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가톨릭 주춧돌 위에 펼쳐진 이슬람 문명의 기적

  •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5-01-26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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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양, 푸른 바다, 투우, 카르멘, 기타 선율, 플라멩코, 大항해가 콜럼버스와 마젤란,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 이슬람과 가톨릭 문화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 안달루시아. 아랍과 유대인의 지식을 받아들여 아메리카 대륙까지 점령한 그들의 저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로마 다리 너머에서 바라본 코르도바 메스키타. 다리 아래로 과달키비르강이 흐른다.

    스페인수도 마드리드를 출발,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무대가 된 라만차 지방을 지나다 보면 메마른 평원에 올리브 농장이 끝없이 펼쳐진다. 땅속 깊이 뿌리내리는 올리브는 사막에서도 잘 자라 물이 귀한 그곳 사람들에게 ‘신이 인간에게 준 마지막 선물’로 대접받는 식물이다. 운전기사 겸 가이드 노릇을 기꺼이 맡아준 마드리드여행사 손용진 사장은 “스페인이 올리브 최대 생산국이라는 것은 알고 계시죠?”라며 입을 떼고는 올리브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얼른 생각하기에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면 좋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땅이 건조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예로부터 올리브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면 땅은 물기를 머금게 되고 그게 또 비를 내리게 하는 원인이 된답니다. 올리브 나무를 심는 것은 사막화를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인 거죠. 아랍인들은 1000년 전부터 이 땅에 올리브 나무를 심기 시작했는데,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열매를 따는 광경도 재미있어요. 바닥에 그물을 펼쳐놓고 막대기로 툴툴 터는 식이니까요. 그때쯤이면 아프리카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이 몰려와 그 일을 돕곤 하죠.”

    라만차의 평균고도는 해발 400~600m. 하지만 높은 산이 없어 고지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신 하늘이 그만큼 넓어 보였다. 파란 캔버스 위로 하얀 구름이 여유로이 흘러가는 모습, 마음까지 여유롭고 넓어지는 듯하다.

    필자의 목적지는 ‘코르도바’다. 스페인 최남단 지역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둘러보려면 이곳 코르도바에서 출발하는 게 정석. 안달루시아는 동서로 넓게 퍼져 있는데 면적과 지형이 우리나라의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합쳐놓은 것과 흡사하다. 8개 주를 아우르는 광활한 안달루시아는 오래 전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혀왔다.

    “기후는 시리아처럼 온화하고 땅은 예멘처럼 비옥하고 꽃과 향료는 인도처럼 풍부하고 귀금속은 중국처럼 흘러넘치며, 해안은 아덴(예멘의 항구도시)처럼 배가 정박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평가를 받는 곳이 바로 안달루시아다.



    하지만 여행자인 필자에겐 정열과 자유분방이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플라멩코와 투우, 카르멘, 기타의 낭만적 선율, 대항해가, 눈부신 태양, 파란 바다 때문이다.

    늦은 오후에 코르도바에 도착한 필자 일행은 곧장 메스키타로 달려갔다. 스페인어로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뜻하는 메스키타는 고유명사로 쓰이면 코르도바의 메스키타를 지칭한다. 최고의 정성과 돈으로 최대 규모로 지은 것이라 그러하다.

    동서양을 하나로 묶은 메스키타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코르도바 메스키타의 핵심인 미흐랍. 최고의 정성을 바쳐 만든 것이다.

    이슬람 장군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400명의 무슬림 병사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 땅에 첫 발을 디딘 것은 711년 7월이다. 카디스 남쪽의 바르바테 강변에서 서(西)고트 왕국(419~711)의 로데리크 왕을 죽이고 북상을 거듭한 그들은 이듬해에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 톨레도까지 손에 넣었다.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정복하는 데는 불과 7년도 걸리지 않았다.

