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길여 총장이 걸어온 길은 파란만장하다. 병원장에서 문화사업가로, 언론사 회장에서 대학 총장으로, 그가 이끄는 사회법인만도 19개에 이른다. 거대한 ‘이길여 왕국’을 건설한 셈이다.
9월6일 오후 2시. 기자는 경기도 성남시 경원대학교 총장실을 찾았다. 우선 고희를 앞둔 할머니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사한 옷차림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이 예쁘게 나와야 한다며 정면에 대형 거울을 갖다 놓으라고 주문할 때는 사춘기 소녀처럼 수줍어했다. 낭랑한 목소리는 또한번 그의 나이를 의심케 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막힘이 없다. 오히려 그런 당당함 때문에 배석한 홍보팀 직원은 혹시나 ‘말실수’가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대학 총장과 종합병원 이사장, 언론사 회장 중에서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어느 쪽을 택하고 싶습니까.
“모두가 혼신의 노력을 다해 이룬 것이기에 어느 것 하나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맨 마지막에 맡은 경원대학을 택하고 싶습니다. 경원대학에는 내가 아직 충분한 노력을 들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경원대학교에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울 생각입니다.”
“복지와 환경 개선에 힘쓸 것”
이길여 총장은 요즘 일주일에 3일을 경원대에서 보낸다. 그만큼 경원대를 하루 빨리 정상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98년 경원학원을 인수하던 당시 학생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일도 상당히 신경쓰는 듯했다. 그래서 이번에 총장으로 선임되기 직전 학생들과 경원발전위원회를 만들기로 약속까지 했다. 절차 문제는 풀렸지만 아직까지 학생들은 이길여 총장 체제를 관망하고 있다. 총학생회는 학부제 문제를, 노동조합은 ‘낙하산 인사’를 거론하며 이총장을 압박하고 있다.
―경원대로 오시면서 학생들에게 여러 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중에서 독재정권과 싸우고 학원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학생들에게 보상조치를 해주겠다는 부분이 눈길을 끕니다.
“명예를 회복시켜줄 생각입니다. 제적된 사람들 다 복적시켜 주려고 합니다. 이제 와서 복적하려면 돈도 없을 테고 하니까 장학금도 주려고 합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경원대는 오랫동안 학내분규로 몸살을 앓아왔습니다. 총장께서는 10대 사학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도 밝히셨는데 무슨 복안이라도 있습니까.
“우선 학생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는 복지와 환경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교실, 운동장, 기숙사 등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대학발전위원회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돈이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병원쪽도 파업사태로 자금사정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금은 비밀이니까 말로는 못하겠고…. 어떻게든 할 겁니다. 병원에 가면 병원돈이 학교로 갈까봐 걱정하고, 학교에 오면 학교돈이 병원으로 갈까봐 걱정해요. 하하하. 내가 맡고 있는 19개 사회법인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때가 되면 다 떼어낼 겁니다. 나는 한푼도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총장께서 살아오신 과거를 살펴보면 근성과 승부욕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됩니다.
“글쎄요. 나는 그런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거기에 최선을 다한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성공해서 큰 종합병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그냥 의사가 좋아서 열심히 공부했고 의사가 돼서는 환자가 좋아서 정성껏 환자를 돌보았어요. 그러다 보니 환자가 많아지고 병원을 더 짓게 되었어요. 그런 과정에 좋은 의사도 만들고 싶었고, 간호사도 길러내고 싶었어요. 그때 그때의 요구에 충실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요.”
이총장의 병원 운영방식은 저돌적이었다.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수십억원이 들어가는 기계도 두말없이 사들였다. 병원을 짓는 것도 수지타산을 맞춰보고 되겠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식이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대목은 대외 홍보에 주력한 부분이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신문지상에 실린 길병원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최초’라는 말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길병원은 흥미로운 이벤트도 자주 선보였다.
―경영자는 거액의 돈이 들어가는 투자를 앞두고 고민하게 마련인데, 이 총장의 의사결정 과정은 매우 신속했습니다.
“내가 병원을 개업하고 수많은 수술을 해봤는데 기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술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좋아하던 기계가 지금도 병원에 있어요. 그 기계와 똑같은 것을 들여왔는데도 내가 쓰던 기계가 아니면 수술을 못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의사들은 기계에 예민합니다. 새로운 기계를 빨리 사와야 내가 편리하고 환자들이 편리하거든요.”
