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호

베트남 보트피플과 한국인 선장의 극적 상봉

“캡틴 전,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19년 동안 기도했습니다”

  • 김지현 재미 자유기고가 lia21c@hotmail.com

    입력2005-01-25 13: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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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통영의 평범한 멍게양식업자 전제용(65·全提用)씨가 ‘유엔의 노벨평화상’으로 불리는 난센상 수상후보에 올랐다. 20년 전 남중국해에서 표류하던 베트남 보트피플 96명을 구조해준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 특히 전씨와 당시 난민 중 한 사람인 피터 누엔(60)씨의 애틋한 사연은 시공을 넘어 잔잔한 감동을 던져준다. 두 사람은 지난해 8월 미국에서 19년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났다.
    베트남 보트피플과 한국인 선장의 극적 상봉

    미국 방문을 끝내고 귀국하는 전제용 선장(오른쪽)과 피터 누엔씨가 LA 공항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다.

    ‘붕~부우웅~.’ 1985년 2월10일, 전제용 선장은 힘찬 뱃고동소리로 참치잡이 원양어선인 ‘광명 87호(이하 광명호)’의 출항을 알렸다. 부산항을 떠나 인도양 어장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 최근 대지진이 발생한 바로 그 해역이다. 전 선장은 그곳에서 7개월 동안 400여t의 참치를 잡았다. 그 정도 어획고면 평소에 비해 좋은 편이었다.

    전 선장이 귀항길에 오른 건 그해 11월14일. 식료품 등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느라 싱가포르항에 정박해 하루를 쉬었다가 출항한 참이었다. 해가 막 넘어가는 오후 5시30분경, 싱가포르 동북쪽 200마일 지점의 남중국해상을 지날 무렵이었다.

    “선장님, 저게 뭡니까?”

    당직 항해사가 선박 좌측으로 떠내려가는 작은 목선 한 척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날따라 파도가 무척 높았다. 목선은 파도가 내려가면 보였다가 파도가 올라오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보트피플임이 분명했다. 광명호가 목선에 다가가자 배 위의 사람들이 손과 옷을 벗어 흔들어댔다. 구조해달라는 신호였다. 베트남이 패망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당시만 해도 공산 베트남을 탈출하는 보트피플이 줄을 잇고 있었다.

    ‘구조냐’ ‘무시냐’ 격론



    전 선장은 즉시 간부선원들을 소집했다. 광명호의 속력은 전속에서 중속으로 낮춰진 상태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긴급회의에선 ‘못 본 척할 것이냐’ 아니면 ‘구조할 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출항 전 회사의 지시사항은 ‘보트피플을 보더라도 무시하라’는 것이었다.

    토의가 벌어지는 10분 남짓한 사이 전 선장의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였다. 본사의 지시에 따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전 선장은 고민 끝에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기로 하고 간부들의 동의하에 ‘구조’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광명호의 뱃머리가 보트피플 쪽으로 향했다. 전 선장은 그 순간까지도 고뇌에 빠져 있었다. ‘난민들을 구조한들 표창받는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목선 위에는 10여명 정도의 사람이 나와 있었다. 전 선장은 우선 1등 항해사와 1등 기관사를 목선에 내려보냈다. 식수나 식량, 기름 등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럴 경우 부족한 식품이나 연료만 제공해주면 된다. 그렇게 해서 난민들이 자신의 목적지에 갈 수 있게 된다면 굳이 본사의 지시를 어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낡은 목선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엔진은 가동이 중지된 채 아예 수리가 불가능했다. 식량도 바닥이 났다. 표류상태로 나흘이나 지나면서 배는 이미 반 침수상태였다. 바다에는 벌써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항해사와 기관사의 보고를 받은 전 선장은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파도는 계속 몰아쳤고, 목선은 침몰 직전이었다. 구조가 시작됐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끌어올려졌다. 10여명 정도인 줄 알았는데 선창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힘들게 난민들을 모두 구조하고나자 사방은 이미 캄캄한 밤이었다. 전 선장과 선원들은 난민들을 안정시킨 다음 인원점검에 들어갔다. 난민은 총 96명. 그중엔 임신 8개월째인 임부도 있었다. 그 다음엔 광명호의 식량과 식수 등 재고 파악에 나섰다. 우선 남녀노소와 환자를 구분했다. 조리사는 수일간 굶은 난민들에게 갑자기 밥을 먹일 수 없어 우선 따뜻한 우유와 잼을 바른 식빵을 나눠주었다.

