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법과 시대상은 다르건만, 세 사람의 그림은 너무도 닮았다.
- 모노크롬 색조, 서민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각, ‘인간의 진실함을 그리겠다’는 작가정신…. 1950년대 한국의 자화상을 그려낸 박수근의 후손들이 시드니에 둥지를 틀고 가난한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박수근의 그림이 호당 1억원이 넘게 거래되는현실과는 대조적인 풍경이다. 2세이기 때문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 한때 할아버지를 원망했던 장손.
- 고집스런 예술혼을 이어가는 화가 3대 이야기.
박수근 ‘4대’.
아침밥을 지어야 하는데 쌀이 없어서 부엌 한켠에 망연자실 앉아 있는 아내. 등록금을 내지 못해 창피하다며 학교에 안 가겠다고 버둥거리는 아이. 병원비가 없어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예술가. 사정이 이렇게 절박한데도 ‘예술가의 가난은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운이 좋으면 예술작품이 돈이 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1950∼60년대를 살았던 한국의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과연 ‘운수 좋은 날’이 얼마나 됐을까.
이쯤에서 이야기의 실체를 밝히자. 해외의 그림 경매장에서 한국인의 그림으로는 최고가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고 박수근(1914∼65) 화백의 이야기다.
통상 그림엽서 한 장 크기를 1호라고 하는데, 박수근의 그림은 호당 1억5000만∼2억원을 호가한다. 그러니 그의 그림 몇 점만 지니고 있어도 평생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으련만, 그의 아들과 손자의 가난은 2005년 2월에도 ‘현재진행형’이다.
3대에 걸친 가난
아버지의 그림이 그렇게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으나, 박수근 화백의 장남 박성남(58·서양화가)은 호주 시드니에서 18년 동안 청소부로 일하면서 ‘한 목숨 걸어놓고’ 그림을 그린다. 박수근의 큰손자 박진흥(32·서양화가)은 경제적 부담이 적은 인도의 델리미술대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하고 역시 새벽에 청소를 해서 번 돈으로 호주 웨스턴시드니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한 후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3대째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작고하던 해(1965년)의 박수근(左). <br>박수근이 그린 컷들.
필자에겐 박수근과 관련해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한국전쟁 통에 만난 박수근의 이야기를 소재로 ‘나목(裸木)’이라는 데뷔작이자 출세작을 쓴 소설가 박완서에 대한 궁금증이다. “박수근과 박완서는 연인 사이였다” “‘나목’은 소설의 형식만 취했지, 사실은 두 사람의 실화를 쓴 논픽션이다”라는 등의 풍문이 떠돌았기에 이참에 그 궁금증까지 함께 풀어볼 작정이었다.
부끄럽지 않느냐? 바람 사나운밤중엔 춥지 않더냐?벌거벗은 김장철의 나무야
낮엔 햇볕이 따사롭고밤엔 별빛 정겨우니고단했지만 외롭진 않았지요
맨땅에 앉아 있는 노인들과흰옷 입은 아낙들, 아기 업은 소녀담을 게 없어 슬픈 보퉁이를머리에 이고 귀가하는 사람들어디선가 포성이 들려오면하던 말을 멈추었던우리… 벌거벗은 나무들1952년 겨울, 서울의 초상화
뿌리 끝엔 봄에의 향기가애닯도록 절실한 나목*
*박완서 소설 ‘나목’에서 인용- 윤필립 詩 ‘박수근·박완서의 裸木’ 전문
자신의 작품 앞에 선 박성남 화백.
아주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은둔하며 지내는 사람들은 대체로 언론 인터뷰를 극도로 꺼린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는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는 무심한 답변으로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그렇다고 그의 전화응대가 냉랭하거나 무례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음성에서 어떤 상처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쳐버린 삶에서 비롯된 외로움인 것 같았다. 삶의 디테일에서 묻어나는 크고 작은 얼룩들….
그의 말을 한참 듣다 보니, 그의 음성에 높낮이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마치 독백을 하듯 담담하게 지난날을 들려주었다. 문득 모노크롬(단색화)에 가까운 박수근의 그림이 떠올랐다.
한국의 밀레를 꿈꾼 박수근
필자는 박수근을 모른다. 그를 만난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그러나 그를 붕어빵처럼 닮은 장남 박성남을 만나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책 속에 쓰인 박수근의 생애가 다큐멘터리 영상처럼 재생됐다.
두 부자의 사진을 보면 모든 걸 금방 알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억울하다”고 소리치지 않고, 순한 사슴처럼 눈만 끔뻑이는 박수근과 박성남. 이 두 사람을 만나본 소설가 박완서는 박성남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박성남씨를) 처음 만났을 때 아버지를 빼닮은 융숭 깊은 인상 때문에, 그 후에도 종종 떠올릴 때마다 박수근 화백이 남기신 어떤 작품보다도 큰 기쁨과 위안을 느낍니다.
생김새뿐만이 아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지만 살아가는 방식과 예술에 대한 견해가 어쩌면 그렇게까지 일치하는지. 마치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 윌리엄 브레이크가 그의 시 ‘무구의 노래(Songs of Innocence)’에 담아낸 순진무구처럼, 자연 그대로의 순박함을 그리는 것이다. 다음은 박수근의 말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像)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 말이 담고 있는 박수근의 작가정신은 장남 박성남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특히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다’는 부분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는 타계하기 몇 해 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는데, 여기에서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 드러난다.
아버님 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님은 신병으로 돌아가시니, 공부는커녕 어머님을 대신해서 아버님을 돕고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우물에 가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와야 했고 망(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여야 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혼자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드리면서 그림 그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빚으로 한 채 남은 집마저 팔아버리고 온 식구가 뿔뿔이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춘천으로, 평양으로 봉급생활을 하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박성남의 삶도 마찬가지다. 1986년,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혼자 호주로 이주했지만 영주권 문제로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다. 더욱이 장남과 차남이 인도로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가족들은 한국, 호주, 인도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그는 시드니에서 청소원으로 일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혼자 외롭게 살면서 죽기 살기로 그림에만 매달렸다. 26세의 새신랑 박수근도 직장생활 때문에 평양에 혼자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다만 박수근은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나 박성남은 “아버지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버지의 화풍을 닮고 싶다기보다 화가로서의 투철한 작가정신과 성실한 삶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완서 소설 ‘나목’의 소재가 된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여인’.