―이 총장의 대외 활동이나 길병원의 프로그램은 그동안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언론플레이의 귀재’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던데요.
“그렇게 말한다면 좀 섭섭한 생각이 들고… 하하하. 80년대 초에 내가 여자의사협의회 회장을 했습니다. 해보니까 여의사들이 안 보이는데서 많은 봉사를 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숨어서 일하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신문을 만들고 대화의 장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여의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점차 높아졌어요. 내가 결혼을 안 한 여자여서 더 관심이 컸나 봐요.
―병원 이사장을 넘어서 언론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병원을 운영하다 보니 자꾸 책임의식을 느꼈어요. 좋은 의사를 길러내고 싶었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인천지역을 위해 문화사업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부터 있던 것이 우리 시대에서 많이 사라지고 있는데 그것을 살려서 후세에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세대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우리 문화가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어요. 그래서 제대로 보관하지 못하고 있는 고서들을 사들여 전시회도 열고 했는데, 거기서 국보가 나왔어요. 나는 언론을 잘 모르지만, 언론이 자기 색깔을 갖고 좋은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어요. 꼭 언론을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다가 내게 주어졌습니다.”
경인일보 인수 배경
―주변 상황 때문에 언론사를 인수했다는 말씀입니까.
“경인일보를 운영하시던 분과 누님 동생하며 지낼 만큼 친했습니다. 그분이 건강도 좋지 않고 건설업도 부진하다면서 경인일보를 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왔어요. 그래서 두 달을 고심하다가 맡았어요. 내가 그동안 해온 일과 잘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경인일보의 색깔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우리가 해온 좋은 사업들과 조화시킨다는 구상이었지요.”
―경인일보를 인수하면서 지면개선과 투자확대 등을 약속했는데, 아직까지 가시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별로 못한 게 사실입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하는데, 아직 그럴 만한 시간을 갖지 못했습니다. 경인일보는 전부터 잘 되던 곳이기 때문에 내가 일일이 신경 쓸 것은 별로 없습니다. 가끔씩 내가 ‘책임을 물을 거야’라는 말도 하니까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열심히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얘기 나가면 그분들이 정말 스트레스 받는 거 아닙니까? 언젠가는 내가 가서 족칠 거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요?”
―경인일보를 인수한 지 1년이 다 됐습니다. 기자들은 이제 뭔가 나올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네들이 해야지. 내가 무슨 기사를 쓰나, 편집을 하나…. 나도 다 생각하고 있어요. 임금도 다른 회사보다는 더 올려줬어. 길병원하고 임금을 비교해보니까 기자들 아무것도 아니더구먼. 이래 가지고 되겠는가 해서 많이 올려주라고 했어. 그러나 노조에서 해달라는 걸 다 해줄 수는 없잖아. 앞으로 더 좋아질 거야.”
길병원은 80년대에 고속으로 성장했다. 한참 경기가 좋던 시절 길병원은 연간 100억원의 흑자를 기록한 적도 있다. 이총장이 각종 문화사업과 교육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도 이 무렵의 호황 덕분이다. 호사다마라던가. 길병원이 인천지역을 대표하는 의료기관으로 부상하면서 주변에는 수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다.
―한때 길병원 원장이 죽었다거나 자살했다는 소문도 나돌지 않았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런 소문이 나돌았지요. 지금 생각하니까 그런 루머가 나돌았을 때 초장에 잡았어야 하는 건데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내가 죽었다는 소리가 10년 동안 있었어요. 나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는 자연히 없어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대꾸를 안하니까 점점 더 퍼지더라구요. 우리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더라구요.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을 죽었다고 했으니…”
―왜 그런 소문이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내가 79년도에 길병원을 지은 뒤부터 그런 소문이 나돌았으니까…. 나는 가끔 그런 얘기를 해요. ‘남이 잘 되면 처음엔 부럽다가 그 다음엔 질투하다가 나중엔 미움이 되는가보다’라고.”
―길병원이 사업을 확장하자 정가와 증권가에서는 5공 고위층과 유착설이 심심치 않게 나돌았습니다. 사업자금을 대출받는 과정에 특혜를 받았다는 주장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너무나 억울합니다. 60년대 초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구조적으로 병원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환자가 아파도 돈이 있어야 병원을 가지요? 60년대 말부터 경제발전이 되고 병원들이 생겨났는데 차병원, 백병원, 길병원, 순천향병원 등이 다 그때 시작한 겁니다. 이때 병원 하신 분들은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가족을 위해 시간도 냈을 겁니다. 나처럼 24시간 일에만 매달린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분들은 술도 마시고 가족을 위해 돈도 썼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안 먹고 안 놀고 일만 했습니다. 지금 그분들 병원이 길병원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왜 길병원은 경이로운 것이고 다른 병원은 당연한 겁니까? 70년대에 병원을 지을 때 다른 분들은 정부에서 보조를 받았지만 나는 순수하게 내 돈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특혜를 받았다는 겁니까?”
