다. 세종대왕이 만드신 우리 글이 얼마나 좋은 언어인데 하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상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역사는 수백 년이 넘었어도 그것을 문학적으로 다듬어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 이인직(李人稙)의 ‘血(혈)의 淚(누)’ 이후이기 때문에, 문학적 언어로서의 한글은 아직 어린이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정월도 이에 맞장구를 치며 오늘에야 진짜 문학도를 만났다고 기뻐했다. 정월과 이상은 조선어를 조선에서의 단순한 통용어 수준에서 학문어와 예술어로 개발하고 발전시키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정월은 이상과 서산에게 조선어로만 글을 쓰지 말고 일본어는 물론 다른 나라 언어로도 글을 발표하라고 재차 격려했다. 정월 자신은 우선 조선에서의 남녀평등과 여권을 주장하는 일이 급해서 조선어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지만, 이상과 서산은 조선만의 문학에서 탈피해 아시아권 전체, 아니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기 위하여 우선 일본어로라도 글을 많이 쓰라고 주문했다. 정월의 힘있는 조언에 이상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러나 구본웅은 이상과 정월의 정서가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이 남긴 일본어 작품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가? 친일 문학인으로 낙인찍힐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편견과 몰이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미 이상의 시공간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난 일부 반일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생명이 마감될 때까지 완고하게 지켜간 시간적인 편견과 조선반도라는 지역적인 편협성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정월 나혜석은 시계를 보더니 많이 늦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은 정월 앞에서 한동안 넋 나간 장승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구본웅이 이상의 그런 모습을 다시 본 것은 몇 년 후 그가 금홍(錦紅)을 처음 만났을 때라고 기억했다.

    ‘제6회 조선미전’이 1927년 5월25일부터 3주일간 남대문통 조선총독부 도서관에서 열린다고 4월에 발표되었다. 작품 접수 마감일은 5월17일 오후 5시까지였다. 작업실을 같이 쓰는 서양화가 이창현은 구본웅에게 조선미전에 함께 출품하자고 졸랐다. 구본웅은 단호히 거절했다. 장애인이라고 관립학교 입학도 거절당했는데 또다시 관청에서 주관하는 조선미전에 출품하라고? 그는 관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자신과 굳게 약속했으니 절대 출품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창현은, 구본웅의 작품 실력이 조선미전의 특선급이라고 김복진도 장담했고 또 이렇게 밤잠을 안자고 수개월간 열심히 만들었는데 사장시킬 수 있느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구본웅은 관청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조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창현은 할 수 없이 마감 날인 5월17일 오전에 자기 작품만 출품했다. 그리고 작업실에 돌아와 완전히 탈진해 쓰러진 구본웅을 발견했다. 그는 인력거를 불러 급히 병자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다시 작업실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구본웅이 근래 만든 몇 개의 조각 작품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는 시간에 쫓겨 헐떡이며 조선미전 접수창구로 달려가 작품을 내밀었다. 그때 비로소 신청서의 작품명 난에 무엇이라고 써야할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는 구본웅이 그 해에 계속하여 얼굴 습작을 했다는 것을 상기하고 ‘얼굴 習作(습작)’이라고 적어 넣었다. 이렇게 하여 조선 최고 권위의 미술전람회에 정말로 습작이 출품되는 파격이 벌어졌다. 또한 구본웅의 생애 전체에 걸쳐 관청에서 주관한 전람회에 단 한번 출품하게 된 마땅치 않은 경력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불쾌한 수상소식

    5월21일 오전 10시에 심사 결과가 발표된다고 하여 이창현이 총독부 도서관에 다녀왔다. 이창현은 총 1416점이 응모하여 310점이 입선했는데, 서양화는 810점 중 177점이 입선되고 조소 분야는 25점이 응모하여 9점이 입선되었다고 떠벌렸다. 특선은 서양화, 동양화, 조소, 서예, 사군자 분야를 모두 합쳐 29점뿐이고 조선인 12명이 특선에 올랐는데, 놀랍게도 무감사로 입선했던 나혜석이 이번에는 특선에서 탈락하는 이변이 생겼다고 흥분했다. 자기는 이번에도 입선에 머물렀다고 어깻죽지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본웅은 그날 저녁에야 비로소 김복진에게서 조소 분야에서 조선인 한 명이 특선상을 받게 됐는데 수상자가 바로 구본웅 자신임을 통보받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조선미전 기간 내내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앞으로 다시는 조선이건 일본이건 관청 전람회에 얼씬거리지 않고 진취적이고 전위적인 영원한 야인(野人)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구본웅의 수상은 조선미전이 개최된 이래 조소 분야에서 김복진 다음으로 조선인의 작품이 특선에 입상한 것으로 조선미술사 등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28년 여름 김복진이 일제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공산당 간부라는 혐의를 받았다고 했다. 구본웅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가 보기에 김복진은 성실하고 착한 휴머니스트이고 유능한 이상주의자였으며 열기에 넘치는 민족주의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구본웅에게 자상하고 사려 깊은 스승이었다.

    그러나 구본웅의 집안 어른들은 김복진 주변에 있는 사회주의 성향의 예술인들이 구본웅에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구본웅도 스스로 새로운 전환과 변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김복진에 대한 실망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조소작품 활동에 넘기 힘든 한계를 절감했다.

    지난 2년 간 구본웅은 조소(彫塑)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지만 건강이 나쁘고 힘이 약한 장애인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힘든 분야였다. 그래서 조소를 포기하고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도 김복진 쇼크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1928년 가을에 무조건 일본으로 떠나기로 했다.

    1928년 9월 구본웅은 부산으로 가서 일본행 여객선을 탔다. 동경에 도착하여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 양화부에 등록했다. 교육은 주로 석고 데생이었다. 그러나 무조건 선생을 따라서 실습하는 도제식(徒弟式) 교육에 싫증이 났다. 그 당시 일본에 유학하는 미술학도들은 대부분이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거쳐 관립학교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해서 아카데믹한 고전파와 인상파의 아류를 뒤쫓았다.