결국 논픽션을 단념하고 픽션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게 장편소설 ‘나목’이다. 전기를 소설로 바꾸며 상상력에 제한을 받지 않게 되자, 도리어 박수근의 진실에 훨씬 흡사한 인물을 창조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호흡한 시대를 보다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었다.
전기를 소설로 바꾸었으니 논픽션에 응모할 수는 없는 일. ‘신동아’와의 인연은 그걸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다 마침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돼 소설가로 데뷔하는 바람에 ‘신동아’와의 인연도 이어졌다. 박완서는 1974년 8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1977년 2월 ‘흑과부’, 1979년 8월 ‘우리들의 부자’ 등의 소설을 ‘신동아’에 게재했다.
다음은 ‘박완서의 문학앨범’(1992)에 실린 글과 박완서와의 전화통화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렇게 정리하고도 여전히 궁금한 부분들이 많다. ‘나목’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 때문이다.
[여자와 남자가 이루는 풍경, 거기엔 적어도 춥지 않은 무엇이 있었다. 저들도 춥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을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추운 김에 아쉬운 대로 옆에 있는 옥희도(박수근)씨라도 좋아해볼까 보다고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느라 별로 무섭다는 생각도 없이 어두운 길목들을 지났다.
나는 홀연히 옥희도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나목만큼이나 선량한 박수근
-1985년 열화당에서 나온 책을 읽어보니 ‘그와 나의 일년 남짓한 사귐에 조금이라도 불순한 게 섞였다면, 아마 그 정도인가 싶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건 박수근 화백이 돌아가신 후 ‘박수근 유작전’에 가서 그의 부인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감상입니다. 아주 미인이고 기품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난 추녀에다 악처의 모습을 상상했거든요. 화가 남편을 닦달해서 초상화나 그리게 하는…. 내 상상력을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인사도 나누지 않고 왔는데 그때의 심정을 토로한 겁니다.
그 당시 미국 PX는 양색시들이 우글거려서 마음 놓고 차 한 잔 마실 형편이 안 됐어요. 게다가 이상하게 박수근씨랑 한 번도 가족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어요. 그저 서로를 존중해주는 마음은 있었지만 연정을 느낄 처지는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그땐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따로 있었거든요.”
-박성남씨 얘기로는 서울 창신동에 살 때 아버지가 어떤 여자와 동네 입구까지 와서 어머니가 솥단지를 막 두들기신 적이 있답니다. 와이셔츠에 붉은 립스틱 같은 게 묻어서 어머니가 작은집으로 가버린 적도 있고요. 그게 나중에 물감으로 판명됐지만….
“그건 절대로 내가 아닙니다. 우린 거의 매일 같이 퇴근했지만 저녁을 같이 먹거나 박 화백의 집으로 따라간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다방은 ‘727’이라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가 헤어졌어요. 박 화백은 워낙 말수가 적어 주로 내가 얘기를 했어요. 포성이 가까이 들리는 날은 둘 다 말을 끊고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요.”
-소설 ‘나목’은 논픽션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바꾼 것 같은데요.
“아닙니다. 논픽션은 왠지 극적인 맛도 없고 밋밋했어요. 그래서 소설로 바꾼 건데 소설 속의 이야기는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후 ‘박수근 유작전’에 간 것도, 거기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요.”
-박수근의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그분 그림 중엔 유난히 겨울 풍경이 많아요. 우리가 만났던 1년 남짓한 기간에는 분명히 4계절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박수근의 나목을 ‘시대의 초상’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측면도 물론 있겠지만 그분이 워낙 나목을 즐겨 그렸던 것 같아요. 벌거벗은 채 추운 겨울에 떨고 있지만 그 안에서는 봄이 꿈틀거리는 나목 말입니다. 그분은 나목만큼이나 선량한 분이었어요.
25년 전 내가 쓰려고 했던 ‘박수근 전기’를 윤 선생이 3대까지 연장해서 쓰시는군요. 그것도 ‘신동아’ 지면에다 말입니다. 참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써주세요.”
박성남 화백 가족. 왼쪽부터 박성남, 장남 박진흥, 손자 예담, 큰며느리, 작은며느리, 차남 박진영.
[창신동에 살 때 저는 동덕여고 학생이었지요. 박 화백의 큰딸 박인숙(인천여중 교장·서양화가)이 제 후배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박 화백의 부인 김복순씨와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당시는 너나없이 대문을 열어놓고 지내던 시절이라 툭하면 박 화백 댁으로 가서 사모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밥도 함께 먹곤 했습니다.
당시 그 댁의 최고상찬은 콩나물밥이었습니다. 그걸 참 맛있게 먹었는데, 나중에 듣자 하니 그 댁에 쌀이 없어 끼니를 거르는 날도 있었다더군요. 제가 참 눈치 없는 이웃이었지요.
박 화백은 늘 그림만 그리셨어요. 가끔씩 내게 이런저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워낙 과묵한 성품이라 주로 사모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사모님이 집에 없으면 마루 먼발치에서 박 화백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그분은 한 번에 한 작품씩 그리시는 게 아니라 여러 작품을 늘어놓고 돌아가면서 그리셨어요. 거의 매일 그 댁에 갔기 때문에 그분의 그림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구경할 수가 있었죠. 지금도 기억에 선한 것은 수도 없이 덧칠을 하신다는 것이었어요.
하루는 농악대의 그림을 그리셔서 유심히 보았는데, 한참 동안 바라보니 그림 속에서 농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얼마나 신기했는지….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마루에 놓여 있는 많은 인물화들에서도 숨결이 들리고 삶의 고뇌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박 화백은 부인과 자녀들을 무척 애틋하게 사랑했습니다. 특히 부인에겐 끔찍할 정도로 잘해주셨는데, 가끔 사모님이 이웃에 살던 장군 부인과 영화를 보고 오면 밥상을 잘 차려 보자기를 덮어놓으실 정도였어요.
저의 결혼식 전날, 박 화백이 부르더니 그림 한 점을 결혼선물로 주셨어요. 갖고 있던 걸 주신 게 아니라 새로 그려서 주시더군요. ‘저녁에’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는데, 박 화백은 “저녁에 귀가하는 시간을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이라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를 앞세우고 귀가하는 엄마 그림을 주시면서 “편안하게 살라”고 축하해주셨습니다.
