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군사적으로 오랜 우방인 한국과 미국은 스포츠에서만큼은 지독한 악연을 쌓아왔다.
- 한국이 미국에 억울하게 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십년 이어진 한미간 스포츠 악연의 역사와 비화를 소개한다.
양태영은 당시 평행봉에서 가산점 0.2가 붙는 최고 난이도(E)의 연기 ‘밸리 파이크’를 펼쳤다. 하지만 미국인이 포함된 3명의 심판은 이를 가산점 0.1이 붙는 D난이도 연기 ‘모리스’로 잘못 판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양태영은 총점에서 57.774로 동메달에 그쳤는데, 판정이 정확했다면 57.874로 미국의 폴 햄(57.823)을 제치고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양태영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설욕의 무대로 겨냥하고 있지만 과연 그가 베이징올림픽에 한국대표로 출전할 수 있을지, 또 출전한다 해도 금메달을 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오노 사건’은 2002년 2월21일 솔트레이크시티 아이스센터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결승전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당시 세계랭킹 1위이던 김동성과 미국의 간판스타 아폴로 안톤 오노는 금메달 후보답게 마지막 반 바퀴를 남겨놓고 나란히 1, 2위를 달리고 있었다.
김동성에 이어 2위로 달리던 오노는 승부수를 띄우려는 듯 직선 주로에서 안쪽으로 파고들어 추월을 시도했고, 이를 간파한 김동성은 직선 주로를 내어주지 않으며 오노를 견제했다. 순간 오노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그 유명한 ‘할리우드 액션’을 취했다. 김동성이 고의로 자신을 막았다는 뜻이었다.
오노에게 추월을 허용치 않은 김동성은 1위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고, 태극기를 들고 빙판을 돌며 우승을 자축했다. 하지만 호주의 제임스 휴이시 주심은 김동성에게 ‘크로스 트랙(Cross track)’이라는 반칙을 선언해 실격시키고 오노에게 금메달을 안겨줬다. ‘크로스 트랙’은 상대의 추월을 막기 위해 ‘고의적으로 다른 선수의 앞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진로방해다.
미국은 한국 프로복서의 무덤
어이없는 판정에 넋이 나간 김동성은 들고 있던 태극기를 빙판에 떨어뜨렸고, 경기장을 빠져나가 숙소로 돌아간 뒤 울분 속에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이후 한국에서는 치사하고 비열한 짓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을 가리켜 ‘오노 같은 X’라는 욕을 할 정도로 오노는 한국인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다.
김동성은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설욕하겠다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이후 연예계를 기웃거리며 은퇴와 현역복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지금은 거의 은퇴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한국과 미국의 스포츠 악연은 질기고도 오랜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한국 선수들이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미국 선수들에 패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악연의 역사는 앞서 살펴본 체조의 양태영과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의 김동성 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전인 약 30여년 전부터 시작됐다.
1967년 9월15일, 미국 LA에서는 당시 프로복싱계에서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이라는 평가를 받던 한국의 서강일과 WBA 주니어 라이트급 챔피언인 미국의 라파엘 로하스의 시합이 벌어졌다. 경기는 서강일의 우세였다.
하지만 결과는 판정패. 서강일은 중량급 선수면서도 경량급 선수에 뒤지지 않는 스피드와 현란한 기술로 라파엘 로하스를 압도했지만 석연찮은 판정으로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이 한국 프로복서의 무덤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이후 한국 프로복서들은 미국에서 벌어진 세계타이틀 매치에서 무려 26연패를 당했다. 미국, 멕시코 등 북·남미 선수에게 미국에서 벌어진 세계타이틀 매치에서 30년 넘게 전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26번째로 진 선수가 바로 현 WBC 페더급 챔피언 지인진이다. 지인진은 2001년 7월28일 LA 스테이플스센터에서 멕시코의 강타자로 당시 WBC 페더급 챔피언이던 에릭 모랄레스와의 지명전에서 잘 싸우고도 판정패 당했다.
