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년여 만에 유골로 발견된 개구리소년들의 죽음에 깃든 진실은 무엇인가. 법의학팀의 사인규명 작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경찰은 법의학팀의 감정결과가 나와야 본격수사에 나설 수 있다며 공을 넘긴다. 언론보도는 사고사와 타살의 경계를 넘나들며 춤을 춘다.
- 사고사인가, 타살인가. 사인은 과연 베일을 벗을 수 있을까.
10월8일 오후 4시 대구시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해발 299.6m). 흰 천막을 지붕 삼고, 사위(四圍)를 주황색 경찰통제선으로 둘러친 개구리소년 유골 발굴 현장에선 3명의 대구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직원들이 현장 주변의 흙을 네모난 체로 거르고 있었다. 분주해보인다. 체에서 곤충 번데기 하나가 걸러지자 한 경찰관이 앞에 놓인 바구니에 휙 던졌다.
경찰은 지난 9월26일 최초 유골 발굴 이후 행여 빠뜨린 유류품이 있을까 추가 발굴작업을 벌이는 중이었다.
경찰은 이날 부위가 밝혀지지 않은 뼛조각 3개와 탄두 18개를 발견했고, ‘대구 성서초등생 실종사건 수사본부’(이하 수사본부)는 이튿날 기자들에게 브리핑 자료를 돌렸다. 자료엔 ‘실종 당시 (실종)소년들을 보았다는 진술들을 재확인중이나 오랜 세월의 경과로 기억하지 못하는 목격자들에 대해 필요한 경우 추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최면수사를 의뢰할 것을 고려중’이란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수사진척도는 하루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유골 발굴 현장은 승용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멀지 않다. 수사본부가 꾸려진 성서파출소에서 현장 부근 ‘외교구락부’ 골프연습장까지는 승용차로 약 7분 거리. 골프연습장을 끼고 와룡산 쪽으로 150m쯤 걸으면 성산고등학교 신축공사장이 나온다. 거기서 5분 가량 등산로를 따라오르면 곧 현장에 닿는다. 기자가 만보계로 재본 결과 230보 정도였다. 소로(小路)마다 드문드문 등산객이 눈에 띄었다. 유골 발굴 현장을 제외하면 화창한 가을날 오후의 고즈넉한 산속 풍경 그대로다.
현장에서 몇 발짝 떨어진 구릉에선 성서아파트단지가 바로 건너다보였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것은 11년 6개월 전. 지금의 빽빽한 아파트 숲은 당시 논밭과 산이었다. 과연 저체온사 등 사고사의 가능성은 희박한 것일까.
물론 경찰은 1990년 12월과 2001년 11월에 각각 촬영된 와룡산 일대 항공사진을 판독한 결과, 유골 발견 지점에서 250여m 거리에 민가 서너 채, 600여m 떨어진 곳에 구마고속도로가 있어 소년들이 길을 잃고 헤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잠정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이것도 추정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사고사든, 타살이든 개구리소년들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수수께끼 가운데 명쾌하게 풀린 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거듭된 경찰의 失機
주지하듯,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은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전형적인 미스터리성 사건이다. ‘1991년 3월26일. 기초의회의원 선거일인 이날 오전 9시 친구 사이인 대구 성서초등학교 남학생 5명은 “도롱뇽을 잡으러 간다”는 말만 남기고 와룡산으로 떠났다…그리고 다시는 산을 내려오지 못했다. 그날의 날씨는 초봄이라 조금 쌀쌀한 편. 최고기온 12.3℃, 최저기온 3.3℃. 오후 6시쯤부터 8.2mm의 비가 내렸다.’ 이것이 알려진, 사건 당일의 명세(明細)일 뿐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11년6개월 만인 지난 9월26일. 개구리소년들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면서 세인의 관심은 온통 사인(死因)에 쏠리고 있다. 하지만 사인이 조속히 규명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여기엔 경찰의 실기(失機)가 한몫했다. 유골 발견 지점을 성급하게 삽으로 파헤쳐 훼손하는 바람에 현장을 원형보존하지 못해 사인을 밝힐 결정적 단서를 놓친 것. 경찰 내부에서조차 “출동 경찰관들이 약간의 감식분야 지식만 지녔더라도 현장 훼손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과연 발굴 전 현장 상태는 어땠을까? 수사본부측이 10월9일 기자에게 보여준, 유골 발견 지점을 최초로 촬영한 사진엔 유골 중 두개골 일부와 옷가지 일부가 지표 위로 조금 비어져나온 정도였다.