    예언자 마호메트가 아라비아에서 이슬람을 창건한 게 622년이고, 그로부터 40년 뒤인 661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우마이야’란 이슬람 왕조가 세워졌다. 우마이야조(朝)의 왈리드 1세는 노련한 정치가 이븐 무사 누사이르를 아프리카 총독에 임명하고는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나도록 명했다. 그들이 북아프리카를 지나 대서양에 이르기까지는 무려 7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원주민 베르베르족의 완강한 반격이 그들의 기동력을 더디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베르베르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해 이슬람의 최정예 전사가 되자 불과 7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를 통째로 삼켜버릴 수 있었다. 서고트 병사들은 이들의 기동력과 파괴력에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된 무어족(모로코 출신의 무슬림)의 스페인 지배는 1492년 1월까지 무려 800년간 계속됐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크게 세 단계로 나누는데, 첫 번째가 코르도바에 도읍지를 정한 안달루시아 왕국(756~1031) 시대다. 메스키타는 안달루시아 왕국 시대 초기에 세워졌다. 원래 그 터는 로마인과 서고트인이 교회를 세웠던 곳으로 무어인들은 정통 이슬람 방식을 따르지 않고 주춧돌과 기둥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여 메스키타를 지었다. 그리하여 동서양은 이 메스키타를 통해 하나가 됐다.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메스키타 내부에는 850개의 말발굽형 아치 기둥이 들어서 숲을 이루고 있다.

    코르도바 메스키타는 과달키비르 강변에 서 있다. 아랍어로 큰 강이란 뜻의 과달키비르는 세비야를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간다. 그 위로 난 길이 225m의 로마교는 2000년의 모진 풍상을 용케 견뎌내고 지금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시민들의 산책로로 사랑받고 있다.

    그 끝의 갈라호라 탑에 오르자 강과 다리는 물론 웅장한 메스키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코르도바는 오직 메스키타를 위해 세워진 도시 같다. 메스키타의 건설이 시작된 게 785년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 듯싶다. 메스키타 주변에는 흰 벽에 황토색 기와지붕을 인 가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오랜 아랍 도시처럼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이 이리 얽히고 저리 설켜 미로를 방불케 한다. 이슬람이 이 땅을 떠난 지 500년이 지났건만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아직도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도피자 압두르라만의 한계

    ‘면죄의 문’을 통해 메스키타의 경내로 들어서자 오렌지 정원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꽃과 수목이 수없이 많은데 굳이 오렌지를 모스크의 안뜰에 심은 까닭은 무엇일까. 모르긴 해도 성스러움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곳 오렌지 정원의 크기가 메카에 있는 카바 성전의 평면 규모와 똑같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녹색 잎사귀 사이로 노란 오렌지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게 보기에 나쁘지 않았다.

    정원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예배소에 들어가기 전 손발을 씻도록 만든 것이다. 돌을 박은 바닥 아래 거미줄 같은 수로가 만들어져 나무마다 물이 공급되도록 했다는데 바로 이런 게 이슬람 문화의 핵심 아닌가 싶었다.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험해도 그걸 탓하고 체념할 게 아니라 알라의 뜻으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보다 나은 환경으로 만들어가는 것 말이다. 그들이 말하는 오아시스란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손과 지혜로 만든 낙원을 뜻한다. 필자는 이런 예를 다마스쿠스에서, 그리고 이란의 이스파한에서 똑똑히 보았다.

    ‘종려나무의 문’으로 시작되는 메스키타 내부를 빈틈없이 채운 수많은 원기둥과 그것을 장식하는 말발굽형 아치에서 필자는 무어인의 또 다른 면모를 보았다. 말발굽은 이동과 공격의 상징이 아니던가. 무어인은 자신들의 기상과 특기를 말발굽으로 표현해놓았다. 빠르고 외향적인 기질을 가졌다면 지구력 면에서는 좀 떨어질 법도 한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섬세함마저 갖췄다. 기둥에 새겨진 조각술이나 미흐랍을 장식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정교함은 보는 이의 입이 벌어질 정도다.

    메스키타를 짓기 위해 첫 삽을 떴던 압두르라만 1세는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왕조가 무너지자 몸을 피해 비옥한 과달키비르 강변의 코르도바로 건너와 수도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코르도바를 다마스쿠스나 바그다드(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압바스 왕조의 수도)보다도 더 이슬람적이고 더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에게서 비애를 느꼈다.

    도피자인 까닭에 그에게는 정통성이 없었다. 압두르라만은 그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족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도시를 꾸미고 모스크를 지었다. 일본의 역사도시 나라(奈良)에서 사라진 백제문화의 원형을 볼 수 있는 것이나,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의 사라진 문화재가 우리의 성균관에 잘 보존돼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원조는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도 원조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후발주자는 옛 것(고전)을 버리는 순간 존재의 근거가 사라지기에 감히 버릴 생각을 못한다. 코르도바가 바로 그런 꼴이다. 정통성이 유일한 가치가 아닌데도, 정통성만을 내세운 지배자가 백성들을 허기지게 만든 예는 비일비재하다. 정통성이 삶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준다면 모르겠으나 현실세계에선 ‘입’만 키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천이 따르지 않는 입,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 입, 배를 허기지게 만드는 입 말이다. 제대로 되려면 정통성 못지않게 실용성도 갖춰야 한다.

