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찬이 따로 필요 없다. 구수한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린 양념간장 한 종지면 충분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갓 지은 콩나물밥을 간장에 비벼 먹으면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다. 시원한 김장김치 한 포기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콩나물밥은 예부터 서민들에겐 별미 중의 별미였다.
그에겐 콩나물밥에 얽힌 서글픈 추억이 있다. 그의 나이 여섯 살 무렵 어느 여름날의 일이다. 1950년대 후반 김극장장의 집안은 무척 가난했다. 한때는 시내 중심가 번듯한 집에서 살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변두리 ‘셋방살이’로 쫓겨난 신세였다.
식구도 많았다. 위로 누나 셋에 아래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이다. 김극장장은 2남4녀 중 넷째다. 가난한데 식구까지 많으니 ‘끼니 때우기’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여름철 보릿고개를 넘기고 갓 수확한 보리는 주식이나 다름없었다.
한 여름날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여린 김극장장의 코끝을 자극했다. 냄새를 따라 가보니 주인집에서 나는 냄새였다. 하얀 쌀에 콩나물을 둔 콩나물밥이 눈에 들어왔다. 소년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온 신경이 그 콩나물밥으로 쏠렸다. 입속에 침이 돌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오라며 손짓하자 비로소 멍하니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손짓에 못이긴 척 가려던 찰나, 누군가 뒤에서 붙잡았다. 누나였다. “넌 자존심도 없냐”고 꾸짖으며 그를 끌고 갔다.
김극장장은 아직도 그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벌써 40여 년이 흘렀건만 지금도 눈에 선하다. 뜨거운 콩나물밥은 여름에 잘 먹지 않는 음식이다. 하지만 김극장장은 한여름에도 가끔 콩나물밥을 해 먹는다. 어린 시절의 서글픈 추억을 떠올리면서.
김명곤 극장장 가족의 콩나물밥 만찬. 부인 정성옥씨와 아들 종민(초6). 딸 아리 (중3).
솥은 아무거나 상관없지만 그래도 돌솥이 권할 만하다. 잘 다진 쇠고기를 솥바닥에 골고루 편 다음 콩나물을 소복하게 얹는다. 그 위로 쌀을 얹으면 된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게 바로 물이다. 콩나물에서 나올 물까지 감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평소 밥물보다 약간 적게 붓는데 정량화하기는 어렵다. 손대중 눈대중으로 가늠할 수밖에 없다. 밥을 지을 때도 주의해야 할 게 있다. ‘중간에 솥뚜껑을 열면 안 된다’는 것. 만일 열게 된다면 콩나물의 비릿한 냄새가 밥에 배 먹기가 쉽지 않다. ‘솥뚜껑 운전’ 경력이 짧은 이들이 흔히 범하는 ‘중대한’ 실수다. 밥이 다되면 중불로 4~5분 뜸을 들인다.
콩나물밥이 ‘만두 피’라면 양념간장은 만두의 ‘속’에 해당한다. 양념간장에 들어가는 것은 파와 마늘, 깨소금, 고춧가루, 참기름 등 5가지다. 파는 잘게 썰고 마늘은 잘 다진다. 순서에 상관없이 간장에 넣어 잘 저으면 양념간장 완성. 준비가 끝나면 콩나물과 쇠고기, 밥을 잘 섞어 그릇에 담은 다음 양념간장에 비벼 먹으면 된다. 여기에 미역국이나 시원한 조개탕을 곁들이면 좋다.
김극장장 가족은 단출하다. 부인 정선옥씨(40)와 딸 아리, 아들 종민이 있다. 네 식구는 주말 점심이나 저녁 가끔 콩나물밥을 별미로 즐긴다.
김극장자이 3년 가까이 새롭게 꾸미고 가꾼 국립극장. 부부는 가끔씩 이곳에서 공연을 함께 즐긴다.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듣게 된 판소리 한 자락은 그의 모든 것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처음엔 자신도 몰랐다.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서야 알았다.
대학 졸업 후 1979년 ‘뿌리깊은 나무’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극장장은 판소리와 연극을 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교사라면 방학도 있으니 시간여유가 좀 있으리라. 1980년 배화여고로 직장을 옮긴 후 교사극단 ‘상황’에 참여했다. 그의 연극판 인생의 첫 시작이었다. 뒤집어보면 그건 ‘고행’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인 정선옥씨는 당시 그의 제자다.
김극장장이 출연한 영화와 연극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천재선언’ ‘영원한 제국’ ‘헬로 임꺽정’ ‘바보선언’ ‘개벽’ ‘태백산맥’ ‘명자 아끼꼬 쏘냐’ 등. 그 어느 작품보다 그는 ‘서편제’로 대표된다.
책임운영제로 운영되고 있는 국립극장장 임기는 3년. 김극장장의 임기는 올 해 말까지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를 국립극장장으로 알기보다는 ‘서편제’ 주연 배우로 아는 사람들이 더 많다. ‘서편제’는 이제 그에게서 쉽게 뗄 수 없는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돼버린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김극장장이 한 일은 무척 많다. 시민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대극장, 소극장 등으로 불리던 명칭을 친숙하고 정겨운 우리말로 바꿨다. ‘해오름극장’ ‘달오름극장’ ‘별오름극장’ ‘하늘극장’으로. 또 ‘토요문화광장’ ‘열대야 페스티벌’ ‘해설이 있는 발레’ 등은 시민들이 딱딱하고 멀게만 느끼던 국립극장으로 한 걸음 다가서게 했다.
“창작 활동만 하다가 행정이 이런 거구나 알 수 있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좋은 경험을 했다”는 김극장장.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중장기 계획을 시작도 못하고 물러나야 한다는 것에 아쉬움도 많다. 국립극장 인근에 위치한 자유총연맹 건물을 전시장으로 바꾸고, 장충체육관은 다양한 이벤트 장소로 활용하는 등 인근 지역을 ‘장충동 문화지구’로 개발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김극장장의 마지막 말이 여운을 남긴다. “어느 몽상가의 꿈으로 끝날 것 같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