경찰은 현장 훼손 외에 유골 발견 하루 만에 개구리소년의 사인을 ‘저체온사’로 예단하는 치명적 실수도 저질렀다. ‘개구리소년으로 추정되는 유골 발견 보고’란 경찰 자료에 나와 있는 ‘사망 분석(추정)’의 내용은 이렇다.
‘행불자들이 아침을 먹고 도롱뇽 알을 줍기 위해 점심저녁을 굶은 채 하루 종일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어 지친 상태에서, 당일 비가 오자 비를 피하기 위해 위 유골이 발견된 와룡산 4부 능선 구릉 밑에서 쪼그리고 모여앉아 있다 기온이 급히 떨어지므로 저체온 현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 아무리 ‘추정’이라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깝다.
이 예단이 사인규명에 혼선을 불러온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유족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자 경찰 수사방향은 타살 쪽으로 급선회했다. 11년 전 단순가출로 예단, 부실한 초동수사를 벌였다가 국내 단일 실종사건으론 유례 없는 연인원 32만명을 동원하고도 사건 윤곽조차 파악하지 못한 뼈아픈 경험을 반복한 것이다.
경찰은 “사인규명에 수사력을 총동원하겠다”며 지난 9월28일 대구지방경찰청 조선호 차장을 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고, 수사본부도 유골 발견지 관할인 용산파출소에서 실종사건 초기에 수사를 맡았던 성서파출소로 옮겼다. 수사인력도 16명에서 45명으로 늘렸다.
그러나 외면에 비치는 이런 의지와는 달리, 경찰 수사는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수사본부의 조두원 대구지방경찰청 수사과장은 “‘사람에 의한 사망’일 것이라는 몇 가지 정황은 있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과학적 자료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며 “각계 전문가를 총동원해 반드시 사인을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은 사실상 법의학팀의 감정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제보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다.
이쯤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사인을 타살 일변도로 보는 흐름이 이어지면서 저체온사 등 사고사에 대한 추론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현 시점에 사고사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제기하면 백안시(白眼視)당할 정도다. 물론 옷매듭 등 타살 정황이 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진 않다. 그럼에도 아이러니컬한 것은 법의학팀의 감정과 경찰 수사가 지지부진할수록 타살 의혹은 점점 증폭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책임의 절반은 언론의 보도태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론이 부추긴 타살說
언론매체들은 유골 발굴 이틀째인 지난 9월27일 현장에서 탄두와 탄피가 발견되자 일제히 유탄 피격(被擊) 의혹을 제기하며 사인을 타살로 모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여기에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으로 ‘30대 남자로부터 군생활 당시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죽였다는 말을 들었다’는 전직 구두미화원 한모씨(43)의 제보까지 뒤이어 보도되자 타살 의혹은 한결 증폭됐다.
당시 한 공중파방송사는 객관적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타살 확실시’ ‘피살 집중수사’ 등 자극적인 제목을 내보내는 선정성의 극치를 보였다.
지난해 8월 경북 청송군 보현산에서 한국호랑이 촬영에 성공했다고 호들갑 떨다 오보로 판명난 전력(前歷)을 지닌 그 방송사다. 이런 선정적 보도는 타살 의혹에 주관적 심증만 굳혀준, 경찰의 ‘저체온사 추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예단이라 할 수 있다.
어찌됐건 언론이 타살 쪽에 더 비중을 두면서 인터넷에도 네티즌들의 온갖 추리가 난무했다. 각종 설(說)이 판치는 가운데, 심지어 경찰이 개구리소년 유골을 미리 발견해놓고도 ‘4억달러 대북 지원설’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묘한 시점에서 터뜨린 게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그러나 유골 발견 당시 상황을 더듬어보면 그런 음모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금세 알 수 있다.