    다행히 코르도바는 후자의 길을 걸었다. 10세기 초 압두르라만 3세 때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코르도바의 주민은 50만명을 넘었고 20만호의 주택, 300개의 모스크, 50개의 병원, 500개의 공중 욕탕, 30개의 도서관이 있었다.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더불어 유럽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알바이신 언덕에서 바라본 알함브라 궁전.

    메스키타의 한 쪽에는 무려 2만50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다는 성당이 있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가 부하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치형 기둥의 일부를 헐고 그 자리에 고딕 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그런 식으로 표출하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왕은 성당이 완공되자 이곳을 둘러보고는 실망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고칠 줄 알았다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을. 그대가 만든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대가 파괴한 것은 이곳에만 존재했던 특별한 것(something unique)이었다.”

    손용진 사장은 필자 일행을 ‘꽃의 골목’으로 안내했다. 골목 양편에 늘어선 집집마다 좁은 골목을 향해 난 창틀에 제라늄 등 붉은 화분을 내걸었다. 압두르라만 1세가 유대인에게 회계관리나 행정업무를 맡기는 등 우대 정책을 펴자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살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고 손 사장이 말해줬다.

    그곳에서 ‘메리얀(Meryan)’이란 가게를 찾아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넓어졌고 파티오(안뜰) 곳곳이 조각과 꽃으로 장식돼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인상 좋은 60대의 주인은 작품(?) 몇 개를 골라 설명하고는 작업과정까지 재현해 보였다. 하나하나가 대단한 수작이라 모두 합하면 엄청난 재산이 될 것 같은데도 주인은 세 아들과 함께 가게 일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필자의 뇌리에 톨레도의 어느 금속 공예점에서 만난 다마스키나도가 스쳐지나갔다. ‘다마스키나도’란 다마스쿠스 출신의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그들이 있어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다마스키나도는 그 나라의 경제와 사회를 떠받치는 버팀목이었던 셈이다.

    코르도바는 300년의 영화를 누리고 쇠망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스페인은 군소 이슬람 왕족이 난립하는 이른바 ‘타리파 시대’를 맞았다. 그때 힘깨나 쓰던 소국이 그라나다, 세비야, 말라가, 발렌시아, 사라고사 등이다. 영화로도 유명한 엘 시드 장군이 나타나 스페인군이 용맹을 떨친 것도 다름아닌 이때다. 스페인 기독교도들이 자기네 땅에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겠다고 나선 게 ‘레콘키스타’, 즉 국토회복운동이었는데 엘 시드는 그 서장을 장식한 인물인 것.

    타리파 시대의 대표적 도시인 그라나다로 가는 길도 올리브 밭의 연속이다. 한 시간을 달렸을까, 저 멀리서 흰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준봉이 시야에 들어왔다. 첫눈에 영화 ‘닥터 지바고’의 로케 장소이자 유럽의 스키어들이 꿈에 그리곤 한다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라나다는 그런 산들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룬다. 시에라네바다의 눈 녹은 물이 사시사철 땅을 적시고 그게 방벽 역할까지 해준다.

    기독교도들에게 쫓겨 반도의 북·중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코르도바, 세비야마저 잃은 무어족이 그라나다에서 250여년(1236∼1492)이나 버텨낸 것은 오로지 이처럼 특이한 지형 때문이었다. 석류라는 뜻을 가진 그라나다는 8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던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보루’였다.

    태양의 언덕에 선 알함브라 궁전

    석류는 올리브와 마찬가지로 사막에서도 잘 자란다. 같은 수종으로는 무화과와 사이프러스(삼나무) 등이 있다. 그라나다는 인구 20만의 도시인 데도 넓어 보였다. 곳곳에 높다란 골리앗 크레인이 서 있어 관광도시라기보다는 신흥 산업도시라는 느낌을 준다. 관광수입을 밑천 삼아 새롭게 발전하는 도시라서 그런 것 같았다.