우린 그걸 40년 가까이 소중하게 지니고 있다가 소더비 경매장 시드니 지점을 통해 팔았지요. 집에 습기가 많았거든요. 돈보다는 그림이 상할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판 것이죠.]
“벌거벗은 나무에 옷을 입히고 싶다”
박수근 화가 3대는 박수근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선하고 정직한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의 핏속에 흐르는 고집스런 정직함이 시대와의 부조화로 상처를 받기도 했을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세계는 그 자신의 운명을 암시하고 투영하는 거울이다.
작고한 박수근은 그림과 연보 등으로 만났지만, 장남 박성남과 큰손자 박진흥은 취재기간에 수시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박수근이 그렸던 ‘선하고 정직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화제가 그림으로 옮겨가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 가차 없는 비평과 날카로운 분석으로 듣는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작가로서의 강한 자존심을 드러낸다.
가끔은 ‘박수근이 살아 있다면 똑같이 말할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다. 이에 대해 박성남은 “아버지도 똑같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진흥은 한 술 더 뜬다. “그게 없으면 예술가도 아니지요.”
창신동 시절의 이웃 조경자씨에 따르면 박수근의 부인 김복순은 “남편이 한국의 밀레가 됐으면 좋겠다”고 늘 소망했다고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소망은 이루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장남 박성남과 큰손자 박진흥은 어떤 소망을 갖고 있을까.
“아버지의 벌거벗은 나무들에게 옷을 입혀주고 싶다. 오랜 세월을 시드니에 묻혀서 살았지만, 앞으로는 서울과 시드니에서 전시회도 열겠다. 또한 아버지의 작품이 진정한 민족의 유산으로 남도록 애쓰겠다.”(박성남)
“할아버지의 작품들을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에서(골목이나 시장) 그림 속 사람들과 같은 처지의 이들(행상, 노인, 어린이 등)이 마음껏 보게 해주고 싶다. 난 어차피 호주 화단에 선을 보였으니 이곳에서 승부를 걸 생각이다. 천천히…, 그러나 참되게.”(박진흥)
성탄절 예배에 참석한 박성남 가족을 시드니새순교회에서 만났다. 큰아들 박진흥과 큰손자 예담이, 임신 중인 큰며느리, 둘째아들 박진영과 둘째며느리까지 모두 6명의 식구가 모였다. 예배가 끝난 후에 이규현 담임목사를 만났다.
“세상에서 이만한 겸손과 성실을 만나기도 힘들 겁니다. 박성남 집사는 한 마디로 진국입니다.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지요. 10년 넘게 교회에 출석해왔지만 박 집사가 화가라는 것을 목사인 저도 3년 전에야 알았습니다. 대부분의 교인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과시하거나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자세는 깊은 신앙심에서 나오는 듯합니다.”
박수근의 그림 중에는 ‘노상(路上)’이란 제목이 많다. 그런데 박성남이 지금 구상하고 있는 연작 시리즈의 제목도 다름아닌 ‘거리’다.
“쓰레기에서부터 고도의 지성까지 다 수용하는 거리를 그리고 싶다. 거리가 세상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박성남에게 “아버지의 ‘노상’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공통점을 말하면서 작품세계를 빼놓을 수 없다. ‘박수근 작품집’에서 본 아버지의 그림과 아파트 4층에 빼곡히 들어찬 아들의 작품을 비교해보니, 기법상 차이가 있을 뿐 주로 서민들의 삶을 다룬 소재나 모노크롬에 가까운 단조로운 색조가 비전문가인 필자의 눈에도 아주 닮아 보였다.
손자 박진흥의 작품까지 본 필자는 ‘핏줄은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손자의 그림도 모노크롬에 가까운 색조가 주조를 이뤘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박수근의 그림은 백색 위주의 모노크롬이고 아들 박성남의 그림은 녹색계통이다. 손자 박진흥의 그림은 회색계통의 모노크롬이다. 잘 알 수는 없지만, 시대상과 모노크롬의 색조에 무슨 함수관계가 있는 것만 같다. 박성남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손
나의 아버지 박수근의 손은 회초리를 드는 ‘체벌하는 손’이었고, 아들의 얼굴을 그려준 ‘아버지의 손’이었다. 공사장의 인부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을 그리던 ‘노동자의 손’이었고, 힘들고 고독할 때마다 묵상하며 기도를 올린 ‘기도하는 손’이었다.
‘인간의 선함과 정직함’을 우직하게 그렸던 작품에 대해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평가해줬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아버지 박수근은 1914년 2월21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 정림리의 유복한 기독교 집안에서 삼대독자인 아버지 박정지와 어머니 윤복주의 간절한 기도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 글방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양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일찍이 그림에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의 공식적인 학업은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 졸업으로 끝났다. 할아버지가 광산업에 손을 댔다가 크게 실패하고, 큰 홍수로 논밭이 다 떠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때 아버지는 열두 살이었다. 그 즈음에 난생 처음 프랑스 화가 밀레의 작품 ‘만종(晩鐘)’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열두 살에 아버지 그림의 평생 주제인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기도의 응답으로 얻었고, 그 주제에 합당한 오브제를 선택하여 그리고 또 그렸다.
‘가난하고 못났지만 생긴 그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선하고 진실한 사람들’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만 그렸다. 하다못해 의자나 방석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나 멋스럽게 파이프를 문 사람도 그리지 않았다. 맨땅에 앉아 있는 노인과 아낙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그렸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는 작업은 열두 살 소년에게 내린 하나님의 계시였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어 아버지가 된 박수근은 신의 계시에 따라 ‘손의 노동’을 바쳤을 뿐이다. 마치 바흐가 ‘손의 노동’을 바쳐 신의 음성을 악보에 담아냈듯이.
1932년, 18세 시골청년이던 아버지는 ‘봄이 오다’라는 수채화를 제11회 조선미술전(선전)에 출품, 최초로 입선하는 감격을 누렸다. 아버지는 그 후 1936년부터 43년까지 8년 동안 선전에 출품해 계속 입선했다.
26세 되던 해인 1940년, 춘천의 부유한 집 규수였던 나의 어머니 김복순과 결혼했다. 1942년 첫아들 성소를 낳고, 1944년에 첫딸 인숙을 낳았다. 나는 1947년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나 형 성소의 죽음으로 태어날 때부터 장남이었다.