    난민을 부산에 입항시키지 말라

    광명호 선원들은 이어 자신의 침실을 난민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비워줬다. 전 선장은 보트피플의 리더 격인 피터 누엔씨와 가톨릭 신부를 꿈꾸는 신학생에게만 부녀자들 구역 출입을 허용하고 다른 선원들에게는 일체 출입을 금지했다. 그 바람에 선원 24명은 기관사 침실 4곳과 통신실에서 단체숙박을 해야 했다. 난민 중 남자들은 갑판에 천막을 치고 지내게 했다.

    갑자기 승선인원이 120여명으로 불어나 음식을 준비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난민 여성 중 2명이 부식준비 등 주방 일을 도왔다. 샤워실은 한번에 서너 명만 들어갈 수 있어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사용하도록 하고 남자들은 갑판에서 호스로 샤워를 했다. 전원이 모두 샤워를 하려면 꼬박 이틀이 걸렸다.

    광명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난민구조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선박 구조수칙에 입각해 일사불란하게 대처해 갔다. 전 선장은 선원들에게 난민들로부터 일체 물품을 받지 말라고 당부했다. 동전이나 지폐 또는 기념품 등 사소한 선물을 받는 것도 금지시켰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의사도 병자를 다 구하지 못한다. 좋은 일을 해놓고 절대 대가를 바라지 말라”고 강조했다.

    전 선장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본사인 고려원양에 보트피플을 구조하게 된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러면 본사는 해양항만청, 외무부, 안기부 등 관계부처에 즉각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고심 끝에 전 선장은 전날 밤 일어난 구조경위를 간략하게 작성해 본사에 타전했다. 예상했던 대로 본사는 ‘난민들을 부산항에 입항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보내왔다. 막막했다.

    하지만 보트피플 96명을 실은 광명호는 그 해(1985년) 11월26일 부산항에 무사히 입항했다. 한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난민들은 11월30일 부산 대한적십자 난민보호소에 수용됐다. 그리고 전 선장은 그날부로 하선조치 당했다.

    전 선장과 피터 누엔씨, 두 사람이 배에서 함께 지낸 날은 12일에 불과했지만 서로 깊은 신뢰를 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보트피플이 난민보호소에 수용된 지 2개월 후 전 선장은 누엔씨로부터 손수 만든 크리스마스카드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용인즉, “전 선장이 구조한 난민이 96.5명에서 97명으로 늘어났다”는 소식이었다. 그가 구조해 준 임부가 수용소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 전 선장으로서도 무척 기쁜 일이었겠지만, 그는 수용소를 찾지 않았다. 난민들이 부산 수용소에 남아 있던 1년 반 동안 단 한 번도. 그 후 전 선장과 난민들 간의 연락은 완전히 두절됐다.

    LA ‘리틀 사이공’의 영웅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2002년 5월 초 어느 날, 전 선장은 한 재미교포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미국에 있는 피터 누엔씨가 당신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전 선장은 누엔씨가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찾으려 애쓰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두 사람은 그 뒤 편지와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을 주고받다가 2003년 가을 무렵 서로 만나자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2004년 5월 전 선장은 누엔씨로부터 미국에 와달라는 초청장을 받는다.

    전 선장이 LA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날은 2004년 8월5일. 그때 이미 전 선장은 미국 내 한국교포 사회는 물론 베트남인 사회의 영웅이 돼 있었다. LA의 베트남 커뮤니티인 ‘리틀 사이공(Little Saigon)’의 최대 일간지인 ‘누이 비엣’지가 전 선장이 방문하기 1주일 전쯤인 7월27일, 20여년 전 한국인과 베트남인 간에 벌어진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휴먼스토리를 보도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는 베트남 보트피플 출신 피터 누엔씨가 20년 전 남중국해상에서 자신들을 구조해준 한국인 전 선장을 애타게 찾다가 마침내 연락이 돼 미국으로 초청했다는 내용이었다. 전 선장이 인도적인 난민 구조를 했음에도 선장직에서 쫓겨났다는 내용도 함께 실려 있었다.