    그러나 구본웅은 스스로 정한 원칙에 따라 처음부터 관립학교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전통적인 굴레에서 벗어나 새롭고도 실험적인 조형예술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미술기법을 찾아내기 위하여 이론 공부부터 하기로 작정했다. 1929년 봄 그는 일본대학 예술전문학부 미학과에 입학해 정식으로 예술이론 공부에 매달렸다. 그 동안 공부하던 미술실기와 달리 학구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후 1년간 예술이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경험이 평생 동안 예술이론의 발전과 그 동향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으며 미술비평가로서 미술평론과 미술론을 집필하는 바탕이 되었다.

    1929년 여름방학이 다가왔다. 구본웅의 아버지는 구본웅의 혼처가 정해졌으니 방학 다음날 서울로 돌아와 일주일 후에 결혼식을 올리라고 편지로 통보했다. 규수는 종1품 벼슬을 지낸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경기도 연천군으로 낙향하여 현재는 가세가 기울었지만 명문가의 후예라고 힘주어 쓰셨다. 그런 여자가 왜 꼽추에게 시집을 오느냐고 물을 것 같았는지, 혼인은 다 하늘의 인연으로 맺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결혼하는 날에야 비로소 신부 이름이 강임(姜妊)이라는 걸 알았을 정도로 구본웅은 그녀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혹시 자신처럼 장애인이 아닌가 눈여겨보았지만 그녀의 얼굴과 체형은 정상이었다. 결혼 첫날밤 그는 착하게 생긴 새하얀 피부의 건강한 여자를 안았다. 그녀는 한없이 떨고 있었다.

    그는 신부에게 어떻게 꼽추에게 시집왔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부모가 정해준 대로 따랐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아버지가 그녀의 친정에 논밭을 주었음을 그날 처음 아내로부터 들었다. 한없는 미안함과 측은함, 열등감과 당혹감 그리고 분노와 처절함이 뒤섞여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는 신부를 부둥켜안고 울먹이면서 신혼 첫날밤을 지샜다. 신부는 오히려 꼿꼿이 앉아 그를 격려하고 감싸는 의연함을 보였다.

    조선 최초의 야수파 화가

    신랑 구본웅은 외아들로서 가계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과 결혼의 의미를 이해했다. 아들을 많이 낳아 대를 이어 잘 기르는 것이었다. 숙부 말씀이 서양에서도 결혼이란 성교와 육아의 제도화라 하지 않았던가! 물론 사랑이 결혼에 중요한 전제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을 낳는 일이었다. 이를 위한 도구 내지 기계 노릇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도구나 기계나 원료가 되기 싫었다. 서로 첫눈에 반한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고 싶었다. 아름다움에 관한 그의 집착과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첫눈에 반했던 기생 채경이 이하로 눈높이를 내려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은 이상형에 고정되었다.

    1930년 봄 구본웅은 혼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유화(油畵)를 전공했다. 그동안 그는 일본대학 미학과에서 익힌 미술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자학적인 저항정신을 표출하는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화단의 주류는 인상파에서 야수파를 포함한 넓은 개념의 표현주의로 옮겨 가고 있었다. 야수파(포비즘)는 극한적으로 단순화한 형태와 선명한 원색적 색조 그리고 대담하고 격정적 필촉으로 화면을 형성하는 특색을 지녔다. 그는 유럽에서 발아해 일본 화단에 이입된 이 대담하고 거칠면서도 선명한 야수파의 기법에 매료되었다. 바로 이러한 미술기법이 자신과 사회에 대한 콤플렉스를 배설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새로운 화법으로 1930년 동경 태평양미술전 콩쿠르에서 1929년에 이어 2년 연속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더욱이 1930년 가을 구본웅은 ‘이과회미술전람회(이과미전 또는 이과전 또는 이과회전)’에 입선했다. 이과(二科)란 전통적인 서양화의 화풍을 일과(一科)라 하는 데 반해 진취적 경향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제국미전이 1과 중심으로 운영되는 관전(官展)인 반면 이과미전은 제국미전과 쌍벽을 이루는 2과 중심의 민전(民展)이었다. 조선의 언론들은 조선의 청년 수재 구본웅이 조선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이과미전 양화부에 입선했다고 보도했다. 3년 후인 1933년에는 김종태와 신흥휴가, 1934년에는 김종태, 1935년에는 김환기가 이과미전 입선 기록을 이어갔다.

    이과미전에 입선하고 작품이 특출하다는 소문이 나자 구본웅에게는 일본 각지에서 연애편지가 날아들었다. 같은 하숙집에서 매일 만나는 여학생들도 데이트하자고 열광했다. 그녀들에게는 그가 불구거나 기혼인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직 특별한 재능과 유명인사라는 점에 호기심을 보이며 애정과 성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전람회 소식을 듣고 여러 장의 편지를 보내고 일본까지 찾아왔던 한국 신여성은 등이 굽은 그를 보고는 말 한마디 없이 도망가버렸다.

    1930년 가을에 이과회 소속 화가들 중 야수파와 표현주의파에 속하는 화가들이 결속하여 독립미술가협회를 창설했다. 1931년 1월에는 ‘제1회 독립미술가협회전람회(독립미전 또는 독립전)’를 개최했다. 야수파에 심취해 있던 구본웅은 독립미전에도 출품해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입선했다. 5년이 지난 1936년에는 유영국, 1937년에는 김만형이 조선인으로서 독립미전 입선 기록을 이어갔다.

