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나는 공사 3기생과 행정장교 후보생간의 패싸움에 대해
-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장에 섰다. 1961년에는 윤보선 대통령의
- 민정이양 발언을 보도한 동아일보 필화사건으로
-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두 사건으로 아버님은 큰 병을 얻어 서울 구경도
- 한번 해보지 못하고 환갑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 아버지…!
선친께서는 1964년 6월22일 환갑도 채 되기 전인 만 58세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이 불효자식 때문에 아버지께서 속병을 앓아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이고 가슴이 저려온다. 그 당시 하시던 사업이 기울어 마음의 고통도 있었지만 나에게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아버지께 크나큰 충격과 고통을 안겨드리고 이것이 병을 유발한 원인이 되어 아버님이 세상을 일찍 떠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 두 가지 사건이란 바로 1952년 ‘공군사관학교 퇴교사건’과 1961년 ‘동아일보 필화사건’이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연세대 정외과 1학년이었던 나는 ‘하늘에서 조국을 지키자’는 생각으로 공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했다.
공사 입학식 때부터 학생 대대장으로 뽑혔던 나는 2학년 때는 생도회격인 ‘오성회(五星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모임을 이끌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소박한 ‘파일럿’의 꿈은 2년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군법회의장에서 먼 발치로 본 아버지
1953년 봄, 모든 기초훈련을 마친 우리 생도들은 비행훈련 이전에 실시하는 마지막 지상훈련을 받기 위해 대전항공학교로 이동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우리는 항공병 학교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날 밤 임관을 하루 앞둔 행정장교 후보생들이 유성에서 술을 마시고 돌아와 3기 사관 불침번에게 공연히 시비를 걸어 일이 터진 것이다. 물론 사건의 발단은 술에 취한 행정장교 측에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부상자가 생겨난 데다 전시중이라 그대로 넘길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되었다.
이제 열 달만 참으면 임관하게 되는데, 최소한 예닐곱 명은 어쩔 수 없이 처벌당할 위기였다. 생도회장인 난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비록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회장인 내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모든 건 내가 책임지고 동료들을 살려야겠다.’
결국 난 혼자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장에 섰고 퇴교조치되었다. 아쉽게 공사를 퇴교했지만 군인사법에 의해 공사 3년이 군복무기간으로 환산되어 공군 이병으로 전역했다.
이 일은 당시 공군에서는 워낙 큰 사건이라 대구시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번졌다. 아버님은 달성공원에 아침 산책을 나가셨다가 ‘이번 공군사건의 주동자가 대구 출신의 이모 생도라더라’는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 수소문 끝에 군법회의 장소인 대구 서부(西部)국민학교로 달려오셨다.
아버지는 군법회의를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공군본부 헌병대로 오셨으나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군법회의장으로 호송되어 들어갈 때 먼발치에서 나를 바라보시던 수심에 가득 찬 아버지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이후 결정적으로 아버님의 건강을 상하게 한 사건이 바로 동아일보 필화사건이다.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한 달도 채 못된 6월3일 오후, 청와대에서는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의 특별 기자회견이 있었다. 윤대통령은 “군사정권은 9월의 유엔총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조속히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게 문제의 기사였다. 모든 언론은 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아예 그 기사를 빼버리거나 은폐해버렸는데 동아일보만이 당당하게 1면 톱으로 다뤘던 것이다.
혁명정부는 윤보선 대통령이 하지도 않은 말을 동아일보가 국민과 군사정부 사이를 이간시키기 위해 꾸며서 썼다며 문제를 삼았다. 결국 나는 혁명정부의 ‘포고령을 위반한 죄’로 13일 오후 구속돼 서대문경찰서에서 서빙고 육군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내가 수감되자, 아버님께서는 큰 충격을 받으셨다. 특히 아버님께서는 내 죄명이 혁명정부의 ‘포고령 위반’이라 중형을 받는 것이 아닌가하고 크게 걱정했던 것이다. 아버님은 사나흘에 한번씩 대구에서 면회를 오셨는데 그때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얼굴에 병색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렇게 두어 달 고생하고 8월 초 내가 풀려났으나 아버님께서는 충격을 이겨내지 못해 결국 속병이 들었으며 2년 뒤 환갑을 한 해 남긴 채 눈을 감으시고 말았다. 모두 내 탓이었다.
