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 이름에 ‘춘’자 들어가는 전통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호산춘’. 500년 가까이 한 집안에서만 빚어지고 있는 이 술에는 긴 세월만큼이나 사연이 많다. 서울로 길 떠난 나그네의 발걸음을 되돌릴 만큼 술맛 또한 기막히다는데….
마당에서 솔잎을 다듬는 권숙자씨.
점심 무렵 약돌을 갈아서 먹인 돼지고기 음식점에 들어갔다. 호산춘(湖山春)이 나왔다.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누군가 한국의 3대 명주로 경주교동법주, 소곡주 그리고 호산춘을 꼽은 적이 있다.
경주교동법주는 국가지정문화재이고, 소곡주는 2004년에 ‘전통식품베스트 5’ 선발대회에서 최고 명주로 꼽힌 술이다. 초면인 호산춘이 그 술에 비해 밀리지 않는 것은 춘주라는 명칭 때문이리라.
호산춘 두 병이 밥상에 올랐다. 하나는 유리병이라 투명하게 속이 들여다보였다. 술색은 빛나는 구릿빛인데, 세월의 무게가 감지될 만큼 그 색이 진하다. 가격은 700ml에 9000원. 다른 하나는 도자기병으로 주둥이가 넓어 옛 주병을 연상시킨다. 900ml에 1만4000원이니, 도자기병 값으로 5000원이 추가된 셈이다. 물론 술의 양은 200ml 늘었다. 술값이 불안할 만큼 저렴하다. 언제부터인가 술값이 싸면 불안하다. 재료비가 나올까, 혹 재료비가 안 나와 값싼 재료를 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다.
호산춘 한 잔을 들이켰다. 술맛은 달지만 뒷맛이 끈적거리지 않았다. 진하지 않다는 얘기다. 누룩내가 스치지만 코끝에 오래 머물지도, 입안에 오래 남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래 되고 노련한 풍미가 있다. 마치 아귀가 잘 맞는 성벽을 더듬는 느낌이다. 술맛은 짱짱하고, 도수도 제법 세다. 알코올 도수를 보니 소주보다 3%포인트 낮은 18%다. 백세주가 13%니, 약주로는 센 편이다. 한산 소곡주와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센 발효약주다.
음식점을 나오려는데 술이 남았다. 술이 남으면 아깝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생명체 같아, 차마 팽개칠 수 없다. 그래서 술병을 챙겼다. 그 술병을 들고 문경을 떠돌다가 진남교반에 이르렀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던 조선의 길 영남대로가 폭 50cm로 좁아지는 길목이다. 산과 산 사이로 강줄기가 태극문양으로 빠져나간다.
그곳에 토천(兎遷), 토끼비리(벼루)라고 부르는 좁은 길이 나 있다. 이곳에서 길을 잃은 고려 태조 왕건과 그의 부하들이 달아나는 토끼를 뒤따르다 개척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토끼비리는 고모산성 성벽과 연결되어 있다. 성벽에는 진남문이 있다. 남쪽을 제압하겠다는 뜻이다. 그 문루의 현판을 호산춘을 빚는 이가 썼다고 한다. 술 빚는 사람과 글씨 쓰는 사람, 둘 다 손놀림이 좋아야겠지만 한 사람이 글씨도 쓰고 술도 빚었다는 게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호산춘을 빚는 이를 만나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한때 경상도 최고의 비경으로 꼽혔던 진남교반을 벗어나, 문경새재로 가는 길목에 터를 잡은 도자기전시관을 찾아갔다. 관요(官窯)가 발달한 경기도 이천, 여주와 달리 문경은 민요(民窯)가 발달했다. 민요에서는 실용 도자기를 많이 만든다. 대표적인 상품으로, 근자에 이르러서 부상한 막사발이 있다. 일본인들이 귀하게 여긴 덕분이다. 전시관에는 막사발과 찻사발이 눈에 많이 띄었다. 차 마시는 방도 있었다.
500년 된 술잔에 술을 붓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전시관 이종범 관장에게 막사발의 용도를 물었다. 막사발은 물도 마시고 밥도 담고 제기로도 쓰고 술잔으로도 썼다고 한다. 막 썼기에 막사발이라는 것인데, 문경에서는 그 용도가 다양해 개 밥그릇으로 사용할 정도였다 한다. 막사발에 막걸리가 들어앉으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막사발은 예전의 막사발이 아니다.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까지 하는 고가의 상품이 된 지 오래다. 막걸리만 애잔하다. 그러고 보니 전시관에 주병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소문난 고려청자나 조선백자 하면 주병들인데 다 어디 가고 찻사발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냐고 물었더니 관장은 나중에 조용히 따로 오면 좋은 술병을 보여주겠노라고 했다.