최초 발견자 최모씨(55)가 유골을 발견한 시각은 9월26일 오전 11시40분쯤. 신고를 받고 경찰이 현장에 출동한 시각은 낮12시20분. 경찰 연락을 받은 유족들이 현장으로 달려온 때는 오후 3시경. 당시 현장으로 가장 먼저 달려간 한 기자는 “경찰이 숨기고말고 할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기자들 중 맨먼저 유골 발견 소식을 접한 건 우연이었다. 그날 오후 3시쯤 출입처인 달서경찰서에 있다 한 경찰관의 통화내용을 옆에서 듣고 알게 됐다. 나중에 들으니 경찰은 당초 하루 뒤인 9월27일 유골 발견 사실을 공개하려 했다고 한다. 발굴작업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곧 다른 기자들까지 우르르 몰려왔으니 유골 발견 소식은 최대한 빨리 보도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경찰이 어떤 의도에서건 ‘공개 시점’을 조절할 여지는 없었던 셈이다.
타살 의혹이 커지면서 제보도 잇따랐지만, 대다수는 허위로 판명됐다. 유골 발견 하루 전 한 일간지에 ‘와룡산에 개구리소년 유골이 있다’고 제보한 정모씨(40·주거부정)의 경우 실제론 와룡산 위치조차 모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총기 살해설’을 제기했던 한씨의 제보도 마찬가지다. 그는 보병 제50사단(흔히 육군 50사단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이는 정확한 명칭이 아니다)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경찰은 10월9일 현재 70건의 신고 및 제보사항을 접수해 이중 신빙성 없는 52건을 종결하고, 18건에 대해서는 계속 확인수사중이다. 종결된 제보 사례 중엔 이런 것들도 있다.
‘부산 영도구 신선동 3가에 거주하는 최모씨가 테러에 의해 개구리소년이 납치됐다고 10월6일 신고’ ‘주거가 불분명한 이모씨가, 자신의 처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개구리소년들 중 한 소년의 엄마의 남동생이 돈문제로 싸우다 개구리소년을 죽였다고 10월8일 신고.’
물론 개구리소년 관련보도가 언제나 선정적으로만 흐른 건 아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만9년이 된 2000년 3월26일. 이날을 즈음해 당시 대구 달서경찰서 출입기자들은 해마다 그맘때면 한 꼭지씩 쓰던 개구리소년 유족 근황 기사를 더 이상 쓰지 않기로 결정했다. 비록 달서경찰서내에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수사전담반(형사6반)이 있긴 했지만, 수사가 진척되지 않는데다 과거 온갖 허위제보를 확인 없이 보도한 사례들을 감안, 유족들의 가슴에 더 이상 못질을 해선 안된다는 선의에서였다. 더욱이 ‘개구리소년’이란 표현도 사건발생 이후 와전(訛傳)되던 것을 언론이 조어(造語)한 터였다.
최근의 보도행태가 사건발생 당시만큼이나 지나치다는 데 대다수 기자들은 공감한다. 한 사회부 기자의 토로. “솔직히 우리(기자들) 사이에서도 확률은 반반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확실한 목격자도 없고 물증도 없다. 누가 감히 사인을 단정할 수 있나. 그런데도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무언가 기사거리가 될 만한 게 있으면 안 쓸 수는 없다. 데스크 주문도 그렇고…. 자가증폭하는 셈이다. 그래도 집단피살 운운한 보도는 너무했다는 게 기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이제 답은 분명해진다. 개구리소년 변사사건(더이상 실종사건이 아니다) 해결에 있어 더욱 냉정하고도 과학적인 접근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접근은 사인규명을 위한 것이다.
개구리소년 유골발굴 현장에서 감식작업을 벌이고 있는 법의학팀
법의학팀은 이들 검사 결과를 취합·분석해 이르면 오는 11월초쯤 종합 판정할 예정이지만, 경우에 따라 판정이 더 늦어질 수도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유골 감정결과와 타살 의혹 간 ‘괴리’를 좁히긴 쉽잖아 보인다. 지금까지 결정적 단서가 될 만한 조사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극물검사를 맡은 국과수 약독물과 관계자는 “지금으로서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고 입을 닫았다. 토양검사를 의뢰받은 국과수 화학분석과 관계자 역시 “10월2일 밤늦게 법의학팀에게서 토양검사를 의뢰받았다. 검사를 실시중이라 결과는 아직 알 수 없다”며 말을 극도로 아꼈다.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않은 탓인지 10월10일엔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보도까지 튀어나왔다. 이에 대한 법의학팀의 반응은 싸늘하다. 법의학팀 채종민 교수(경북대 의대 법의학교실)의 말이다.