1950년 전쟁 통에 셋째아들 성인을 잃고 그 후 넷째아들 성민과 둘째딸 인애를 얻었으나 지금은 둘 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인애는 열한 살에 세상을 떴고 아우 성민은 4년 전 53세의 나이로 저 세상으로 갔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4년 후인 1979년에 작고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미군 PX에서 미군과 그들의 애인 초상을 그리고, 집에 와서는 ‘시대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모든 것이 풍족한 미군들의 초상화와, 가진 것이라곤 포탄에 이지러진 폐허뿐인 ‘서울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첫 기억은 전쟁이 끝날 무렵이던 1953년, 몹시도 고단해하던 모습이다. 아버지의 연보를 보니 그때 아버지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계셨다.
그러나 1970년에 나온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을 읽을 때까지, 나는 아버지가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 기억엔 아버지가 하루 종일 말없이 그림만 그리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박수근이 그린 장남 박성남.
[아버지,
아버지 계신 곳의 나무들은 아름답고 따뜻한 옷을 입고 있는지요? 제가 남아 있는 지상은 아버지의 그림처럼 아직도 벌거벗은 나무들이 떨고 있습니다. 제 마음 또한 겨울을 견뎌내는 나무들처럼 웅크린 채, 겨울이 잉태하고 있을 봄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개인전 한 번 못 열고, 그 지긋지긋한 가난도 벗지 못한 채 건강마저 잃어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그때 저는 고등학교 3학년, 열여덟 살 소년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선전에 처음 입선하셨을 때와 똑같은 나이지요. 저 또한 아버지의 마지막 국전 출품작인 ‘할아버지와 손자’와 아주 흡사한 작품을 그려 제20회 국전에서 입선했습니다. 적어도 데뷔한 나이에서만은 아버지께 지지 않았지요.
그것뿐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6개월 동안 저는 밤낮없이 아버지의 그림을 연구해서 모든 걸 알아냈습니다. 아버지의 그림을 옆에다 놓고 수없이 베꼈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어머니께 여쭤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림을 그리실 때는 조심스레 까치발로 걸어다녀야 했지만, 저는 아버지의 작업과정을 유심히 지켜보곤 했습니다. 캔버스나 하드보드에 청자색과 암갈색 계통의 바탕색을 기름에 버무려서 칠해놓은 후, 그리려는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담아내는지 눈여겨보았습니다.
아버지 특유의 마티에르(질감)를 얻기 위해서 몇 번 정도 덧칠하셨는지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비밀기법인 열십자 터치도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캔버스나 하드보드의 요철을 이용하고 화폭을 가로 세로로 돌려가면서 서너 번의 덧칠을 하신 것까지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의 가짜 그림들이 나돌 때, 단박에 그게 가짜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다만 미술감정협회 등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굳게 입을 다물었을 뿐입니다. 제가 위작(僞作)들을 어떻게 식별했는지 말씀드릴게요.
우선 선입견을 버립니다. 의심하는 그 마음까지 의심하면서 텅 빈 캔버스가 되는 것이지요. 사용한 재료를 통해서 언제 그린 그림인지 확인한 후에, 제가 봤던 그림인지 아닌지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그런 다음에 데생과 마티에르의 구조를 살펴보면 감정은 거의 끝납니다.
거기에다 그 그림이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보고 그린 것인지를 확인하지요. 그림 사진을 놓고 베낀 그림은 마티에르에 고심한 흔적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마티에르 하나하나에 얼마나 고심하셨는지 제 눈으로 똑똑히 봤거든요.
그림의 완성단계에서 열십자 터치로 ‘때묻힘’을 하여, 적당히 때묻은 모시옷이나 고가구의 정감을 표현하신 아버지의 기법. 거기에다 나중에 칠한 색조가 떠 보이는 것을 가라앉혀서, 똑같은 흰색을 사용해도 작품 속의 여인이나 노인들을 다감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기법은 저만 간직한 비밀이었습니다.
2003년, 서울의 가람화랑에서 3시간 동안 아버지의 기법을 공개하는 강의를 하면서 캔버스에 직접 그림까지 그렸습니다. 조금 지나치다 싶어서 90% 정도만 덧칠을 층층이 올린 다음에 강의를 마쳤지요.
그건 아버지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사실 저는 청년시절부터, 아버지 이상으로 아버지 풍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몇 배 더 잘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건 제가 아버지보다 유능해서가 아니라 치열하게 아버지의 작품을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럴 기회가 많이 있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연세인 51세가 되어야 아버지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해 제 나이 쉰여덟이 됐습니다, 아버지.]
층과 선 긋기
시드니 서부지역에 위치한 리버풀의 작은 아파트 4층이 박성남의 살림집이자 작업실이다. 두 아들이 인도로 유학을 떠나고 부인도 인도에서 직물 비즈니스를 시작해 혼자 살고 있다. 식구가 없으니 세간은 거의 없고 다만 빼곡한 그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며칠째 그를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듣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미대 출신의 아내와 20년 가까이 살아온 것말고는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필자의 처지에선, 그의 설명이 어렵다고 투덜거릴 일도 아니다. 겸손한 자세로, 그림 하나라도 더 보고 설명 하나라도 더 챙겨듣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크리스천도 아닌 필자는 그가 나가는 시드니새순교회까지 쫓아가 함께 예배를 드렸고, 그의 작품을 구입해 걸어놓은 한인동포의 집을 방문했고, 마침내 그의 집으로까지 쳐들어갔다.
박성남은 본인의 작품세계에 대해 짧은 글을 써놓은 새순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책자를 보여줬다. 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다. 그중 일부를 문장을 약간 다듬어 옮긴다.
[나는 공간을 창조해주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내 그림의 제목은 ‘층(層)’입니다. ‘층’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표정을 담아내는 대변자이며, 중재자입니다.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총체입니다.
나는 다이아몬드보다 쇠가 좋고, 쇠보다는 가죽이 좋습니다. 가죽보다는 종이가 좋고, 종이보다는 풀잎, 물, 공기, 빛이 좋습니다. 종이는 마음대로 구길 수가 있어 나에게 승리자의 기쁨을 주고,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나를 늘 패배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물은 단단할수록 공간(층)이 없어 빛도, 소리도, 공기도 통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그곳엔 생명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층이 없으면 살아 있는 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건 공간적 층만이 아닙니다. 시간의 층 또한 생명의 한 모습입니다.