    미담은 한인 언론과 미국 주류언론에 잇따라 보도되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보트피플이 주축이 된 미국 내 베트남 커뮤니티는 거족적인 ‘환영위원회’까지 구성할 정도였다.

    지난날 공산 베트남을 탈출해 보트피플이 되었던 사람들은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조를 외면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베트남의 주변 국가들조차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선창에 구멍을 내면서까지 항변에 나선 난민선박이 있었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전 선장이 보여준 행동은 리틀 사이공에서 ‘영웅’으로 칭송되기에 충분했다.

    리틀 사이공은 미국에서 베트남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코리아타운에서 동남쪽으로 약 60km 정도, 오렌지카운티의 ‘제2의 코리아타운’에서는 불과 몇 블럭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1975년 4월30일 수도 사이공이 공산 베트남 정권에 의해 호치민시로 이름이 바뀌자 미국에 정착한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타운 이름을 ‘리틀 사이공’으로 내걸고 잃어버린 조국의 상징으로 삼았다.

    2004년 8월5일 오후 4시경, 전 선장은 부인 김기자(47)씨, 막내딸 휘진(16)양과 함께 대한항공편으로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날 공항에는 한 시간 전부터 누엔씨 가족과 ‘전제용 선장 환영위원회’ 관계자, 그리고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베트남인들은 한글로 ‘전제용 선장님을 환영합니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나왔다.

    전 선장이 입국장에 모습을 나타내자 누군가가 “영웅이 도착했다!”고 소리쳤다. 입술이 타들어갈 만큼 애타게 기다리던 누엔씨는 그 길로 뛰어나가 전 선장을 왈칵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전 선장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누엔씨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전 선장은 “참 오랜만이야. 11시간이면 이렇게 만나는데…. 몸 건강한 걸 보니 정말 기쁘군” 하고 말하며 “땡큐”를 연발하는 누엔씨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19년이라는, 실로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만남의 순간이었다.

    베트남 보트피플과 한국인 선장의 극적 상봉

    1985년 전 선장의 구조를 받은 피터 누엔씨와 베트남 난민들이 부산 적십자난민수용소에서 찍은 단체사진.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 수용됐던 누엔씨가 LA ‘리틀 사이공’에 정착한 것은 1987년이다. 그때부터 그는 세 가지 목표를 갖고 살았다. 첫 번째는 안정된 직장을 구해 베트남에 있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전 선장을 찾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건 세 번째 목표였다. 가족을 데려오는 것보다 전 선장을 찾는 일이 그에게는 우선이었다. 전 선장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와 세 번째 목표는 이뤘으나, 전 선장을 찾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누엔씨는 한국인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전 선장 찾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부인과 주일마다 성당에 나가 그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2001년 말, 자신이 근무하는 페어뷰 병원의 동료직원인 김순자씨가 휴가차 한국에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누엔씨는 다시 한번 전 선장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감동받은 김씨는 한국의 친척들을 동원해 전 선장을 찾는 일에 적극 나섰고, 마침내 2002년 5월 제부로부터 경남 통영에 살고 있는 전 선장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소식을 들은 누엔씨는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세 가지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에 감사했다. 그 순간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1945년 1월1일 베트남 북부 쾅빈성에서 태어난 누엔씨는 10세 때 부모를 따라 공산 월맹을 탈출해 남쪽 다낭에 정착해 살았다. 그는 신부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24세 때인 1968년 월남군에 입대해 1973~75년까지 합동군사위원회의 연락장교(중위)로 근무하면서 파리협정위반사항 및 포로교환업무를 담당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던 1975년 4월30일, 사이공에 있던 누엔은 월맹군 탱크가 진입하는 광경을 허탈한 심정으로 바라봤다. 길거리에선 시민들이 흐느껴 울었다.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그는 월남군 근무경력 때문에 체포돼 6년 동안 정치범 재교육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수용소에서 풀려나왔을 때, 그의 집은 이미 공산당 간부가 차지하고 있었다. 후환이 두려웠지만 요시찰 인물로 찍혀 거주지에서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었다. 신분을 바꿔야 했다. 그는 공산당 간부에게 뇌물을 주고 교사자격증을 구입했다. 안경을 쓴 자신의 모습이 군인보다는 교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남쪽의 롱탄이라는 지방으로 이주해 교사와 농사일을 겸하며 연명해 갔다. 시간이 갈수록 형편은 더욱 악화돼 가기만 했다. 아내가 아파도 약을 살 수가 없어 인근 절에서 구한 약초를 먹여야 했다. 그 지역에서도 공산당의 잔인무도한 행위와 위선적인 행동은 끊이질 않았다.