    필자 일행은 타고 온 차를 호텔에 세워두고 택시를 탔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아랍인 마을 알바이신으로 오르기 위해서였다. 그곳 역시 여느 이슬람지구와 마찬가지로 길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거주자가 아니면 택시나 마을버스를 이용해야 한다는 게 손 사장의 설명이다.

    차는 다로(Darro) 개울을 따라 꼬불꼬불한 길을 달리다 목적지인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멈췄다. 그러자 숲속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알함브라 궁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러 개의 적황색 건물로 이루어진 궁전은 넓은 정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멋진 정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셔터를 누르는 사람, 스케치북에 옮겨 그리는 사람, 이들을 대상으로 기념품을 팔거나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들로 전망대는 활기가 넘쳤다.

    무어 왕조가 기독교도들에 쫓겨 그라나다까지 밀리자 왕실을 따라 장인과 상인, 관료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최고의 번영기를 맞았던 알바이신은 지금도 아랍 특유의 하얀 집들로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가옥이 모두 흰색 벽에 연한 황토색 기와 지붕인 것은 태양이 눈부신 지역이라 실내온도를 낮추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마당이 있는 집엔 어김없이 포도나 무화과, 사이프러스 등이 자라고 있었다. 전망이 좋은 때문인지 작은 옥외 카페와 스페인 또는 아랍 레스토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사자 궁전의 중심엔 사자 분수가 물을 뿜어대고 있다.

    손바닥만한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알함브라 궁전을 바라보는 것도 괜찮지만 그 아래 작은 찻집에서 커피 한잔 마시며 느긋한 마음으로 궁전과 궁전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기분도 그럴싸하다. 손 사장은 해질 무렵 레스토랑 창가에 앉아 조명 빛에 졸고 있는 궁전을 본다면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될 것이라며 호기심에 불을 댕겼다.

    ‘세로 델 솔(태양의 언덕)’이라 부르는 작은 언덕 위의 알함브라 궁전으로 들어서는 순간 온갖 꽃과 수목들로 별세계를 연출하고 있는 정원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다 간신히 궁전의 핵심이랄 수 있는 이슬람 궁전, 즉 카사 레알(왕궁)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궁전 관람은 오전, 오후로 나뉘어 있었다). 왕궁에는 방이 매우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백미는 각국 대사들이 눈을 가린 채 인도되어 창을 등지고 앉은 7명의 왕을 만났다고 하는 ‘대사(大使)의 방’. 나스르의 왕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똑같은 용모와 복장을 한 여섯 명과 함께 나타나서는 빛을 등지고 앉았다는 것이다.

    여느 방보다 크고 높은 ‘대사의 방’은 삼면이 벽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벽, 그리고 천장은 온통 황금색이고, 그 위에 생동감 넘치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새겨져 있다. 거기에 코란의 글귀까지 어울려 화려하게 빛난다. 마치 인간의 손길이 얼마나 섬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처음 이곳을 찾은 에스파냐의 기독교인들도 그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나머지 한쪽 벽면에는 아치형 창이 여럿 나 있고 창 밖으로 알바이신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 건물들로 뒤덮여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했다.

    완벽한 대칭의 아름다움

    방 밖으로는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진 기둥과 장방형의 연못이 펼쳐졌다. 못은 주위의 모든 것을 그대로 담되 그것을 그대로 토해낸다. 똑같은 것이 쌍으로 나타나니 환상적이랄 수밖에. 이슬람 건축의 묘미는 이렇듯 완벽한 대칭에 있다. 그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그들이 생명처럼 여긴 물을 이용했다. 그러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거기서 벽 하나를 넘어서자 사자(獅子) 궁전이 나타났다. 이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왕과 여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내전이라 신기(神技)를 펼쳤기 때문이다. 야자수를 닮은 124개의 대리석 원기둥과 그 위에서 이 모두를 하나로 이어주는 아라베스크 문양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할 정도다. 기둥들로 둘러싸인 파티오(中庭)의 한가운데에는 12마리의 돌사자가 연신 물을 뿜어댄다. 규칙적인 물소리가 정적을 깨는 사자 분수는 사막 속의 오아시스를 연상시킨다. 나스르의 왕들은 궁전에서 제일 깊은 이곳을 아마도 낙원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다.

    적에게 쫓기는 자라면 초조함에 대개는 허술하게 지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이 궁전은 지은 지 700년이 지난 지금도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성을 지르게 한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배짱과 생각으로 그토록 정교하고 튼튼한 궁전을 지은 것일까.

