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발간된 ‘야생초 편지’란 책이 화제다.
- 간첩으로 몰린 양심수 황대권씨가 출소 후 생태공동체운동가로 거듭나기까지의 극적인 사연도 그렇거니와 책에 실린 그만의 독특한 건강비결 또한 눈길을 끈다. 그가 말하는 생태주의적 삶과 야생초 잘 먹어 건강 지키는 법.
감옥에서 눈뜬 자연요법
그후로 60일간 간첩임을 인정하라는 강요와 함께 잔인한 매질과 고문이 밤낮없이 계속됐다. 결국 그는 ‘조작된 간첩’이 되어 13년 2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이른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체포 당시 그는 결혼한 지 10개월 된 아내와 갓 태어난 아기를 둔 서른 살의 가장이었지만, 반공 이데올로기의 번성을 위해 ‘야생초’처럼 삶의 뿌리를 솎음질당했다.
최근 황대권(47)씨는 ‘야생초 편지’(도솔)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을 보면 그가 13년 2개월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알 수 있다. ‘야생초 편지’엔 그가 감옥에서 직접 키운 꿀풀, 아기똥풀, 왕고들빼기, 괭이밥 등 야생초 이야기가 막내동생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태로 묶여있다. 미대 지망생이던 그가 직접 그린 야생초 세밀화도 군데군데에 실려 지난(至難)했던 감옥생활을 짐작하게 해준다.
“체질적으로 기관지가 약했어요. 1년에 서너 차례 감기에 걸렸고요. 허리도 좀 약했죠. 그러다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으면서 몸이 완전히 망가졌고, 감옥생활을 오래 하면서 만성기관지염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요통·치통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고요. 양약을 먹다 지쳐 만성기관지염을 고쳐보려고 풀을 뜯어먹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야생초에 흠뻑 반하게 된 겁니다.”
감옥 안의 생활·의료환경이 열악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수인(囚人)들은 늘 기관지염, 비염 등 지병을 달고 산다. 줄곧 한 평 남짓한 독방에서 생활하던 황씨가 언젠가 10여 명의 수인들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다. 그때 공동으로 쓰는 담요의 먼지 때문에 기관지염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새벽녘이면 기침이 너무 심해 잠을 못 이루고 심한 경우 탈진까지 할 정도였다.
교도소 경비교도대에 약을 신청했지만 기관지 환자나 무좀·배탈환자 모두에게 똑같은 약을 처방하는 무성의함만 되풀이됐다. 그는 감옥 안에서 어금니가 8개나 빠졌다. 이가 아파 죽을 지경이어도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러다 ‘내 몸은 내가 고쳐야겠다’는 몸의 신호가 ‘자연요법’에 눈뜨게 만들었다.
재소자들에겐 ‘출역’시간이란 게 주어진다. 출역은 재소자 갱생훈련의 하나로 목공·봉제·원예 등 기술을 익히게 하는 일종의 강제노동이다. 그러나 일반 재소자들과 달리 황씨 같은 양심수에겐 출역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공연히 출역 나가서 ‘간첩활동’을 하며 주변 재소자들을 ‘포섭’할까봐 아예 접촉할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황씨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원예부 출역을 자청했다. 교도소를 장식하는 국화·팬지·수국 등 식물을 관리하면서 교도소 담벼락에 핀 야생초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매일 풀이 얼마나 자랐는지, 꽃이 얼마나 커졌는지 관찰하다가 급기야 교도소 안에 자기만의 꽃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교도소 여기저기에 피어난 야생초를 한 곳에 옮겨심기도 하고 먼저 출소한 동료나 친하게 지내는 교도관들로부터 씨앗을 구해 심기도 했다.
야생초가 낫게 해준 만성질환
그렇게 해서 가꾸게 된 야생초가 냉이, 제비꽃, 씀바귀, 방가지똥, 지칭개, 명아주 등 100가지가 넘었다. 풀에게 애정을 쏟는 만큼 풀과 ‘교감’도 깊어졌다. 그는 그 교감을 그림으로도 옮겼다.
그러면서 각종 식물도감을 구해 야생초의 생리·생태를 공부하고, 식용·약용 등 야생초의 효과적인 활용방법을 터득해나갔다. 그가 감옥 안에서 읽은 야생초, 자연요법, 동양의학에 관한 전문서적만 해도 큰 책장으로 4개 분량이나 된다.