    동아일보는 구본웅에게 1931년 6월에 동아일보 사옥에서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제의했다. 서울에 있는 신문사가 개인전을 주최하고 주관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는 이 개인전에 49점을 출품했다. 작품 대부분이 일상의 주변에 있는 정물화와 풍경화였다. 그러나 전위예술의 여러 경향을 섭렵한 새로운 화풍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예상 밖으로 관람객이 넘쳐났다. 개막식 날은 이화여전과 숙명여전에 재학중인 신여성도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작가가 키 작은 선생님이라고 알았다. 월간 종합지 ‘東光(동광)’이 1931년 5월호에 구본웅을 “일본의 이과전과 독립전에서 새로운 기치를 휘두른 키 작은 선생님”으로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 표현이 꼽추란 의미로 전달되지 않고 아담한 체구를 지닌 동경 어느 학교의 미술교사로 조선인들에게 알려졌다. 신여성들은 작가를 앞에 내세워 소개하라고 요청했다. 꼽추가 앞에 나서자 그들 중 몇 명은 두 말 않고 자리를 떴다. 구본웅은 그녀들이 당황하는 걸 보며 오히려 긍지와 재미를 느꼈다. 자신감이 노력과 성취로 만들어지고 그 자신감은 여유와 긍지와 새로운 각오로 축적되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제8회 조선미전’에서 특선했던 김주경(金周經)은 ‘구본웅 개인전’에 관한 평을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제까지 조선에 소개되지 않았던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을 처음으로 소개한 것이다. 연(然)이나 씨가 발표한 작품 전부가 쉬르라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는 큐비즘(입체파)과의 중간층과 포비즘(야수파)과의 중간층 내지 익스프레셔니즘(표현주의), 또는 임플레이셔니즘(인상파)의 중간층에 속하는 작품들도 병진되었음을 부기하여 둔다.”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구본웅이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아방가르드(전위) 화풍의 선구자라며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동아일보 개인전이 끝난 후 그를 ‘운명의 화가’ 또는 ‘숙명의 화가’ 또는 ‘서울의 로트렉’라고 부르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은 꼽추가 된 그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바로 그 운명이 그를 뛰어난 화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노력하는 예술가’일 뿐이었다. 열심히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어떠한 역경에서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려는 의지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동아일보’ 개인전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간 구본웅은 1933년 3월 초 태평양미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편 폐병이 심해진 이상은 2월 말에 총독부를 그만둔 후 습기로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찬 골방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었다. 구본웅은 요양을 위해 그를 황해도 백천온천으로 데려갔다. 이상은 그곳에서 금홍(錦紅)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를 6월초에 개업한 제비다방의 마담 겸 내연의 처로 맞아들였다.

    백천온천에서 먼저 서울로 돌아온 구본웅은 1933년 4월28일부터 휘문고보 강당에서 열린 ‘제12회 서화협회전람회(서화협회전 또는 協展)’에 ‘실제(失題)’란 작품을 출품했다. 서화협회전은 조선미전에 맞먹는 민전이었다.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서양화였다.

    시인 겸 비평가 김기림(金起林)은 편석촌(片石村)이란 필명으로 ‘조선중앙일보’에 비평문을 기고했다. 그는 구본웅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그는 “지극히 불리한 환경에도 그만한 경지까지 개척해 나간 구본웅의 예술에 대한 정열에 탄복한다”며, “구본웅의 작품 ‘실제’야말로 조선미전의 관료주의에 대한 반대로서 서화협회전의 빛나는 존재가치를 또렷하게 인식토록 해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조선화단의 ‘아카데미즘’이 그에게 아무리 돌을 던질지라도 구본웅씨는 엄연히 우리 화단의 최좌익이다. 적막한 고립에 영광이 있어라”라고 끝을 맺었다. 김기림은 조선의 전통적 관학(官學)파와 관전(官展)파 화가들이 아무리 무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이고 최초·최첨단의 전위화가로서 구본웅에게 계속 정진하라는 격려를 보낸 것이었다.

    구본웅은 매일 ‘낙랑팔라’와 제비다방에 들러 예술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1933년 4월에 오늘날 유네스코회관 근처에 있는 건물 2층을 빌려 경성정판사(京城精版社)를 개업했고 9월에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소공동에 골동품 갤러리 우고당(友古堂)을 열었다. 경성정판사에서는 주로 극장 포스터를 디자인하고 인쇄해주는 일을 했으며 우고당에서는 미술품을 감정하고 좋은 골동품을 발견했을 때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 수집가를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는 장애를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개방적으로 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우고당 3층에 아틀리에를 마련했는데 교통이 좋아서 낮에는 친구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그는 특별한 재주꾼들과 교류를 즐겼다. 늘 자진해서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주변 사람들과 융합하려고 애썼다. 어떤 모임에 가도 장애인이 왔다는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항상 쾌활하고 명랑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으며 재담과 농담을 잘했다.

    ‘꼽추 멋쟁이’라는 별명

    시인 고은(高銀)은 ‘이상 평전’에서 구본웅의 본가(本家)와 그의 일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낙랑팔라’에서 만나는 일을 제외하면 그들이 매일 만나는 곳은 다동에 있는 구본웅가의 광활한 대가(大家) 사랑의 화실이었다. 그 화실 겸 거실은 당시의 시인, 작가, 비평가, 화가, 심지어 영화감독까지도 모여들어서 문예살롱의 기분이 짙었으며 그 본웅가(家)를 다옥정(多玉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본웅은 화가답게 그의 꼽추에도 불구하고 서구적인 멋 가락을 잘 나타내어서 다옥정(多屋町) 기생들도 ‘꼽추 멋쟁이’ ‘꼽추 도련님’이라는 별명으로 수군거릴 정도였다.”