―중앙길병원을 지을 때는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취약지구를 맡지 않았습니까. 철원과 양평, 백령도는 아무리 운영을 잘해도 적자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병원은 꼭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내가 취약지구를 맡는 조건으로 500 병상을 받아서 중앙길병원을 지었던 겁니다. 그 사람들 먹여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슨 특혜입니까. 가장 특혜를 안 받은 사람이 바로 납니다. 지금 크게 성장한 어떤 병원은 70년대 초에 길병원보다도 못했습니다. 정말 내가 돈이나 벌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대도시로 가지 뭐하러 취약지로 들어갑니까. 그때는 병원을 짓겠다고 하면 정부가 공원부지를 풀어주고 돈까지 싸서 주었습니다. 그런 병원들이 지금은 엄청나게 큰 겁니다. 그랬는데 내가 특혜를 받았다구요? 하하하.”
“나는 지금껏 사심없이 살아왔다”
이길여씨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왜 하필 인천이었을까. 인천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인연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이길여씨가 병원문을 닫고 유학길에 올랐을 때 많은 환자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이길여씨는 귀국 후에도 인천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 인천에서 이길여씨에 대한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 적이 있다. 길병원에서 노동조합의 합법성 여부를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졌을 때다. 지난해 8월 20여명의 직원들이 길병원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그때까지 10여년 이상 활동이 거의 없던 노동조합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충돌이 생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이 대거 신규 조합에 가입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길병원측은 조합원을 징계하는 파동이 생겼다.
이 사건은 길병원과 이길여씨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복수노조를 둘러싼 노사의 신경전이 장기화되면서 이길여 이사장을 성토하는 직원들이 생겨났다. 인천지역 시민단체들과 민주노총 등도 이길여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병원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이미지를 중시해온 이길여씨로서는 적지않은 충격이었다.
―사건 전말을 살펴보면 이 총장은 노동조합에 대한 편견을 갖고 계신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편견 없습니다. 현행법상 복수노조는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태를 겪으며 내가 깜짝 놀란 게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사심없이 살아왔습니다. 내 개인을 위한 일에는 정말 혹독하게 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전부 희생하고 오로지 병원을 위한 일에만 힘써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한테 잘못했다고 따지는 거 아닙니까. 그때 내가 너무 놀랐습니다. 아이들에게 저런 면이 있었구나.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았지’ 하는 실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노조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결국은 그 아이들이 병원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냥 방관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거 아닙니까.”
―노조를 만든 뒤에야 회사 내에 노동조합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만큼 기존 노동조합이 활동을 안 했다는 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경영자로서 노동조합을 소홀하게 대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사실 내가 노동조합 사람들과 대화해 노사 문제를 풀어본 경험이 없잖아요.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지 그런 부분까지는 신경 쓸 틈이 없었어요. 나도 지난번에는 성숙하지 못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은 해요.”
“여성이라서 못한 일은 없다”
이길여 총장은 전라북도 옥구 출신이다. 그가 태어나던 날 집안에서는 아들을 기다리며 마을잔치를 준비했다고 한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 시작한 셈이다. 아들이 귀했던 집안의 둘째딸이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능히 짐작할 만하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상처가 컸던지 이길여씨는 여섯 살 때까지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눈치를 살펴가며 억척스럽게 집안일을 거들었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구박이었다.
―어린 시절에 관한 글을 보니까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 같습니다. 혹시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까.
“어렸을 때는 정말 간절하게 했죠. 남자가 뭐고 여자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에 왜 여자로 태어나서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와 아버지로부터 구박을 받아야 하는 지 곰곰히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학교에 들어간 뒤부터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지금껏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개인적으로 여성이기 때문에 할 일을 못했다거나, 더 할 수 있는 것을 포기했다거나 그런 적은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의사는 남녀차별이 그리 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수많은 여성이 자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개선하는데 있어서 나도 무엇인가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최근 군복무 가산점 제도를 놓고 남녀의 견해가 감정적으로 부딪친 일이 있습니다. 총장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하하하. 여성으로서는 남자를 특별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자가 됐건, 여자가 됐건 군대에 가서 국가를 위해 봉사한 것은 높이 평가하고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 나갔다가 여성들에게 혼나는 거 아니야. 하하하.”
