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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

시인 이육사와 딸 옥비 여사의 고향 마을 안동 원촌

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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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인 이육사의 땅에 그의 외동딸 옥비 여사가 살고 있다. 앞에 강이 흐르고, 뒤에 산이 둘러쳐진 풍수적 길지다. 퇴계 후손들이 대대로 군자가 되기를 염원하며 살아온 곳. 아버지의 강직함을 속으로 이어받은 외유내강형 딸이 소박하지만 꼿꼿한 삶을 보여준다.
강하고 향기로운 문학 낳은 지조의 땅

이육사문학관을 지키고 있는 딸 옥비 여사.

이름이 ‘옥비’인 분이 경북 안동에 살고 있다. 한자로는 ‘沃非’다. ‘기름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와 ‘윤택하게 살지 말라’는 당부가 담긴 이름이다. 시인이고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는 1941년, 막 백일이 된 딸에게 ‘옥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3년 후 중국 베이징의 추운 감방에서 고문받은 흔적이 역력한, 피투성이의 몸으로 세상을 떠난다. 광복을 1년 앞둔 시점이었다. 그는 베이징으로 압송되기 직전, 세 살짜리 딸을 껴안고 “아빠 갔다 오마!”라고 볼을 비볐다. 그 아기 이옥비가 올해 일흔 살이 되었고 ‘여사’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안동 원촌의 이육사문학관을 지키고 있다.

나는 진작부터 이옥비 여사에 관련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해마다 1월16일 조촐하나 진지하게 열리던 순국 추모행사에도 참석하곤 했다. 동지 지나고 한 달 후쯤이면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씨가 이어진다. 그날 육사를 추모하는 이들은, 들어올 땐 추위에 퍼렇게 질렸다가 곧이어 회한과 참담과 자괴로 다시 벌겋게 상기되곤 했다. 그들은 곁에 앉은 사람과 “베이징은 안동보다 얼마나 더 추웠겠느냐, 이런 날 감옥에서 온몸에 피가 낭자하도록 얻어맞으며 버틴 힘은 과연 무엇이었겠느냐, 그렇게 목숨을 바쳐가며 이뤄낸 독립인데 우린 지금 제대로 잘하고 있는 거냐” 같은 말을 낮은 소리로 두런거렸다. 그럴 때 이옥비 여사는 단상 아래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해맑을 정도로 담담히 감정을 갈무리하는 육사의 한 점 혈육을 보며 참석자들은 섣불리 눈물을 보일 수도 없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와 딸

육사 이활, 또는 이원록! 그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남긴 시로 ‘청포도’와 ‘광야’와 ‘절정’이 있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 이육사가 어떤 고난을 겪었으며 그의 이상은 과연 무엇이었으며 후손들은 어떻게 삶을 꾸려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갖기에는 우리 현실이 너무 팍팍하거나 너무 여유가 없다. 또 우리는 역사에 무관심하다. 하긴 역사랄 것도 없다. 바로 엊그제같이 손에 잡히는 이야기가 아닌가.

“1943년 봄에 베이징에 가셨는데 7월 할머니와 맏아버지 소상에 참여하러 안동에 오셨다가 붙잡혀서 다시 베이징으로 끌려가신 모양이에요. 국내가 아니라 베이징으로 압송된 걸 보면 충칭과 옌안 등지에서 무기를 사서 국내로 반입하려는 계획이 탄로난 것 같아요. 체포되기 전 어머니께 세상이 좋아지면 쓸 일이 있을지 모른다며 러시아 지폐를 몇 장 주셨대요. 아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서 난생처음 받아본 돈이었을 거예요. 그것도 나중에 순사에게 뺏겨버렸다지요.”



내가 옥비 여사에게 듣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 육사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할머니와 어머니에 관한 기억과 딸인 옥비 여사 자신의 삶이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남자들이 서울로, 만주로 떠나간 후 빈집과 조상과 아이들을 지켜야만 했던 여자들의 사연은 역사의 뒤켠으로 사라져버린다. 옥비 여사가 더 나이 들기 전에 그 이야기들을 기록해둬야 할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독립운동 하는 남편을 둔 요시찰 인물이니 순사가 자꾸 어머니를 찾아왔대요. 어머니는 ‘나는 소박데기다. 설령 남편이 조선에 와도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대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잡혀가서 면회를 갔더니 그 순사가 소박데기가 어찌 면회를 오느냐고 따졌대요. 어머니는 조선은 예가 높은 나라다, 암만 소박을 맞아도 남편이 고초를 당하는데 돕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하면 ‘소데스까’하면서 물러선대요.”

2004년 육사문학관 개관 당시 옥비 여사는 일본에 있었다. 니가타 총영사관 사택에서 한식(궁중음식)과 꽃꽂이를 담당하고 있었다. 막 위암 수술을 끝낸, 38㎏의 몸으로. 궁중음식은 어머니께 배운 솜씨였고 꽃꽂이는 평생 의탁해온 취미였다.

“남편(양진호씨)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요. 쌍둥이 손자들이 왔다가서 배웅하고 들어오니 방금 멀쩡하던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더군요. 우린 평생 참 의좋게 살았어요. 제가 하겠다고 하면 뭐든지 밀어줬고 언제나 제 기를 살려주는 남편이었어요. 평생 곁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견딜 수가 없데요. 암 걸린 나를 살려놓고 자기만 가버렸으니…. 마침 총영사관이 직원을 구하고 있다기에 지원을 했지요. 아무도 없는 곳에 가고 싶었어요.”

그때가 옥비 여사 나이 쉰아홉이었다. 영사관에서 3년을 일했고 일본 전역에 김치를 판매하는 대리점에서도 일했다. “원래는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어요. 아들이 둘 있지만 혼인해서 각자 살고 있으니 내가 필요할 시기도 아니고! 기념식에 참석하러 잠깐 나왔던 거예요. 그러나 원촌에 와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산천도 좋고 인심도 좋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생겼다는 것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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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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