    구본웅은 외출할 때면 양복 정장을 차려 입었다. 그런데 양복 어깨에 각을 만들고 구부러진 짧은 등을 돋보이게 하여 꼽추인 외모가 더욱 두드러져 꼴불견이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격에 맞는 의관과 모자를 고집했다. 그래서 그는 최고급 양복을 격식에 맞게 제대로 갖추어 입었지만, 양복 정장이 귀하던 시절에 서양 상류층의 복장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이 예술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1934년 5월에는 동경미술학교 출신 7명과 구본웅이 모여 목일회(牧日會)를 창립했다. 이들 8명은 조선미전의 개혁을 주장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런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들은 조선미전 출품을 거부하고 ‘제13회 조선미전’을 며칠 앞둔 5월16일부터 일주일간 화신백화점 5층에 있는 화신화랑에서 ‘제1회 목일회전’을 개최했다. 회원 8명이 46점을 출품했는데 구본웅의 작품이 14점이나 됐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듣는 뼈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A생(生)이란 가명으로 ‘조선일보’에 기고된 ‘목일회 제1회 양화전(洋畵展)을 보고’란 비평문은 “구본웅의 활달한 작품이 14점이나 나와 구본웅 개인특별전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라고 표현했다. 그는 “구본웅의 작품들이 마치 사군자 휘호회에서 보이는 단숨의 붓놀림 같은 화풍 탓으로 보는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하지만 현실에 발붙이지 않은 채 구름 위에 그 어느 세계를 건설하려는 데카당한 일면이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A생은 ‘얼굴’에 대해 “시각의 예리함을 보여주어 작가의 관점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고 칭찬하면서도 “몹시도 대담한 구상과 색채에 비해 선이 무기력해 보인다”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의 초현실주의 작품에 대해서는 “(구본웅의) 괴로운 인생을 그 어느 숭고하고 신비스러운 환상의 세계에까지 유도”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현실이 없는 초현실”이라고 꼬집었다.

    1934년 5월이 가까워오면서 정월 나혜석은 ‘제13회 조선미전’에 대한 비평 요청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1회부터 제11회까지 11년간 아홉 차례 출품하여 아홉 차례 입선했고 다섯 차례나 입상했다. 또한 그중 세 차례는 조선인으로는 최고상을 받았다. 출품하지 못한 경우는 구미를 여행한 2년과, 그리고 작품 접수 기일 변경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제12회 등 세 차례 뿐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조선미전에 많이 출품했고 그때까지 입상과 최고상을 가장 많이 받은 화가였다. 1933년에는 출품하지 못한 대신에 ‘매일신보’의 요청으로 ‘美展(미전)의 인상’을 발표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미술비평을 하고 싶었다. 어느 모로 보나 누구보다도 자신이 미술비평 자격과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개막일이 며칠 지나도록 어느 언론에서도 비평 요청이 없었다.

    구본웅은 전년도 10월에 ‘靑邱會展(청구회전)을 보고’란 비평문을 ‘동아일보’에 투고했었다. 이 비평문이 남다르다는 소문이 났다. 그래서 여러 신문사에서 ‘제13회 조선미전’에 대한 비평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구본웅은 첫번째로 요청을 받은 ‘조선중앙일보’에 ‘제13회 조선미전을 봄’을 5월30일부터 6월6일까지 연재했다. 그리고 ‘월간매신’ 6월호에도 비평문을 게재했다. 각 신문사의 비평문 중에서 구본웅의 글이 제일 뛰어났고 또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9월에는 ‘조선일보’가 그에게 미술계에 대한 한 해의 소감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그 해에 10명 남짓한 비평가들이 ‘일본화풍의 맹목적 본뜨기’와 ‘겉핥기식 향토색’에 대하여 꾸짖고 나섰지만 이들은 언론에 각각 한 번 정도의 비평을 썼다. 그러나 구본웅과 프로예맹(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출신의 정하보(鄭河普)는 각기 비평을 세 편이나 쓰는 적극성을 보였다. 물론 정하보와 구본웅의 생각은 달랐다.

    구본웅이 주장하는 향토성은 소재 따위로 민족성을 해석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조선 풍속이나 조선의 자연을 그리는 것만이 향토성이 아니며 조선인 생활의 모던화를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향토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조선 전래의 생활풍습, 언어행동, 풍토와 역사 따위에 바탕을 두는 직관이 나타나면 그것이 향토성 아니냐고 물었다. 당시에 일본제국주의 정부는 조선에서 민족성이란 용어를 쓰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책에서 지방색이란 용어를 강조했다. 이에 반발한 조선인들은 향토성 또는 향토색이란 표현을 선호했다.

    구본웅의 비평에 대하여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이 지원사격을 하고 나섰다. 그는 “백화점에 태극선 화문석 같은 것을 늘어놓으면 조선 맛이 난다. 그러나 한 예술품이 가진 정신이나 맛은 그러한 조선 물정이나 묘출하였다고 해선 조선적 작품은 될지언정 조선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그는 “요즈음 조선심(朝鮮心)이니 조선정조(朝鮮情調)니 하고 그것을 고조하는 예술가들”이 있지만, “내면적인 것을 잊어버리고 외면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예술가들이 많음을 안타까워했다.

    파란 몰고온 이혼고백장

    나혜석은 이제 미술비평에 구본웅 시대가 왔음을 직감했다. 나혜석은 미술작품에서만이 아니라 미술비평에서도 이미 설자리가 없다는 것을 절감해야 했다. 그래도 자신이 제일 아끼는 제자인 구본웅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 위안을 삼으며 눈물을 머금었다.

    나혜석은 다시 남녀평등과 사회정의를 위한 공격에 나섰다. 그녀는 ‘삼천리’ 1934년 8월호와 9월호에 장문의 ‘이혼고백장’을 연재했다. 자신의 10년간 결혼생활과 4년 전 이혼 과정의 적나라한 갈등과 비극적인 심경을 솔직하게 밝히고, 조선에서 여성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정조 관념을 비판하면서 앞으로도 계속적인 자아발견 그리고 정진과 재기를 다짐하는 글을 발표했다. 당시로서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이혼의 도화선이었던 친일적인 사회지도자 최린(崔麟)을 상대로 파리에서의 정조 유린에 대한 거액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9월19일에 제기했다. 이 사실이 1934년 9월20일자 언론에 보도되어 남성중심의 조선 사회는 또다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다방 운영의 적자와 금홍의 가출 등으로 어깻죽지가 처진 이상은 오후 늦게 구본웅의 우고당 작업실에 들르거나 밤에 만취해 다옥정 구본웅의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럴 때면 이불에 오줌을 싸고 방에 토하기 일쑤여서 구본웅의 부모는 이상을 싫어했다. 그래도 구본웅은 이상이 좋았다. 꼽추와 결핵환자인 두 사람만의 동병상련 의식은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아픔을 승화시켜 황량한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주는 화롯불 같았다.