이총장의 인생에서 어머니 차순녀 여사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산을 팔아 서울대 의대에 진학시킨 사람이 어머니다. 짧은 통치마를 즐겨입었던 어머니는 일찍이 만주와 상하이를 다녀왔을 만큼 세상 물정에도 밝았다. 2년 전 차순녀 여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총장은 ‘어미새의 노래’라는 평전을 냈다. 여기에는 이총장의 가족사가 진솔하게 담겨 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지 2년이 다 됐습니다. 어떤 때 어머니의 빈 자리를 느끼십니까.
“어머니 얘기를 하려면 마음을 좀 가다듬어야 되는데…. 내 행동과 내 생각 곳곳에 어머니 냄새가 배어 있어요.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면 ‘이게 바로 어머니의 냄새야’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한국 여성들 중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감정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라고나 할까. 살아오면서 그런 느낌이 드신 적은 없었습니까.
“그 시대 여성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해요. 나는 비교적 그 시대를 잘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봐도 어머니는 그 시대를 열심히 사셨어요. 만일 내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어머니처럼 하기는 힘들었을 거예요.”
‘어미새의 노래’를 읽다 보면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차순녀 여사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시어머니는 후처를 들이면서까지 대를 이으려고 노력했다. 세월이 흘러 이길여씨가 의사로 성공한 뒤 한 청년이 차순녀 여사 앞에 나타났다. 차여사는 이 청년을 이복 아들로 확신하고 입양하기 위해 ‘친자관계부존재확인소송’을 내게 된다. 문제의 청년이 다른 사람의 호적에 올라가 있는 점을 알고 편법을 썼던 것이다.
―‘어미새의 노래’를 보면 차순녀 여사가 ‘잃어버린 이복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재판정에서 “내가 낳은 아들”이라며 거짓으로 증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 얘기도 나옵니까? 책을 읽지 못해서…. 우리 어머니니까 그런 일을, 그런 짓을…. 그런 짓이라고 해야겠네. 그 당시 언니와 나는 굉장히 반대했어요. 재판도 하지 말자고 그렇게 말렸는데 어머니는 막무가내였어요. 우리는 어머니와 생각이 많이 달랐지만, 어머니 말이라면 신기할 정도로 복종했어요.
―어머니께서는 두 딸을 잘 키우고도 아들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내색은 안했지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참았겠어요. 그게 그만 그 사람을 보는 순간 한꺼번에 허물어진 것 같아요.”
이길여 총장은 독신 여성이다. 미모의 재력가가 왜 독신인가 하는 의문은 평생을 두고 따라다녔다. 그럴 때마다 이총장이 하는 말이 있다. “나는 환자하고 결혼했어요.” 어머니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랐지만, 결혼 문제만큼은 예외였다. 그렇다고 이총장이 독신주의를 고집한 것도 아니다. 일에 몰두하다 보니 남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결혼과 사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품어본 일도 있습니까.
“나는 계속 일해야 했기 때문에 시집간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요. 남편이 생기고 자식이 생기면 그만큼 환자들에게 신경을 못쓰게 되잖아요. 미국 가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번도 결혼을 꿈꿔보질 못했어요.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눈에 들어오는 남자가 없었어요. 나는 완벽한 여자거든요.”
―자신이 완벽한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건가요.
“얘기가 그렇게 되나? 사람은 좀 허술한 데가 있어야 되겠더라구요. 친구들과 어디 놀러가도 좀 떨어지는 여자는 남자를 빨리 만나고, 나는 그 아이보다 완벽한데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거야. 나는 그게 연분이 아니라 남자를 받아들일 만한 허술한 구석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남자를 받아들이는 게 허술하다구요?
“하하하. 나한테는 너무나 큰 벽이 있는 거야. 딱딱한 벽이 있다 보니 남자들이 접근을 못한 거야.”
―친구들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 부러움 같은 것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내가 부러움을 느꼈으면 결혼을 했지. 내가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으면 얼마든지 했지. 나는 한번 결심하면 하는 사람이거든. 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니까. 하하하.”