“책을 통해 도라지, 선인장, 알로에가 기관지염에 좋다는 걸 알았어요. 도라지는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 직접 재배해서 먹기 시작했고, 선인장은 원예부 출역을 나가면서 교도소에서 키우던 선인장 화분에서 얻었지요. 선인장은 사막지대 사람들의 귀중한 음료수 원천이기도 한데 가시를 제거하고 날로 씹어 먹었어요. 하지만 약효를 보기엔 수량이 턱없이 모자랐어요.”
야생초가 대안이었다. 그는 특별히 어떤 풀이라고 할 것도 없이 괭이밥, 쇠비름, 참비름, 질경이, 명아주 등 각종 야생초를 뜯어먹었다. 그래서 감옥 안에서 얻은 그의 별명은 ‘토끼.’ 화단에 난 것을 날로 뜯어먹기도 했지만 야생초를 주재료로 한 ‘야생초차’ ‘들풀모듬’ ‘모듬풀 물김치’ ‘십전대보잼’ ‘모듬 야생초무침’ 등 야생초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야생초를 1년 넘게 먹으니까 만성기관지염, 요통, 치통이 깨끗이 낫더군요.”
그는 건강을 위해 감옥 안에서 야생초를 직접 길러 먹을 뿐만 아니라 ‘요료법(尿療法)’ ‘도인술’ ‘명상’ 등을 병행했다. 특히 그는 오줌은 사람이 구할 수 있는 ‘최상의 생수’라고 강조한다.
“요료법은 몸의 자연치유력을 증진하는 자연요법입니다. 오줌엔 자기 몸에 생긴 병을 치료하는 물질이 들어 있거든요. 전 아침에 일어나면 제 첫 오줌을 받아 마시고, 망가진 잇몸과 치아를 내버려둘 수 없어 오줌으로 양치도 했어요. 감옥에서 그것말고는 병을 낫게 할 별다른 대안이 없었거든요. 요료법을 실시하는 한 일본 사람은 집에서 오줌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가서야 뱉어낸다고 합니다.”
실제 암에 걸린 한 장기수가 옥중에서 요료법으로 병을 완치한 사례도 있다는데, 황씨 말에 따르면 요료법은 건강유지와 피로회복 특히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그는 요료법에 관한 지식을 주로 일본에서 발행한 전문서적에서 얻었는데, ‘오줌은 혈액이 신장에서 걸러져 요관을 통해 방광에 머물렀다 배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혈액보다 더 깨끗한 것이다. 피를 뽑아 놓아두면 빨간 부분이 가라앉고 노란 물이 맑게 고이는데, 이게 오줌이라 생각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라는 내용에 공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 요료법을 실시한 후 차게 식힌 ‘쑥차’ 한 컵을 들이켜고 나면 “매번 몸 안에 새로운 생기가 충전되는 듯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고 말한다.
서울 여의도 생태공원에서 야생초를 둘러보는 황대권씨
그는 감옥에서 매일 30분∼1시간 가량의 명상도 빼놓지 않고 실행했다. 이때 ‘몸관찰’과 ‘마음관찰’을 통해 자신도 하나의 우주라는 자각이 서서히 싹텄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정신과 물질의 통합체라고 생각해요. 몸관찰은 가만히 제 몸 내부를 세포 하나하나까지 상상해보는 거죠. 그러면 하나의 세포부터 시작해서 몸 전체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축소판이란 느낌이 들어요. 몸이 우주의 축소판이자 내가 곧 우주라는 말이죠. 그런 자각이 일면 나와 내 앞에 있는 야생초, 쥐, 거미 등의 생명체도 똑같은 몸이고, 그 몸도 우주의 축소판이고 더 확대하면 우주가 됩니다. 결국 나와 다른 생명체는 우주적 근원에 연결돼 있는 동질의 생명입니다.”
그는 이런 체험을 통해 단순히 자신의 몸만 치유한 게 아니라 야생초와 실천적 교감을 이뤄내고 서서히 ‘생태주의자’로 변모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비자연적이고 반인간적인 감옥이 그에겐 ‘생태학교’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과거 ‘나는 어떻게 조작간첩이 되었나’라고 항변하던 그가 이제는 ‘생태공동체연구모임(www.commune.or.kr)’의 대표로 활동하면서 ‘나는 어떻게 생태주의자가 되었나’라는 주제로 국내외 강연을 다니게 된 것도 모두 이른바 ‘법무부 생태학교 졸업장’ 덕이다.
그렇다고 그가 풀 먹고 명상하면서 마치 도인처럼 생태주의자로 거듭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수업료를 처절하게 치렀다.