    이곳에는 왕이 향연을 베풀던 방과, 왕의 여인과 정을 통했다 하여 목이 달아난 귀족 청년의 이름을 딴 알펜세라헤 방, 왕과 후궁들이 몸을 씻기도 하고 마사지도 하던 욕탕 ‘두 자매의 방’ 등이 있다. 두 자매의 방이란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무하마드 15세)이 후궁 가운데 가장 총애한 두 자매를 위해 지은 것. 그런데 이들 자매는 기독교도였다.

    그러나 보아브딜은 바로 그 기독교도들에 의해 이 궁전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 여인들이 기독교도였기에 그라나다에 남을 수 있었고, 알함브라 궁전이 흠 하나 없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자매의 방을 지나 궁전 바깥으로 나가자 이번에는 잘 가꾸어진 파르탈 정원이 나왔다. 그 위쪽으로 왕의 여름 별장 헤네랄리페가 있어 자연스레 발길이 그곳으로 옮겨졌다. 가는 길에 비운의 왕 보아브딜이 기독교인에게 쫓겨 궁전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걸었다는 계단이 나타났다. 그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모든 것, 심지어 사랑하는 여인까지 남겨두고 몇몇 환관의 도움을 받으며 황급히 달아나야만 했던 그 심정이….

    헤네랄리페에 특별한 건물은 없으나 솟구치는 물방울이 포물선을 그리다 다시 물 위로 떨어지는 분수만큼은 황홀경 그 자체였다. 공중에 떠 있을 때는 햇빛을 받아 영롱한 빛을 발하다가 바닥의 물과 만나는 순간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맑은 소리를 냈다. 물이 귀한 땅에서 태어난 때문일까. 그들은 물을 다루는 데에는 천재적인 솜씨를 발휘했다.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의 정면. 벽면에는 이사벨 왕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녀는 내부 제단 앞에서 영면중이다.

    한나절에 걸쳐 궁전 관람을 끝낸 필자 일행은 시내 누에바 광장 근처의 중국식당으로 가 싼값으로 배불리 먹고 카피야 레알(왕실 예배당)을 찾았다. 그라나다를 정복한 이사벨 왕의 유해가 그곳에 안치돼 있다. 그라나다 최대의 거리 ‘그란 비아 데 콜론(콜럼버스대로)’ 초입의 작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진한 황토색 벽면에 단발머리를 한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왕은 아름다운 그라나다에 묻히고 싶었던지 1504년 10월 이곳에 예배당을 짓게 했다.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이. 그리고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예배당에는 남편 페르디난도, 딸 후아나, 사위 펠리페 1세도 잠들어 있다.

    예배당에는 눈길을 끄는 게 또 하나 있다. 보아브딜이 이사벨에게 그라나다 성의 열쇠를 건네주는 장면을 그린 대형 그림이다. 보아브딜은 검은 색 말을 타고 검정색 옷을 입고 있는 반면 그를 마주보고 있는 이사벨은 흰 가운을 걸친 채 백마를 타고 있다. 흑백의 대비가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상징 같아 왠지 씁쓸했다. 화가 프란시스코 프라디야(1848∼1921)는 이것까지 계산해서 그린 것이리라.

    이사벨(1451∼1504)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자로 있던 1469년 10월,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디난도 2세와 바야돌리드란 도시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카스티야는 마드리드 북서부에 위치해 있고, 아라곤은 그 동쪽에 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18세인 이사벨은 이복 오빠이자 카스티야의 왕인 엔리케 4세의 방해를 받았고, 그녀보다 한 살 아래의 신랑은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 결혼식 며칠 전에야 겨우 식장에 도착했다. 그보다 앞서 카스티야 왕실은 이사벨의 결혼 상대자로 포르투갈의 40대 홀아비 왕을 적극 권했다. 하지만 이사벨은 앞으로 자신이 다스리게 될 왕국의 번영을 위해서는 피를 나눈 혈연관계에 있는 아라곤과 손을 잡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신랑·신부를 생사의 갈림길로 몰아넣었다.

    당시 스페인은 레콘키스타의 와중에 있긴 했으나 각국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잦아 초기에 비해 열기가 많이 식은 상태였다. 그 열기를 되살리기 위해 내부 통합이 급선무라 생각한 이사벨은 1474년 카스티야·아라곤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자마자 레콘키스타에 박차를 가했다. 1482년엔 마지막 남은 그라나다를 향해 공격을 개시해 10년째 되던 1492년 정월 초이튿날 보아브딜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면서 400년에 걸친 레콘키스타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그녀는 일곱 왕을 모아 통일방안을 논의해 마침내 에스파냐 왕국을 세웠고 왕으로 옹립됐다.

