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13억 인민 삶의 질 높이는 ‘샤오캉(小康) 사회’ 이룬다

‘준비된 지도자’ 후진타오의 경제발전 전략

  • 글: 강현구 중국경제전문가· 경제학박사 191710@hanmail.net

    입력2003-03-25 10: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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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3월 중순 중국의 후진타오 총서기가 국가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국의 1인자가 되었다. 후진진타오에게 놓여진 과제 중 가장 시급한 것은 경제 문제. 후진타오는 권력 전면에 포진한 제4세대 지도자들과 함께 어떤 방법으로 사회주의 강국 건설을 모색할 것인가.
    13억 인민 삶의 질 높이는 ‘샤오캉(小康) 사회’ 이룬다
    3월 중순, 베이징에서는 이른바 ‘양후이(兩會)’라 불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全國人民代表大會, 이하 전인대)와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이하 정협)가 열렸다. 이는 21세기 들어 새로 출발하는 제10기 전인대와 정협의 첫 회의라는 점과 지난 당대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된 후진타오(胡錦濤)가 국가주석에 선출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국 최고지도자로 자리매김한다는 점에서 대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중국이 마오쩌둥(毛澤東)을 중심으로 한 제1세대 지도자들의 혁명의 시대,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심으로 하는 제2세대 지도자들의 개혁 개방의 시대, 장쩌민(江澤民)을 중심으로 하는 제3세대 지도자들의 도약의 시대를 넘어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하는 제4세대 지도자들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이번 제4세대 지도자들은 그 전 세대가 심각한 상처를 보듬으며 출발했던 것과 달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구가하는 종합국력 7위”라는 비교적 좋은 조건에서 출발한 셈이다.

    후진타오는 중국을 명실상부한 사회주의 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낙관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 목표가 쉽게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제4세대는 미래의 중국을 어떻게 설계해나갈 것인가.

    이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의 중국이 처한 종합적인 상황, 특히 제4세대 지도자들의 대표인 후진타오의 정치 역정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그의 정치 역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지금의 중국 지도부를 설계한 덩샤오핑의 후계구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덩샤오핑이 직접 고른 후진타오

    한때 덩샤오핑은 영원한 2인자라 불렸다. 하지만 그에게 진정으로 어울리는 호칭은 ‘실권자’라는 표현일 것이다. 덩샤오핑은 단 한번도 공식적인 국가원수 자리에 올라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마지막 복권 이후에는 중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그는 생존해 있을 때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중국의 지도부를 결정했을 뿐 아니라 장쩌민 이후까지도 직접 챙김으로써 중국의 백년대계를 설계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이 직접 고른 인물이다.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장쩌민을 발탁하면서 그 체제가 본질적으로 오래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보완 장치로 내세운 것이 장쩌민 이후의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덩의 결론은 ‘당(黨)에는 후진타오, 정(政)에는 주룽지(朱鎔基)’였고 이들의 안정적인 권력 계승을 위한 장기적인 안배를 시작했다.

    후진타오를 중국 공산당의 핵심요직인 중앙판사처 주임으로 앉힌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장쩌민이 권력투쟁이라는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고 있을 때, 후진타오는 당의 핵심요직에서 조직을 관리하고, 동시에 중국공산당 중앙당학교의 교장으로 후진을 양성하면서 거센 파도를 한 발짝 피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덩샤오핑의 설계였다.

    하지만 치밀했던 덩샤오핑마저 예측 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장쩌민이라는 인물이 예상 밖으로 강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장쩌민의 권력장악 과정에 잘 나타난다. 권력 초기 그는 중국 역사상 최약체 최고지도자였다. 장쩌민의 등장 자체가 덩샤오핑의 낙점에 의한 것이었고, 처음부터 과도기용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작한 불안정한 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장쩌민의 집권 초기 위상은 덩샤오핑의 강력한 후원이 있음에도 불안 그 자체였다. 많은 사람들이 주석인 장쩌민과 당시 부총리에 불과했던 주룽지를 라이벌 관계로 인식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외부에 비치는 장쩌민은 리펑(李鵬), 차오스(喬石) 등 보수파와 주룽지 등 개혁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곡예사였다. 장쩌민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쩌민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현명하게도 당내 영향력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아무리 약체라도 중국의 주석은 곧 중국 공산당의 총서기다. 당내 영향력 강화는 그대로 국가 전체의 영향력 강화로 이어지는 것이 중국의 현실. 그가 선택한 주요 방책은 먼길을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사상공작강화’였다.