오래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 필자는 다시 도자기전시관을 찾았다. 술병을 구경하고 호산춘을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였다. 이번엔 호산춘과 호산춘을 빚는 황규욱씨와 함께했다. 관장이 나무상자를 열어 곱게 간직한 도자기를 보여주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까지 역사 속에 잠깐 등장했다 사라진 분청사기 술병이었다. 모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분 화장을 한 듯 회색이 돌고, 선이 자유롭고 거침없어 편안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완벽을 갈구하지도 않는 선들이 술병의 겉면을 장식했다. 관장은 뒤이어 16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분청인화문 잔을 내놓았다. 옅은 청자색이 도는데, 술잔 안쪽에 국화꽃 문양의 손도장이 무수히 찍혀 있다. 술잔은 넓고 운두는 낮다.
필자는 호산춘 술병을 꺼내 “술 한잔 따라 마셔도 되지요?” 묻고는, 이 관장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술잔에 술을 채웠다. 필자는 변명삼아 “이 술잔도 술맛을 보지 못한 지 500년은 되었을 겁니다”라면서 한 잔을 목에 넘겼다. 그때 황씨가 물었다.
“술맛이 어떻습니까?”
술을 빚는 이들은 자신의 술맛을 늘 궁금해한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그 궁금증이 더 커지는 모양이다.
“500년 된 술잔에 술을 마시니, 500년 된 술을 마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그럴싸했다. 호산춘의 역사는 황씨 집안의 역사와 함께 해왔기 때문이다.
“할머니 오래 사시겠어요”
황씨는 500년 이상 문경 땅에 터잡고 사는 문경 장수 황씨 사정공파의 장손이자, 조선 초기 명재상 황희 정승의 22대손이다. 황희 정승이 사용하던 벼루, 갓끈, 문진도 그의 집안에서 보존해왔다. 황희의 고조부(장수 황씨 중시조)는 전북 장수 사람이고, 황희는 개성과 한양을 기반으로 활동한 인물인데, 어떤 연유로 황씨 집안이 문경에 터잡고 지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연유는 이러하다. 황희 정승의 둘째아들 황보신이 상주에 내려와 살았다. 상주에서 문경 산북면으로 들어온 사람은 황보신의 손자 황정이다. 황정은 삼척부사를 지낸 아들 황사웅에게 재산 상속과 관련된 분재기를 작성하여 남겼다. 그 분재기가 아직도 황씨 집안에 전해오고 있다. 문경 장수 황씨 집안은 입향조 황정의 호를 따라 사정공파라 이름하게 됐다.
사정공파 종가는 오랜 고택이다. 고택 마당에는 400년 된 탱자나무가 있고, 고택 뒤편에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호산춘이 함께 살아온 공간이다. 호산춘의 무게가 단지 춘주라는 이름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었다.
현재 호산춘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고택 바로 앞집에서 빚고 있다. 격식 있는 한옥이라 술 빚기가 까다로워 앞집으로 나왔는데, 술 옆에 사람이 있어야 해서 살림살이까지 따라 나오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고택은 텅 빈 채로 덩그렇게 남아 있다. 문경시 산북면 한두리마을 앞으로는 개울물이 흐른다. 야트막한 두 개의 산줄기가 개울물을 호위하면서 따라가는데, 황씨의 고택은 산 밑에 자리잡고 있다. 편안한 양지를 찾아 마련한 집터다.
호산춘은 황씨와 그의 어머니 권숙자(75)씨가 빚는다. 호산춘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91년의 일이다. 전통주 빚기가 허용된 게 1990년이니 비교적 일찍 문화재로 지정된 셈이다.
황씨 집 앞에는 ‘호산춘’ 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이 호산춘을 파는 유일한 곳이다. 술을 빚기만 할 뿐 일부러 내다 팔지는 않는다. 홍보도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내준다. 이곳의 마당은 넓고 지붕은 낮다. 권씨가 거처하는 살림집과 별도로 호산춘 제조장이 있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권씨는 마당에서 솔잎을 따고 있었다.