    그녀에게는 여왕을 뜻하는 ‘레이나(Reina)’대신 왕을 뜻하는 ‘레이(Rey)’란 칭호가 붙는다. 그녀는 왕위를 이을 적법한 남자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왕위를 계승한 여왕이 아니었다. 아라곤 왕국과 연합하고 식민지를 거느린 에스파냐 제국을 건립하는 등 큰 업적을 거둠으로써 왕위를 창출한 떳떳한 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에스파냐 왕국의 왕위는 공동 통치자이자 남편인 페르디난도 2세가 아니라 그녀의 딸인 후아나에게 이어졌다.

    이사벨은 1492년 그라나다를 정복하자 곧 두 가지 큰일을 도모했다. 그중 하나가 콜럼버스를 도와 대항해의 길을 떠나도록 한 것이다. 그 현장인 그라나다에는 ‘콜럼버스 기념조각’이 세워져 있다. 이 조각에는 지도를 펴놓고 대항해 계획을 설명하는 콜럼버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사벨 여왕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콜럼버스는 이탈리아 제노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사벨은 그에게 국운을 걸었다. 모험을 한 셈이다. 이웃 나라 포르투갈이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는 것에 자극받은 터라 어쩔 수가 없었다. 결국 콜럼버스는 서인도 제국을 발견하고 광대한 신천지와 광산 등으로 그녀의 기대에 보답했다. 덕분에 스페인은 오래지 않아 거대한 식민지를 거느린 대제국이 됐다.

    한편 이사벨은 식민지 개척 못지않은 실수도 저질렀다. 기술과 정보, 특히 돈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난 유대인들을 단지 종교상의 이유로 몰아낸 것이다. 유대인이 그때 중·동부 유럽으로 건너가 자기들만의 공동체인 게토를 건설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리분별에 밝은 그녀가 왜 이런 악수를 둔 것일까. 어쨌거나 그 여파는 심대했다. 유대인들이 떠나자 아랍인들도 덩달아 떠났다. 그들은 지금처럼 앙숙이 아니라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숙련된 아랍계 노동력도 대거 유출됐다.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말라가의 히브랄파로 성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풍경.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막대한 물자가 들어오고 특히 멕시코와 볼리비아의 은광에서 캐낸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스페인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지만 그것은 곧 하이퍼(超)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 금융전문가가 있었다면 어느 정도 진정시킬 수 있었을 텐데 유대인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운 플랑드르인, 독일인, 제노아인들은 제 몫 챙기기에만 바빴다. 실물경제라도 튼실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겠지만 아랍계 숙련공을 대신할 노동력도 태부족이었다.

    제국으로 웅비하려는 순간 그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그들의 영화는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영국군에 격파되면서 스페인의 영화는 종말을 고했다. 번영을 구가한 지 고작 100년 만이었다. 사람을 모으면 번성하고 사람을 버리면 쇠망한다는 진리를 스페인의 근대사는 이렇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왕실 예배당 앞으로는 토산품 가게들이 즐비했다. 크고 작은 식당은 대로변에 있는데, 이슬람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아랍 식당이 가장 흔했다. 그중에서도 ‘적신 빵’을 뜻하는 가스파초와 샤프란 향을 이용한 해물볶음밥인 ‘파에야’를 파는 곳이 많았다. 가스파초는 토마토 수프와 비슷한 것으로 거기에 양고기 스튜와 바삭하게 구워진 바게트가 따라나와 우리 입맛에도 맞고 양도 많아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카레처럼 노란색을 띤 파에야는 쌀과 게, 새우 등이 들어 있어 느끼하지도 않고 양도 넉넉했다.

    저녁에는 알바이신 지역에 있는 집시 마을 사크레몬테를 찾았다. 인도에서 이슬람의 서진(西進)과 함께 스페인 땅을 밟은 집시들은 늘 유랑생활을 했지만 알함브라 궁전이 함락될 때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궁전의 내부 구조와 병사들의 배치 상황을 자세히 담은 정보를 에스파냐측에 고스란히 넘겼던 것이다. 에스파냐 왕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사크레몬테를 그들의 근거지로 만들어주었다.