처음 감옥에 갇히고 그후로 5년 동안 그에겐 풀 한 포기 살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 억울한 누명을 벗고 나갈 수 있을까?’가 최대 고민거리였다. 그는 1989∼90년이 가장 힘든 고비였다고 회고한다.
“아내와는 미국 유학중 만나 결혼했는데 제가 ‘간첩’으로 낙인찍히는 바람에 아내도 취직이 안돼 생계가 막연한 상태였어요. 말로는 연좌제가 없지만 국가보안법에 걸린 무기수 가족들은 사회생활을 도저히 해나갈 수 없거든요. 배우자가 무기수면 합의하지 않아도 이혼이 됩니다. 징역살이도 힘겨운데 이혼당하고 가정마저 파괴되니까 몸과 정신이 급속도로 피폐해지기 시작했어요.”
수포로 돌아간 ‘결전의 날’
국가보안법이란 거대한 포식자가 아내와 자식으로 표현되는 그의 마지막 희망까지 삼켜버렸다. 이때 그가 겪은 고독과 절망감의 크기를 비슷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는 무조건 감옥에서 뛰쳐나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고 토로한다.
“어떻게 하면 법정에 다시 서서 ‘나는 어떻게 간첩으로 조작되었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릴까 궁리했어요. 그러려면 다시 법정에 설 수밖에 없는 죄를 저질러야 하잖아요. 어차피 무기징역을 받은 상태니까 징역이 추가된다고 해봤자 ‘바다에 물 한 방울 추가하는 것’이라 생각했죠.”
1991년 어느 봄날, 그는 1주일에 한 번 있는 안동교도소 내 종교집회를 ‘결전의 날’로 정했다. 종교집회에는 재소자뿐만 아니라 외부인사들도 참석해 교도소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시간이다.
“그때는 서화반에 출역을 나갔는데 출역 때 모은 종이로 밤새워 ‘삐라’를 만들었어요. 1주일 내내 ‘국가보안법 철폐하라’는 내용의 삐라를 100장 정도 만들었으니까요. 혼자 하면 죄형이 가벼울까봐 일반 재소자 2명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마침내 다가온 결전의 날! 그는 종교집회가 열리는 단상을 점거한 후, “국가보안법 폐지하고 전향제를 폐지하라”고 절규했다. 그리고 한지에 붓글씨로 그의 주장을 적은 플래카드도 내걸었다. 감옥 안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단적 행위였으니만큼 채 3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시위는 강경진압으로 마무리됐고 가혹한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도소측에서는 조작 간첩을 법정에 세워봤자 자기네들만 귀찮다고 생각했겠죠. 저를 기소하지 않고 징역살이의 최대 처벌인 ‘징벌방’에 두 달 동안 가두었어요. 굵은 포승으로 두 손을 꽁꽁 묶고 머리 위엔 24시간 감시카메라를 작동시켰죠. 포승으로 엮은 뭉치가 등 뒤에 있어서 제대로 누울 수도 없고 손을 움직일 수조차 없어 소위 말하는 ‘개밥’을 먹었어요.”
그는 징벌방에 있는 두 달 동안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 ‘왜 나를 이렇게 내치십니까?’하고 원망해도 신은 꿈속에서조차 해답을 주지 않았다. 계속된 침묵뿐이었다. 결국 그는 ‘침묵하는 하느님’을 버렸고, 감옥에서 나가겠다는 ‘욕망’을 버렸다.
“이때 유일신만 존재한다는 관념을 지우고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을 믿게 됐죠. 풀이나 하찮은 미물에서 신성을 찾게 됐지요.”
그는 ‘흐름’을 강조하는 도덕경·장자 등 도가 경전에 심취하면서 도가적 사유체계를 세워나갔다. ‘나’를 없애고 ‘교만’을 다스리면서 야생초를 만나 ‘생명의 교감’을 시작했다.
‘아무리 화사한 꽃을 피우는 야생초라 할지라도 가만히 10분만 들여다보면 그렇게 소박해 보일 수가 없다. 자연속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있을지언정 남을 우습게 보는 교만은 없거든. 우리 인간만이 생존경쟁을 넘어서서 남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자연의 향기를 잃고 있다. 남과 나를 비교하여 나만이 옳고 잘났다며 뻐기는 인간들은 크건 작건 못생겼건 잘생겼건 타고난 제 모습의 꽃만 피워내는 야생초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많다.’(‘야생초 편지’ 중 ‘딱지꽃’ 일부).