    장쩌민이 주창한 ‘사회주의 정신문명 건설(社會主義精神文明建設)’을 시발로 ‘3강(三講)’ ‘삼개대표(三個代表)’로 이어지는 일련의 정책구호는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강국 건설’이나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인민에게 다가갔다.

    특히 개혁·개방의 급격한 조류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사회문제, 특히 극심한 부패와 도덕적 타락을 해결하는데 장쩌민의 정책구호는 대안이 되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장쩌민의 사상 및 도덕의 상대적 우월성이 소외된 많은 인민들에게 깊이 각인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레 장쩌민의 권력강화로 이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위기는 1997년의 차오스 반란이었다. 당시 차오스는 보수파들의 지지를 얻어 장쩌민을 밀어내려는 야심찬 계획을 준비했고 그 본격적인 대결은 그 해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서 벌어졌다.

    유명한 휴양지인 베이다이허에서는 여름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는 가을에 열리는 당대회의 주요 안건들을 미리 점검하는 사전의견조율 회의. 따라서 여기서 이뤄진 결정은 당대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차오스는 이 회의를 통해 정적인 장쩌민을 무력화시키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축출되고 만다.

    이 반란을 성공적으로 제압함으로서 장쩌민은 당내 지휘를 굳히는 데 성공한다. 이후의 과정은 장쩌민에게 탄탄대로였다. 자신감을 얻은 장쩌민은 이후 당정을 아우르며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중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이에 따른 국제적 지위 향상은 당연히 장쩌민의 행보에 힘을 더해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실질적인 권력을 움켜 쥔 장쩌민은 곧바로 자신의 퇴임 이후의 설계에 들어가는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장쩌민의 희망이 전제되어 있었다.

    먼저 그는 중국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로 기억되고 싶어했다. 이른바 ‘삼개대표(三個代表)’로 축약되는 자신의 사상이 중국 공산당의 21세기 이념으로 자리잡게 하려 했다. 둘째, 동세대와의 동반퇴진을 통해 안전한 미래와 세대교체의 주역이라는 명예를 동시에 얻으려 했다. 셋째, 모든 권력자가 그러하듯 자신의 세력을 권력 요소에 심어놓으려 했다.

    사실 이 세 가지의 희망을 모두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장쩌민은 자신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매개로 ‘전퇴(全退)’냐 ‘반퇴(半退)’냐를 둘러싼 논쟁에 불을 붙이며 차세대 지도자로 내정된 후진타오와 지난한 물밑 투쟁에 들어선다.

    이 투쟁의 결과가 일단락된 것은 작년 11월 끝난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이하 당대회)이다. 그 결과는 이미 전세계에 알려졌듯 장쩌민의 완벽한 승리였다.

    그는 정치국 상무위원 및 정치국원에 자신의 측근들을 대거 진출시켜 실리를 취했음은 물론이고 당헌에 자신이 주창한 삼개대표 이론을 추가시킴으로써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잇는 지도자라는 명분도 획득했다. 더구나 총서기 자리만 내놓았을 뿐 초미의 관심사였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물론이고 국가 주석직 퇴진도 다음 인민대표자 대회로 미뤄버렸다.

