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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美-中 수교를 빛낸 중국 명주 마오타이

닉슨과 마오쩌둥의 만남

역사적 美-中 수교를 빛낸 중국 명주 마오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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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닉슨과 마오쩌둥의 역사적 만남으로 죽(竹)의 장막에 갇혀 있던 중국이 처음 세계에 얼굴을 내밀 때, 그 현장에는 마오타이주(茅台酒)가 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 작업을 준비했던 보좌관은 “마오타이주를 직접 마시면 곤란하다. 건배 제의가 있더라도 입에 갖다 대는 시늉만 하라”고 건의했지만, 닉슨은 얼굴을 잠깐 찡그린 뒤 술을 다 마셨다. 마오쩌둥이 홍군을 이끌고 대장정을 할 때, 마오타이주의 고장인 마오타이진 주민들은 홍군에게 이 술을 건네며 장정의 고단함을 달래주었다.
역사적 美-中 수교를 빛낸 중국 명주 마오타이

1972년 2월21일 중국 베이징에서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오른쪽)이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최근 한 일간지에 ‘부끄러운 역사도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제목으로 미국 닉슨 대통령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인용한 이 글은 1974년 그의 사임을 몰고 왔던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 상설 전시장이 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남부 요르바 린다에 있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안에 설치됐다는 내용이었다. 닉슨 도서관장이자 워터게이트 갤러리 큐레이터인 티머시 나프탈리는 “닉슨 대통령이 미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임기 중 사임했다는 걸 고려하면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라는 복합적인 사안들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미국의 제37대(재임 1969~74)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1913~94)은 많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업적에 비해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일례로 200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그때까지의 역대 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평가 순위에서 닉슨은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과 함께 공동 37위를 기록해 여느 여론조사에서와 다름없이 ‘워스트 텐’(Worst 10)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닉슨은 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1953~61)한 뒤 대통령 재선에도 성공한 유일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 첫 재임기간에는 베트남전쟁을 종결시키고 중국과 구(舊)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끈 업적으로 1973년 재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1969년 발표한 그의 대아시아 외교 정책은 닉슨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에 널리 알려지며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의 전도를 결정적으로 망친 것이 앞서 말한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974년 8월9일 대통령직에서 떠난 닉슨은 그 후 내내 미국 역사상 초유의 임기 중 사퇴라는 불명예의 멍에를 지게 된다.

닉슨은 1913년 캘리포니아 주 요르바 린다에서 출생했다. 휘티어대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뒤 듀크대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1937년 캘리포니아에 돌아와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지원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군에서 그는 활약을 인정받아 소령까지 진급했다.



부통령과 대통령 각각 재선에 성공한 닉슨

종전 후인 1946년 캘리포니아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하원의원 시절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대표적인 우파 반공주의자로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국무부의 고위 관리였던 앨저 히스의 구소련 간첩 활동 진상 파악도 그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정치적 명성에 힘입어 1950년 상원의원이 됐고, 1952년 선거에서는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1890~1969)의 러닝메이트로 40세의 나이로 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부통령 중 한 사람이 됐다. 그는 이어 1956년 선거에서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그야말로 실패를 모르는 승승장구의 정치 과정을 밟는다.

1960년 닉슨은 마침내 그의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제35대 미국 대통령선거에 도전한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무난히 승리를 거둔 닉슨은 그러나 본선 무대에서 민주당 후보로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1917~63)라는 걸출한 인물을 상대한다. 풍부한 경륜을 앞세운 닉슨과 젊은 피를 앞세운 케네디 간의 대결은 시종일관 접전이었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신매체로 선거전에 등장한 후보자 TV토론은 승리의 추를 케네디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결 젊고 매력적인 케네디의 이미지는 토론 내용에 관계없이 닉슨을 압도했다. 더구나 네 번의 토론 중 첫 번째에서는 닉슨의 몸 상태까지 좋지 않았던 탓에 그런 분위기가 더욱 강조됐다. 결국 선거 결과 닉슨은 전체 유권자 투표에서 불과 0.2%(12만표) 뒤지는 차이로 케네디에게 패배하고 만다.

선거에 패배한 닉슨은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변호사 일과 함께 저작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다 1962년 주위의 권유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선거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는 현역 민주당 후보에게 또다시 아픈 패배를 당한다. 많은 정치 평론가는 이번 패배야말로 닉슨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닉슨 자신도 선거 패배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자회견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절치부심하던 닉슨은 오랜 기다림 끝에 1968년 대통령선거에 재도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부통령이던 민주당 허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1911~78)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오랜 정치적 꿈을 이루게 된다. 그의 첫 4년간의 재임 기간(1969~73)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의 점진적인 개입 중단과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등 국제 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 정책에서도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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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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