    구본웅은 이상의 얼굴을 초상화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얼굴은 바로 억압과 암울의 시대를 사는 예술인의 모습이었다. 구본웅은 이상의 얼굴을 통해서 식민지 시대를 사는 지성인들의 모습을 상징화하기로 했다.

    1935년 3월3일 13시, 구본웅은 우고당 작업실로 이상을 불렀다. 원래 이상은 오래 전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수없이 졸랐다. 그러나 구본웅은 남의 초상화 그리는 일은 철저히 거절했다. 이번에도 그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권태와 조소와 자학과 반항과 분노와 초탈을 폭포줄기처럼 쏟아내는 젊은이를 나타내려 한다고 작품의도를 설명했다. 구본웅은 그에게 다음날부터 매일 모델로 나와줄 것을 부탁했다. 이상은 그 작품을 자기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응했다.

    구본웅은 우울하고도 비탄에 잠긴 표정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탕 화면을 푸른 색조로 짙게 처리하겠다고 이상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상은 이번에는 황달이 아니라 ‘청달’에 걸렸다는 조소를 받게 될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비다방에 걸려있는, 이상 자신이 그려 1931년도 ‘제10회 조선미전’에 입선했던 ‘自畵像(자화상)’에는 누런 색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친구들로부터 황달에 걸렸다는 놀림을 자주 받았던 것이다.

    구본웅은 그에게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이상은 평소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실제로는 구본웅이 파이프 담배를 물고 다녔는데, 구본웅은 그런 모습에서 일상성에 조소를 퍼부으면서 반항 의식을 분출하는 한 지성인의 내면세계를 표출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인상’은 구본웅의 자화상

    구본웅은 친구 얼굴에서 그의 내면을 읽고, 나아가 불우한 한 시대의 내면까지 묘출하려고 매일 이상을 불러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하게 했다. 이상은 왜 그림은 빨리 안 그리고 요리조리 포즈만 취하게 하면서 사진 모델 취급을 하느냐고 성화가 대단했다. 그 과정에서 구본웅은 단순한 친구의 모습이 아닌, 한 시대의 상징과 자신의 내면을 나타내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신체적 조건에 적응하면서도 이를 권태롭게 수용하고 조소하며 도전하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나타내려고 열중했다.

    마침내 구본웅은 이상의 눈매를 더욱 날카롭게 하고 파이프를 비스듬히 물고 있는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그림으로써 젊은 지성인의 반항적이고 괴팍한 이미지를 포착했다.

    모든 것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상의 얼굴은 그 개인의 권태를 자각하려는 내면의 구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둠을 향한 지성인의 시니컬한 대응이기도 했다. 권태롭고 조소적인, 그러면서 세상을 초탈한 듯한 젊은 지성인이 격한 터치와 어두운 색조의 응결로 그려졌다. 이 시대 의식 있는 예술가들이 지녔던 자학과 조소와 도전, 이러한 내면 풍경을 극명하게 묘출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갔다.

    구본웅은 격렬한 터치와 어두운 톤이 작품을 지배하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구성적 의지를 표출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상 이러한 점이 다른 야수파, 표현파 계열 화가와 구분되는 구본웅만의 예술 세계였다. 그래서 이 ‘友人像(우인상)’은 바로 구본웅 내면의 자화상(自畵像)이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구본웅의 대표작 중 하나이자 우리나라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유화 초상화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작품을 완성했을 때 구본웅은 인력거에 이 작품을 싣고 제비다방으로 갔다. 제비 다방이 개업했을 때는 이상의 ‘자화상’과 구본웅이 그려 기증한 ‘裸婦(나부)와 靜物(정물)’ 두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은 회칠한 사면 벽에 주르 뢰나르의 그림틀을 몇 개나 더 걸어 놓았다. 이상은 주르 뢰나르의 복사그림 하나를 떼어내고 ‘우인상’을 걸었다.

    그 자리에서 구본웅은 이상에게 창문사 인쇄공장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교정과 편집 일을 도와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를 경제적으로 돕고 싶은 생각이 앞섰다. 이상은 다방 일도 있고 해서 하루에 3시간 정도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며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하루 3시간 근무에 일급은 1원40전으로 정했다.

    ‘주식회사 창문사(彰文社)’는 구본웅의 아버지가 1934년 9월에 ‘주식회사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를 인수해 설립한 회사였다. 이 회사는 기독교 관련 서적과 YMCA 등 기독교 기관의 간행물을 인쇄했는데 당시로는 최신 인쇄시설을 완비했다. 이 회사는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가 황성신문을 그만둔 후 전국서점 주인들의 주식 참여(이상재 명의로 주식을 발행했음)와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모은 기부금, 그리고 고종 황제의 하사금 등을 합쳐 설립한 민족자본 기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인쇄하여 출판한 공로도 남겼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적자가 누적되었다. 이를 고심하던 초대 사장 이상재는 2대 사장 양주삼의 동의를 받아 구본웅의 아버지인 구자혁(具滋爀)에게 인수하도록 설득했다. 젊은 시절에 황성신문 기자와 종합잡지 ‘開闢(개벽)’ 편집장을 역임했던 구본웅의 아버지는 적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조선의 문화계를 위해서라면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 회사를 인수한 후 ‘조선기독교’란 이름은 빼고 그간 약자로 불리던 ‘주식회사 창문사’란 간판을 쓰기로 결정했다.