    특히 주목할 점은 장쩌민이 자신의 심복인 쩡칭훙(曾慶紅)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출시킴으로써 퇴임 후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초작업을 다지는 데 성공한 점이다. 이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유지와 더불어 장쩌민의 퇴임 아닌 퇴임을 방증하는 것이다. 즉, 덩샤오핑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후진타오의 후견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전과정은 장쩌민의 정치적 승리의 과정임과 동시에 후진타오의 입지가 그만큼 줄어드는 과정이기도 했다. 물론 후진타오라고 해서 손을 놓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장쩌민의 힘에 대항하기에 후진타오의 힘이 아직은 모자란 것 뿐. 오히려 실질적인 권력 싸움은 이제부터인지 모른다.

    13억 인민 삶의 질 높이는 ‘샤오캉(小康) 사회’ 이룬다

    후진타오(오른쪽)가 국가 주석직에 취임했으나 장쩌민의 영향력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흔히 후진타오를 굴신의 달인이라 부른다. 그는 오랜 세월을 숨죽이며 살아왔다. 차차세대 지도자로 내정된 그의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내력을 살펴보면 후진타오가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차세대 지도자로서의 완전한 자리매김은 그에게 곧 장쩌민과의 지난한 투쟁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가 작년 11월에 열린 제16대 당대회에서 총서기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말 그대로 암투의 연속이었다. 이 암투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 투쟁과 이후 중국의 권력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당대회와 전인대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권력구조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권력구조를 이해하려면 중국공산당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1921년 7월 조직된 중국공산당은 2000년 현재 약 6100만명의 당원 수를 자랑하는 거대 조직이다. 당헌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은 중국 노동자계급의 전위대로서 중국 각 민족과 인민 이익의 충실한 대표이며 중국 사회주의 사업의 지도적 핵심을 담당한다. 중국 헌법 역시 그 영도성을 보장하고 있다. 이런 특성상 중국 공산당은 중국의 헌법상 최고 권력기관인 전인대를 실질적으로 지도한다.

    중국 공산당의 조직은 크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중층적 구조로 되어 있다. 최고 권력기관인 당대회를 실행하고 당의 활동전반을 지도하며 대외적으로 당을 대표하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핵심이다. 이 전체회의는 중앙위원 193명, 후보위원 151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년에 1회 이상 개최된다. 정치국은 22명의 정의원과 2명의 후보위원으로 구성되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폐회 중 중앙위원회의 직권을 행사한다.

    중국의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7~9명으로 구성되며 국가와 당에 관계되는 모든 정책을 최종 결정하고 당·정·군의 인사권을 장악한다. 중국의 권력구조는 실제로 당 총서기를 중심으로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핵심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 지도체제다.

    물론 마오쩌둥처럼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실권을 잡고 있을 때는 이런 집단 지도체제가 의미가 없지만 지금 같은 권력의 교체기에는 결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내부의 권력지형이 곧 중국의 권력지형이 된다.

    실제로 당대 중국에서 단독으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좌우할 정도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건국 초기의 마오쩌둥이 유일했다. 그 마오쩌둥마저도 결국은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국가 주석직을 내놓고 남방을 떠돈 것을 생각하면 이 기관이 갖는 위상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7~9인으로 구성된다는 점. 결국 여기서 다수를 확보한 사람이 권력의 핵심이 되는 것이 중국 정치다. 극심한 권력 투쟁기에는 더더욱 그렇다. 여기서 중국 특유의 야합과 배신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상무의원 인선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

    지난 11월에 개최된 16대 당대회의 핵심안건은 역시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였다. 후진타오가 이미 당 총서기로 내정된 상태였지만 제4세대 지도부를 구성할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인적 구성이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론적으로 제4세대 지도부는 정치국 상무위원 수를 당헌이 정한 최고치로 늘려야 할 정도로 치열한 암투 끝에 9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했다. 전대 상무위원 중 후진타오를 제외하고 모두 바뀐 이번 인선은 앞서 언급했듯이 장쩌민 계열의 승리로 끝났다. 장쩌민 계열은 우방궈(吳邦國) 부총리, 자칭린(賈慶林) 전 베이징(北京)시 서기, 쩡칭훙 전 당 조직부장, 황쥐(黃菊) 전 상하이(上海)시 서기 등 5명이 진입함으로써 과반수를 차지했다.