의사가 된 사연
이길여 총장은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린 나이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서른다섯살의 나이에 세상을 뜬 아버지를 두고 사람들은 홧병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길여씨의 외삼촌은 “폐렴이 틀림없다. 일본에서는 고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귀가 번쩍 띄는 순간이었다. 그후 이총장은 장티푸스로 죽어나가는 친구들을 보고 의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다.
―특별히 의사라는 직업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까.
“아주 어려서부터 의사가 좋았던 것 같아요. 청진기를 끼고 진찰하는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의사 얼굴만 봐도 존경스러웠어요. 옛날에는 잘 먹지도 못해서 아픈 사람들이 참 많았어요. 나는 그 사람들을 고쳐주고 싶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폐렴으로 돌아가셨는데 페니실린이 없었던 거예요. 죽음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날마다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폐렴으로 돌아가셨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는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총장께서는 산부인과에 주력하셨습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의사가 되겠다는 목표는 세웠지만, 폐렴을 고치겠다거나 전염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그 시절엔 그냥 학교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고통받는 어린 아이들을 너무 많이 보았거든요. 내가 산부인과를 택한 건 당시 부인병으로 고생하는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그때는 여자들이 아팠다 하면 대부분 산부인과 질환이었어요.”
의사가 되겠다는 이길여씨의 의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리에서 통학하던 시절 기차를 기다리며 교탁 밑에 숨어서 책을 읽던 일이나 6·25 전쟁 때 피란도 가지 않고 토굴에 숨어서 입시를 준비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있다. 당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이데올로기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총장 역시 그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일까.
―광복 이후의 혼란기에 중학교를 다녔고, 6·25 전쟁중에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공부만 하는 학생은 ‘왕따’를 당할 수도 있었던 시절인데….
“할아버지가 동학당에 참여했는데 자금을 대시면서 가끔씩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어요.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노심초사하면서 사셨어요. 그때 할머니가 아이를 열둘인가 낳았는데 기어다닐 만하면 죽는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열세번째인데 또 죽겠구나 하고 내버려두었더니 살아난 거예요. 그러니 그 할머니가 아들을 어떻게 키웠겠어요. 할머니는 ‘회도 미꾸라지 회가 최고’라며 아버지가 혹시라도 휩쓸릴까봐 철저히 감시하셨어요. 그런 영향이 우리한테도 미쳤던 거지요. 우리가 만세라도 부르겠다고 하면 절대로 안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만세 부르면 잡혀가서 죽는다는 거예요. 6·25 전쟁이 터질 무렵에는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했어요. 인민군이 들어와서 학생들을 데리고 교육을 하는데 나는 거기 휩쓸리지 않았어요. 유혹도 참 많았어요. 하지만 나는 대학에 가서 의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토굴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좀 이기적이었죠 뭐.”
‘이길여 신화’의 본거지 인천
이총장은 마침내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어머니가 논밭을 팔아 등록금을 댔다. 이총장은 졸업을 앞두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1인자가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고생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유학을 미루고 말았다. 친구와 함께 인천에서 개업한 ‘자성의원’은 대성공이었다. 이때부터 인천은 이길여 신화의 본거지가 된다.
―사람은 잘 나갈 때 현실에 안주하기가 쉽다고 합니다만. 어떻게 미국 유학과 일본 유학을 결정하셨습니까.
“미국 유학은 대학시절부터 준비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미국 갈 돈을 벌기 위해서 개업한 거나 마찬가지죠. 미국을 다녀와서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 환자가 너무 많아서 길가에까지 줄을 섰으니까요. 그때는 페니실린과 마이신만 쓰면 병이 다 나았어요. 그러니까 환자들이 엄청나게 밀려온 거죠. ‘선생님, 왜 병이 안 낫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침부터 새벽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어요. 그런 생활을 하던 어느날이었어요. 잘 닦인고속도로를 벤츠 승용차가 옆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리다 바윗덩어리에 쾅하고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환자만 보다가 어느새 마흔이 된 거예요. 젊었을 때는 노벨상 같은 것도 생각해본 사람이 신문 한 장 못보고 살면서 40을 넘긴 거예요. 막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어요. 그렇다고 그 나이에 미국으로 가서 젊은 아이들과 경쟁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일본으로 간 거예요.”