불운의 26연패 기록에는 고(故) 김득구 선수의 사투도 포함된다. 김득구는 1982년 11월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특설 링에서 벌어진 맨시니와의 WBA 라이트급 타이틀 매치에서 14회 19초 만에 KO 당했다. KO 직후 뇌에 심한 이상을 일으키면서 정신을 잃었다. 병원으로 긴급후송된 그는 뇌출혈 진단을 받고 2시간10분 만에 뇌수술을 받았으나 99시간의 사투 끝에 숨을 거뒀다.
김득구가 맨시니 선수에게 무수히 얻어맞은 뒤 끝내 14회에 숨지자 WBA는 15회까지 치르던 세계타이틀 매치를 12회로 줄였다. 이후 WBC도 WBA를 따라갔고, 지금은 WBO, IBF, IBA를 포함한 모든 세계타이틀 매치가 12회전으로 치러지고 있다.
김득구는 해외원정에 나선 국내 복서 중 처음으로 사망하는 기록을 남겼다. 한국 선수로는 처음 복싱의 본거지인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해 그 첫 경기에서 허무하게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4전5기의 대명사 홍수환도 미국 징크스의 희생자였다. 홍수환은 국군수도경비사령부 병장이던 1974년 7월3일 멀리 남아프리카 더반까지 날아가 당시 WBA 밴텀급 챔피언이던 아널드 테일러를 4차례나 다운시키며 15회 판정승을 거두어 김기수에 이어 두 번째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28일 필리핀의 카바렐라에 판정승을 거두고 타이틀 1차 방어에 성공했다.
그런데 2차 방어지가 미국 LA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도전자는 멕시코의 알폰소 사모라. 당시 20연속 KO승 행진을 하던 강 펀처였다. 물론 국내외 복싱 전문가들은 키가 10cm 더 큰 홍수환(1m72cm)의 노련미가 알폰소 사모라(1m63cm)의 파워를 잠재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1975년 3월15일 LA에서 벌어진 2차 방어전에서 홍수환은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알폰소 사모라에 4회 KO패를 당했다. 링 주위를 꽉 메웠던 멕시코계 관중들의 열화 같은 응원과 처음 접해보는 낯선 링, 그리고 심판의 눈에 보이지 않는 편파 진행에 기가 센 홍수환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LA올림픽과 미국의 ‘금메달 음모’
돌주먹 김태식도 미국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했다. 51kg 이하의 플라이급 선수로 활약했던 김태식은 한국 경량급 사상 최강의 주먹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태식은 1980년 2월17일 장충체육관에서 벌어진 WBA 플라이급 세계타이틀 매치에서 챔피언 파나마의 루이스 이바라에게 2회 KO로 이길 때까지 200여개의 무서운 펀치를 퍼부어 보는 사람을 경악케 했다.
하지만 강 펀처 김태식도 부상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김태식은 1980년 12월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진 피터 마테블라와의 WBA 플라이급 세계타이틀 2차 방어전에 앞서 손목 부상을 당해 결국 주먹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고 15회 판정패를 당했다.
김태식은 경기가 끝난 후 “복싱을 시작한 지 10여년 됐지만 손목을 다친 것은 처음이다. 불가항력이었다”며 아쉬워했다.
미국 징크스는 아마추어 복싱도 마찬가지였다. 1984년 LA올림픽은 한국스포츠계가 모처럼 맞은 호기였다. 그보다 8년 앞선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한국은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딴 바 있다.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였다. 이후 경기력 향상에 가속도가 붙는 듯했지만,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때 미국 일본 캐나다 서독 등 자유진영 국가들과 함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뜻으로 출전하지 않는 바람에 금메달 열기를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1984년 LA올림픽 때는 3년 전 들어선 군사정부가 프로야구 프로축구 민속씨름 등 프로스포츠를 잇달아 창단하는 등 ‘스포츠 장려책’을 편 덕분에 경기력이 크게 향상됐다.
더구나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때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국가가 불참한 데 맞서 소련 쿠바 동독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출전하지 않는 바람에 이들 나라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온 일부 종목에서 메달을 딸 기회가 많아졌다.
