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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손 가수’ 이석

“아프리카 청년들이 나를 보고 희망 가졌으면…”

‘황손 가수’ 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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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손 가수’ 이석
나라는 망해도 사람은 살 수밖에 없다. 의병을 일으켜 목숨 걸고 싸우거나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하는 이들을 순국선열(殉國先烈)이니 의사(義士)니 하며 우러르는 것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분연히 떨쳐버렸기 때문이다.

‘비둘기집’을 노래한 ‘황손 가수’ 이석(70). 지금은 황실문화재단 총재라는 명함을 건네지만, 그는 ‘사람은 살 수밖에 없는’ 슬픔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석 총재는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승광재(承光齋)에 산다. 빛을 계승하는 집. 2004년 전주시가 민가 네 채를 매입해 조성한 작은 한옥이다. 빛(光)은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따왔다.

빛을 계승하고 싶지만 그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다. ‘황손 가수’로 소개됐지만 사람들은 그를 황손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거듭된 결혼 실패와 미국에서 막노동, 찜질방을 전전했던 그의 삶은 외국인의 눈에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6월19일자 주말판에 ‘왕자 이야기(The Prince‘s Tale)’라는 제목으로 이 총재의 고단한 삶을 전했다.

기자는 6월 중순 승광재에서 이 총재와 마주 앉았다. 이후 여러 차례 전화 인터뷰를 했다. 칠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그의 바리톤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승광재 여기저기에 걸린 황실의 흑백사진은 대한제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을 화제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 아버지(의친왕) 사진이네요.



“(사진을 보며) 잘생겼죠? 젊은 시절 사진입니다. 젊었을 때 대동단에 참여해 중국에 망명정부를 세우려다 붙잡혔죠. 아, 그때 잡히지 않았다면 한국 근현대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나요?

“기골이 장대하고 남자다웠습니다. 나는 사동궁 서양식 건물에서 태어났고, 이후 성북동 성낙원에도 살았어요. 가끔 김구 선생이 찾아왔는데, 저는 ‘매미 아저씨’라고 불렀어요. 아버님은 종종 양주병을 들고 있었어요. 술을 많이 드시면 천장에 총을 쏘기도 했고요. 당시 오정환 비서는 ‘전하 고정하십시오’하고 말렸고, 어머니는 ‘구들장 빠진다’며 술병을 빼앗으려고 했어요.”

만취하면 천장에 총 쏜 의친왕

▼ 왜 총을 쏘았나요?

“울분이죠. 울분. 망국의….”

▼ 오래전 일인데 비서 이름을 기억하시네요.

“그럼요. 신하로는 안충만·지강덕, 운전기사는 박재돌. 생생히 기억하죠. 제 아명이 영길인데, 아침에 문안 인사드리면 아버님은 ‘굿모닝’하고 인사하셨어요. 그러곤 ‘영길아, 재돌이에게 말 가져오라 해라’ 하셨죠.”

여기서 잠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보자. 고종의 세 아들 중 순종(1874~ 1926)은 자식이 없었고, 영친왕(1897~ 1970)은 이방자 여사와 결혼해 이구(1931~2005) 황세손을 낳았다. 이구 황세손은 미국 스탠퍼드대 공학박사였지만 한국말을 못했고, 후사도 없이 2005년 일본의 한 호텔에서 의문사했다. 반면 이 총재의 아버지 의친왕(1877~1955)은 왕족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물이다. 1919년 고종이 별세하자, 그해 11월 상복으로 위장해 일부 독립운동 동지들의 안내를 받아 상해임시정부로 찾아가다 만주 안동에서 일경에게 발각됐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은 것은 명약관화하다. 의친왕은 7명의 여인에게서 13남9녀를 보았다. 11번째 아들이 이석 총재다.

▼ 사동궁(寺洞宮)은 어딘가요?

“지금의 종로구 안국동 로터리에서 태화관(현재의 태화빌딩)까지 그 일대가 모두 궁이었어요. 서양식 건물과 기와집이 몰려 있었는데 아버지의 사저이기도 했어요. 그곳에는 상궁, 나인, 청각씨(궁을 관리하는 사람) 등이 함께 살았고 일본 순경이 보초를 섰죠. 여섯째 명길(明吉) 형님은 서쪽에서 가정을 꾸리고 사셨고, 일곱째 경길(慶吉) 형님은 북쪽 기와집에 살았죠. 경길 형님 집 앞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상궁들에게 혼나기도 했고요. 공주 해경(海慶) 누님 방에는 피아노도 있었어요.”

▼ 환갑이 넘은 나이에 아들을 봤으니, 의친왕께서는 이 총재를 무척 귀여워하셨겠네요?

“그럼요. 형님들은 이미 출가하거나 어른이 됐고, 저는 막내였으니 더욱 귀여워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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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강 기자│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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