예를 들자면, 흙을 삽으로 파냈을 때 생기는 쓸림(파임)과 쌓임의 미학, 풀잎이 눕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면서 창조하는 층이 바로 생명의 모습입니다. 아버지 박수근의 시대와 나 박성남의 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층 또한 생명이지요.
거기에다 정신적인 층은 또 어떤가요. 예를 들자면 고부간의 갈등도 층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만들어지는 층이지요. 공간과 시간 속의 층, 물질과 정신이 빚어내는 층. 그 모든 층이 나의 그림입니다.]
이렇게 친절한 글을 읽고도 이해가 잘 안 되는 건 마찬가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렸더니 그는 대표작 중의 하나인 ‘층’(54쪽 화보 참조)을 보여주면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얘기를 들려줬다. 역시 알아듣기 힘든 내용이었지만….
[바람이 불어 옆으로 누운 풀잎 하나를 ‘선 긋기’ 방식으로 그렸다. 거기엔 물성(物性)과 함께 정신이 깃들여 있다. 지금은 누워 있지만 잠시 후 바람이 멎으면 풀잎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에 의지한 추상(抽象)의 세계다.
즉 누워 있는 사물인 풀잎만 그린 게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하는 층의 속성까지 그린 것이다. 내 그림은 구상이면서 추상이고, 사물이면서 정신이다.
이렇게 층을 추적하는 작업을 통해서 얻은 게 ‘쓸림과 쌓임의 미학’이다. 그런데 구상과 비구상의 층, 동양과 서양의 층, 시대가 빚어내는 층 등이 차츰 이즘화(化)하고 말았다. 그러나 미술은 이즘이 아닌, 그냥 미술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기 엉켜 있는 선과 선 사이의 ‘층’을 보라. 바로 그 공간이 끌어들이는 빛과 시간을 음미해보라. 공간 안에 공존하고 있는 빛과 시간의 하모니, 그 생생한 증거를 보라.]
박성남이 층에 천착하면서 끊임없이 선 긋기를 해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77년 서울화랑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작업(Work)’에 이미 선 긋기가 나타났으니, 무려 28년 동안이나 이어진 작업이다.
사실 선 긋기는 박성남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얻은 영감이기에 40년이나 계속된 그의 평생작업이다. 이제 박성남은 자신의 작품을 아버지의 그것과 겨뤄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아버지의 작품과 명성에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다.
여기에서, 1977년에 발행된 미술전문지 ‘미술과 생활’에 실린 미술평론가 김복영의 박성남 개인전 비평 일부를 인용한다.
[박성남이 ‘선 긋기’를 통해서 그려낸 선들의 굴곡은 ‘대지의 상상력’으로 넘쳐난다. ‘작품(Work)’이라고 붙인 표제들이 말해주듯이 그의 그림은 대지에 그어야 할 선들을 평면에 재현시켜놓았다.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하루 세 끼 먹고 싶으나 먹고 싶지 않으나 먹어야 하는 배고픔이 있다면, 또한 하고 싶으나 하고 싶지 않으나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이러한 선(배고픔)을 긋고 싶습니다.
이러한 때에 나는 농부의 행위를 빌려왔습니다. 농부는 땅이라는 자연 위에 하나의 ‘선 긋기’를 시작하여 하루 종일 반복합니다. 그렇게 선을 그어가다 보면 농부의 하루는 끝나게 되지요.
아직은 모내기를 하기 전, 다시 말해서 쌀이 생산되기 이전의 선을 농부가 그어가듯이 나 또한 선을 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땅은 놀라서 일어나고, 캔버스에도 놀람의 흔적이 남게 됩니다.”]
서울 창신동 시절의 박수근 부부. 가운데 어린이는 차녀 인애씨.
덧칠과 덜어냄의 미학
-과묵한 성품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오랫동안 얘기한 적이 있는가.
“처음이다. 나는 혼자 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날도 많다. 물론 작업을 하면서 작품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하지만….”
-박수근과 박성남의 기법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버지의 그림은 수없는 덧칠을 통해서 독특한 마티에르를 창출했기 때문에 손으로 요철을 감지할 수 있을 만큼 아주 촉각적이다. 아버지의 시대가 ‘빈 그릇의 시대’라서 무언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넘치는 시대다. 덜어내야 한다.
아버지가 덧칠을 통해서 촉각적인 효과를 얻었다면 나는 덜어냄을 통해서 시각적인 효과를 얻었다. 그게 시대의 차이에서 오는 층이다. 아버지 그림과 내 그림 사이의 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식하게 묻겠다. 박수근의 그림과 박성남의 그림 사이에 놓인 가장 현격한 층은 그림값이다. 비록 한인동포 사회에 한정하고 있지만 박성남 그림의 판매가격은 얼마인가.
“밝히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절대 싼 가격으로 팔지 않는다. 사실상 판매된 그림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 그림 가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동포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아버지의 그림 가격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됐는데….
“솔직히 그 대목은 무척 혼란스럽다. 그러나 후손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아버지 그림 가격의 거품이 빠졌으면 한다는 것이다. 전쟁의 혼란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선함과 정직함’을 그렸던 아버지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아버지의 그림은 한국의 가장 아픈 시절을 담은 ‘시대의 초상화’다. 있는 것을 있게끔 하는 ‘손의 노동’이자 ‘정신의 노동’이었다. 권세도 명예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는 일제 강점기대로, 6·25는 또 6·25대로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았다.
그런 아버지의 그림을 투기대상으로 삼고, 일확천금 했다고 좋아하면서 은행금고에 처박아놓는 것은 예술가에 대한 모독이고 배반이다. 철제금고 속에서 그 나무들이 숨이나 제대로 쉬겠는가.”
-그러나 그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여건에서 아버지의 작품이 어떻게 보관되기를 바라는가.
“박수근의 작품은 이미 국가적인 유산이다. 개인 소장을 인정한다고 해도 보관은 그림상태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미술관에 맡겨야 한다. 개인이 소장하다가 화재라도 나면 개인의 재산을 잃는 것일 뿐 아니라 소중한 문화유산을 잃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양도소득세 등의 감면혜택을 줘서 공공기관에 위탁하거나 기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으리으리한 실내를 그린 게 아니라, 서민들이 사는 거리풍경을 그린 아버지의 뜻을 헤아린다면, 그 그림들이 제자리(거리)로 돌아가게 해주어야 한다. 엄청난 가격표가 붙은 자신의 그림을 보고 슬픈 표정을 짓지 않으시도록….”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아버지의 작품은 없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던 가족들이 몇 차례 ‘박수근 유작전’을 열어 모두 팔았다. 당시엔 호당 5000원이었다. 그 돈으로 쌀을 샀고, 학비를 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도 그랬다.