    후진타오를 제외한 나머지 4석은 우관정(吳官正), 리창춘(李長春), 뤄간(羅幹)이다. 뤄간은 잘 알려진 대로 보수파로 분류되며, 우관정은 산둥성 서기 출신으로 후진타오와 대학 동기이다. 이번에 최연소 상무위원이 된 리창춘은 선양(瀋陽) 시장을 역임해 조선족에게도 익숙한 인물로 장쩌민과 가깝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결국 후진타오는 총서기에 오르기는 했지만 장쩌민으로부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넘겨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치국 상임위원회에 자신의 사람을 심는 데 실패했다. 또한 6명이 교체된 정치국 위원 역시 장쩌민은 류치(劉淇) 베이징시 서기,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서기, 차이쑹웨(柴松岳) 전 저장(浙江)성 서기 등 심복 3인을 진입시킴으로서 전체 21인 중 절반 가량을 자신의 계열로 채울 수 있었다. 이에 반해 후진타오 계열로 볼 수 있는 사람은 한때 그의 상급자였던 왕자오궈(王兆國)를 꼽을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것이 후진타오의 완벽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지난한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계열 간부를 지방 성장(省長)급 고위 간부직에 잇따라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공청단 계열인 멍쉐눙(孟學農·53)이 수도 베이징의 시장으로 선출된 것과 올 2월 공청단 계열인 한정(韓正·49) 상하이시 부시장이 상하이 역사상 최연소 시장에 당선된 것은 주목할 만한 정치적 승리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인대를 통해 국가주석에 오른 후진타오는 이제 명실상부한 자신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후진타오 시대의 경제발전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후진타오를 낙점한 덩샤오핑의 구상을 살펴야 한다.

    2020년까지 GDP 4배 신장

    중국 경제의 장기적 전망은 1987년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3회 전국대표대회에서 기초가 만들어졌다. 덩샤오핑은 이 대회에서 사회주의 건설 이론에 근거하여 중국 경제의 발전 과정을 3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로 300달러인 1인당 국민소득을 20세기말까지 4배로 끌어올려 원바오(溫飽·의식주가 해결된 기초생활) 수준을 이룩한다. 2단계로 공산당 창건 100주년인 2021년까지 국민소득을 다시 2배로 끌어올려 중진국에 진입하며, 3단계로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선진국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구상을 밝히면서 원바오 문제의 해결과 기본적인 문화 생활이 가능한 샤오캉(小康) 사회 건설이라는 단계적인 사회 전망을 제시했다.

    샤오캉은 본래 전통 유가사상에서 유래한 말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이상정치의 궁극은 샤오캉에서 출발하는 다퉁(大同)의 상태다. 이는 천하가 모두 한 집안인 상태로서 백성들의 생활수준이 안정 단계에 접어든 것을 뜻한다.

    후진타오 시대의 경제발전 전략 역시 덩샤오핑의 구상을 앞당기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지난 당대회에서 언급한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의 구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전면적인 샤오캉 사회란 덩샤오핑이 제기한 샤오캉 사회가 물질적인 생활수준 제고에 중점을 두고 있는 데 반해, 물질문명·정신문명·문화수준의 제고 등 3가지 측면으로 그 범위를 확장한 데 있다. 중국은 이를 위해 2020년까지 GDP를 2000년의 4배로 늘려 종합국력과 국제경쟁력을 현저히 강화시킬 것을 핵심으로 하는 다음 4가지 방면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역시 중국의 큰 목표는 공업화를 이룩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와 신축성 있는 개방경제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소외지역의 도시화를 통해 도농격차를 줄이며 사회보장제도와 취업문제를 해결한다. 법과 제도 개혁을 강화하여 의법치국(依法治國)의 기본방침을 달성하며 인민들의 정치 경제 문화적 권익을 존중하고 보장한다. 그리고 전민족의 사상도덕 수준과 과학문화 수준, 보건 수준을 한 차원 높여 현대국민교육체계를 비롯한 과학기술과 문화창조체계 건강의료체계를 구축한다. 마지막으로 생태환경을 개선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환경 친화적인 사회발전을 촉진한다.