소련 쿠바 등이 강세를 보이던 복싱도 그 가운데 한 종목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미국의 음모가 개입할 줄은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치열한 헤게모니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연히 올림픽 무대에서도 자존심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미국 일본 등 스포츠 강국들이 참가하지 않은 틈을 타 메달을 주워담다시피 해 무려 80개의 금메달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역대 올림픽 가운데 한 대회에서 한 나라가 따낸 최다 금메달이었다.
미국은 4년 뒤 자국에서 열린 LA올림픽에서 종합 1위는 물론 금메달 수에 있어서도 지난 대회에서 소련이 따낸 80개보다 1개라도 더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그에 따라 객관적인 수치로 순위가 정해지게 마련인 육상 수영 사격 등 기록종목보다는 심판들의 재량으로 경기결과가 뒤집힐 수 있는 격투기 종목을 집중 공략대상으로 삼았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복싱 라이트 웰터급 김동길은 8강전에서 미국 선수에게 억울한 판정패를 당했다. 반면 미들급의 신준섭(사진 가운데)은 결승에서 홈링의 미국 선수를 판정으로 누르는 ‘행운’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동길은 기본기가 탄탄한 데다 양 훅의 위력이 프로선수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4년 LA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승승장구했다. 그런데 8강전에서 미국의 제리 페이지 선수를 만난 것이 불행이었다.
복싱 전문가들은 대부분 두 선수 가운데 이기는 선수가 금메달을 딸 것으로 보았다. 즉 실질적인 결승전이었던 것이다. 김동길은 이날 복싱을 시작한 이후 최고의 경기를 벌였다. 주무기인 양 훅은 물론, 어퍼컷도 간간이 성공시키며 시종 우세한 경기를 펼쳤다. 누가 봐도 김동길이 이긴 경기였다.
그런데 판정결과 엉뚱하게도 제리 페이지의 손이 올라갔다. 말도 안 되는 판정에 한국뿐만 아니라 이 경기를 지켜본 제3국의 권투 관계자들은 물론 미국 관계자들마저 부당한 판정이라며 불만을 떠뜨렸다. 한국은 LA올림픽 조직위원회측과 국제복싱연맹(AIBA)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급기야 김승연 당시 대한복싱연맹 회장이 미국의 편파판정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복싱 선수단을 철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판정은 뒤집어지지 않았다. 한국을 비롯해 LA올림픽에서 편파판정의 희생양이 된 나라들이 ‘복싱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강력히 항의하자 미국은 미들급에서 한국에 보상(?)을 해주었다. 신준섭의 금메달이 그것이다.
전광석화 같은 원투 스트레이트에 눈이 좋고 발이 빠른 신준섭은 1회전에서 금메달 후보였던 우간다의 레트릭 리탄다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꺾으면서 큰 고비를 넘겼다. 이후 캐나다의 렉 테프, 나이지리아의 제레미아 오코로, 푸에르토리코의 아리스 티데스 등을 차례로 물리치고 결승전에 올랐다.
신준섭의 어부지리
그런데 신준섭의 결승전 상대는 심판의 편파판정을 등에 업고 올라온 미국의 버질 힐이었다. 버질 힐의 실력은 신준섭과 비슷했다. 그러나 권투와 같은 격투종목은 상대에 따라 실력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신준섭에게 버질 힐이 바로 그런 상대였다. 버질 힐은 신준섭처럼 원투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하는 데다 파워도 있었다. 경기 내용은 대등했다. 누구 손을 들어줘도 좋을 정도로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심판은 5명. 홈링의 이점을 감안하면 버질 힐의 손이 올라가도 할 말이 없는 경기였다.
그러나 결과는 그 반대였다. 신준섭이 3대2로 이긴 것. 이렇게 해서 한국 복싱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물론 신준섭의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김동길의 희생이 한몫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LA올림픽에서 미국은 한 대회 역대 최다인 83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종합 1위에 올랐다. 2위 루마니아(20개)와는 무려 63개나 차이가 났다. 이는 4년 전 소련이 2위를 차지한 동독(47개)보다 33개 더 많은 80개의 금메달로 종합 1위를 차지한 것보다 훨씬 좋은 성적이었다.