아무런 생활대책이 없었던 어머니는 우리 형제의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길이 없어서 아버님의 작품관리에 매달릴 수 없었다. 자녀들이 그림에 재능을 보여도 말려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아버지의 작품 몇 점만 갖고 있었어도 20년 가까이 외국에서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청소 일이 뭐가 어떤가. 엄연한 직업이고 정직한 노동이 아닌가. 내가 호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언어문제도 있고 해서 청소 일을 시작하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 중엔 한국 최고 명문대 출신도 있었다.
아버지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은 건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다. 그렇게 큰 재산이 있었다면 형제간의 우애도 지금처럼 원만치 않았을 것이고, 무척 게으르게 살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가는 적당히 가난해야 한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난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2세는 죽어야 한다’
-부친은 타계한 후 큰 명성을 얻었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선 후손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 셈이다. 아버지의 후광(後光)에 의지해 유명화가의 길을 걸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질문에 모욕감을 느낀다. 나는 아버지보다 더 잘 그리는 화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만한 자긍심도 없다면 붓을 꺾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아버지의 작품이 대단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명성과 그림 가격의 폭등, 거기에다 가짜 그림이 난무하는 것을 보고 무척 혼란스러웠다. 사실 그런저런 이유로 한국을 떠난 것이다. 아버지의 후광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거목(巨木)이다. 그런데 거목은 주변의 자양분을 다 흡수해버린다. 그래서 주변엔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기 어렵다. 거기에다 누군가가 희생적으로 치다꺼리를 해줘야 한다. 솔직히 지금도 아버지라는 거목 때문에 치다꺼리하는 것 아닌가.
그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랑스럽고 기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그것이 내가 한 사람의 독립된 예술가로 서는 데 방해가 됐다. 국전 7회 입선, ‘구조그룹전’ 11회 출품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늘 한계에 부닥쳤다. 아버지의 후광이 역으로 작용하여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국전 입선작을 포함해서 상당수의 작품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 후에 내린 결론이 ‘2세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속된 말로, 나까지 날뛰다가는 아버지의 명성에 누가 되고 나는 나대로 매장될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자꾸 마약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이해될 정도다. 내가 죽어지내기로 결심하고, 내 이름 가운데 자인 ‘성(成)’을 ‘성(城)’으로 바꾸었다. 흙토변을 추가한 것인데, 흙의 이미지를 빌려온 것이다. ‘흙처럼 썩어지자’는 의미였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살아왔다.
이젠 그런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닌 선배 화가로서 당신과 당당히 겨뤄보겠다고. 이젠 내가 51세에 작고하신 아버지보다 7살이나 더 많으니 그럴 때도 됐다고 본다. 아버지도 기뻐하실 것이다. 그뿐 아니다. 큰손자 박진흥의 도전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성실성과 진실성에서 할아버지를 꼭 빼닮은 손자가 할아버지 그림 속의 소처럼 서두르지 않고 묵묵하게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언젠가 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셨던 ‘무딘 칼로 새긴 것이 예리한 칼로 새긴 것보다 더 오래 간다’는 말씀을 아들 진흥에게 해주고 싶다. 그건 사후에나 인정받을 수 있었던 아버지의 운명을 예견한 말씀이고, 지금까지 날 견디게 해준 버팀목이다.”
바야흐로 박수근, 박성남, 박진흥 화가 3대(代)의 경쟁이 시작된 느낌이다. 필자는 지난날을 회상하며 가슴아파하는 박성남을 남겨두고, 그 다음날 박수근의 장손 박진흥을 찾아갔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화가이면서 장남이라는 것이다. 장남 3대가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데, 박성남과 박진흥의 가장 큰 공통점은 요즘 세상에서 만나보기 힘든 ‘무구(無垢)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구한 사람들’의 원조는 박수근이다. 박수근의 장손 박진흥에게 물었다. 화가 박수근은 누구인가?
닮지 않으려 애써도 닮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에 초등학교 때만 해도 할아버지를 전혀 몰랐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넌 유명한 할아버지를 두어서 좋겠다”고 해서 나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사람들이 어떻게 아는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그때서야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의 생애에 대해 들려주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내 ‘어, 이건 아버지 스토리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은 닮았다.
그 후 미술을 전공하면서 할아버지의 예술세계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들이 자꾸만 할아버지를 ‘당대 최고의 화가’라든가 ‘그림가격이 얼마다’라는 얘기를 할 때는 무척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어떤 형태로든 표현하고 싶어한다. 할아버지는 마치 그림일기를 그리는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게 당신의 삶을 그렸고, 그림 속의 사람들처럼 사신 분이다.
가난한 삶이었지만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후대의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고 좋아하는 것 같다. 불행했던 시대의 불행했던 삶까지 사랑하셨던 할아버지. 거기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박진흥 화백.
또한 내가 좋아하는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처럼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나 전쟁고아들의 모습도 할아버지 특유의 우울한 톤으로 그리셨다면 걸작이 됐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할아버지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냄새가 나고, 맛까지 느낄 정도의 환상에 빠진다. 그만큼 오감(五感)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려내셨다. 남들이 선호하는 화려함보다는 ‘오래된 토기’ 같은 둔탁함을 담아낸 할아버지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의문을 갖곤 한다.
하나는 ‘물감을 살 돈이 없으셨을지도 모른다’는 궁금증이고, 또 하나는 ‘그림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경지에 이르셨을까’ 하는 경이로움이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림공부를 하지 않으신 것은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할아버지의 성장과정에 잘못된 미술교육이 개입했더라면, 십중팔구 개성 없이 획일적인 그림만 그렸을 것이다.
계원예고 1학년 때였는데, 학교에서 크로키 100점을 그려오라는 방학숙제를 냈다. 그런데 나는 게으름을 피우다가 15점만 제출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100점에서 부족한 숫자만큼 종아리를 때렸다. 나는 85대를 맞았다.