    좀 진부해 보이지만 중국 경제정책의 큰 틀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근대화된 선진조국 건설이라는 박정희 시대의 이념과,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전두환 시대의 정책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장기 전망 아래 후진타오 시대의 경제정책의 주된 기조는 2001년부터 시작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 10·5 계획’의 연장선 아래에서 실시되고 있다. 이 계획은 중국 현대화로 경제 및 사회가 전면적으로 발전하여 경제적인 측면에서 샤오캉 수준을 달성하며 그 이후 확대된 샤오캉 달성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 추진이라는 목표를 수립해놓고 있다. 이에 대해 작년에 열린 당대회에서 언급된 평가는 꽤 호의적이다.

    “중국은 지난 1996년에서 2000년까지의 9·5기간 중 복잡한 국내외 경제환경에 대해 당 중앙과 국무원이 상황에 맞게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전체적인 변화국면에 적응하였다. 발전 방법을 견지하여 애로를 해결하였고 여러 민족의 공동노력으로 인플레이션을 극복하여 성공적인 경제 연착륙을 실현하였다.”

    하지만 중국경제가 장밋빛 일색이라고만 평가하지는 않는다. 중국경제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문제점이 존재한다는 인식은 점차 팽배해져간다. 앞선 4가지 목표들도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현재 중국 스스로가 파악하고 있는 문제점은 과 같다.



    중국은 이러한 문제를 발전의 과정 에서 해결하기 위해 △지속적인 고도경제성장 △경제구조조정의 지속추진 △서부 대개발 추진 △과학기술의 진보 및 교육에 역점 △전방위적인 대외개방형 경제추구 △국민생활수준의 제고 등6가지의 국민경제 운용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

    지난 10·5조치 기간 중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약 7.0%에 달했다. 2005년의 GDP를 2000년 가격으로 예상하면 약 12.5억 위안, 1인당 GDP는 약 9400 위안에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또한 5년간 도시의 취업 증가 및 농업 노동력 이전은 각각 4000만 명, 도시의 실업률은 약 5% 좌우로 억제할 계획이다. 총 가격수준은 안정기조를 띠고 국제수지 역시 기본적으로 균형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기본 방향하에 후진타오 시대는 그 첫해 경제 운용의 목표를 관례대로 2003년 중국 국민경제 및 사회발전계획 초안의 형태로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2003년 중국경제는 경제성장률 약 7%, 신규로 증가하는 도시 일자리 800만개 이상, 도시등록 실업률 4.5%, 소비자물가 1% 상승, 총 수출입액 7% 증가를 목표로 한다.

    이의 실현을 위해 중국 중앙이 확정한 전반적인 경제업무요구에 근거하여 내수확대방침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이며,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안정적인 화폐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방침이다. 거시정책에 있어 연속성과 안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기본이다.

    장밋빛 계획 일색이지만 계획대로만 된다면 중국은 제4세대 지도자들의 첫 임기 5년 내에 다음과 같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산업구조가 개선됨으로써 편중된 국제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게 된다. 국민경제와 사회 정보화가 제고되며 기초 인프라가 확충될 것이다. 이 결과 지역간의 불균형 발전이 해소되며 도시집중현상을 일정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2005년 GDP 중 제1·2·3산업 증가액의 점유율은 각각 13%, 15%, 36%이며 종업원 수의 1·2·3산업 점유율은 각각 44%, 23%, 33%로 예상된다.

    결국 사회주의의 기본개념인 과학기술과 교육 발전기조를 유지하며 이를 통해 2005년 범사회적으로 연구와 개발비용은 GDP의 1.5% 이상으로 높아질 것이다. 과학기술 개발능력의 강화는 곧 기술개선 가속화로 이어질 것이다. 9년제 의무교육의 보급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며 중학교의 입학률은 90% 이상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의 입학률은 각각 60%, 15%에 달할 전망이다.