    이곳 집시들은 주로 동굴 속에서 산다. 하지만 집의 정면만큼은 여느 주택처럼 꾸며놓아 처음 보는 사람은 일반 주택이거니 생각하게 마련이다. ‘안달루시아의 영혼’이라는 플라멩코 춤판은 그 속에서 벌어졌다. 춤판은 한 번 춤사위가 벌어지면 대개 1시간 반 정도 걸린다.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높이 98m의 히랄다 탑을 거느린 세비야 대성당의 위용.

    필자가 찾아간 집은 ‘타란티노’란 가게였다. 그곳의 집시들은 길고 짙은 검정색 머리에 진한 눈썹 그리고 선한 눈매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춤사위는 아주 격렬했다. 신들린 듯한 빠른 기타 연주와 손뼉에 맞춰 몸을 비틀다가 바닥이 내려앉을 정도로 발을 구르기도 했다. 어디에도 매이기 싫어하는 그들의 성미가 불같이 격정적이고 강한 동작을 낳았는지 한 사위가 끝날 무렵이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됐다. 플라멩코의 어원은 불꽃을 뜻하는 라틴어 ‘플라마(flama)’다.

    필자는 거기서 비장함을 보았다. 그게 한때의 배반에 대한 회한인지, 아니면 떠돌이가 갖는 비정착성에서 나온 것인지는 판단키 어렵지만. 낮에는 알함브라 궁전에서 화려함 뒤의 스산함을, 밤에는 사크레몬테의 불 같은 정열이 식은 뒤의 냉랭함, 그리고 비장함을 맛본 셈이다.

    한밤중에 집시 가게를 나오다 조명을 받은 알함브라 궁전을 보게 됐다. 그것은 마치 신기루처럼 저 멀리서 다가왔다. 마법의 성 같았다.

    겨울이라고 해도 절대 쌀쌀하지 않다는 안달루시아라지만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도 간간이 뿌렸다. 하늘은 흐리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필자 일행은 ‘태양의 해변’이라 불리는 ‘코스타 델 솔’에 자리잡은 말라가로 향했다.

    말라가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도시로, ‘이베리아’란 말을 선사한 것도 다름아닌 그들이다. 이베리아는 ‘들토끼가 자라는 들판’이란 뜻이다. 말라가는 로마시대에 무역항으로 이름을 날렸고 이슬람 지배 시대에는 지중해 무역의 거점 도시로 번창했다.

    말라가 시내의 가로수는 겨울인데도 무성한 잎과 가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먼저 이슬람식의 히브랄파로 성을 찾았다. 말라가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 파도치는 바다와 모래사장은 물론 알함브라 궁전의 모델이 됐다는 알카사르와 로마의 원형극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세비야의 알카사레스 내 정원.

    시내 중심가인 라 메르세드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고풍스런 대성당과 피카소의 생가를 개조해 지은 피카소 미술관이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피카소는 바닷가에서 뛰놀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코스타 델 솔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마르베야에 닿았다. 그곳 항구에는 한 척에 몇십억씩 하는 초호화 요트들이 무리지어 있었는데,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려는 자세만 취해도 어디선가 경비원이 나타나 ‘NO, NO!’를 연발했다. 마르베야는 유럽에서 가장 빼어난 휴양지 가운데 하나로 왕족들과 영화배우, 부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 지방경찰은 최정예 요원들로 이뤄져 있고 예산 규모도 매우 크다.

    마르베야에는 요트 외에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쇼핑센터도 수준급을 넘는다. 빼어난 경관과 잘 정비된 지방자치, 그리고 개방적인 행정이 이 같은 부를 창출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스페인 남부를 가로지르는 론다 산맥을 돌아 세비야로 길을 재촉했다. 역사가 오랜 세비야의 산타크루스 지역 한가운데 자리잡은 산타마리아 대성당은 규모도 대단하지만 내부 장식 또한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제단 정면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싣고 온 금 1.5t으로 만든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상이, 입구에는 콜럼버스의 유품이 전시돼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의 석관도 안치돼 있었다.

    콜럼버스가 이사벨 왕의 허락을 얻어 대항해를 떠난 곳은 그라나다였으나 배는 이곳 세비야에서 출발했다. 과달키비르강을 따라 대서양으로 빠져 모로코 서쪽의 카나리아 제도에서 잠시 머물다가 아메리카 대륙을 향해 돛을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세비야로 돌아왔다.