    창문사 인수로 문화예술계에서 구본웅에 대한 기대는 더욱 커졌다. 주변에서는 그를 ‘창문사 사주(社主)의 아들’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상도 구본웅의 아버지가 창문사를 인수한 것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상이 원하는 원고는 무조건 무료로 출판해 주기로 다시 약속했다.

    이상은 이때의 생활을 단편소설 幻視記(환시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나는 내 고독을 일급 일원사십전과 바꾸었다. 인쇄공장 우중충한 속에서 활자처럼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똑같은 생활을 찍어내었다.”

    총독부에 근무할 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렇게 깔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던 미남 키다리 이상은 이때부터 더욱 봉두난발, 작소(雀巢)머리와 고슴도치 수염,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쯤 세수한 듯한 어릿광대로 변해갔다. 거기에 백단화(白短靴)와 보헤미안 넥타이를 매고 단장을 휘두르면서 외출할 때에는 퇴폐와 문란의 상징으로 주위의 눈총을 받았다.

    이상이 순차적으로 개업했던 다방 제비’ ‘鶴(학)’ ‘69’ ‘麥(맥)’은 구본웅의 계속적인 재정후원에도 완전히 망해버렸다. 이를 딱하게 여긴 구본웅은 이상에게 하루 8시간씩 창문사에서 일하도록 배려한 후 아예 출판부장으로 대우해 주었다.

    1935년 12월 초순, 또다시 장기 가출중인 금홍 때문에 속을 썩이던 이상이 구본웅과 저녁 외출을 나왔다. 우연히 길에서 희곡 ‘화가와 모델’을 발표한 양백화(梁白華)와 마주쳤다. 이상은 쓸쓸해 보이는 그를 위해서 술 한잔 사지 않겠냐고 구본웅을 충동질했다. 그래서 그들은 양백화가 단골로 가는 다방골에 있는 ‘민순자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세 사람 뒤를 아이들이 졸졸 따라오면서, “곡마단이 왔다”고 떠들어댔다. 양백화가 소리를 질러서 아이들을 쫓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계속 따라왔다. 아이들이 세 사람을 곡마단패로 본 데는 까닭이 있었다. 이상은 차린 복장과 활동사진 변사 같은 말투 때문에 곡마단 요술쟁이로 보였고, 구본웅은 땅에 잘잘 끌리는 망토 같은 인버네스 외투에 높은 중산모를 썼으니 원숭이 조련사쯤으로 보였을 터였다. 그런데 설상가상 구본웅보다 두 배나 크고 팔다리 네 개가 각각 따로 흐느적거리며 걷는 꼴이 흡사 로봇 같은 양백화가 한몫 끼었으니, 이 해괴한 세 사람을 보면 아이들이 아닐지라도 곡마단 단원들로 보았을 것이다.

    그들 세 사람이 밤늦게 술집을 나서서 몇 걸음을 옮겼을 때, 또 다른 술집을 나서는 김복진 일행을 만났다. 이들을 공손하게 배웅하는 기생의 자태가 구본웅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채경이었다. 춘곡 고희동 작품에 모델을 섰던 그 아름다운 채경이가 미소를 머금은 채 통영칠기의 대가(大家) 강창원(姜蒼園)과 서양화가 박상진에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구본웅은 심장이 일순간 멎어버린 듯 그곳에 한동안 장승처럼 서 있었다.

    여인상의 주인공 장성옥과의 만남

    이상은 금홍이 없는 골방으로 돌아오자 연말의 고적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시 ‘紙碑(지비)’ 속편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시의 첫 줄에 “ 어디갔는지모르는안해”라고 띄어쓰기까지 생략할 만큼 숨가쁜 탄식을 내뿜었다. 다음날 그는 그 원고를 월간지 ‘中央(중앙)’에 급하게 우송했다. 1936년 새해 새아침을 장식하는 1월호에 게재해 주기 바란다는 편지를 첨부했다. 돌에 쓴 비문이 아니라 종이에 쓴 비문 시 ‘紙碑’가 ‘천재시인 이상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술집작부 출신 금홍을 일시적인 동거녀가 아니라 사랑하는 정식 아내로 삼았다’는 사실을 영원히 이 세상에 남겨주기를 기원하면서…. 이상의 귀에는 정월 나혜석이 들려주던 기생 강명화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가 자장가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1936년 새해 벽두부터 구본웅은 강창원에게 연말에 보았던 그 미녀를 모델로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박상진은 그녀가 강창원의 애인이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이틀 후 강창원은 장성옥(張成玉)이란 이름의 그 미녀를 데리고 구본웅의 작업실로 찾아왔다.