50명 정도의 학생 대부분이 매를 맞았는데, 다른 아이들은 대충대충 때리던 선생님이 나를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이 자식, 네가 죽어서 네 할아버지를 어떻게 뵈려고…” 하시면서 다른 애들보다 다섯 배는 더 세게 때렸다. 어린 마음에 너무 억울했다. 당장 할아버지가 싫어졌다.
훗날 그때를 회상하니 내가 이럴진대, 아들인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는 할아버지와 얼마나 많은 비교를 당하셨을 것이며, 억울한 일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런 연유였을까.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화풍을 닮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셨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세 사람의 작품을 비교해보면 비슷한 부분이 여전히 많다. 특히 모노크롬의 색조가 그렇다.
대를 이어 장사하는 우동집 맛은 변하지 말아야 한다. 아니, 변해선 안 된다. 그러나 대를 이어가는 예술가들의 경우는 다르다. 선대의 작가정신은 따라야겠지만, 다른 것은 모두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애를 써도 닮는 부분이 나타난다. 그게 바로 핏줄의 운명이다.]
블랙타운 미술전 대상 수상
박수근의 큰손자 박진흥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 때 인도로 유학을 떠나 델리미술대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했고 호주의 웨스턴시드니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경쟁률이 높은 델리미술대를 수석으로 입학했고, 졸업할 때는 인도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
졸업한 다음해인 2001년 블랙타운 미술대전에서 9·11 테러를 소재로 그린 ‘회색도시 뉴욕(Grey City N.Y.)’(55쪽 화보 참조)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차지했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구축한 자신의 작품세계를 심화시켜 생업으로 삼고 ‘피카소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100여명의 어린이들과 5명의 성인에게 그림을 가르친다.
박진흥은 계원예고 3학년 때인 1989년 인도로 갔다. 고등학교 2학년 과정부터 다시 공부하기 시작해 6년 반 동안(고등학교 2년, 대학 4년) 그곳에서 공부했다. 인도 생활은 불만스럽게 시작됐으나 떠나올 때는 정이 많이 들었다. 히말라야 산 속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말로만 듣던 소달구지를 보았고 느리게 사는 법을 배웠다. 느긋함과 게으름이 섞인 그곳의 풍습을 받아들이면서 나 혼자만 빠르게 사는 게 부질없다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아시아 속의 서양’인 호주는 달랐다. 모든 게 첨단이고 자본주의 시스템이 엄정하게 작동하는 나라다. 호주에서의 1년은 결혼과 대학원 입학 등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막상 결혼한 처지에서 공부를 계속하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새벽 5시부터 8시까지는 청소를 하고, 낮엔 미술과외를 하면서 대학원을 다녔다. 대학원 논문을 쓸 때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서 한 번 도서관에 가면 책을 30권씩 빌려왔다.
가끔씩 화가가 된 것을 후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밀레 화보집을 발견하고 ‘만종’을 보게 됐다. 그림 속에는 작은 수확에도 감사하는 사람들이 기도 드리는 모습이 들어 있었다. 문득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인생을 바꾼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밀레의 ‘만종’은 심하게 흔들리던 시기에 스스로를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화가가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다음날 박진흥이 운영하는 미술학원을 다시 찾아 문답을 이어갔다.
-‘피카소 미술학원’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피카소를 좋아한다. 그의 작가정신과 프로페셔널한 자기관리를 특별히 좋아한다. 또 건강하게 오래 산 것과 5만 점이 넘는 작품을 제작한 것도 본받고 싶다. 피카소는 박수근 3대가 지니지 못한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고 있다. 그것조차도 배우고 싶다.”
-델리미술대에서 함께 공부한 화가 고영일에게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그렇다. 그분은 한국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델리로 유학 왔다. 고영일씨가 하루는 ‘내가 너희 집안의 약점을 잘 안다’면서 ‘화가도 비즈니스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
박수근 1점, 박성남 99점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본인의 작품을 비교한다면?
“할아버지의 작품은 잘 알려졌으니까 특별히 언급할 게 없다. 아버지의 작품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를 갖고 있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작품활동을 해오신 아버지를 혈육으로서뿐 아니라 선배 화가로서도 존경한다. 아버지는 그림 이외의 일에는 너그러우신 편인데, 그림에 대해서만큼은 고집과 집착이 강하다. 깊은 철학과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작품엔 시간성과 공간성이 공존한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현재를 그리지만 아버지는 현재까지 진전해온 과정도 함께 표현하신다. ‘통사적(通史的)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너무 오랫동안 세상으로부터 도망쳤다고 생각하는데….
“동감이다. 한때는 아버지께서 그토록 좋은 작품들을 왜 세상에 내놓지 않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걸 이해하게 됐다. 높은 명성을 얻으신 할아버지의 아들로서 은둔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가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좋은 기회를 흘려보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아버지 나름대로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에 그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간직한 시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잘 모르기 때문에 무식하게 묻겠다. 혈육을 떠나서 화가 박수근과 화가 박성남의 작품을 평가해달라.
“엄청난 질문이다. 그러나 무식하게 답변하겠다. 박수근의 그림에 1점을 준다면 박성남의 그림에 99점을 주겠다. 이건 손자나 아들로서의 평가가 아니라 한 사람의 화가로서 냉정하고 공정하게 평가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무식해지자. 더 무식해지면 집안이 파탄 난다.”
-아버지로부터 그림을 배운 적이 있나.
“아버지는 그림을 직설적으로 가르쳐주시지 않는다. 내가 예고에 입학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때부터 화가로 대접하면서 당신의 실제적인 삶을 통해 화가의 길을 보여주셨다.
가끔은 너무 무심하신 것 같아 섭섭했지만, 내가 부모가 되고 보니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아버지들은 강요하지만 아버지는 묵묵히 지켜보신다.”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裸木)’은 화가 박수근과 그의 그림을 소재로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 당선작으로 박완서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이다. 박수근의 그림은 그림만 갖고도 높은 평가를 받지만, 박완서의 소설을 통해서 다시 한번 ‘문자의 생명’을 얻는 영광을 얻었다.