    세비야는 또 한 사람의 대항해가 마젤란과도 인연을 갖고 있다. 그는 포르투갈 출신이었으나 에스파냐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세비야에서 세계일주 항해를 떠났다. 포르투갈에선 알아주는 이가 없었으나 에스파냐 왕실은 그를 믿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향료 산지가 어딘 지를 확인하는 것.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1519년 9월20일 세비야를 떠난 뒤 계속 서쪽으로 배를 몰아갔다. 그가 처음 만난 것은 지금의 남미대륙. 어쩔 수 없이 대륙의 남단(지금의 마젤란해협)까지 내려갔다가 태평양을 가로질러 필리핀에 당도했다. 그의 세계일주는 이렇듯 우연의 산물이었다.

    세계는 바다를 통해 하나가 된다

    태양과 정열의 땅 스페인 안달루시아

    세비야의 무리요 정원에 세워진 대항해 기념탑. 범선 카라벨이 돋보인다.

    그는 필리핀 세부에서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유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항해를 계속해 원래의 계획대로 인도네시아의 몰루카 제도에 도착하여 향료를 손에 넣고는 다시 세비야로 돌아왔다. 1522년 9월8일의 일이었다. 떠날 때는 선원이 270명이었으나 돌아왔을 때 생존자는 겨우 17명. 그런 희생 덕분에 스페인은 아시아의 필리핀까지 식민지로 거느릴 수 있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이 위업을 이룬 곳이 세비야인데 그걸 기리는 기념물이 없을리 있겠는가. 손 사장은 무리요 정원에 그런 게 있다며 우리를 안내했다.

    무리요는 세비야가 낳은 스페인 3대 화가 중 한 사람이다. 높다란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범선 카라벨을 조각해 하나로 이어놓았다. ‘세계는 바다를 통해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 세비야인지라 과달키비르강으로 가 유람선을 타고 1시간에 걸쳐 항해(?)를 즐겼다.

    세비야는 스펀지 같은 도시다. 아랍인들로부터는 높은 학문과 과학, 기술, 농작물을 받아들였고,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금은과 신작물을 들여왔다. 중남미에서 사용되는 스페인어가 수도 마드리드에서 통용되는 카스티야어가 아니라 세비야인들이 쓰는 방언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페인은 아랍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마자 자기 몸집보다 몇 배나 더 큰 아메리카 대륙을 단숨에 정복했다. 그 저력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사벨 왕의 용기와 포용력, 그리고 혜안이었을 수도 있고, 아랍인들이 그 땅에 남긴 문화의 힘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 둘이 합해지면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결과일 수도 있을 테고.

    스페인 광장은 로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세비야에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반달 모양을 그리며 길게 늘어선 세비야의 것이 몇 배나 더 아름다웠다. 건물은 1929년 히스패닉 산업박람회 때 전시관으로 지어진 것이라는데, 궁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대단했다. 특히 석양 무렵 붉게 물든 모습은 여행자의 넋을 쏙 빼놓을 정도다.

    히스패닉은 중남미 국가들을 지칭하는 말. 이들이 스페인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것은 19세기 초다.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아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너도나도 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이 그들을 자기편으로 묶어두려는 노력마저 포기할 정도로 무력했던 것은 아니다. 스페인은 ‘히스패닉’이란 이름을 내걸고 여러 가지 이벤트를 벌였다. 그중 하나가 히스패닉 엑스포다.

    스펀지 같은 도시 세비야

    세비야는 한때 무어족의 왕도였다. 그때의 왕궁 유적이 대성당 옆의 알카사레스다. 건축 시기는 11세기. 당시 ‘로맨스의 화신’이라 불리던 알 무타미드 왕이 왕궁 안에 이슬람식 정원을 조성했다. 왕은 북부 지역 출신의 미인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는 고향 언덕에 쌓인 흰눈을 무척 그리워했다. 이를 못내 안타깝게 생각한 왕은 왕궁 정원에 배나무를 심도록 했다. 봄에 피는 배꽃을 보며 향수를 달래라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배꽃 정원은 100년도 안 돼 사라지고 지금의 것은 14세기에 재건된 것이다. 그래도 이슬람식 정원의 형태는 잘 간직돼 있다.

    정원을 떠날 때가 돼서야 세비야에서 ‘카르멘’이 태어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원인은 바로 저 시인이자 로맨티스트였던 알 무타미드 왕에게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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