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12월에 실시되는 대선의 역사적 의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3김 시대 이후의 한국정치가 새롭게 선보인다는 점이다.
-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 정국에서 한국정치의 희망을 발견하기는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정당보다는 인물, 정책보다는 도덕성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어 있는 데다 포지티브가 아닌 네거티브 캠페인, 그리고 적극적이 아닌 반사적 이익이 효과적인 선거전략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유권자들
오는 12월 대선을 앞둔 우리나라는 전혀 축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우선 정치 자체에 대한 국민적 허무주의가 대선을 썰렁하게 만들고 있다. 오랜 군사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민들은 오매불망 민주주의를 원했고 대통령 직선제를 바랐다. 그것은 당시 독재체제에 대한 불만과 체육관 간선제에 대한 염증이 초래한 국민적 정서였다.
하지만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대통령 직선제를 되찾았다는 민주화의 감격은 지금 정치권에 대한 극단적 냉소와 혐오로 변질되고 있다. 민주화를 통해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으면 비록 만사가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여러 측면에서 조금은 나아지리라고 기대했던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지난 10년 동안 ‘문민정부’ 및 ‘국민의 정부’의 잇따른 국정 실패를 겪으면서 대선에 대한 국민적 열정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다.
‘당한 만큼 갚겠다 VS 놓치면 죽는다’
이와 함께 대선이 국가적 불안이나 혼란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대선 열기를 냉각시키고 있다. 불행하게도 최근 두 차례의 대통령 직선이 국민통합과 국민화합에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김영삼 정부나 김대중 정권 모두 지역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른바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는 ‘국민의 정부’는 집권 5년 동안 지역적 숙원(宿怨)과 이념적 원망(願望)을 발휘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야당 역시 최초의 야당 경험을 제대로 진지하게 수용한 적이 거의 없다. 그 결과, 정치적 대립과 사회적 갈등은 가일층 증폭되었고 정권 말기가 가까워질수록 정치보복 문제는 점점 더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야당이 ‘(우리가) 당한 만큼 갚겠다’고 생각하고 여당이 ‘(권력을) 놓치면 죽는다’고 느끼는 한, 이번 선거는 정권이 아니라 사활을 건 일전(一戰)이 될 공산이 매우 높다. 결국, 국민은 대선 정국에서 모종의 살기(殺氣)를 느끼는 것이다.
국민이 보기에 다가오는 대선이 별로 신나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예상 후보자가 막판까지 너무나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선거를 불과 두 달 정도 앞둔 시점까지도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후보가 겨루는 현재의 3파전이 끝까지 지속될지, 혹은 신당 출현을 통해 양자 구도로 압축될지, 아니면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경쟁구도가 나타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을 두고 선거의 즐거움 또는 관전 포인트로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쯤은 출마가 확정된 인물들을 냉정하게 비교 검토한 다음 누구를 찍을 것인가를 차분히 결정할 시점인데도 아직까지 출마자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은 사실상 유권자의 합리적 선택권을 제약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유권자에게 판단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는 것을 일종의 선거전략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국민적 기만행위로 단죄받아 마땅하다. 현재처럼 대선 구도가 계속 가변적인 상황은 선거를 국민적 축제가 아니라 ‘그들만의 잔치’로 만드는 데 기여할 뿐이다.
정책 대결 사라진 ‘이상한 선거’
설혹 대선 구도가 일찌감치 확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선택지(選擇枝)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다는 점에 사안(事案)의 좀더 깊은 심각성이 존재한다. 누가 출마하든지 국민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유권자인 국민을 가장 맥빠지게 하는 대목이다. 원론적으로 말해 각 대선 후보자들의 정강 및 정책이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어떤 측면에서 이는 국가발전의 방향에 관련하여 사회적 합의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사정은 이와 크게 다르다. 미완 혹은 불발의 개혁 숙제가 산적해 있는 데다가 세계사적 대변혁기를 맞이하여 새롭게 헤쳐가야 할 국가적 과제가 연일 밀물처럼 밀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점에서 각 대선 후보 사이에 의미 있고 현실성이 충분히 고려된 정책상의 차이점이 뚜렷이 부각되지 않는 현실은, 국가발전 목표에 대한 정치권 전반의 폭넓은 공감대를 의미하기보다 국민에 대한 총체적인 직무유기에 가깝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대선 구도에서 정책 대결이 실종된 책임을 현재 출마 예정자들에게만 묻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고된 역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선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선거에서 정책 대립은 항상 뒷전이었다. 우선 한국전쟁의 와중에 도입된 대통령 직선제부터가 이승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국민적 신임투표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소위 ‘부산정치파동’ ‘발췌개헌’ 등의 소동을 겪으며 도입된 대통령 직선제 방식 자체가 - 명분이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 당시 현직 대통령의 재집권을 위한 정략적 발상일 따름이었다. 그 이후 4·19학생봉기에 이르기까지 제1공화국 치하에서 실시된 두 차례의 대선은 모두 이승만의 정권 연장 기도를 둘러싼 여야간의 한판 승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제3공화국 시절의 대선 역시 선거를 통해 독재를 정당화하려는 집권세력과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회복하고자 하는 반대집단간의 일전이었다. 특히 이 기간에는 민주 대 반(反)민주라는 대립구도 이외에 지역감정이나 사상논쟁 등이 주요 쟁점으로 동원되기 시작하면서 정책에 의한 후보자간 경쟁원칙은 더욱 더 소멸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지역감정이나 사상논쟁 모두 시민사회나 유권자에 의해 ‘밑으로부터’ 이슈화된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 혹은 후보자 그룹에 의해 ‘위로부터’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선거라는 민주주의 체제의 핵심적 메커니즘이 실제 국민적 관심이나 이익과 괴리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한국정치의 사상논쟁은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둘러싼 건전한 대립이 아니라 상대방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에 불과했으며, 대선 후보자의 최대 볼모가 된 전근대적 지역주의 역시 이념이나 정책의 차이를 차별하지 않게 되었다.