이렇게 그가 야생초를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기 안의 ‘만(慢)’을 다스리고자 하는 깊은 뜻도 숨어 있다. 야생초와 친해지면서 감옥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더이상 감옥은 투쟁의 장이 아니었어요. 징역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존재를 실현하는 장으로 바꿔나갔죠.”
마침내 그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묵내뢰(默內雷). 겉으론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속으론 우레와 같다고…(중략)…평화란 절대적 평온, 정지, 무사, 고요의 상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단히 움직이고 사고하는 동적 평형(動的平衡) 상태라는 것이지. 사회가 평화롭다, 두 사람 사이가 평화롭다고 할 적에는 내부적으로 부단히 교류가 이루어지고 대화가 진행되어 신진대사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 된다’(‘야생초 편지’ 중 ‘주름잎’ 일부).
그가 신의 구원과 욕망을 버리고 ‘묵내뢰’식 평화에 길이 들 무렵, 희한하게 그의 주변을 둘러싼 문제가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에서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지정, 각종 지원이 들어왔고 영국 펜클럽 명예회원이 돼 외국과도 서신 왕래를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영국 펜클럽협회에서 그의 석방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갔다.
마침내 1998년,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났다. 그는 감옥에서 이미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한 상태였기 때문에 부모님께 이런 의사를 밝히고 출소한 지 5개월 만에 전남 영광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토에 뿌리 박아 징역독도 빼고 농토에 친숙해지기 위해 영광으로 내려갔어요.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산속에서 고생 좀 할 계획이었죠. 마침 아버지가 산소로 쓰시려고 임야 4만 평을 사놓은 게 있었거든요. 전 주인이 나무를 잘라먹고 땅을 팔아서 그런지 땅을 파보니까 그속에 나무뿌리가 많고 다 돌밭이었어요. 맨땅을 개간하느라 별짓 다했어요. 컨테이너 하나 갖다 놓고 거기서 동생이랑 먹고 자면서 포클레인 불러다 나무 뿌리 캐내고 집채만한 바윗덩어리를 들어냈죠. 소형 중고 트랙터를 사서 돌 고르고 밭 갈고 로터리 치고…산속이라 물이 없어 플라스틱 배관 작업까지 다 했어요. 그렇게 농장을 개척하면서 ‘농부는 만능이어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그렇게 개간한 땅에 오가피나무 2만 그루를 심었다. 산비탈이라 일반 농작물 재배는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야생성 강한 약초를 찾다보니 오가피나무가 딱 걸렸다.
그 무렵, 노르웨이 국영방송(NIR)은 양심수에서 농부로 변신한 그를 찾아와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이 프로그램 때문에 그는 국내보다 노르웨이와 유럽에 더 많이 알려졌다.
“노르웨이 국영방송은 1년 중 하루를 정해 24시간 방영권을 시민단체에 일임합니다. 이 날을 ‘내셔널 펀드 레이징 데이(National Fund Raising Day)’라고 하는데요. 이를테면 KBS가 경실련 같은 단체에 하루종일 방송프로그램 방영권을 주는 격이죠. 그때 노르웨이 시민단체는 TV방송을 24시간 책임지고 내보내야 하니까 스튜디오에 저 같은 양심수를 초청해 인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촬영해온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유명 가수를 불러 콘서트도 여는 거죠. 동시에 세계인권운동에 쓰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여요. 그날 노르웨이 수상과 인권장관도 나와서 노르웨이 앰네스티에 엄청난 액수의 기부금을 내더라고요.”
황씨도 출소한 지 얼마 안된 양심수 자격으로 노르웨이 국영방송국 스튜디오에 초대돼 안기부에서 어떻게 고문당했는지를 말하고 거리에서 모금운동도 벌였다. 그 덕분에 그날 모금운동은 노르웨이 시민들로부터 퍽 높은 호응을 얻었다.
제주 갈옷에 담은 철학
“양심수는 감옥에 있을 때나 양심수지 출소하고 나면 앰네스티에서도 지원을 안해줘요. 저는 이 모금운동을 계기 삼아 앰네스티에 ‘영국으로 유학가고 싶으니 장학금을 지원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요청했어요. 그래서 이례적으로 약 2000만원의 장학금을 받았고, 1999년부터 2년 동안 유럽에 있으면서 유럽의 생태공동체를 둘러보고 영국 임페리얼대학에서 생태농업 석사과정을 공부했어요.”