드물긴 하지만 미국 선수가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선수에게 억울하게 진 경우도 있다. 88서울올림픽 복싱 라이트 미들급 경기에서였다.
당시 한국 복싱 라이트 미들급 대표는 박시헌이었다. 라이트 미들급은 전세계적으로 강호들이 득실거리는 체급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라이트 미들급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더구나 박시헌은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스파링을 하다가 오른 주먹을 다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박시헌은 투혼을 발휘해 결승까지 올랐다. 상대선수는 미국에서 ‘제2의 슈거레이 레너드’라는 평을 듣던 레이 존스. 당시 경기에서 레이 존스는 일방적으로 앞서나갔다. 박시헌은 기량도 떨어지는 데다 스파링 때 입은 주먹 부상이 도지는 바람에 컨디션마저 엉망이었다.
드디어 3라운드 종료 공이 울렸다. 두 선수는 심판의 판정을 기다리며 링 가운데 섰다. 누가 봐도 레이 존스가 5대0으로 이긴 경기였다. 그러나 주심은 레이 존스가 아니라 그에게 무수히 얻어맞아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박시헌의 손을 들어줬다.
존스는 주심에게 강력하게 항의했고, 미국은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국제복싱연맹과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미국은 끝내 판정결과가 번복되지 않자 국제복싱연맹을 움직여 레이 존스를 ‘88서울올림픽 복싱 최우수선수’로 인정하도록 조정했다.
그러니까 88서울올림픽 복싱에서는 은메달에 그친 레이 존스가 12체급에서 금메달을 딴 12명의 금메달리스트를 제치고 최우수선수로 뽑히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스포츠 초강국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스포츠 외교력의 결과였다.
88서울올림픽 복싱에서는 한미간 희비가 엇갈렸다. 박시헌의 경우와는 반대로 한국의 라이트 플라이급 금메달 후보 오광수가 미국의 유망주 마이클 카바할에 억울한 판정패를 당한 것이다. 마이클 카바할은 빠른 발과 정확한 원투 스트레이트가 주특기인 수준급 복서였다.
그러나 오광수는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리스트답게 카바할에 앞서는 경기를 펼쳤다. 3라운드 종료 공이 울리자 미국 NBC방송 복싱중계팀의 페르디 파체코는 “경기 내용은 비슷하지만 오광수의 홈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카바할이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내용의 멘트를 내보냈다.
그런데 판정결과는 의외로 카바할의 3대2 승리였다. 한국 복싱선수가 홈링에서 유리한 경기를 하고도 미국 선수에게 판정으로 패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올림픽 남자배구에서도 한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1984년 LA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미국 남자배구는 세계배구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은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9위, 1982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대회 8위 등 보잘것없는 성적을 올리며 한번도 상위 입상을 하지 못했다.
반면 우리나라 남자배구는 1978년 이탈리아 세계선수권대회 4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과 1979년 멕시코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그런데 스포츠에 관한 한 ‘뭐든 한다면 하는 나라’인 미국은 1984년 LA올림픽 남자배구에서 금메달을 노렸다. 당시 미국팀에는 세계 배구사상 최고의 공격수 가운데 한 명인 커크 키날리(1m92cm)가 포진해 있었다.
미국은 높은 점프력과 날카로운 스윙으로 상대 코트를 초토화시킨 커크 키날리를 중심으로 탄탄한 팀워크를 이뤄 막강한 전력을 발휘했다. 마침 남자배구 강국이던 소련과 쿠바, 그리고 동구권 강호들이 출전하지 않은 것도 미국팀의 우승야욕을 부추겼다.
한국 떨어뜨리려 브라질에 일부러 져
당시 우리나라 남자배구팀은 역대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선수진이 화려했다. 컴퓨터 세터 김호철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장윤창, 왼쪽에 강만수와 고 강두태, 중앙에 문용관과 이종경, 그리고 ‘기관총’ 유중탁이 보조 공격수로 활약했다.
