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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열강 거부한 민족주의적 개혁론자 이건창, 서구적 개혁 추구한 근대인의 초상 서재필

이건창과 서재필

서구열강 거부한 민족주의적 개혁론자 이건창, 서구적 개혁 추구한 근대인의 초상 서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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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창은 조선 말에 활약한 양명학자이고, 서재필은 조선 말부터 해방공간까지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두 사람 모두 개혁을 추구했지만 방법론은 크게 달랐다. 민족주의자인 이건창은 서구열강에 반대하는 주체적 개혁을, 서재필은 서구문명을 적극 받아들이는 외세적 개혁을 추구했다.
서구열강 거부한 민족주의적 개혁론자 이건창, 서구적 개혁 추구한 근대인의 초상 서재필

강화도 화도면에 복원된 이건창 생가.

어느새 이 기획도 절반이 지났다. 원효와 최치원으로 시작한 우리 지식인들의 시대정신 모험은 이제 조선사회의 막바지에 도달했다. 영·정조 시대부터 우리 지식인들의 최대 화두는 근대화였을 것이다. 근대화는 다름 아닌 근대성, 다시 말해 모더니티를 이루는 것이다.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정치적 민주주의, 경제적 자본주의, 그리고 문화적 현대주의(모더니즘)를 가리킨다(여기서 말하는 모더니즘이란 예술사조로서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개인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포괄하는 가치 및 정신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뜻한다).

모더니티로 가는 길에서 1876년 개항은 중대한 분수령을 이룬다. 그것은 나라의 문호를 열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낯선 존재였던 서양인과 서양 문물을 문을 열어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방향의 발전을 모색하겠다는 것에 개항의 의미가 담겨 있다. 물론 우리에게 개항은 자발적인 게 아니라 타율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결국 이러한 타율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식민화의 길로 나아갔다.

모더니티로 가는 길

개항이 이뤄진 1876년부터 일제 식민통치가 시작된 1910년에 이르는 30여 년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시간의 하나다.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운동(1894), 갑오개혁(1894), 대한제국 선포(1897), 그리고 일련의 의병항쟁 등의 흐름은 전통과 모더니티의 경계에서 우리 사회가 모더니티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서온 것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오호라, 작년(1905년) 10월에 저들이 한 행위는 만고에 일찍이 없던 일로서, 억압으로 한 조각의 종이에 조인하여 500년 전해오던 종묘사직이 드디어 하룻밤 사이에 망하였으니, 임금이 없으면 신하가 어찌 홀로 있을 수 있으며, 나라가 망하면 백성이 어찌 홀로 보존될 수 있겠는가. 나라가 이와 같이 망해 갈진대 어찌 한번 싸우지 않을 수 있는가. 또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어서 충의의 혼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면암 최익현이 1906년에 쓴 의병 격문이다. 모더니티로 가는 길은 망국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했다. 새롭게 열리는 모더니티의 세계 속에서 첫 번째로 살펴보려는 두 지식인은 이건창과 서재필이다. 이건창은 고종 시대에 활약한 양명학자이며, 서재필은 고종 시대부터 해방공간까지 활약한 독립운동가다.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상징성에 있다. 이건창이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변화를 모색하던 지식인이었다면,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를 대표하던 독립운동가였다.

이건창은 1852년(철종 3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이조판서를 지낸 이시원이 할아버지이고, 아버지는 상학이며, 어머니는 윤자구의 따님이다. 자는 봉조(鳳朝, 鳳藻)이고, 호는 영재(寧齋)이며, 당호는 명미당(明美堂)이다. 개성에서 출생했지만 그가 성장한 곳은 강화도다. 선대부터 살아온 강화도에서 이건창은 할아버지 이시원으로부터 문학과 사상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건창은 5세에 이미 문장을 구사할 정도로 신동이라 불렸는데, 1866년 1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너무 일찍 과거에 합격해 19세가 되어서야 홍문관직 벼슬을 받았으며, 이후 서장관으로 중국을 방문하고, 충청우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을 겪고 난 후 이건창은 1890년 한성소윤이 됐으며, 이후 승지, 공조참판, 해주관찰사 등에 임명됐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국운이 갈수록 기울어지던 1898년 안타깝게 마흔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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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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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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