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날 칠한 것이 제대로 말랐을지, 색깔은 내가 바라는 대로 나왔을지, 혹 잡티가 붙지는 않았을지 조바심과 설렘 긴장감 그리고 경건함까지, 뭐라 말할 수 없는 두근거림이 있습니다. 도공이 드디어 가마 문을 열고 작품을 처음 꺼낼 때의 설렘이랄까요? 그러니 도저히 지루해질 수가 없지요.”
그에게 매일 설렘과 짜릿함을 안겨주는 칠 작업은, 그러나 보통사람의 눈에는 지루한 반복으로 보인다. 칠하고 말리고 갈아내고 다시 칠하는 과정이 여러 차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매번 똑같지는 않다. 칠할 때마다 옻도 조금씩 달리 배합해 쓰고 색깔을 내는 물감을 타 넣기도 하며, 삼베를 붙일 때는 토회(흙과 옻을 섞은 것)를 바르고, 자개를 붙이는 과정이 추가되기도 한다. 또 칠한 면을 갈 때도 여러 굵기의 사포나 숫돌, 또는 고운 숯을 골라서 쓰는 등 단계에 따라 매우 섬세하게 진행된다.
“칠의 매력은 탑을 쌓듯 하나하나 완성해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 초칠을 했다면 내일은 건조 상태와 색깔 변화를 확인한 다음 곱게 갈아내고 덧칠합니다. 이렇게 차례차례 칠해나가다 드디어 마지막 마감칠을 하거나 광내기 작업을 끝냈을 때, 그 달라진 질감과 색깔을 보노라면 ‘완성’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옻칠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늘 다음 작업이 기다려집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빨리 내일이 와야 또 일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밖에 안 들어요. 집에서 허락만 해준다면 매일 공방에서 먹고 자고 일만 하고 싶습니다.”
첫사랑은 곧 영원한 사랑이 되어 그의 인생을 사로잡아버렸으니, 칠에 대한 그의 열정은 긴 세월 동안 조금도 식지 않았다.
칠을 사랑하는 만큼, 칠을 제외한 나머지 삶에 대한 그의 기억은 좀 무심해 보인다. 1949년 황해도 장연에서 아버지가 옥사하고 난 몇 달 뒤 태어난 그는 1·4후퇴 때 홀어머니와 함께 월남해 이곳저곳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나, 특별히 불행했다는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다.
“제주도에서 잠깐 살았고, 사라호 태풍이 왔던 1959년 무렵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경기도 포천과 문산에서도 살다가 초등학교 졸업은 서울에서 했네요.”
이렇게 신산하게 살았으니 중학교는 진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예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 돌아가신 전모(前母) 소생의 두 형이 서울 큰아버지 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큰아버지가 그도 같이 거두어 공부시키겠다고 하는 것을 어머니가 거절했다.
“어머니는 저와 떨어져 살기 싫어서 거절하셨다는군요. 그런데 나중에 어머니는 가끔 그때 큰아버지께 보내 공부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어요.”
큰형은 수술 솜씨가 뛰어난 흉부외과의가 되어 큰 병원의 높은 자리까지 올랐고 작은형은 사진작가가 되었는데, ‘칠장이’가 된 그는 배우지 못한 사람의 한(恨) 같은 것이 없을까? 그런데 정말 없어 보인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지금 7년째 서울대 금속공예과에서 강의하고 있다기에 학벌이 어찌 되느냐고 놀리자, 그는 허허 웃었다.
“초등학교 마치고 교회에서 하는 야학에 다녔는데, 남녀가 모여 공부하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았는지 목사님이 야학을 못하게 하셨어요. 그때 야학을 계속했더라면 영어도 좀 더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배우지 못한 후회가 고작 이 정도다. 어린 시절 힘들고 서럽지 않았는지 물어보아도 “별로 힘든 줄 모르고 살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사무실에서 청소와 심부름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의 대답치고는 참으로 무심하다. 전셋돈을 떼이고 작품 주문도 잘 안 들어오던 시절에도 그는 ‘별 걱정 없이’ 자기 작품을 만들며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은 언제였느냐고 단도직입으로 물으니 한참 궁리하다 스승의 공방에서 일할 때 야단맞은 일을 겨우 생각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