“언론은 유전자(DNA)검사로만 신원확인을 하는 것으로 잘못 아는 듯하다. 신원확인은 인체 특징을 잘 나타내는 치아에 대한 법치의학적 검사, 옷가지·신발 등 유류품, 유전자검사 등을 종합해 결론을 내리는 작업이다. 유전자검사는 신원확인 절차의 최종단계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만 100% 확인되는 게 아니다. 솔직히 조그만 ‘그 무엇’이라도 있으면 무작정 타살 의혹과 연관짓는 언론보도 행태에 불만이 많다.”
현장은 훼손됐다. 언론과 유족은 타살 쪽으로 기울었다. 결정적 단서는 없다…. 사인규명 작업이 장기화할 것이란 전망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 타살 쪽에 무게를 둬온 관점이 과연 과학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타살 근거, 아직은 없다
법의학팀이 감정결과로 내놓을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대략 3가지. 법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타살이나 사고사 중 어느 한쪽,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 불확실한 결과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란 추론이 현재로서도 가능하다.
일부 언론이 무심코 사용하는 자연사(自然死·Natural Death)란 표현은 틀린 것일 뿐 아니라 전혀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 법의학에서 말하는 자연사란 말 그대로 노화 내지 어떤 질병으로 사망한 것이 명확한 죽음을 말한다.
자연사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외인사(外因死·Violent Death)다. 이는 사망 원인이 인체 외부에서 작용한 죽음을 말한다. 자연사 이외의 죽음은 모두 외인사다. 외인사의 법률적 용어가 바로 변사(Unusual Death)다. 즉 외인사에다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죽음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엄밀히 따지면 개구리소년의 죽음은 바로 이 변사에 속한다.
외인사의 종류로는 자살, 타살, 사고사(또는 재해사 Accidental Death), 자·타살 및 사고사의 구별이 불가능한 경우(즉 그런 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을 경우) 등이 있다. 정황으로 미뤄 개구리소년들이 자살, 특히 집단자살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므로 논외로 해도 무방할 듯싶다. 결국 크게 보면 앞서 말한 대로 사고사, 타살, 원인불상(Unknown)의 죽음 등 3가지 가능성으로 집약될 수밖에 없다.
우선 타살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10월14일 현재 법의학팀이 찾아낸 타살 흔적은 전무하다. 유골에선 이렇다 할 만한 외인사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유골 중 일부 두개골에 난 구멍과 함몰 흔적 역시 외력(外力)에 의한 것인지, 자연적 훼손에 의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게 법의학팀의 의견이다.
이제 타살 가능성 중 하나로 제기되고 있는 유탄 피격설 내지 총기 난사에 의한 피살을 가정해보면 어떨까. 이 또한 가능성이 매우 낮다. 발견된 유골은 물론 옷가지 어디에도 총상의 흔적이 없다.
더욱이 10월12일엔, 유골 발굴 현장 주변에서 발견된 탄두에서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고, 탄두 변형으로 인체 관통 여부도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국과수의 1차 감정결과가 나온 바 있다. 또 법의학팀은 10월14일, 구멍 뚫린 두개골의 내부에 육안검사 및 방사선촬영검사를 실시한 결과 금속물질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있을 법하다. 11년 남짓 된 유골에서도 총상 흔적을 찾지 못한다면, 6·25 당시 집단학살당해 50년도 더 지난 후 수십구씩 발견된 피해자들의 사인은 과연 어떻게 밝혀내는 것인가. 그러나 법의학자들은 이는 의외로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본래 총격을 받아 사망하면 유골에 총상에 의한 골절 흔적이나 탄흔이 남는다는 것. 굳이 탄두가 뼈에 박혀 있지 않더라도 살에 박힌 탄두 역시 사체가 부패할 때 함께 부식되고, 이 과정에 탄두의 구리 성분이 빠져나오면서 발생한 녹이 유골에 묻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개구리소년들이 총상, 특히 누군가의 총기 난사로 사망했다는 일부의 추측은 개연성이 지극히 희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미 제보자 한씨에 대한 경찰의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양성(거짓말) 반응이 나왔고, 유골 발견 지점에서 나온 탄두 3발(M1소총탄 2발, 카빈소총탄 1발)에 대한 영천 제2탄약창의 분석결과도 ‘1970년대 이전 사용 탄두’로 결론났다.