황씨는 20대 초반엔 알제리 독립투사 프란츠 파농과 브라질의 민중교육자 파울로 프레이리에 매료돼 있었고, 이 두 사람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전공했다. 당시 칼 마르크스를 연구할 수 없었던 한국의 척박한 현실도 그의 미국행을 부추긴 이유 중 하나다. 미국에서 마르크스를 공부하던 시절, 그는 뜻밖에 영국 과학사가이자 생화학자인 조셉 니덤을 알게 되었고 마르크스를 뛰어넘게 된다.
“마르크스는 세계사를 서구중심으로 해석한 사람이라 그를 연구하면서도 불만이 많았어요. 그런데 중국과학사를 전공한 조셉 니덤의 책을 읽으면서 큰 충격에 빠졌죠. 니덤은 20권이 넘는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 시리즈를 통해 ‘세계 과학사적으로 볼 때, 서양이 18세기 전까지 과학사에 있어서 단 한번도 동양(중국)을 넘어선 적이 없다’고 증명해낸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조셉 니덤은 이제껏 도올 김용옥의 입에 씹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대단함’을 입증하는 사람이다. “감옥에서 도올의 책을 다 읽어봤는데 세계 각국의 유명한 사람들 중 도올의 입에 안 씹힌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그에게 안 씹힌 사람이 딱 둘 있어요. 지구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을 쓰기로 유명한 영국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와 바로 20세기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니덤이에요.”
문명의 지축을 뒤흔드는 새 패러다임을 꿈꾸었기 때문일까. 그가 굳이 영국에서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자신이 특별히 좋아하는 마르크스, 조셉 니덤 그리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로 유명한 슈마허가 런던에서 공부하고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출소하면 꼭 국제적인 생태학교 슈마허대학에 가보겠다고 별렀다. 실제 2000년 5월 그는 영국 데번 지방의 슈마허대학을 찾아가 에콜로지컬 디자인(Ecological Design)코스를 마쳤다. 그는 외국에 갈 때는 꼭 한복을 입었는데, 슈마허대학에서는 제주 갈옷을 입고 다녔다. 여기엔 심오한 뜻이 담겨 있었다. 면에 감물을 들인 제주 갈옷은 한 달 넘게 빨지 않고 계속 입어도 처음 입었을 때의 우아함을 전혀 잃지 않는 ‘생태주의 의상디자인의 완벽한 모범사례’인데다, 서구문명의 지배를 당연히 여기는 외국인들에게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데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니덤, 슈마허처럼 영국의 지기를 받아서 그랬을까. 황씨가 영국에 머문 게 계기가 돼 국내에 ‘생태공동체연구모임’이 탄생했다.
“우리나라의 한 NGO단체에서 정부로부터 유럽생태공동체 탐방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따냈나봐요. 런던에서 ‘대체농법의 상호비교연구-자연농법을 중심으로’란 제목의 석사논문을 쓰고 있는데 저한테 가이드를 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11일 동안 영국, 덴마크 등에 있는 10여 개 유럽 공동체를 함께 돌아다니게 됐죠. 그 인연으로 귀국하자마자 생태공동체연구모임을 만들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고 있어요.”
생태공동체연구모임엔 푸른누리공동체 최한실, 불교환경교육원 유정길, 한살림 윤형근, 한국도시연구소 이근행씨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그는 지난 8월 이들과 함께한 유럽생태공동체 탐방 기록을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는 한 권의 책에 담아냈고, 현재 생태공동체연구모임 회원들과 함께 국내 50여 곳에 산재한 생태공동체 편람을 만드는 중이다.
“무슨 풀을 먹으면 우리 몸에 좋아요?” 그가 ‘야생초 편지’를 출간한 이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 생태공동체운동가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주 난감하다고 한다.
“야생초 한 포기만으론 육체의 병, 문명의 병을 고칠 수 없어요. 자본주의문명은 강자가 지배하는, 단절되고 부조화된 세계입니다. 이 속에서 나타난 여러가지 병을 고치려면 ‘전체적인 조화’가 중요해요. 그러려면 우리 삶을 생태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농사꾼이 자연을 재료로 생산활동을 하고 인간에게 이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생태주의자는 자연계의 모든 생명이나 물질들이 ‘공생’하고 ‘순환’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늘 자연과 공생하고 있는가, 이웃과 공생하고 있는가, 또 생각과 행동이 생명의 순환과정에 있는가 항상 반성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 같은 속도경쟁사회에서 ‘호랑이 등에 앉아 떠밀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세상을 꿈꾸는 사람, 황대권씨. 그가 뜨거운 태양에 밀랍 날개를 잃은 이카루스가 될지 아니면 새로운 문명의 불을 퍼뜨릴 프로메테우스가 될지는 계속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