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중형 선고한 1,2심 깨고 박 전 시장 사건 파기환송
- “검찰과 법원의 판단은 합리적 추론이 아니었다”
- 검찰, 박순자 이재오 홍준표 의원의 확인서도 안 믿어
- 정몽헌 회장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
- 금감원, 검찰 연루됐던 김흥주 로비사건에 대한 보복?
박주원 전 안산시장.
주인공은 9급 검찰수사관 출신으로 2006년 지방선거에서 안산시장에 당선됐던 박주원(53)씨다. 박 전 시장은 지난해 2월 불거진 뇌물수수 사건으로 1, 2심에서 모두 징역 6년, 추징금 1억3000만원의 중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그러나 5월13일 대법원은 1, 2심 판결을 뒤집고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박 전 시장은 자신이 시장으로 재직하던 2007년 4월과 6월 두 번에 걸쳐 건설회사 D사의 김모(63) 회장으로부터 각각 5000만원, 8000만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지난해 2월 검찰 수사를 받고 구속됐다. 그러나 박 전 시장은 “김 회장에게서 돈을 받은 적 없다”고 줄곧 주장해 왔다. D사는 안산시가 추진하던 3조5000억원 규모의 복합단지개발사업(호텔, 컨벤션센터, 해양테마파크 등)의 최종제안사업자로 선정된 업체였다.
표적수사 논란
이 사건은 검찰 수사단계에서부터 논란이 많았다. 금융거래 추적 등을 통해 건네진 돈의 행방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돈을 건넸거나 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술에만 의존해 수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 전 시장은 검찰 수사관 출신이면서도 검찰과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실 수사관으로 재직하던 2001년, 검찰 고위층이 연루된 정·관계 로비 사건을 내사하면서 검찰 수뇌부와 갈등을 빚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내사했던 사건은 2006~07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레이스백화점 매각, 골드상호신용금고(현 솔로몬저축은행) 인수와 관련된 김흥주 삼주산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의혹이었다. 수사과정에서 금융감독원, 감사원, 검찰 고위 인사가 다수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커졌다. 당시 박 수사관은 김흥주씨의 지인이자 당시 검사장이었던 K검사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내사중지 압력을 받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K검사도 당시 대검 차장이던 김종빈 전 검찰총장에게 “박 수사관이 안산시의 한 건설업체에서 거액의 뇌물을 받았다”며 여러 번 수사를 촉구할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K검사는 결국 김흥주 사건과 관련된 의혹으로 대검찰청에서 감찰을 받은 뒤 평검사로 좌천됐다. 이런 이유로 박 전 시장의 뇌물수수 사건이 불거졌을 무렵 검찰 주변에서는 표적수사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K검사를 중심으로 한 특정 지역 인맥에 의해 만들어진 사건이라는 얘기가 검찰 주변에서 나온 것은 사실”이라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게다가 박 전 시장은 2003년 8월 자살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이다. 고 정 회장은 자살하기 전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박 전 시장을 만나 유서 5장을 보여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나왔지만, 이 사건을 두고 ‘파렴치범이냐’ ‘검찰의 보복수사냐’는 논란은 여전하다. 대체 이 사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박 전 시장 사건과 관련된 의혹을 하나하나 따져 봤다.
쟁점 1 ‘제보는 믿을 만했나’
이 사건은 D사에서 비서로 일했던 임모씨의 제보로 시작됐다. 임씨는 검찰 진술에서 “2007년 4월9일에는 렌터카로, 같은 해 6월4일에는 택시로 김 회장과 뇌물공여 장소인 서울 도곡동에 갔다”고 주장했다. 6월4일에는 약속장소에 나타난 박 전 시장을 직접 봤다고 했다. 임씨는 당시 김 회장이 돈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홍색 보자기’(4월9일), ‘길쭉한 형태의 체크무늬 가방’(6월4일)을 들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임씨는 그러한 내용이 자신의 업무용 수첩에 적혀 있다고 밝혔다. 뇌물공여 사실을 부인하던 김 회장은 임씨의 진술이 나온 이후 “4월9일에는 신문지와 보자기로 싼 5000만원을, 6월4일에는 4000만원씩 넣은 쇼핑백 두 개를 테이프로 돌돌 말아 가방에 넣은 뒤 박 전 시장에게 건넸다”고 시인했다. 김 회장은 검찰에서 “임씨가 증거로 제출한 업무용 수첩을 보고 뇌물을 건넨 날짜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임씨의 업무용 수첩은 이 두 사람의 진술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증거가 됐다.