다만 10월10일 법의학팀이 “유골 5구 중 2구의 일부 뼈에서 골절 흔적이 발견됐다는 정형외과 전문의의 검사소견이 나와 골절 원인과 시점을 조사중”이라고 밝힌 부분은 지켜볼 여지가 있다. 이 골절이 유골 발굴 당시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확인됐지만, 총상으로 인한 것인지 여부는 밝혀진 바 없다.
이와 관련, 언론보도로 곤욕을 치른 보병 제50사단 작전참모 라정연 중령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저수지 옆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고 가정해보자. 사인이 익사인지 여부를 알려면 옷이 물에 젖었는지, 물을 먹은 흔적이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저수지 옆에서 발견됐다고 익사로 예단할 수 있는가.” 라중령이 말하는 ‘저수지’와 ‘변사체’에 ‘50사단 사격훈련장’과 ‘개구리소년 유골’을 대입해보면 어떨까. 언론이 제기한 유탄 피격설이 논리적으로 상당히 비약한 것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법의학팀이 유골 클리닝과정에 발견한, 이끼로 추정되는 물질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0월8일 언론은 개구리소년 두개골 2개의 정수리 부근에서 이 물질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또한번 ‘살해 후 매장 가능성’을 거론했다. 정수리 부근에만 이끼가 발견된 것은 흙에 묻힌 뒤 유골 일부가 빗물 등에 씻겨 외부로 노출된 증거라는 것.
그러나 설사 그 물질이 이끼라 하더라도 이끼는 유골 일부가 최근 수개월 정도 물기가 있는 지상에 노출돼 있었다는 징표일 뿐 그 자체로 사인이나 사체 이동 여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게 법의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사인규명에 있어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단지 참고자료일 뿐이라는 것. 전문가 견해가 이렇다면 언론은 이끼 추정 물질 발견 소식을 타살 의혹을 뒷받침하려 애써 부각시켰다는 결론이 나온다.
머리카락과 손발톱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부분도 마찬가지. 10월5일 언론은 유골 발견 현장에서 소년들의 머리카락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것과 관련해 ‘사체유기 가능성’을 새롭게 제기했다.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머리카락 역시 타살을 입증할 단서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이윤성 교수의 말이다.
“사체가 흙속에서 5년쯤 지나면 살은 완전히 썩어 없어진다. 반면 머리카락은 10년 이상 남는다. 흔히 사람들은 이장하는 경우만 떠올리고 관속의 유골처럼 머리카락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머리카락은 유골 발견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오래된 머리카락이 발굴과정에 산산이 부서져 흙에 섞여버리기 때문이다. 발굴할 때 삽질을 하건 붓질을 하건 결과는 같다. 손발톱도 마찬가지다. 머리카락과 손발톱은 사체 주변 상황에 따라 그 상태가 달라진다.”
지난 10월10일 충남 태안군 태안읍 의령 남씨 선산에서 발견된, 조선 중기 삼도통제사를 지낸 남오성 장군의 시신을 떠올리면 이교수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남장군 시신은 300여 년 전의 것이지만 옻칠을 한 15cm 두께의 육송으로 만든 관 속에 안치돼 머리카락과 치아, 수염, 손발톱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됐다. 유골 상태는 이처럼 보존환경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타살 외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고사다. 사고사 역시 입증이 어렵다. 법의학자들에 따르면 오히려 타살의 경우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이른바 저체온 현상으로 숨진 사체는 사망시점에서 몇시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부검해도 체온이 조금 낮은 것 이외에 별다른 특징이 남지 않는다. 더욱이 유골의 경우 흔적은 전무하다. 때문에 법의학에서는 주변 정황을 최대한 고려해 저체온사로 결론을 내린다는 것.