    이 모든 것의 성패를 가름할 인구전략은 중국의 지속적인 관심거리이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을 0.9% 이내로 억제하고 2005년 전국 총인구를 13억3000만명 이내로 억제한다는 목표를 어떤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야 한다. 생태계의 악화 추세를 억제하고 삼림 복개율을 18.2%로, 도시 건설지역 녹지조성률을 35% 제고한다. 도시와 농촌 환경의 질적 개선 및 주요 오염물의 배출량을 2000년 대비 10% 정도 감소시키고 자원의 절약과 보호에서 뚜렷한 성과를 이룩한다.

    결국 이런 정책의 목표는 국민 생활수준 향상에 있을 것이다.

    13억 인민 삶의 질 높이는 ‘샤오캉(小康) 사회’ 이룬다

    중국 지도부의 가장 큰 고민은 극심한 지역 간 불균형 발전이다.첨단도시로 도약하는 상하이(위)와 중국 서부 오지 마을

    이상에서 살펴본 후진타오 시대 첫 경제계획은 사실상 과거와의 단절보다는 승계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장기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으며 후진타오의 정책도 그 테두리 안에서 진행될 것이라는 걸 말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야기하면 후진타오 시대의 경제전략 역시 현재 중국 경제학계의 이론을 주도하고 있는 ‘콴쑹학파’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는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하는 제4세대 지도자들이 과거의 성과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진타오 시대에는 경제에 상존하는 문제들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해결 모색과 급격한 개혁정책이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가능성은 그간 후진타오의 발언과 제4세대 지도자들 중 경제를 담당할 인사들의 면면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후진타오는 전인대 개막 첫날 티베트(西藏)자치구 대표단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중국은 발전 전망이 밝다고 자신감을 표시했다. 또한 개막식에서 행해진 주룽지 총리의 정부 업무보고에 대해 후진타오는 훌륭한 내용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모든 업무분야에서 이를 더욱 성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주룽지가 수행했던 제반 경제개혁 작업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함께 이후 지속적인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또한 국무원 부총리로 내정된 원자바오(溫家寶) 역시 비공개로 열린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1차 회의에서 농업과 국유기업, 급증하는 실업률, 동서부 지역 불균형, 국유은행 부실채권문제를 새 정부의 5대 경제문제로 지적하며 한층 강력한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농업담당 부총리답게 농업문제, 특히 농민들의 낮은 소득수준에 우려를 나타내며 중국 경제는 ‘긴다리(산업발전)와 짧은다리(농업발전)로 돌진하고 있는 상태’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러한 후진타오 시대의 강력한 경제개혁 의지는 정부기구 개편과 경제 분야의 신임 장관 임명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정책은 승계, 인물은 교체

    이번 전인대에 제출된 정부조직 개편안에 의하면 현행 29개의 부(部)와 위원회 가운데 국가발전계획위원회와 국가경제무역위원회, 대외무역경제합작부를 통폐합해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상무부로 개편한다. 또한 국가계획생육(生育)위원회를 국가인구·계획생육위원회로 명칭을 바꿔 28개로 만든다. 그리고 국무원 직속기구로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와 은행감독관리위원회 등 대(大)위원회를 신설하고, 국가약품감독관리국을 국가식품약품감독관리국으로 확대 개편한다. 이에 대외경제무역합작부 직속기관이던 국가안전생산감독관리국 이 부처 폐지에 따라 국무원 직속기구로 승격한다고 한다.

    이는 경제분야의 권한을 집중시키고 조직을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하며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이 훨씬 공격적인 경제정책을 펼 것임을 예고한다. 특히 상무부를 비롯한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은행감독관리위원회의 신설은 강한 경제개혁조치를 예고하는 징조라고 본다.