    공산 베트남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 누엔씨는 결국 탈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탈출은 고사하고 작은 목선을 타고 공해상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탈출자금도 문제였지만 자칫 가족 모두가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들에게 이 같은 이유를 설명하고 혼자 떠날 것을 결심했다. 가족들은 ‘나중에 데려가겠다’는 그의 말을 믿었다.

    1985년 11월10일 밤, 드디어 기회가 왔다. 누엔씨는 가족들과 작별의 키스를 나누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칠흑 같은 밤이었지만, 붕타우 인근 해안은 목선을 타려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목선이래야 조그마한 통통배에 불과했다. 남녀노소 그리고 갓난아기까지 모두 96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배에 올라탔다. 정원을 한참 초과한 숫자였다. 이들은 배를 타기 전 선주에게 돈을 지불해야 했다. 사람마다 모두 뱃삯이 달랐는데, 목선 선주와 안면이 있는 사람은 조금 깎아주기도 했다. 다만 영어를 할 수 있었던 누엔씨는 예외였다. 바다에서 외국 선박을 만날 경우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미국에 정착한 누엔씨는 뱃삯 2000달러를 모두 갚았다고 한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그보다 훨씬 높은 뱃삯을 지불했다고 한다.

    한밤중에 바다로 나간 목선은 남쪽으로 향했다. 인도네시아 쪽인지 말레이시아 쪽인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렇게 나흘 밤낮을 항해하던 목선은 기상이 악화되면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식량과 식수 그리고 기름이 바닥난데다 엔진마저 고장을 일으켜 망망대해에서 둥둥 떠다니는 신세가 됐다. 공해상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탄 목선은 적어도 20여척의 외국 선박들을 만났다. 그러나 하나같이 못 본 척 지나쳐버렸다.

    표류한 지 나흘째인 11월14일 오후 4시30분경, 폭풍이 오려는지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그 때 대형 선박 한 척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선원들이 손을 흔드는 것을 보니 구조해주려는 것 같았다. 난민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그 선박도 그냥 지나쳐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그 후 1시간 쯤 지나자 또 한 척의 대형 선박이 나타났다. 난민들은 또다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그 선박 역시 아무런 반응 없이 계속 북진했다. 그런데 잠시 뒤 선박이 회항을 하는 것이 아닌가. 누엔씨의 설명이다.

    “5~10분이 지났을 무렵 그 선박이 갑자기 회항하더니 10여m 거리까지 다가왔다. ‘코리아-부산’이라는 선적명이 보였지만 그게 남한인지 북한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가에 손을 모으고 큰 소리로 ‘어느 나라냐’고 국적을 물었다. ‘코리아’라는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다시 ‘남한이냐 북한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남한’이라는 답이 왔다. 그 말에 우리는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나의 세 번째 질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좋아하느냐’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공산국가인 북한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자꾸만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됐든 당시에는 그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누엔씨의 메모장에 적힌 내용의 일부다.