권씨의 얼굴에 진 깊은 주름은 세월의 흐름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요즘은 몸도 좋지 않다. 2004년 설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밤 11시가 넘어서 누군가 철문을 두드렸다. 제주(祭酒)로 쓸 술을 사러 온 것이었다. 그래서 마당을 건너 문을 열어주고 술을 두어 병 내주는데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간신히 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는데, 또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도저히 일어나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찾아온 손님이라 힘겹게 몸을 이끌고 나가 술을 내줬다.
방에 들어와 자리에 눕는데 이번엔 전화가 왔다. 술을 사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몸이 아파 팔기 어려우니 내일 아침에 오라”고 했다. 그런데도 “지금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제주 안 사가면 혼난다”며 다짜고짜 찾아오겠다고 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각이었다. 갈수록 가슴의 통증이 심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찬 바람 속에 다시 마당을 건너 문을 열고 술을 내줬다.
결국 다음날 권씨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리고 곧바로 서울 큰 병원으로 옮겨져 심장 수술을 했다. 수술을 마친 의사가 “할머니, 오래 사시겠어요”라고 했다. 권씨가 왜냐고 묻자, “심장 동맥이 파열됐는데도 안 돌아가셨으니까요”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뒤로 권씨는 예전 기력이 아니다. 지금은 아들의 관리감독 아래, 동네 사람 둘을 불러 술을 빚는다.
① 제조장 직원이 누룩을 섞고 있는 모습.<br>② 덧술에 들어간 백설기를 털어내고 있다.<br>③ 술항아리 헝겊을 걷어내고 발효 정도를 점검하고 있다.
술밥을 담는 밑술통의 용량은 100ℓ. 양조장용으로는 작고 실험실용으로는 크다. 어디서 맞춘 것이냐고 물으니 직접 주문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물론 냉각판도 직접 주문한 것이란다. 혼자서도 술을 빚을 수 있는 용량으로 주문했더니 그런 중간 크기로 제작됐다.
보통은 주문량을 감안해서 크기를 정하게 마련인데, 용기가 조금 크다고 해서 가격 차이가 많이 나는 게 아니니 황씨가 직접 주문 제작한 용기는 애당초 술을 많이 팔지 않겠다고 각오하지 않고서야 맞추기 어려웠을 크기다. 265ℓ짜리 발효통도 큰 게 아니다. 밑술통과 발효통 밑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서 혼자서도 충분히 밀고 다닐 수 있다.
혼자 빚을 수 있는 크기의 용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노동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황씨는 고민을 많이 했고 시행착오도 숱하게 겪었다고 했다. 500여년 동안 대를 이어온 집안의 장손치고는 손이 부지런했다.
황씨는 교사생활을 하다가 2000년에 명예퇴직을 했다. 지금은 점촌 집과 호산춘 집을 오가면서 생활한다. 점촌에는 그가 운영하는 서예실(書藝室)이 있다. 수강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 점촌 서예인들의 사랑방이다. 그곳에서 그는 사부(師父)로 통한다.
그의 집안을 살펴보면 할아버지가 글을 잘 썼고, 아버지는 그림을 잘 그렸다. 고조부대에 집안이 크게 번창해 6촌 안에 진사가 8명이나 됐다. 게다가 모두 천석지기여서 ‘황씨 집안은 8진사 8000석’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 많던 재산이 축난 것은 할아버지 때였다. 집안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그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끊임없이 술을 빚다보니 집안 살림이 기울어서 호산춘을 두고 ‘망주(妄酒)’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신선이 탐할 만한 술이라 해서 호선주(好仙酒)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상주 목사가 이 집에 놀러 와서 호산춘에 취해 잠들었다가 밤에 요강을 들이켰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황씨가 어릴 적 서울에서 내려온 아버지 친구들이 떠난다고 인사하고 길을 가다가 술맛을 못 잊어 되돌아와서는 술 단지를 다 비우고서야 돌아간 적도 있다고 한다.
황씨의 아버지가 36세에 세상을 등지면서 집안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때 황씨의 어머니 나이가 30세였고, 유복자로 태어난 딸까지 포함해 슬하에 4남매가 남겨졌다. 장남인 황씨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권씨는 자식들을 키우느라 바느질 품삯 일부터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오르내리며 깨와 고추를 파는 일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그 와중에도 한 해에 열두세 차례나 되는 제사를 꼬박꼬박 모셨는데, 제주로는 당연히 호산춘을 준비했다. 살림은 어렵고 남자는 없어도 한 해에 서너 차례 술을 빚었다.
