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교 3학년 때.
“고1 때 사회 선생님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늘진 느낌을 주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법대를 나왔어요. 서울대는 아니지만. 그래서 법대를 생각했죠.”
어린 시절 그녀는 그다지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마음에 두는 몇몇 친구와는 깊이 사귀고 나머지 친구들과는 그저 그런 관계를 유지했다. 고등학교 들어가자 친구들 간에 ‘계층분화’가 일어났다. 여학생이 공부 좀 하면 살림밑천 해야 된다며 여상(女商) 가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인문계를 갔다. 공부 잘하면서 집안이 어려운 아이들은 다 그렇게 그녀의 곁을 떠나갔다. 시장통이나 산동네 살던 아이들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철학적 고민에 빠졌다.
“이 우연은 어디서 오는 걸까, 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어요. 생활환경이란 건 부모님이 만들어준 거지 내가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니지 않은가. 이 우연 속에 있지 않고 다른 우연 속에 있었던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삶의 우연성에 대한 고민은 대학교 2학년 때 겪은 일로 더욱 깊어졌다. 어릴 때 살았던 산동네가 철거된 것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사당동 총신대 근처였다.
“철거된 뒤에 가보니 폐허가 돼 있었어요. 겨울에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애기엄마들과 할머니들을 봤어요. 부모가 거기 거주하는 친구들도 있었지요. 어쩌면 저도 벗어나지 못했을 수 있던 곳에서.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 일을 겪으면서 ‘조금 더 쓸모 있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죠.”
분노를 느꼈던 걸까.
“분노라기보다는 의문이었죠. 나는 어떻게 그 자리에 없고 다른 곳에 있었던 걸까, 라는. 이왕 사는 것,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거고요.”
총여학생회장
중·고등학생 시절 그녀는 주로 부반장을 했다. 그녀 말대로라면 공부 잘하면서 사교적이지 않고 남 앞에 나서지 않는 성격의 학생에게 딱 맞는 게 부반장이었다. 일탈 한 번 없었다. 전형적인 ‘범생이’로 평탄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삶에 영향을 끼친 특별한 사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 게 있었다면 죽어라 공부만 하지 않았을 것”이란다. 왜 그렇게 죽어라 공부했을까.
“지금도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면 수첩에 적는 버릇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수첩에 ‘정말 미쳤다 생각하고 공부하자’고 적었던 기억이 나요. 뭐랄까. 불타오르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한번 모든 걸 집중해 뭔가 이루고 싶은.”
그 덕분에 학력고사 전국 여자수석을 차지했다. 법대에 진학해보니 자신보다 똑똑한 친구가 많았다. 그들은 세상 보는 눈이 달랐다. 공부밖에 몰랐던 그녀로서는 충격이었다. 뭔가 변화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녀를 도서관 밖으로 밀어냈다. 자아를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삶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총여학생회장을 맡은 건 그러한 변신의 과정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 이런 문제에 제가 굉장히 미숙하더라고요. 부족한 걸 채우고 싶었죠. 그러다 여성문제에 눈을 뜨면서 총여학생회장까지 맡게 됐죠. 나를 둘러싼 비합리가 어디서 비롯된 건지 알게 된 거죠. 성차별을 사회구조적으로 인식한 것이 세상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녀가 과격한 운동권이었을 거라는 나의 선입관은 교정돼야 했다. 그녀는 이분법적인 규정을 거부했다.
“과격과 온건을 가르는 기준이 뭘까요. 저는 감옥에도 안 가고 화염병도 안 던졌지만 그렇게 행동한 학생들을 과격한 동료로 기억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화염병 만들고 새총 쏘는 철거민들을 과격하다고 생각지 않아요. 생존과 자기 방어 차원에서 이해할 소지가 있는 거죠.”
그럼 뭔가. 도대체 그녀의 노선은. 민주노동당 대표의 과거 경력치고는 뭔가 어색하거나 부족하다. 북(北)을 추종하는 주사파도 아니었나?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질문을 무력화했다.
“그런 분류에 동의하지 않으며 (대학가에) 그런 노선이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북한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수는 있지요. 당시 많은 대학생이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남북관계에 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그런 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