    또한 이번에 임명된 상무부 신식산업부 등 경제부처 인사를 보면 이런 경향은 더욱 확연해진다. 상무부 부장으로 내정된 뤼푸위안은 교육부 부부장 출신이다. 교육부 출신인 뤼푸위안의 발탁은 역시 수출입 권리를 쥐고 있는 국유기업과의 유착단절이 목표이다.

    신식산업부(우리의 정보통신부에 해당) 부장으로 내정된 왕쉬둥은 예전 전자공업부 산하 연구소에서 일한 경력은 있지만 정보통신산업과는 관련없는 인물이다. 이는 결국 업계와의 연결 고리를 끊어 정보통신산업을 개혁하겠다는 의도라는 평이다. 이상에서 보여지듯 후진타오는 과거의 정책을 승계하되 제도적·인적 개혁을 통해 강력한 경제개혁을 추진해나갈 전망이다.

    이와 같이 후진타오 시대는 ‘전면적 샤오캉의 실현’을 목표로 제도개혁을 해나갈 것이다. 사실상 후진타오로서는 개혁을 지속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는 상태이다.

    중국경제가 외형적으로 화려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디플레이션, 실업, 소득격차의 3요소가 당면 경제성장의 제약요소로 작용한다.

    디플레이션 문제의 경우 이를 공식 부인하는 중국정부의 주장과 달리 학자들은 경제가 디플레이션 국면에 처해 있다고 인정한다. 작년도 소비자물가지수는 -0.8%를 기록하였는데, 최근 물가가 조금씩 상승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2003년 전체적으로는 1% 정도를 기록할 전망이다. 만일 이라크전쟁이 발발하여 유가가 1배럴당 30달러를 초과할 경우에는 상승률이 1%를 웃돌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중국 경제학자들의 시각이다. 특히 이 문제는 미국과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중국이 여타 아시아국가들에게 디플레이션을 수출하고 있다”고까지 주장하는 등 국제문제화하고 있어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더구나 올해 중국의 취업 대기자는 약 2500만명인 반면 공급가능한 일자리는 800만∼950만개에 불과한 실정이다. 결국 올해의 실업률은 작년과 비슷하거나 약간 증가한 4.5% 정도로 예상된다. 이는 중국의 통계 관례상 농촌 실업을 제외한 도시 실업률이라는 점에서 중국 경제의 앞날을 더욱 압박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농촌지역 실업은 통계조차 못 내는 형편이다.

    소득격차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는 단순히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격차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격차,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의 격차, 그리고 도시지역 내부의 격차 등 다면적으로 나타난다.

    현재 도시주민 중 빈곤인구는 20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는 당연히 대규모 재정적자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중국은 올해 작년보다 200억 위안이 줄었지만 무려 1300억 위안의 국채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후진타오 시대는 전대로부터 물려받은 화려한 실적과 내부적인 문제를 동시에 안고 출발했다. 개혁과 발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아온 중국경제가 이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이는 중국 스스로의 지적처럼 중국이 가지고 있는 제반 문제들을 능동적으로 극복하고 보다 적극적인 개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한국 편이 아니다

    후진타오 시대는 여기에 정보화와 신형 산업화라는 코드를 더한다. 신형 산업화란 정보화로 공업화를 견인하고, 공업화로 정보화를 촉진하여 높은 과학기술수준과 경제효율을 얻겠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중국은 농촌의 적극적인 도시화, 전통산업과 첨단산업의 결합, 금융시장 활성화를 추구하고 있다.



    중국이 가려 하는 방향은 대단히 명확하다. 지금까지의 낡은 산업형태에서 벗어나 정보산업 등 첨단기술산업과 금융산업에 집중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동북아 물류 중심지를 꿈꾸는 우리의 발전전략과 많은 부분에서 겹칠 수밖에 없다.

    한·중간의 기술격차가 날로 좁혀지는 상황에서 이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은 이미 미래의 비전에 있어 우리보다 강한 상대다. 문제는 시간이 한국의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국을 자세히 살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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