솔잎이 유일한 약재이자 방향재
한 번에 한 재 정도씩 빚었다고 한다. 한 재는 밑술에 쌀 8되, 덧술에 쌀 16되 분량이다. 물은 쌀 분량과 똑같이 넣는데, 물을 계량하는 놋그릇이 이집 술의 오랜 흔적이다. 예전 일꾼들에게 고봉밥을 줬을 때 사용하던 큰 놋그릇으로 물을 담아 재보니 900ml다. 딱 반 되 분량이다. 누룩은 밑술 할 때와 덧술 할 때 모두 고봉으로 2되가 들어간다.
밑술 할 때는 멥쌀로 고두밥을 찌고, 덧술 할 때는 찹쌀로 백설기를 찐다. 백설기는 곱게 갈아서 찐 떡이 아니다. 방앗간에서 4~5차례 갈아서 찐 백설기는 맛이 있긴 해도 너무 찰져서 누룩과 버무릴 때 애를 먹게 된다. 그래서 찹쌀은 방아로 찧고 성글게 한 번만 갈아서 사용하거나, 방앗간에서 거칠게 한 번 정도 빻아서 쓴다. 이런 쌀로 떡을 하면 마치 싸라기로 백설기를 한 것 같아서 조각난 쌀 입자가 눈에 보인다. 그렇게 해야 물과 누룩을 넣어서 쉽게 치댈 수가 있다. 옛날에는 백설기를 두 손에 들 수 있을 만한 크기로 둥글게 치대 덩어리진 것을 항아리에 하나씩 담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고 냉각판에 담아 함께 치댄 뒤에 발효통에 한꺼번에 쓸어 담는다.
밑술이 완성되는 데는 7~10일이 걸리고, 덧술은 20일이 걸린다. 1차로 자루에 넣고 눌러서 3일간 걸러내고, 2차로 공기압력을 넣어서 종이필터로 걸러낸다. 그렇게 걸러낸 술을 30~60일 동안 숙성시킨 뒤에 병에 담아 내놓는다.
한 가지 빠진 게 있다. 솔잎이다. 곡주 호산춘에 들어가는 유일한 약재이자 방향재인 솔잎은 백설기를 할 때 넣어서 찐다. 상당히 많이 들어가는 편이다. 그 향이 짙어 호산춘의 술맛을 짱짱하게 잡아준다.
그런데 솔잎이 들어갔다 해서 약술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곤란한 점이 없지 않다. 우리 전통 술에는 솔잎이 들어가는 술이 많기 때문이다. 마치 흰 송편을 찔 때 솔잎을 까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된다. 술밥 속의 솔잎은 여과할 때, 혹은 여과포와 술지게미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형성해 여과를 원활하게 해준다. 이 정도가 현재 문경 호산춘의 속사정이다. 그런데 춘주(春酒)라 하면 세 번 덧담근 술을 이르는데, 호산춘은 두 번 덧담글 뿐이다.
한편 전북 여산 지방에 있었다는 호산춘(壺山春)과는 어떤 관계일까. 문경 호산춘은 ‘호수 湖’자를 쓰고 여산 호산춘은 ‘호리병 壺’자를 쓴다. 여산 호산춘의 내력은 천호산(天壺山)에서 유래된 것이다. 천호산의 별칭이 호산(壺山)이고 여산(礪山)이다. 그래서 이 일대를 호산지방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술 이름도 호산춘이었던 것이다.
황씨는 문경 호산춘도 본디는 ‘壺山春’이라고 불려왔다고 전해준다. 1991년 문화재 등록을 할 때 여산의 호산춘과 구분짓기 위해서 ‘호수 湖’자를 쓰게 되었는데, 문경이 물 맑고 산수 좋은 곳이라서 그랬단다.
문경 호산춘과 여산 호산춘
그렇다면 문경 호산춘은 여산 호산춘과 한 뿌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부분에 대한 황씨의 설명이다.
“문경 호산춘이 익산 호산, 천호산 지방에서 흘러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조선의 명주인 호산춘은 문경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으로도 흘러갔을 겁니다. 그런데 어찌어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저의 집에만 살아남게 된 거죠.”
그는 최고의 술을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자신의 술이 세상에서 최고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전통술이 현대술과 다르고, 오히려 현대에 개발된 술이 기술력에서 훨씬 앞서 있다고 선선히 말한다.