또 만일 저체온사했다면 유골들이 한데 엉키고, 각 유골의 대퇴골과 가슴뼈 부분이 밀착된 상태로 발견됐어야 한다. 반대로 타살당한 뒤 현장에 암매장된 경우라면 유골들은 엉키지 않고 펴진 상태가 된다는 게 법의학적 분석이다. 그러나 개구리소년의 경우 발굴 초기 현장보존이 안돼 저체온사 여부를 밝히기는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다.
사체나 유골 상태에서의 이동 여부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되는 곤충학검사나 토양검사 결과에 관심이 쏠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동이 있었다면 이는 곧 타살을 의미한다.
이렇듯 개구리소년 유골이 여느 유골과는 다른 ‘아주 특수한’ 케이스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더욱 중요한 건 그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성 교수는 “직접 유골을 보지 못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 매인 옷매듭과 두개골 결손 등에 대해선 좀더 치밀하게 확인할 필요성이 있다는 게 개인적 견해”라고 밝혔다. 그러나 “매듭 형태가 이상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상하다고 해서 반드시 타살을 입증하는 건 아니다”는 단서를 달았다. 법의학자의 시각에서도 김영규군(당시 11세)의 체육복 하의에서 발견된 독특한 형태의 매듭은 최대 미스터리다. 상의 매듭의 경우 ‘태권도 허리띠 방식’이라는 잠정결론이 내려졌다.
이처럼 유골을 중심으로 한 법의학팀의 법의학적 조사 부분을 제외하면 사인규명의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옷 매듭 정도에 불과하다. 반복해 말하지만 ‘현재까지는’ 그렇다. 유골 추가발굴에서 실종 당시 조호연군(당시 12세)이 입었던 점퍼가 발견되지 않은 점도 사체 유기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아직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런 미스터리들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사인규명은 그만큼 더뎌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영구미제?
법의학팀이 어떤 판정을 내릴지 현재로선 미지수다. 판정이 나온다 해도 타살과 사고사 중 어느 한쪽이라고 단정짓는 명쾌한 결론은 아닐 것이라는 견해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격렬한 외상이나 총상 흔적 등 타살로 볼 만한 소견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사고사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모호한 결론을 의미한다.
개구리소년 사건 해결의 가장 큰 딜레마는 지금까지의 유골 감정에서 나타난 몇몇 소견, 경찰이 주목하는 타살 정황들 간 상관관계가 거의 없고, 이 모든 것이 ‘개구리소년들이 왜 산에서 내려오지 못했나’라는 근원적 의문과 연결되지 않은 채 각기 따로 노는 데 있다. 때문에 만일 타살일 경우 범인이 전격적으로 자수하는 돌발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사실상 영구미제로 남을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까지 나온다.
타살 심증을 굳힌 유족들은 법의학팀에 강한 불신을 드러낸다. 김영규군의 아버지 김현도씨(56)는 “법의학팀과 경찰간 ‘교감’이 있을 것”이라며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법의학팀의 판정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타살과 사고사의 경계에 무게중심을 둘 게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또 “유족들은 ‘납득할 만한’ 판정이 나오지 않으면 서울대나 고려대, 더 나아가 일본에 가서라도 반드시 재감정을 받을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이런 유족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는 과학이다. 전문가들의 감정결과를 과학적 근거도 없이 배척한다면 사건 해결은 더욱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건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리지 않으려면 재감정과 신빙성 있는 제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재감정 비용은 원칙적으로 본인부담. 무엇이 진정으로 유족을 돕는 길인가. 타살 의혹을 부풀리기보다는 재감정을 위해 각계의 도움을 호소하는 게 더 언론다운 일 아닐까. 한 법의학자의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번 사건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점은 유족에 대한 배려다. 지금 그들은 법의학팀의 감정결과가 나온다 해도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은 심정일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심리다. 하지만 조만간 판정결과를 믿어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 그때마저 그들이 전문가들의 과학적 분석을 부정한다면 그건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유족의 잘못인가? 아무런 결정적 단서도 남기지 못한 채 유골로 발견된 개구리소년들의 잘못인가? 유족 이외엔, 언론은 물론 그 누구도 의혹을 더 이상 증폭시켜선 안된다. 우리가 유족에게 해줄 일은 단지 의혹을 풀어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