    “전제용 선장은 부녀자와 아이들을 극진히 대접했고 선원들도 우리에게 자신들의 음식과 의복을 나눠주는 등 부산까지 항해하는 12일 동안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는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 있을 때 까만색 비닐 커버의 메모장을 구해 수기를 적었다. 2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빛이 바랜 메모장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다.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진도 그 안에 들어 있다. 바로 전 선장이 키를 잡고 있는 사진이다. 20여년 전 헤어질 때 전 선장이 기념으로 준 것이다. 그는 수기에서 “공산주의의 독재정치는 나에게 자유를 위한 탈출을 강요했다”고 적고 있다.

    누엔씨는 “부산항에서 상륙 수속을 하는 동안 외부인들이 광명호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러나 우리들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한국에 도착했다는 신기함과 자유를 찾아 곧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겠다는 희망으로 부풀었다”며 “그 외부인들이 전 선장과 선원들을 조사한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로부터 1년6개월 후 필리핀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다.

    황해도가 고향인 전 선장은 1·4 후퇴 때 자유를 찾아 부모와 함께 월남해 경남 통영에 정착했다. 그는 1969년 2등 항해사로 선원생활을 시작해 1975년부터 선장으로 일했다. 고려원양에 입사해 ‘광명 87호’ 선장이 된 것은 1985년 2월. 고려원양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일으킬 때 민간인으로 협력했던 이학수씨가 혁명정부의 후원으로 설립한 회사다. 당시 이 회사는 원양어업을 개척해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신이 구조하라고 했는지도…”

    전 선장은 보트피플 구조사건 때문에 고려원양에 입사한 지 불과 10개월 만인 1985년 11월30일자로 하선조치 당했다. 사실상 해고였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 한창 일할 나이였다. 원래 계약기간은 10년이었다.

    전 선장은 또 안기부(현 국정원) 등 정부관계 부처로 불려가 세 차례나 조사를 받아야 했다. 보트피플이 베트남 난민인지, 공산월맹군이 난민으로 위장한 것인지, 왜 그들을 구조했는지,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었는지, 아니면 영웅심에서였는지, 혹시 대가를 받았는지 등에 대한 조사였다. 동료선원들도 조사를 받았으나 별다른 혐의가 없어 나중에 모두 풀려났다.

    전 선장은 “그후 집에서 쉬면서 인생공부를 했다”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난민을 구조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3년 후인 1988년 8월 전 선장은 다시 배를 타게 됐다. 맥산 소속의 ‘유니코리아 300호’의 선장으로 키를 잡은 것. 그는 1993년 5월 선장직을 끝내고 맥산 부산지사에서 1년간 근무한 후 25년간의 선원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부터 지금까지 통영에서 멍게양식장을 하고 있다.

    보트피플을 구조한 지 19년이 지난 지금 전 선장은 평범한 양식장 운영자다. 하지만 베트남인들에게 그는 여전히 “캡틴 전(전 선장)”이다. 전 선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항해일지에는 모든 사항을 기록해놨으나 이번 미국에 올 때는 이곳에서 인터뷰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면서도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회고했다.

    먼저 전 선장에게 난민을 구해준 후 한번도 면회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안 간 것인지, 아니면 못 간 것인지. 그러자 전 선장은 “못 갔지. 어떤 사람들이(정부관계자를 지칭하는 듯) 나서지 말라고 하데…”라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더 물어보려 하자 전 선장은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새삼 우리 정부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며 말 끝을 흐렸다. “그때는 왼쪽에서 무슨 일이 나면 오른쪽을 보고, 오른쪽에서 무슨 일이 나면 왼쪽을 바라보는 게 상책이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하며 답을 대신했다.

    베트남 보트피플과 한국인 선장의 극적 상봉

    지난 1985년 ‘광명 87호’ 선장실의 전 선장. 피터 누엔씨는 이 사진을 가보처럼 지니고 있다.