    동양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눈과 작은 얼굴, 맑은 눈빛과 안면의 입체감, 처녀만이 가질 수 있는 육색과 가냘픈 체구 그리고 넘치는 건강미에 구본웅은 완전히 뇌쇄당하고 말았다. 그는 강창원과 장성옥에게 여인 상반신 그림 두 장을 그리겠다고 제안했다. 하나는 한복을 입고, 또 하나는 상반신 나체로 얼굴과 가슴 부위를 그리는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았다. 술집에서 ‘예쁜 옥(玉)’이라고 불린다는 만 19세의 이 미녀는 그의 작업실 분위기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강창원이 돌아간 다음, 옥이는 웃옷을 모두 벗고 의자에 앉았다. 구본웅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 잡으라고 주문했다. 오래 견디기 어려운 포즈였다. 그녀는 발레리나와 같은 동작으로 움직였다. 실제로 그녀는 조선춤을 아주 잘 춘다고 했다. 구본웅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이 곱고 깨끗한 균제의 아름다움과 기름진 육체를 19년 동안 곱게 감추어 두었다가 이 작은 화인(畵人)에게 풀어 헤쳐 내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은 옻칠같이 검고 그 눈은 벨벳마냥 보드랍고 그 살결은 진주처럼 빛났다. 기계로 쭉 뽑아낸 듯 미끈한 어깨 곡선이 서기를 뿜고 있었다. 황홀한 젖가슴 구석구석에서 파동치는 신비의 율동을 보았다. 구본웅의 귀는 분명히 청옥을 덮어놓은 듯한 젖가슴에서 심장의 고동도 들었다. 놀랐다. 이처럼 어려운 포즈를 태연하게 연출하는 대담성과 인내심에. 모델을 보고 마음이 이렇게 들떠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구본웅의 그림은 이런 아름다움을 곱게 그려내지 못했다. 그 여인을, 그의 마음과 정신을 미치도록 흔들고 혼란스럽게 하는 주체로 화폭에 담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모델 장성옥뿐만 아니라 기생 채경과 이상의 금홍, 그리고 정월 나혜석도 어른거렸다. 그래서 벌거벗은 여인의 상반신을 화면 가득히 펼쳐 놓은 이 ‘女人像(여인상)’은 ‘우인상’에 비하여 더욱 격렬한 터치와 왜곡된 상형으로 그려갔다. 여인의 얼굴보다는 가슴을 강조하고 볼과 입술을 붉은 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성적인 특성이 노골적이면서도 난폭하게 드러났다. 내적으로 불안한 에너지가 막을 길 없어 폭발하듯 분출되고 있었다. 자신으로부터 파동치는 격정의 소용돌이가 그림 속으로 용암처럼 흘러들어갔다.

    “처음으로 사람대접, 여왕대접 받았다”

    추하게 일그러진 여인상을 통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장애인의 절망과 분노 그리고 시대적 아픔과 도전을 표현했다. 그러한 아픔과 절망, 분노와 도전이 그림 속에서 위기의식에 편승되어 나타났다. 그래서 이 ‘여인상’은 어느 특정한 여인을 대상으로 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작가의 주관에 의한 극단적인 표현태도를 보였다. 이제까지 조선의 예술과 미학에서 성전처럼 취급되던 전통적 가치와 예술관을 죄 부정하고 현대성이라는 조형의 실험이 작품에서 잘 드러나도록 노력했다. 특히 두 팔을 머리 뒤로 돌리고 있는 나부(裸婦)의 대담한 변형과 강렬한 색채 그리고 거친 선과 필촉은 색채 면에서 이전의 야수파 작가들이 보이던 밝고 경쾌한 색채 대신 무겁고 어두운 색채 위에 부분적으로 밝고 강렬한, 짧은 터치의 색채를 대치시켜 표현했다. 그래서 긴장감을 더 두드러지게 했다. 뿐만 아니라 굵고 거친 선으로 여인의 상체 윤곽을 표현하여 화면에 강렬한 느낌을 주는 것은, 작가 자신의 내면적인 리얼리티를 강하게 표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특히 인체 표현의 기본형에서 벗어나 검은 색조의 배경에 부분적으로 강조되어 있는 붉은 색의 강렬한 대비는 이 ‘여인상’ 속에 숨어있는 구본웅 자신의 자화상(自畵像)이리라.

    옥이는 이 흉측해 보이는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보고도 전혀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파하고 절망하며 분노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도전하는 불구자에게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작업실 청소도 하고 비서 노릇도 하면서 스스럼없이 구본웅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10년 연하인 그녀가 하는 행동이 그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이상이 백천온천에서 스물한 살 된 금홍을 보고 서른한 살 먹은 사람보다도 낫다고 감탄하던 것이 구본웅에게도 이제야 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는 그동안 짝사랑으로 가슴에 담아왔던 기생 채경을 닮은 미녀와 작업실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더할 수 없는 행복감에 도취했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어 갈 즈음 그녀는, 그간 경험했던 모든 남자가 자신을 돈만 주면 데리고 놀 수 있는 술집여자로 대했는데, 지난 한 달간 처음으로 이곳에서 사람대접은 물론 여왕대접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특히 항상 반말만 듣고 살던 그녀는 처음으로 존대어로 예우받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손을 잡고 같이 울었다.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달래주고 감싸주었다. 영과 영이 마주치는 섬광은 찬란하고 황홀했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모자람을 보태주고 절망을 덮어주자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구본웅의 인물화 중에서 ‘우인상’과 함께 대표작으로 알려진 ‘여인상’이 태어나게 되었다. 이 두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서산 구본웅이 ‘근대미술의 큰 봉우리’일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의 첫 봉우리’라는 평가를 오늘날의 많은 관람객들과 미술애호가들에게 전해 주고 있다.

    이상은 변동림과 신혼 생활을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인 1936년 6월 하순부터 이미 그 결혼은 실패라는 느낌에 관해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는 늘 하던 기법대로 이번에도 실제의 스토리를 문학성으로 포장된 소설이나 수필로 꾸미는 작업을 계속했다. ‘斷髮(단발)’ ‘童骸(동해)’ ‘終生記(종생기)’ ‘失花(실화)’ 등의 소설이 그렇고 수필 ‘에피그램-아무도 모를 내 비밀-’도 그랬다.

    1936년 10월 하순, 드디어 이상은 동경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매일 오후만 되면 기동을 못할 정도로 신열이 나서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쇠약도 심해졌다. 그러니 서울 생각만 더욱 간절했다. 그는 서울에서 끝내지 못한 단편소설 ‘종생기’를 꺼내서 다시 다듬으며 결론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5개월 전 변동림과 결혼한 것을 회상할 때 무엇보다도 그의 첫 부인이었던 금홍과 구본웅에 대한 미안함이 앞섰다. 자신의 결혼으로 해서 중증 결핵환자와의 결혼을 반대하던 구본웅의 가족과 변동림 사이에 얼마나 큰 갈등이 생겨났던가! 또 연속적인 자신의 다방사업 실패로 이를 후원한 구본웅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는가! 그는 구본웅에게 미안한 마음을 ‘암호’ 같은 표현으로 ‘종생기’에 끼워 넣었다(괄호 속에 쓰인 내용은 필자가 해독한 것으로 지금까지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던 것임).