그러나 이들 증거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논란이 제기됐다. 박 전 시장 측은 “현직 시장이 백주 대낮에 돈 넣은 보따리를 공공장소인 카페에서 받을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또 임씨가 박 전 시장을 6월4일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임씨가 박 전 시장을 봤다는 장소에는 화단이 조성돼 있어 멀리 있는 사람을 식별하기 힘들며, 인터넷을 통해 사진만 봤을 뿐 일면식도 없는 박 전 시장을 임씨가 단번에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전 시장 측은 임씨의 업무용 수첩에 대해서도 의문을 던졌다. 일단 증거로 제출된 수첩은 원본인 업무일지에서 상당부분 옮겨 적는 식으로 사후에 변조된 사실이 수사과정에서 드러났다. 임씨는 검찰 조사과정에서 “검찰에 압수될까봐 업무일지 내용을 수첩으로 옮기고 원본은 폐기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이는 수첩이 사후에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1, 2심 법원은 박 전 시장과 관련된 혐의에 대해 임씨의 수첩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특히 법원은 임씨의 수첩에 당시 타던 렌터카 번호(2007년 4월9일자에 기재된 ‘대림아크로텔, 렌터카, 서울38허****’)가 적혀 있는 것에 의미를 뒀다. “렌터카 번호까지 적어놓은 걸로 보아 수첩의 내용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이었다. 몇몇 D사 직원도 임씨가 항상 업무용 수첩을 가지고 다녔다고 진술해 임씨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당시 법원은 이 수첩의 진실성은 때로는 믿고, 때로는 믿지 않는 태도를 보여 논란을 불렀다. 박 전 시장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수첩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법원이 또 다른 피의자인 안산시 공무원 김모씨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이 수첩의 변조 혹은 오류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 1심 판결문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제보자) 임OO 작성의 업무용 수첩 중 2007년 4월15일란에 ‘도시국장’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그 무렵 (안산시 공무원) 김OO은 안산시 상하수도 사업소장이었고, 2008년 2월22일에야 도시국장이 되었으므로 그 부분에 대한 임OO의 업무용 수첩 기재 내용을 신빙하기 어렵다.”
제보자인 임씨가 당시 김 회장 측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는 것도 제보의 진실성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었다. 임씨는 2009년 6월경 D사에서 해고된 뒤 앙심을 품고 김 회장에게 “회사 비리를 폭로하겠다”는 식으로 금품을 요구하다 도리어 김 회장 측으로부터 공갈혐의로 고소당한 사실이 있었다. 박 전 시장 측은 이를 근거로 임씨의 자작극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대법원은 이번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혔다.
“법원은 공평하고 공정해야 한다. 검사의 공소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에서 보이는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에는 애써 눈감으면서 오히려 피고인의 주장과 증거에는 불신의 전제에서 현미경의 잣대를 들이대며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형사법원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법원은 심리과정에서 선입견 없는 태도로 검사와 피고인 양편의 주장을 경청하고 증거를 조사하여야 하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헌법상 요구되는 형사재판의 원리인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무죄를 판단하여야 한다.”
쟁점 2 ‘핵심 진술의 번복’
김 회장은 사건 초기 박 전 시장에 대한 뇌물공여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다 임씨의 진술이 나오자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뇌물공여 장소인 ‘카페’를 특정한 것도 임씨가 아닌 김 회장이었다. 김 회장은 “2007년 2~3월경 박 전 시장을 문제의 카페에서 만났는데, 박 전 시장이 ‘시장 선거를 치르느라 빚이 2억~3억 정도 있는데 힘들다’는 말을 해서 사업을 잘 봐달라는 취지로 돈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6월4일 8000만원을 건네면서 ‘사업에 신경 좀 써달라. 이것 좀 갖다 쓰소’라고 말하자 박 전 시장은 ‘어유,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가방을 받아갔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그러나 1심 재판이 진행되던 중 김 회장은 느닷없이 박 전 시장과의 대질심문에서도 인정했던 금품제공 사실을 번복했다. “2007년 4월9일 5000만원을 줬다”는 진술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당시 김 회장의 바뀐 진술은 이랬다.