    전 선장은 당시 회사의 방침을 어기면서 구조명령을 내린 것에 대해 “내가 조금 용기가 있었던 모양”이라며 “설마 날 죽이기라도 하겠는가 하는 심정이 발동했던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또 “그 많은 친구들을 보고 어떻게 지나칠 수 있었겠냐”고 반문하면서 “만약 모른 척하고 지나쳤더라면 저승 갈 때까지 두고두고 후회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로 얼굴도 모르지만 세상에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요즈음 간혹 TV 방송을 보면 한국 유학생이 일본인을 구출해냈다든가, 철로에서 어린이를 구하고 하반신이 절단된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도 있는데 당시 그 많은 베트남 난민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면 너무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라며 “신이 있다면 그 순간 내게 그들을 구조하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리틀 사이공’ 사상 최초 환영행사

    전 선장 가족은 16일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베트남 커뮤니티는 물론 한인동포사회와 미 주류사회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디즈니랜드와 LA 다저스로부터 VIP로 초청받았고, 미 연방 하원의 에드 로이스 의원은 전 선장을 ‘UN 난센상’ 후보로 추천했으며, 미 정치인들과 각계에서 받은 공로패와 감사패, 기념패만도 20여개나 된다. 전 선장 가족은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여러 곳으로부터의 초청 일정 때문에 기진맥진할 정도였다.

    8월8일 베트남과 한인 커뮤니티가 공동으로 마련한 리젠트 웨스트 레스토랑에서의 ‘전 선장 환영대회’에는 1000여명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장 중앙 연단 벽에 걸린 노란색 바탕의 현수막에는 한글로 ‘우리에게 복된 삶을 안겨준 전 선장님! 당신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1-14-85’라고 써 있었다. 11-14-85는 1985년 11월14일에 구조됐다는 의미다. 행사장에는 한국, 베트남 그리고 미국 현지 언론의 취재진 50여명이 몰려들었다. 감색 정장 차림의 전제용 선장과 베이지색 개량한복을 차려입은 부인, 그리고 막내딸 휘진양이 입장하자 장내엔 박수와 환호성이 울렸다. 전 선장 부인의 왼쪽 가슴에는 전날 누엔씨가 사서 달아준, 자유월남 국기가 새겨진 브로치가 반짝이고 있었다.

    전 선장은 이 자리에서 “당시 그 상황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나와 같은 일을 했을 것이고,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다”라고 겸손해하면서 “신의 은총으로 보트피플을 발견해 건져올린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좋은 날을 계기로 한인 사회와 베트남 사회가 서로 의지하고 협력해 다른 이웃과 국가에 좋은 일을 해주기 바란다”며 연설을 맺었다. 열렬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이날 여흥순서에서 한인과 베트남 여성들은 서로의 민속의상을 바꿔 입고 ‘아리랑’과 ‘너와 함께’(베트남 민요)를 불렀으며, 베트남 극단은 전 선장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꾸며 그에게 바쳤다.

    행사장에는 전 선장이 구조한 96명 중 한 사람인 트랜 동씨가 멀리 루이지애나주에서 달려와 참석했다. 루이지애나에서 일식당을 운영한다는 그는 “오늘 이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전 선장 덕분”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날 행사에 자원봉사자로 나선 트랭다이 트랭구엔(베트남 프로젝트 연구관)씨는 “오늘의 환영축제는 리틀 사이공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행사”라며 흐뭇해했다. 또한 ‘전제용 선장 환영회’를 주관한 켄 누엔 리틀 사이공 재단 회장은 “베트남 커뮤니티와 이웃한 코리아타운과 지금까지 특별한 교류 없이 지내왔다”면서 “전 선장의 이번 방문이 두 커뮤니티를 잇는 가교역할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19년 만의 고백

    전 선장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날 밤인 8월20일, 숙소에서 누엔씨와 마주앉았다. 탁자에는 소주와 오징어가 놓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소주 한 모금을 넘긴 누엔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젠 내가 고백할 차례”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지난번 편지에 96명의 난민 중 많은 사람이 당신을 오기를 고대하니 꼭 미국에 오라고 했는데, 사실 전 선장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중 10여명과 연락이 닿았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관심을 보이지 않아 너무 가슴이 아팠다. 너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전 선장은 “많은 사람이 나를 환영한다고 해서 미국에 온 것이 아니다. 피터, 당신 한 사람만으로도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사실 고백은 전 선장이 먼저 했다. 전 선장은 2002년 누엔씨로부터 편지를 받고 그 해 10월에 보낸 회신에서 16년간 가슴에 묻었던 ‘부끄러운 이야기’ 두 가지를 적었다.

