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지닌 치명적인 매혹이 있다. 왠지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제 맛(?)일 것 같은 낭만적인 환상을 심어준 괴테의 출세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베르테르 효과’라는 불명예스러운 신드롬을 탄생시켰다. 베르테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비극적인 죽음의 충분한 사유가 된다는 위험한 환상을 유포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또한 이에 못지않은 절절한 문체로 비극적인 짝사랑이 파괴해버린 한 젊은 영혼의 고백을 담고 있다. 대답이 없을수록, 기약이 없을수록, 희망이 없을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 짝사랑의 기이한 매혹이다.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나’와 ‘그/그녀’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그/그녀의 달콤한 눈빛 속에 있다. 오직 다른 사람의 품에서만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그/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치유 불가능한 외로움이 짝사랑의 실질적인 콘텐츠다. 짝사랑의 ‘현실’은 지독한 외로움이며, 짝사랑의 ‘이상’은 오직 공허한 망상 속에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짝사랑과 가장 친밀한 감정은 외로움이다. 타인을 향한 마음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깊어지는 외로움을, 마음속에 ‘두 사람’이 함께 살게 되자마자 더욱 외로워지는 뼈아픈 역설을, 우리는 저마다 고통스러운 통과의례의 기억으로 간직한 채 어른이 되어간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일으킨 파장은 어디를 가나 극단적인 것이었다. 재판의 제2부 앞머리에는 “사나이다우시오! 그리고 나를 따르지 마시오!”라는 작가의 글이 실렸다. 베르테르 열병, 베르테르 유행, 베르테르 모방자(Wertheriade) 같은 신조어들이 생겨났다. 고통에 찬 삼각관계가 유행하고, 베르테르 향수가 나왔으며, 베르테르와 로테의 초상화는 부채, 도자기, 찻잔, 동판화 등의 도안으로 쓰였다. 베르테르가 입었던 푸른 연미복에 노란 조끼와 바지가 유행했고, 예루살렘(괴테가 베르테르의 모델로 삼았던 인물로 알려진 인물)의 묘지에서는 베르테르의 추모제가 열렸다. 심지어는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자까지 속출했다. 이 같은 열광적인 찬사와 아울러 이 작품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광적인 거부도 있었다. 이 소설은 “성직자들은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는 말로 끝맺고 있는데 특히 정통파 신학자들은 이 작품이 자살을 찬양한다는 이유로 ‘사탄의 미끼’라고 비방했다.
-정두홍,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수용에 관한 연구’ 중에서
낭만적 환상의 인큐베이터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대상을 향한 안타까운 응시 속에서 점점 통제할 수 없는 열정으로 치닫는 짝사랑의 맹목. 그것은 어떤 만족스러운 보답도 받을 수 없고 어떤 희망적인 약속도 바랄 수 없기에 더욱 순수한 열정으로 기억되곤 한다. 무한 쾌락과 무한 고통이 동시에 찾아드는 기이한 열정을, 사람들은 짝사랑이라는 마음의 열병을 통해 배운다. 짝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만이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심장 깊숙이 새겨졌다. 이 순간 나는 그녀가 슬퍼하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이라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투르게네프, ‘첫사랑’ 중에서
짝사랑의 가장 좋은 점은 데이트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우스갯소리는 꽤 의미심장하다. 짝사랑은 서로의 합의 아래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과 달리 ‘세속적인 현실’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데이트 비용뿐 아니라 그/그녀와 함께 할 ‘현실적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보금자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할 필요가 없고, 그들 사이에 태어날 아이의 미래를 위한 저축을 들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오히려 사랑이라는 비상구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도망친다. 짝사랑의 중력장 안에 있는 한, 그들은 낭만적 환상의 인큐베이터 속에 안전하게 머물 수 있다. 그들에게 사랑은 원치 않는 세계로, 경쟁자와 속물들이 가득한 위험한 세계로 나아가고 싶지 않은 현실도피 심리에 탈출구를 제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