1970년대의 유신체제와 1980년대 초·중반의 신군부 통치는 한국의 대선 정치를 또 다시 왜곡·굴절시켰다. 그 이유는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 동안 한국정치에서 대통령 직선제 자체가 사라졌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현대 한국정치의 최대 암흑기라고 부를 만한 이 기간에 군부독재의 청산과 민주주의 쟁취가 시대적 과제로 부상했는데 그것의 최대 가시적 상징이 바로 대통령 직선제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되돌아보아 대통령 직선제가 곧 민주주의로 인식되던 당시의 분위기는 물론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 직선제 자체는 민주주의의 작은 출발일 뿐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그것이 모든 국민의 절대적 염원인 양 간주되는 동안 과연 무엇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인지, 또한 누구를 위한 대통령 직선제인지에 대한 냉철한 성찰은 생략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른바 3김 혹은 양김(兩金) 정치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후세의 어떤 사가(史家)가 1970년대 이후 30여 년간의 한국정치를 ‘3김 시대’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정사(正史)에는 유신독재와 신군부의 명멸, 그리고 민주적 전환이 있었지만, 그 막후와 배후, 그리고 이면에는 항상 ‘3김 정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로 그들이야말로 한국정치 무대의 최장기 출연 배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민주화 투쟁에 관련하여 3김, 특히 양김의 공헌은 역사적으로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남긴 부정적 유산 역시 은폐되거나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의인화(擬人化)함으로써 대선을 단순한 인물 콘테스트로 변질시켰다. 그들은 국민을 위한 민주화 투쟁에 시종일관 철저하기보다는 그것을 개인적 야망과 연계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1950년대 이래 쟁점 없는 선거, 정책 빠진 대선이라는 한국정치의 불미스러운 전통은 양김을 거치면서도 불식되지 못했다. 혹자는 그와 같은 인물중심 선거 판도가 민주·반민주 구도 하에서 불가피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 양김이 대권을 장악한 것은 1990년대의 일로 민주적 전환이 이미 이루어진 시점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출범한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 둘 다 궁극적으로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 체제로 귀착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양김은 국정운영 자질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각론적인 검증 절차 없이 민주화 투쟁의 주역이라는 상황적 프리미엄과 지역 패권주의에 입각한 전근대적 지지기반을 업고 대통령직에 올랐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인격윤리나 도덕성의 잣대조차 날카롭게 적용된 적이 거의 없다. 민주적 개방에 이은 민주적 전환, 그리고 민주주의의 공고화라는 일반 단계에 비춰볼 때 우리 나라의 경우 YS와 DJ의 집권은 시기적으로 훨씬 더 빨랐어야 한다. 아니면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필요했던 시점에 하필 정치적 절정기를 구가한 3김 시대가 우리나라의 민주화나 정치발전에 반드시 유익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정당보다는 인물, 정책보다는 도덕성이 우선되는 묘한 풍토
오는 12월에 실시되는 대선의 역사적 의의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3김 시대 이후의 한국정치가 새롭게 선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선 정국에서 한국정치의 희망을 발견하기는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정당보다는 인물, 그리고 정책보다는 도덕성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어 있는 데다가 포지티브가 아닌 네거티브 캠페인, 그리고 적극적이 아닌 반사적 이익이 더욱 효과적인 선거전략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지역주의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고 지적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낮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역시 영남지역에서 안정적 강세를 보인다. JP의 몸값이 아직도 하락하지 않은 까닭도 그의 충청도 기반 때문이다. 국민경선과 함께 불었던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노풍 역시 그 진원지가 호남이라는 점에서 사실은 지역주의를 오히려 강화한 측면이 있다.