“검찰에서 5000만원을 박 전 시장에게 준 부분을 진술하였으나 (제보자인) 임씨가 계속 (내가) ‘빨간 보자기를 들고 갔다’고 하고 (D사가 정·관계에) 17억원가량 로비를 했다고 검찰이 추궁을 하니까 각박한 심정에서 그렇게 진술한 것이다. 5000만원에 대해서는 기억이 왔다갔다 한다. 전혀 기억에 없다. 빨간 보자기 자체가 기억나지 않는다.”
2007년 1월 김흥주 삼주산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과 관련 기소된 김중회 금융감독원 부원장. 그러나 법원은 김 전 부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쟁점 3 ‘현장에 갔나, 안 갔나?’
박 전 시장은 사건 초기부터 줄곧 문제의 장소(도곡동 카페)에서 김 회장을 만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5000만원을 받았다는 4월9일(오후 4~6시경)에는 안산시청에서 중국에서 온 손님을 접대한 뒤 계속 일을 했으며, 6월4일에는 포천의 한 리조트에서 열린 안산시의원 연찬회에 참석한 뒤 여의도로 이동해 국회의원들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6월4일의 경우, 박 전 시장은 오후 2시10분경 리조트를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관용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중간에 내려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는 게 박 전 시장의 주장이다. 박 전 시장은 관용차가 아닌 택시를 타고 이동한 이유에 대해 “관용차가 국회에 드나든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리조트에서 국회의사당까지는 약 90㎞, 자동차로 1시간50분 정도가 걸린다.
박 전 시장 측에 따르면 오후 4시경 국회에 도착한 박 전 시장은 박순자, 이재오, 홍준표 의원을 국회 의원회관에서 잇달아 만났다. 국회의원들도 박 전 시장의 주장과 같이 “6월4일 오후 4시부터 대략 30분 간격으로 박 전 시장을 만난 사실이 있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박 전 시장 측을 통해 법정에 제출했다. 박 전 시장은 이를 근거로 문제의 카페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해왔다. 시간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과 법원의 생각은 달랐다. 박 전 시장이 국회에 갔다면, 문제의 카페에 들러 돈을 받아서 다시 국회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봤다. 검찰과 법원은 “박 전 시장을 딱 10분 만났으니 시간상으로 볼 때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검찰과 법원은 국회의원들이 써준 확인서에 대해서도 “작위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며 진실성을 의심했다. 박순자 의원의 경우 법정에까지 나와 증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법원이 주목한 또 하나의 증거는 검찰이 제출한 국회의원 관용차량 출입기록이었다. 검찰은 국회의원들이 박 전 시장을 만났다는 시간에 관용차량이 국회에 없었다는 점을 들어 국회의원들이 써준 확인서에 의문을 제기했다. 국회의원들이 “심부름을 시켜 관용차량이 국회에 없었던 것”이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영결식. 박주원 전 안산시장은 정 전 회장이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이다.
“(검찰과 1, 2심 법원이) 2007년 6월4일 포천의 한 리조트에서 열린 안산시 의원 연찬회에서 피고인 박주원이 점심식사 후 인사말을 하고 오후 2시10분경 한화리조트에서 서울 방면으로 출발한 사실은 배척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에 의하더라도 리조트에서 여의도까지 곧바로 가더라도 2시간가량 걸리는 상황에서 그 날 오후 국회에서 박순자, 이재오, 홍준표 의원을 만날 계획을 갖고 있는 위 피고인이 달리 피고인 김OO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같은 날 방향이 전혀 다른 도곡동 카페에 들르기로 약속하고 그곳에서 김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후 택시를 이용하여 여의도로 이동하였을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은 합리적 추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4월9일에 대해) 검사의 공소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수긍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