―미국 유학을 마칠 무렵 영주권을 허용한다는 통보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귀국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조국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조국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모든 혜택을 받고 의사가 됐잖아요. 우리보다 유능한 사람들이 전쟁통에 부모 잃고 공부할 기회를 놓쳤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면 조국이 고맙고 뭔가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렵게 배운 지식을 왜 미국 사람을 위해 씁니까? 고통받는 민족을 위해 쓰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그때는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사람은 별로 없어요.”
―길산부인과를 운영하시던 시절 하루에 한끼만 먹고 잠도 3시간 이상을 자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체력에 한계를 느낀 일은 없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참 이상해요. 병원을 하루도 쉰 일이 없거든요. 내가 건강한 체질인가 봐요. 그것도 어머니한테 감사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지요.
일반인이 볼 때 그의 고립은 쉽게 이해되거나 흉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는 무엇엔가 몰두해 자신을 통째로 던지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일종의 환자(?)라고 자신을 진단한다.
실제로 현재 전주에 거주중인 그는 전화도 끊고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매일을 고등학교 3학년처럼 읽고 쓰고 가르치는 일만 하면서 살아간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에도 그렇게 산 적이 있다. 공부하는 즐거움에 빠져 5년 동안 한번도 한국에 나오지 않고 학교와 집이 전부인 생활을 했다. 자기가 살던 소도시의 지리를 전혀 모르고 그저 학교와 그 앞에 있던 아파트 사이의 길만 알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외국 유학의 가장 큰 장점을 ‘격리된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마치 고시생들이 절이나 고시촌에 들어가는 것처럼 공부에 미치지 않으면 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시생처럼 한시적으로 자신이 이룰 뚜렷한 목표를 위해 고립을 자청하는 경우와 강준만처럼 지속적으로 격리된 환경에 있는 것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같은 대학에 있는 교수들마저 그와 연락이 안 돼 우연히라도 마주치면 “도대체 어떻게 접선해야 되느냐?”고 물을 지경이란다.
강준만의 고립된 삶은 그에게 무엇을 보장해 주는 것일까? 그의 육성을 한번 들어보자.
“전 제 이름을 소중히 여깁니다. 먼 훗날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언론을 갖게 된다면 그때 가서 가장 공이 큰 공로자로 제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게 제가 ‘인물과 사상’에 모든 정열을 바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는 읽기에도 벅찰 만큼의 글을 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기가 질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밀고 당기고 높고 낮고를 가리지 않는 전천후 타자를 만나면 투수는 도대체 볼을 던질 곳이 없다는 공포감을 느낀다. 피부로 느껴질 만큼 내공이 막강한 고수와 맞선 상대는 자신의 초라함으로 절망감을 경험한다.
한번 그의 글을 읽어 보라. 아침마다 10개의 일간지를 거실에 펼쳐 놓고 비교해 가며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그의 독서량은 사람의 기를 질리게 한다.
“나는 최선을 다할 뿐”
인터뷰를 끝내야 할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지막 주제는 역시 의료계 사태였다. 의사가 좋아서 미친 듯이 공부를 시작했고 한국 의료계에 신화를 만들었던 이길여씨. 그는 의료계의 파업투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길여씨가 몸담고 있는 길병원과 가천의과대학도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어쩌면 그의 병원사업에 최대의 고비를 맞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건의료 부문을 총체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의료계의 목소리와 국민의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총장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다양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학생과 교수와 전공의가 다 생각이 다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진리는 올바른 의약분업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말씀해주십시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와 의료계의 주장이 워낙 달라서….”
―의료계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하지만 고통받는 국민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제는 진료를 거부당한 시민이 지하철에 뛰어든 일까지 있었는데.
“무척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파업으로 문제를 풀려는 방식에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들까지 진료를 중단해야만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있고…. 개인적으로 파업에는 반대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이해합니다.
―만약 지금 총장께서 전공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공의라면 당연히 전공의의 주장을 따라야지.”
인터뷰가 모두 끝났다. 이길여 총장은 “내 평생 이렇게 긴 인터뷰는 처음”이라며 땀을 닦았다. 자세히 보니 눈가에 주름이 선명했다. 예순여덟살에 대학교 총장이 된 ‘철의 여인’. 그는 지금 자신의 마지막 꿈을 키우고 있다. 총장실 문을 나오기 직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30년쯤 지난 뒤 ‘이길여’라는 이름이 어떤 인물로 사람달의 기억속에 남아있기를 바라십니까.
예상대로 이길여 총장은 자신의 ‘좌우명’을 꺼냈다. 그는 여전히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벤츠 승용차였다.
“그 사람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그 한마디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