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더니티론은 기본적으로 진화론적 발상에 기반을 둔다. 전통에서 현대로의 변화가 그 기본 가정을 이룬다. 물론 최근 모더니티론에서는 진화론적 발상과 서구중심주의적 발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뤄져왔지만, 그럼에도 이 이론이 진화론 및 서구중심주의와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다. 모더니티의 중핵을 이루는 자본주의라는 물질문명은 본디 서구 근대의 산물이며, 비서구사회에서는 이 물질문명을 수용해왔다.
모더니티가 이러한 과정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에 그 수용 과정에는 전통과의 격렬한 갈등이 내재하게 된다. 전통이란 다름 아닌 모더니티의 대척점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한다.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특히 동아시아 사회에서 전통이란 모더니티 이전의 민족문화 또는 민족사회를 지칭한다.
문제는 모더니티론에 내재된 진화론적 발상이 전통을 모더니티보다는 열등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과연 전통은 모더니티에 비해 열등한, 다시 말해 낡고 덜 발전된 것일까. 이와 관련해 먼저 떠오른 것은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寅煥)네 /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 /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 시인 김수영은 1964년 우리 삶의 거대한 뿌리로서의 전통을 이렇게 노래한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진화와 발전의 당위성을 특권화하지만, 기실 우리 인간이 갖는 인식의 지평은 우리 삶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전통의 구속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Hans-Georg Gadamer)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강조하듯이 전통과 모더니티는 잘못된 이분법일 수도 있다. 전통과 모더니티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지의 문제는 이 글의 후반부에서 다시 돌아와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교에 평등사상을 융합하다
모더니티를 향한 시대정신의 탐구에서 전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두 지식인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기 위해서다. 최제우와 경허가 바로 그들이다. 최제우는 토착적 사상이자 한국적 종교라 할 수 있는 동학을 창시했으며, 경허는 기존 불교를 혁신하고 한국 선종(禪宗)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주목할 것은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이 당대 지식인들과 사뭇 다르다는 데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당대의 지식인들로는 위정척사파를 꼽을 수 있다. 위정척사파는 전통의 주자학적 질서를 옹호하고 외세에 맞서 이를 지켜내고자 했다. 위정척사라는 말에는 ‘바른 것을 지키고(衛正)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斥邪)’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여기서 바른 것은 성리학적 질서이며 사악한 것은 일본을 포함한 서양 문물이다. 이러한 위정척사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먼저 위정척사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16세기 이래로 전 지구로 확장되기 시작한 서구의 식민주의는 19세기에 그 마지막 지역인 동아시아에 진출했다. 서구의 압박 아래 중국과 일본은 문호를 개방했으며, 조선사회 역시 1878년 개항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성리학을 숭상하던 당시 재야 지식사회는 이러한 흐름에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됐으며, 그것은 통상 수교 요구를 거부하고 서구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자는 위정척사파의 척화주전론으로 구체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