하지만 아무리 세련되게 만들어도 현대의 도자기가 고려청자를 대신할 수 없듯이, 전통술에는 현대술이 따라가기 힘든 소박하고 순수하고 고졸한 멋과 맛이 있다고 말한다.
술의 내력을 살펴보면 여산에서 호산춘이 왔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문경의 장수 황씨 집안을 크게 일으킨 인물로 황시간이 있는데, 서애 유성룡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는 의병 활동을 했다. 현재 황씨 집안의 400년 된 탱자나무도 황시간이 심었다고 전해온다. 황시간 때부터 이 집안은 경상도의 주류세력인 남인 계열에 속했다. 그러다가 우암 송시열이 유배당할 때 성균관에 있던 황상중이 여러 유생과 함께 상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고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황씨 집안은 경상도의 비주류인 노론 계열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 후론 가까이서 혼사처를 구하지 못하고 기호학파와 충청도 선비 집안과 혼사를 많이 맺었다.
우암은 대전 회덕 사람이다. 지금의 호남선과 경부선이 갈리는 회덕 인터체인지 부근이다. 조선 태종의 장모의 친정고을인 익산 천호산에는 송씨 집안의 큰 제각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우암을 추종한 유생들의 영향력이 미쳤던 지역이다.
술은 집안에서 집안으로, 특히 모계 쪽으로 쉽게 흘러다닌다. 그 흐름 속에 문경 호산춘이 있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다만 냄새가 그리 풍긴다는 것이지, 정확한 물증은 없다.
그런데 문경 호산춘과 문헌으로만 전해오는 여산 호산춘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1715년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에 여산 호산춘의 제법(製法)이 구체적으로 언급돼 있다. 그 특징만 정리한다면 가루 낸 쌀에 뜨거운 물을 뿌려 반죽해 누룩과 밀가루를 넣어 밑술을 담고, 13일 간격을 두고 두 차례 덧술을 한다. 여산 호산춘을 만드는 방식은 독특하고 복잡하다.
그에 견주면 문경 호산춘은 단출하고 분명하다. 고두밥을 쪄서 밑술 하고, 백설기를 해서 덧술 하는 방식은 다른 술 빚기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집안으로 건너뛰면서, 또 대물림하면서 술 빚는 형태도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여산 호산춘과 문경 호산춘 사이에선 유사한 원형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미 전혀 다른 술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문경 호산춘이 호(湖)자를 써서 여산 호산춘과 갈라선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 얘기했으면, 호산춘을 한잔 더 마시고 싶어진다. 아쉬운 것은 호산춘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호산춘을 맛보려면 문경시 산북면 한두리 마을로 찾아가야 한다. 그러나 500년을 이어온 문경 장수 황씨 종가 동네에 들어서서 종가 며느리나 종손으로부터 술을 직접 건네받아 맛보면 문경을 찾아온 수고가 아깝지 않다. 물론 집에 앉아서 편하게 받아보는 방법도 있다. 택배주문을 하면 된다. 하지만 택배주문은 그 술을 마셔본 사람들에게 한정되기 쉬워서 소비자의 저변 확대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좀더 적극적인 홍보와 마케팅을 할 의향이 없냐고 황씨에게 물어보니, 단호하게 말한다.
“내 술 좀 팔아달라고 발로 뛰고 사정하고 홍보하고 배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장사가 그런 배짱 장사냐고 하면 저는 내 방식대로 간다면서 웃고 맙니다. 돈은 안 돼도 속은 편합니다. 남의 자본 끌어들이지 않고 분수를 지켜가면서 술을 빚는 게 제 방식입니다. 남에게 팔기 이전에 내가 마시고 내 이웃이 마시는 술입니다. 한 병 더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맛있는 술을 내기 위해서 빚기에 술이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길이 있다고 다 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론 알면서도 갈 수 없는 길이 있어야 합니다.”
황씨가 혼자서 술을 빚을 수 있는 설비를 갖춘 것도 이런 생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술 장사꾼이 아니라 글에 정진하는 선비 소리를 듣기를 원한다. 500년을 이어온 한 집안의 종손으로서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려 한다. 다만 가업으로 문화재 지정까지 받은 술을 자신의 대(代)에서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만은 투철하다. 그 사명감에서 창의적인 서체를 찾듯이 창의적인 술 빚기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의 삶에, 그의 집안에 신념이 있듯이 그의 술에도 신념이 있다. 자존심 센 술, 호산춘이 있어 문경은 자존심 센 동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