    “…사장(창문사 사장이며 구본웅의 아버지 구자혁)과 취체역(이사의 옛말, 창문사 전무이사 겸 발행인 구본웅)과 사둔(구본웅의 숙부 구자옥, 당시 YMCA 총무)과 아범(변동림의 아버지 변국선)과 애비(처남의 아버지 변국선)와 처남(변동욱·변동림의 오빠)과 처제(변동림의 여동생)와 또 애비(변동림의 아버지)와 애비의 딸(변동숙·변동림의 이복언니이며 구본웅의 계모)과 딸(변동림)이 허다중생으로 하여금 서로 서로 이간을 부치게 하고 얼버무려져 싸움질을 하게 해 놓았고 사글세방(구본웅이 도와준 돈으로 얻은) 새 다다미에 잉크와 요강과 팥죽을 엎질렀고, 누구누구를 임포텐스로 만들어놓았고 .”

    이상은 ‘종생기’를 끝마치면서, 구인회(九人會)의 동인지(同人誌)로 창간하기 위하여 그가 기획과 원고 모으기와 편집을 주도했고 구본웅이 발행인과 편집인으로서 1936년 3월에 무료로 간행해 준 ‘시와 소설’을 회상했다. 구인회는 좌익단체인 카프에 속하지 않았던 예술파 문인 9명이 1933년에 창립한 친목단체로 1934년에 입회한 이상은 이태준(李泰俊), 정지용(鄭芝溶), 김기림(金起林), 김유정(金裕貞), 박태원(朴泰遠) 등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었다.

    이상은 ‘시와 소설’ 속표지 첫 장에 그 자신이 기록해 놓았던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는 자신의 예술관과 함께 그와 절친했던 문우(文友)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간 여러 가지 진기한 연장과 암호, 기발한 기법과 기교로 자신의 절망과 속뜻을 교란시키고자 한 자신의 예술적 음모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하여 제대로 밝혀질 것인가를 유추하면서 이상은 날밤을 지새우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열은 더욱 높아가고 있었지만 이상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종생기’가 천하의 눈 있는 선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를 애틋이 바라는 일념을 품은 채.

    남보다 빠른 체념의 지혜

    1936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 구본웅은 아틀리에에 혼자 앉아 있었다. 그날 오후 그는 지난봄에 소실로 맞아들인 옥이(장성옥)를 그와 동거하기 이전에 일하던 기방(妓房)으로 나들이를 보냈다. 그 곳에서 그녀가 질펀하게 놀고 기분을 재충전하여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상이 배우자인 변동림의 간음을 용서하지 못해서 ‘종생기’를 쓰고 동경에서의 끝없는 권태와 암흑 속에서 내일을 희망하는 동안, 구본웅은 오히려 소실을 기방에 내놓아 그녀에게 자유를 주고 비밀을 만들어 주기로 작정했다. 재기 발랄한 젊은 미녀를 장애인이 독점하고 구속하여 결국 도망가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먼저 정조관에서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합리적인 결정이라기보다 오히려 체념이고 지혜로운 생존전략이었다. 그는 이 밤이 빨리 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가끔 옥이에게 기방에 출입할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그를 위해서 슬퍼하고 미쳤다고 할지 모르지만, 구본웅에게는 결혼생활과 소실을 함께 지키기 위한 도전이고 배려이며 체념이었다. 그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았기에, 체념하는 지혜는 남들보다 뛰어났다.

    구본웅은 1936년 크리스마스 이브의 무료함을 달래려고 책상 위에 놓인 ‘삼천리’ 12월호를 집어 들었다. 눈이 번쩍 띄는 이름이 있었다. 정월 나혜석의 단편소설 ‘玄淑(현숙)’이 실려 있었다. 그는 단숨에 읽었다. 첫 보기에 쉬운 글이나 충분히 다듬어지진 않았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러나 이해하기 쉬운 글이 아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고차원적인 구조와 주장이 담겨 있었다. 사랑 계약, 계약 동거, 혼외정사와 성매입을 일삼는 남성이 당당한 것처럼, 정조를 버린 여성도 당당할 수 있는 공평한 사회, 불의와 부도덕이 판치는 사회에서도 꺼지지 않는 나눔과 베풂의 은총. 생활에는 회계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나혜석의 절규가 소설 속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역시 나혜석다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은 동경에 있는 골방에서 그의 마지막 단편소설 ‘失花’와 수필 ‘十九世紀式(19세기식)’을 동시에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세기식’에서 “내가 이 세기에 용납되지 않는 최후의 한꺼풀 막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간음한 아내는 내어쫓으라’는 철칙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는 내 곰팡내나는 도덕성이다”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이어서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할 뿐만 아니라 더 불쌍하다”며 자신도 간음한 비밀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실화’의 첫 문장에서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고 비밀 간직의 의미와 가치를 재차 강조했다.

    이상이 찾은 화해의 길



    이상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40여 일 후에 후테이센진(不逞鮮人·‘불령선인’은 일본 체제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조선인을 일컬음) 혐의로 검거될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는지, 또는 4개월 후에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간음한 아내를 용서하지도 버리지도 않는 잔인한 악덕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르며 용서와 화해의 길을 찾고 있었다.

    옥이를 기다리는 구본웅의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크리스마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녀가 부스스한 얼굴로 돌아올는지…. 옥이와 함께 있을지도 모를 통영칠기의 대가 강창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불안감과 초초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새벽 1시가 넘어 그림 도구들을 펼쳤다. 이번에는 ‘婦人像(부인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품위 있고 예쁜 젊은 부인이었다. ‘여인상’과는 달리 그가 사랑하는 옥이 그대로를 사실주의적으로, 그녀의 청아함과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한참 후에 구본웅은 밀려오는 피로감에 작업을 멈추었다. 벽시계에서 새벽 5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때 대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