그런데 미국과 한 조에 속한 것이 불운이었다. 한국은 중국과 브라질에 각각 3대1, 튀니지에 3대0, 그리고 아르헨티나에도 3대1로 이겼다. 그러나 미국에는 0대3으로 패하고 말았다. 세트스코어는 0대3으로 완패였지만 경기 내용은 호각세였다. 매 세트 16대14, 15대13 등으로 접전을 벌였던 것. 다시 맞붙는다면 어느 팀이 이길지 모를 정도로 대등한 경기였다.
아무튼 미국은 강력한 우승후보인 한국을 이김으로써 4연승을 올렸다. 한국은 4승1패를 기록했지만 조2위까지 오르는 4강 진출은 낙관하고 있었다.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미국이 3승1패를 기록하고 있는 약체 브라질을 쉽게 이길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미국은 LA올림픽 남자배구 경기에 출전한 12개국 가운데 한국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실 한국도 다른 조의 1, 2위 팀인 이탈리아, 캐나다를 충분히 이길 만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4강에 오른다면 미국과 금메달을 다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미국은 브라질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커크 키날리 등 주전선수 6명을 모두 빼고 후보선수들만 기용했다. 그 결과 브라질에 0대3으로 완패했다.
한국은 브라질 미국과 4승1패로 동률을 이뤘지만 세트 득실에서 조 3위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눈뜨고 도둑맞은 격이었다. 미국은 결승전에서 다시 만난 브라질에 3대0으로 이겨 금메달을 차지했다.
한국의 주전공격수였던 장윤창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한국팀의 전력은 정말 막강했다. 어느 팀과 맞붙어도 이길 수 있었다. 설사 미국과 다시 만난다고 해도 자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장난으로 4강 진출이 좌절됐다. 정말 억울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한국 남자배구는 올림픽 4강은 물론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한번도 상위 입상을 하지 못했다. 체격조건이 좋은 소련, 유고,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유럽팀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쿠바 등 탄력이 좋은 중남미 국가들도 남자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김동성, 미국전 축구시합 현장응원 취소
2002한일월드컵축구대회에서도 한국과 미국은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펼쳤다. ‘다행히’ 무승부로 끝남으로써 악연으로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한국이 미국에 져서 그 때문에 16강에 오르지 못했다면 ‘오노 사건’ 등으로 무르익은 반미감정은 최고조에 이르렀을 것이다.
한국은 폴란드, 포르투갈, 미국과 함께 D조에 속했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은 예상을 뒤엎고 첫 경기에서 축구 강국인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각각 물리쳤다. 한국은 황선홍과 유상철의 릴레이 골로 폴란드를 2대0으로 제압했다. 미국도 포르투갈을 ‘펠레 스코어’인 3대2로 물리쳤다.
미국은 경기시작 3분 만에 ‘쌕쌕이’ 오브라이언 선수가 선취골을 터트렸고, 전반 29분 포르투갈의 자책골, 전반 35분 맥 브라이드의 그림 같은 헤딩골로 3대0으로 앞섰다. 포르투갈은 뒤늦게 반격에 나섰지만 2골을 만회하는 데 그쳤다.
만약 이 경기에서 포르투갈이 미국을 이겼다면 한국으로서는 미국과의 경기에서 그다지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1승을 올리는 바람에 만약 미국에 패하면 마지막 경기에서 당시 D조 최강으로 평가받던 포르투갈을 반드시 이겨야 했다.
2002년 6월10일 광주에서 벌어진 한국 대 미국 전은 축구 경기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한국축구 사상 최초로 월드컵 16강 진출 여부가 걸려 있는 데다, 그 해 2월 벌어진 2002 동계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경기에서 미국의 오노 선수가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을 ‘할리우드 액션’으로 빼앗아간 사건으로 미국에 대한 감정이 몹시 악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동성은 이날 미국과의 축구경기 때 현장응원을 계획했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김동성이 나타나면 관중이 흥분할 수도 있다’는 주변의 우려 때문이었다.