박수근과 박완서
어떤 이는 “박수근의 그림은 박완서의 소설 덕분에 더 유명해졌다”고 말한다. 심지어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박성남 화백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박완서 선생님의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두 분에 관한 내용을 전혀 몰랐다. 소문을 듣고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한참을 읽다 보니, 내가 소설을 읽는 게 아니라 소설에 담긴 내용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꼬투리 잡을 일은 없는지, 아버지의 명예가 손상되는 부분은 없는지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여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벌어진 사랑싸움에 소설의 여주인공이 빌미를 제공한 일은 없는지를 ‘수사’하느라,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 시간을 몇 배나 더 소비했다.”
그는 이런 말도 들려줬다.
“누가 뭐래도 박완서 선생님과 아버지는 우리 예술계의 쌍두마차다. 1950년 초의 막막한 서울을, 한 분은 문학으로 또 한 분은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나목의 이미지말고 다른 무엇으로 그 아픈 시대를 그려낼 수 있었겠는가. 그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박완서 선생님은 시대의 어머니이고 나의 어머니이며, 수많은 독자들의 어머니다. 두 분의 소설과 그림으로 그 시대의 아픔이 많이 치유되어 전처럼 앙상하지만은 않게 됐다. 두 분이 계시다는 것은 축복이다.”
필자는 서울에서 몇 차례 뵌 적이 있는 박완서 선생께 이메일을 보내고 국제전화를 걸어서 궁금한 것들을 여쭈었다. 뜻밖에도 박완서 선생은 53년 전의 일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 내용을 소설로 썼을 뿐만 아니라 몇 차례 산문으로도 썼기 때문에, 잘 정리된 파일을 쓱 꺼내서 한번 읽어보라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최근에 발표한 ‘그 남자네 집’까지 언급하면서.
내 나름대로 상상한 때문일까. 박완서 선생의 음성에서, 오래된 앨범을 들춰보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는 큰누나의 조금은 달뜬 목소리 같은 게 느껴졌다. “얘야, 나한테도 이럴 시절이 있었어….”
이쯤에서 박수근을 사이에 두고 박완서와 ‘신동아’ 사이에 있었던 묘한 인연을 살펴보자.
소설 ‘나목’은 1년 남짓 사귄 가난한 예술가에 대한 추억과 연민을 담아낸 장편소설이다. 이는 필자가 박완서 선생과 긴 대화를 나눈 후에 내린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자세한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 박완서 선생의 진술을 들어보자.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 써놓은 진술서, 혹은 소설이라는 허구의 옷을 입고 있는 실화를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당시 박완서는 양가집 규수 출신으로 서울대 국문과에 합격했으나 전쟁 통에 공부도 제대로 못해보고 어찌어찌 미군 PX에 취직해서 초상화부의 경리 비슷한 일을 하고 있던 ‘도도하고 막돼먹은’(본인의 표현) 처녀였다. 소설엔 박수근의 실명이 그대로 나온다.
‘우울한 정열’ 대신 ‘단순노동의 평화’
어느 날 박씨라는 체격이 듬직한 화가가 화집을 하나 끼고 나왔다. 나는 한번도 화가들 개개인에 대해 개별적인 호기심이나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간판장이들로 족했다. 이름도 알고 있는 이가 없었다. 다행히 다섯 명의 화가들은 성이 다 달랐다. 박씨, 황씨, 장씨, 노씨, 마씨였다. 성씨만으로 구별해 부를 수 있으니 그만이었다. 박씨도 다섯 명의 간판장이 중의 하나일 뿐 그만의 특색이나 사건으로 인상에 남을 만한 건수는 없었다. 나는 박씨가 두툼한 화집을 끼고 나오는 걸 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꼴값하고 있네. 화집만 끼고 다니면 간판장이가 화가 되나. (중략)
그 밑에 들어 있는 작가 이름을 보고 처음으로 나는 그가 박수근이라는 걸 알았다. 박씨라는 성 외에 이름을 더 알았다뿐, 그 전부터 박수근이라는 화가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진짜 화가가 우리 초상화부에 있었다는 것은 나에게는 사건이요 충격이었다. (중략)
그 후에도 박수근이가 다른 화가하고 다른 점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그의 눈은 황소처럼 순했고 그림 그리는 태도는 진지하다기보다는 덤덤했다. 아무리 봐도 특출한 점은 나타나지 않았다. 특출이란 여러 평범 중에서 돌출되는 점이어야 하는데, 그는 어디서도 존재가 드러나기에는 불리한 조건만 갖추고 있었다. 평균치의 한국인 얼굴에다 목소리는 낮았고, 남을 웃기는 재담도 할 줄 몰랐고, 신랄한 독설가는 더군다나 아니었다. 사교술도 없었지만 남을 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중략)
그가 간판장이들과 달라야 한다는 건 나의 희망사항일 뿐 그는 간판장이들보다 더 간판장이다웠다. 그게 남다른 점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갈구하는 남다름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서 얼핏이라도 좋으니 예술적 고뇌, 억압된 우울한 정열 같은 걸 훔쳐보고 싶었다. 도대체 그에게 그런 게 있기나 한 걸까.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봐주려도 그에게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예술적 고뇌 대신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부양한다는 노동의 충족감이었고, 우울한 정열 대신 단순 노동의 평화였다. (중략)
그에게는 남다른 의젓함이 있었다. 다들 늘 돈, 돈, 돈 했고 한 푼에 치를 떨었고, 자기 그림이 빠꾸당하면 불같이 화를 내느라 딴 그림까지 망쳐놓기 일쑤였다. 박수근의 가난엔 그런 조바심이 없었다. 그의 그림이 빠꾸당하지 않게 하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떨고 있는 내 등뒤로 와서 슬그머니 그림을 빼앗으면서, 또 그려 주면 될 걸 뭘 그렇게 애를 쓰느냐고 위로한 것도 그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몽상한 천재적인 예술가는 아니었다. 그가 만약 천재였다면 사는 일을 위해 예술을 희생하려 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술보다는 사는 일을 우선했다.
논픽션에서 픽션으로
박완서는 바로 그 사람이 훗날 그렇게 유명한 화가가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박수근은 살아 생전 단돈 몇 달러로 연명한 가난한 화가였는데, 사후에야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고 그림값까지 덩달아 천정부지로 올랐다. 제기랄!
그러나 박완서의 복잡스런 감정은 ‘제기랄!’만으로는 풀리지 않았다. 박수근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증언하고 싶었다. 그에 대한 평가에 보탬이 되고, 아울러 그의 그림을 거래해서 수지를 맞추기에 급급한 화상(畵商)들의 장삿속엔 충격이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