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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보자기에 수를 놓는 예술가 자수장 김현희

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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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다른 섬세함으로 이름 높은 자수장 김현희(金賢姬·67)의 전문 분야는 보자기다. 우리 전통 조각보와 수 보자기를 멋지게 아우른 그의 보자기는 조선시대 궁수 전통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조화시킨 작품이다. 예술성과 작가주의를 추구하는 김현희의 독특한 색감과 구성, 빼어난 수를 곁들인 보자기는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는 명품이 됐다.
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자수장 김현희가 사는 곳은 선경(仙境) 같다. 정갈하며 아름답다. 그리고 꽃과 나무가 많다. 거실과 이어진 베란다 사이에는 전통 미닫이문을 달았는데, 닫으면 겨울 햇살이 다사롭게 비쳐들고, 열면 봄날처럼 베란다를 꽉 채운 꽃밭이 펼쳐진다.

“제가 꽃을 워낙 좋아합니다. 빨간색도 좋아하고요.”

꽃이 핀 선경에서 김현희는 선녀처럼 앉아서 수를 놓는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왔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수놓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 꽃 나라에서 노니는 선녀 그대로다. 조선시대 관(官)에서 수를 놓는 장인을 ‘화아장(花兒匠)’이라 불렀으니, 선녀는 선녀로되 꽃 선녀고, 결혼하지 않았으니 영원한 ‘꽃의 아이’다.

규방공예 가운데서도 천을 짜거나 옷을 짓는 기본적인 일을 하는 이들과 매듭을 꼬거나 수를 놓는 장식적인 일을 하는 이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전자가 창조의 열정을 막힘없이 분출하는 편이라면, 후자는 꼼꼼하고 세련되게 표현한다. 물론 자수에도 탱화처럼 큰 작품이 있지만, 김현희는 작은 보자기를 더욱 사랑한다. 근사한 흉배도 있고 아름다운 병풍도 있는데, 왜 하필 범용한 보자기인가.

“수는 흉배나 활옷 등 격식을 차리는 의례용 옷부터 병풍, 주머니, 보자기, 노리개, 안경집, 가구 등 일상 물품까지 다 꾸밀 수 있습니다. 워낙 쓰이는 분야가 많은데, 하다보니 무언가 특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세계 사람이 다 좋아할 만한 보자기를 선택했지요.”



그의 보자기에는 천을 이어붙인 조각보 형태도 있지만 대개는 수 보자기다. 1995년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은 작품은 조각보 가운데 연꽃을 수놓아, 조각보와 수를 결합한 형태다. 그의 작품은 수도 아름답지만 직접 천연염색한 독특한 색감과 조각을 이어붙인 구성까지 모두 그만의 개성으로 넘쳐난다. 가장 즐겨 놓는 문양은 역시 그가 좋아하는 꽃과 나무, 새다. 그의 집처럼 그가 만든 보자기에도 알록달록 꽃나무에 꽃이 피었고 새가 노래한다.

왕진기 사진만 보고 복원

새와 꽃에 취해 선녀처럼 살아온 반백 년

꽃나무와 새를 상징적으로 처리한 수 보자기.

그의 집에는 1988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별상을 받은 대형 왕진기(王鎭旗·왕의 진영에 세우는 깃발)도 있고, 왕보(왕의 옷에 부착하는 둥근 보), 문무관의 흉배 등도 걸렸는데, 왕진기는 특별히 아름답다. 우아하고 따뜻한 황금빛과 갈색 색조의 왕진기에도 목단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새 마흔두 마리, 거기다 천리마와 해태, 봉황까지 있다. 궁중유물박물관에나 가야 만날 법한 이렇게 크고 멋진 작품을 만들어낸 그이지만 이 작품 이후 보자기에 더 집중하게 됐다고 한다.

“저 왕진기를 만드는 데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거의 하루 내내 매달리다시피 하면서요. 하루 여덟 시간 일하는 걸로 치면 3년은 족히 걸린 셈입니다. 인생은 그리 길지 않답니다. 생각보다 짧아요. 하나에 집중하기에도 부족한 세월이지요.”

수를 놓은 시간만 따져 그 정도지, 그 왕진기의 도안 작업까지 따지면 꽤나 힘들고 까다로운 과정이었다. 이 멋진 왕진기 원작은 일본에 있고, 그래서 김현희는 실물을 본 적이 없다.

“동국대 학술조사단이 일본에 갔다가 조선 왕진기를 발견했다는 김사엽 교수의 글을 신문에서 보고 예용해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예 선생님이 김 교수를 소개해주셔서 김 교수께 왕진기 사진과 자료를 받을 수 있었지요.”

그 사진을 바탕으로 미대 출신 여동생이 극사실화로 그려 이를 확대해 찍어서 원본 사진과 비교해 수정하는 방법으로 밑그림을 확정했다. 그 과정이 번거롭고 까다롭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사진을 잘 찍고 그림을 세밀하게 그렸다 해도, 수의 기법을 일일이 분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은은한 바탕색을 내려고 물을 여덟 번이나 들이는 시도를 했고, 모든 색깔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고풍스러운 맛을 주려고 연한 밤색을 섞어 수놓는 등 이만저만한 공력을 들인 게 아니다. 그런 노고가 아우러진 그의 왕진기는 말 그대로 왕의 품격과 고아함이 풍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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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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