죽다 살아난 이을용
거스 히딩크 감독은 미국과의 경기에 폴란드전 멤버를 그대로 기용했고, 미국은 미드필더 레이나와 공격수 클린터 매시스를 새로 투입했다. 바로 그 클린터 매시스가 한국전에서 선취골을 터트릴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한국은 전반전 20분 미국의 클린터 매시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했다. 폴란드전에서 90분 내내 골을 허용하지 않았던 터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0대1로 리드당하던 전반 38분 황선홍이 미국의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제프 아구스에 걸려 넘어지자 마이어 주심은 한국의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프리킥의 명수 이을용이 키커로 나섰다. 그러나 그의 왼발 인프런트 킥은 미국 프리덜 골키퍼의 선방에 걸렸다. 후반 34분 안정환이 헤딩 동점골을 터트릴 때까지 현장에서 또는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헤매는 심정으로 ‘미국 타도’를 외쳐댔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한국야구팀은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박찬호의 양아버지 토미 라소다 감독이 이끄는 미국팀에 패해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다.
2000년 9월26일 시드니야구장에서 벌어진 한국과 미국의 야구 준결승전. 2대2 상황에서 9회말 투수 박석진이 미국의 미엔 키비츠에게 우측 담장을 넘는 솔로 홈런을 맞았다. 한국의 역전패였다.
한국이 선취점을 뽑을 기회를 잡은 것은 3회초였다. 선두타자 장성호가 사사구로 출루한 후 박진만이 좌익수 키를 넘는 2루타로 노아웃 2, 3루의 찬스를 만들었다.
정수근이 볼카운트 2-2에서 우익수쪽으로 희생플라이를 날리는 사이 3루주자 장성호가 홈을 밟았다. 한국은 계속된 찬스에서 이병규가 좌중간을 가르는 2루타를 터뜨려 1점을 추가했다.
선발투수 정대현의 호투 속에 2대0으로 리드하던 한국은 4회말 위기를 맞았다. 3회까지 단 1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으며 호투하던 정대현이 미국의 선두타자 윌커슨에게 우중간으로 빠지는 2루타를 내준 것이다. 닐의 내야땅볼 때 3루까지 진루한 윌커슨을 코튼이 좌중월 2루타로 불러들였다.
한국야구팀 울린 두 번의 오심
미국은 7회말 다시 득점기회를 만들었다. 원아웃 이후 킨카데가 3루 쪽으로 기습번트를 댔다. 3루수 김동주가 잡아 던진 볼은 1루수 이승엽의 글러브로 빨려들어갔다.
사단은 여기서 발생했다. 1루심이 태그플레이로 착각해 세이프를 선언하는 오심을 범한 것이다.
한국팀은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웬일인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약 이 항의가 받아들여졌다면 한국 야구역사가 바뀔 뻔했다.
한국의 김응용 감독은 잘 던지던 정대현 대신 좌완 송진우를 내보냈다. 송진우는 미엔 키비츠에게 우전안타를 허용했다. 이 사이 1루 주자 킨카데가 무리하게 3루까지 내달리다 오버런, 3루수 김동주에게 태그아웃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3루심이 세이프로 판정하는 오심을 연출했다. 그 탓에 한국은 주자 1, 3루의 위기를 맞았다. 누가 봐도 아웃인데 유독 3루심만 못 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젠슨이 중견수 쪽으로 희생플라이를 날려 스코어는 2대2가 되었다. 만약 오심이 없었다면 경기는 2대1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두 차례의 오심 때문에 강력한 우승후보이던 한국은 결승 진출에 실패해 금메달을 딸 기회를 놓쳤다.
일본과의 3, 4위전에서 이승엽이 일본의 마스자카 투수를 시원하게 두들겨 동메달을 따긴 했지만 한국으로서는 잇따른 오심으로 미국에 패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을 꺾고 결승에 오른 쿠바팀 전력은 국제대회 출전사상 최약체라는 평을 듣고 있었다. 미국전에서 두 차례의 결정적인 오심만 없었더라면 한국이 우승을 차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