결국, 좋든 싫든 지난 수십년 동안 3김에 의해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한국정치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대선을 두 달 정도 앞둔 시점에도 창당이 여러 갈래로 분주히 논의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증거다. 이는 정당이 대선 후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대선 후보가 정당을 만들어온 한국정치의 후진성을 숨김없이 고백하는 일이다. 철새 정치인을 비난하기 전에 철새 정치인을 양산하는 정당정치의 전근대성을 먼저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 ‘창당 전문가’라는 직업이 있을까? 물론 우리 나라에는 있다. 한 개인의 정치역정에서 얼마나 많은 정당을 만들어 보았으면 ‘창당 전문가’라고 평가되는 정치인이 있겠는가.
게다가 차별화된 정책을 둘러싼 후보자간의 진지한 토론은 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역대 대선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부는 것은 오직 각종 바람 풍(風) 뿐이다. 북풍, 총풍, 세풍, 병풍 등 과연 한국정치에는 바람 잘 날이 없나보다. 그런데 유권자인 국민을 우롱하는 것은 정치에서 진실이 사라지고 책임 또한 묘연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이회창 후보를 둘러싼 병풍의 경우를 보자. 이후보 측 아니면 민주당 측 둘 가운데 한 곳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이는 유권자의 투표 의욕을 감퇴시키는 정치권 전체의 오만과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일은 병풍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권에 부는 대부분의 바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지고 보면 이처럼 정치권을 어수선하고 불안하게 하는 인공(人工) 바람은 한국정치에서 선거라는 것이 그저 후보자의 인물됨이나 도덕성 검증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다. 후보자의 이념이나 정책을 묻고 따지기 전에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병역과 납세 의무를 제대로 이행했는가, 재산증식 과정에 불법적인 요소는 없는가, 부부사이는 원만하고 가족관계는 정상적인가 하는 따위의 질문은 사실 너무나 기초적이어서 대선 출마자라면 논쟁이나 시빗거리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우선 이런 초보적 기준조차 무난히 충족시키는 후보를 현실적으로 찾기 쉽지 않다는 것과 함께, 그동안 우리 사회가 대선 후보자들에게 합당한 본격적이고도 본질적인 문제제기를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우리 사회는 어떤 정치인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껍데기나 주변을 주로 살피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고향, 학력, 가족, 재산 등이 정치인의 자질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두주불사’(斗酒不辭)라든가 ‘영어능통’이라는 것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평가항목이 될 수는 없다. ‘외유내강’이라든가 ‘보스형’이라는 항목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나 후보를 비교하고 평가할 때 훨씬 더 중요한 기준은 지금까지 그가 입안했거나 발의한 정책, 국회에서의 투표 성향, 법조인 시절의 법원 기록, 정치인으로서의 발언 내용, 경제인으로서의 사업 성과 등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론조차도 이런 종류의 질문에는 대체로 침묵하는 편이다. 지식인 사회 또한 스스로의 강한 정치지향성 탓에 정치권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 이번 대선의 경우에도 유력 후보 캠프들은 자문이나 고문을 자청하고 밀려드는 대학교수나 언론인, 연구원들로 연일 문전성시라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후보 정치인과 유권자 국민을 이어주는 중간 교량도 매우 허술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 화합과 사회 통합에 앞장설 수 있는 인물 선택해야
결국,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 한국정치의 밝은 미래를 전망할 수 없다. 이는 반드시 후보자 개인들의 자질로부터 연유하는 비관적 전망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한국정치가 그렇게 흘러왔고 한국의 선거문화 혹은 대선구도 또한 그런 식으로 형성되어 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약 이러한 체념 상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면 우리는 썩은 사과와 병든 사과 가운데 하나, 혹은 떨어진 사과와 주운 사과 가운데 하나를 집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는 차라리 외주(外注)나 아웃소싱(outsourcing)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언필칭 세계화의 시대, 국경이 사라지고 국적도 희미해지는 판국에 굳이 정치 영역에서만 민족주의나 애국심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는가?
물론 그것이 완벽한 대안이나 현실적인 해결책이라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이는 유권자인 국민이 자신의 주권을 남에게 넘기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번 대선을 통해 한국정치의 희망을 우리 스스로 만들고 가꾸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후보자에 관련된 지엽적 배경이나 부수적 요인에 얽매이기보다는 그 사람의 직업적 경력(professional career)에 주목하여 투표에 임해야 한다.
둘째, 비록 미세할지는 모르나 후보자간에 존재할 수 있는 정강정책 차이를 돋보기를 통해 확대·관찰해야 하며, 그것들을 임기 내내 기억하고 끝내 책임을 추궁하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셋째, 한풀이나 정치보복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화합과 사회통합에 앞장설 수 있는 인물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3김 시대 이후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통해 한국정치의 질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신념과 능력을 갖춘 후보자를 차기 지도자로 선택해야 한다. 이로써 정치권 스스로는 도저히 깎지 못하는 머리를 유권자 국민이 대신 깎아주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