    1985년 11월14일. 회사는 베트남 난민을 데리고 부산항에 입항하는 것을 강력히 만류했다. 난민을 무인도나 인근 섬에 하선시키고 귀국하라는 것이 회사의 지침이었다. 난민 구조로 선원들에게 후환이 미칠까 두려웠다. 그래서 전 선장은 선원들과 갑판에서 판자와 드럼통으로 100여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뗏목 만드는 망치소리가 전 선장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난민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눈치챘을까?’ 결국 전 선장은 회사 방침이 국제법에 위배되기에 본사의 부당한 처사에 따르지 않겠다고 통보하고 부산항으로 향했다.

    그의 두 번째 고백은 난민들이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서 생활하는 동안 비록 자신에게 ‘면회금지’와 ‘2년 반 동안 승선금지’ 등이 내려졌지만, 그렇다고 한번도 찾아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전 선장의 고백편지를 받은 누엔씨는 아내와 함께 큰 소리로 울었다. 자신들 때문에 전 선장이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내왔던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광명호 선원들은 가끔 난민보호소에 들렀는데 유독 전 선장만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도 비로소 알게 됐다.

    누엔씨는 “만약 전 선장이 편지에서 뗏목을 만든 이유를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모르고 살았을 것”이라며 “고백하지 않아도 될 일을 솔직하게 말해준 전 선장의 용기에 다시 한번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갑판에서 선원들이 뗏목을 만들고 있는 광경을 보긴 했지만 구조된 우리를 태워 무인도에 보내려고 하기 위해서였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김치 만드는 베트남인

    필자는 전 선장 가족이 귀국한 후 누엔씨의 자택을 방문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거실 한편에는 십자가와 성모상 등 성물들이 자리잡고 있고, 다른쪽 벽면에는 전 선장이 미국 방문 때 언론에 소개된 기사들을 담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 날 그의 집에 흐르던 음악도 한국 성가였다.

    지난 연말에 그는 “한인 마켓에서 김치 만드는 법을 물어 직접 만들어봤다”며 “김치냄새가 나지 않냐”며 즐거워했다. 매일 아침 성당 미사에 참석하는 누엔씨 부부는 전 선장 가족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고 산다.

    누엔씨는 전 선장이 미국에 머무는 동안 매일 밤 일기를 썼다. 그는 벌써 그와 전 선장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의 워너브라더스사로부터 영화 제작 제의도 받았다. 그는 “우리를 구조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준 ‘광명 87호’의 다른 선원들도 보고 싶다”며 “당시 부산 적십자 난민보호소에서 만난 한옥주 간호사와 대학생 자원봉사로 나섰던 변영해씨도 꼭 찾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새로운 목표는 앞으로 미국 내 96명의 보트피플과 연락해 매년 11월14일을 ‘부산 데이(Busan Day)’로 정하는 것이다. 올해는 전 선장을 만나러 2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할 계획도 세웠다. 요즈음 그는 한국어 테이프를 구입해 한국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한편 리틀 사이공 베트남인들은 오는 3월 스위스 소재 유엔 난민고등판무관(UNHCR)으로부터 기쁜 소식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12월20일 UNHRC ‘난센상 심사위원회’로부터 “한국인 전제용씨가 2005년도 난센상 후보로 공식 선정됐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누엔씨는 “올해 전 선장이 난센상을 받을 수 있는 행운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전 선장 본인은 자신이 난센상 후보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나중에야 알았다. 한국인이 최초로 이 상 수상후보로 올랐다는 뉴스가 보도된 직후 여러 언론사로부터 인터뷰 요청과 이웃들의 축하인사가 쏟아지자 그때서야 자초지종을 알았다는 것. 전 선장은 “나는 그런 상을 받을 인물이 아니다. 나보다는 누엔 같은 사람이 받아야 할 상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전 선장이 지난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영웅이 아닙니다. 단지 작은 용기와 결단이 그들을 구조하게 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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