공군사관학교 퇴교사건이나 동아일보 필화사건은 나로서는 부끄럼 없는 소신에 따른 행동이었으나 아버님으로서는 혹시 내 자식이 잘못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아버지께서는 인자하시면서도 무척이나 엄하신 분이셨다.
나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한방을 썼는데 내가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꾸벅꾸벅 졸 때면 아버지께서는 나를 꼬집으며 한 겨울에도 밖에 나가서 찬물에 세수를 하고 다시 공부를 계속하라시며 야단을 치곤 하셨다.
‘정직하라’ ‘겸손하라’
이런 아버지의 엄하심은 내가 정치에 입문해서도 여전하셨다.
1963년 가을 나는 민족의식이 강하고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집념이 강한 박정희(朴正熙) 국가최고회의의장에 공감하여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공화당에 입당, 그해 대통령선거 유세반 연사로 나섰다.
나의 연설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50만이 넘는 인파가 대구 수성천 양쪽 강둑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연단에 오른 나는, 내가 왜 공화당에 입당하게 됐는지, 왜 박정희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지 목청을 높였다.
내 연설은 대성공이었다. 연설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박의장은 내게 “대웅변가요” 하면서 담배를 한 대 권했다. 기자 시절 마주 앉아 담배를 피운 적이 있었던 난 무심코 받아 피웠다. 그날 대구 유세를 마친 후 문안인사차 대구시 서문로 본가에 들른 나는, 아버지로부터 호된 야단을 맞았다.
“네가 어떻게 감히 국가 원수와 함께 맞담배질을 할 수가 있단 말이냐?”
순간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정중하게 사과를 올렸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과 함께 마음속 깊이 존경심도 갖고 있다. 아버지께선 특별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당에서 한학만 공부하신 분이지만 평소 생활이 깨끗하고 바른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한평생 나에게 ‘정직하라’ ‘겸손하라’고 가르치셨다.
당신께서 살아온 길을 생각하면 내가 8선 의원에다 국회의장까지 지냈다고는 하나 아버님에 비할 바가 못된다.
아버지께서는 평범한 가운데서도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강한 분이셨다. 본래 합천 출신으로 결혼 후 대구에 정착했는데, 1932년 내가 태어날 땐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었기에 우리 집은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했다.
당시 대구시내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던 사람을 조합원으로 하는 양곡조합 이사장은 동암(東菴) 서상일(徐相日) 선생이 맡고 있었는데, 동암 선생의 사무실이 대구시내 달성공원 앞 조양(朝陽)회관에 있었다.
동암 선생은 1910년대에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는데 가끔 우리 집에 들러 아버지와 뭔가 밀담을 나누곤 하여 나는 무슨 일인가 몹시 궁금했다. 그 의문은 해방이 되자 곧 풀렸다.
해방 후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바에 의하면 동암 선생은 일제시대에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부터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거출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는데 아버지께서도 동암 선생을 만날 때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독립운동자금을 드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민족학교인 대륜중학교에 들어간 것도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독립운동과 신앙심
아버지께서는 신앙심 또한 매우 깊었다. 대구 서문교회(당시 목사 李聖獻)의 집사로 계셨는데 1964년 돌아가시는 날 아버지께서는 “나는 오늘 밤 12시에 하느님 곁으로 간다”고 말씀하시고는 정말로 그날 밤 12시 정각에 두 손 모아 합장기도를 하신 채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내 전재산인 저금통장이 서랍 안에 있으니 그대로 교회에 갖다바쳐라”는 말씀을 남기셨으니 참으로 신앙심이 깊으신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내 걱정을 하셔 내 집사람에게 “네가 꼭 아범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유언도 남기셨다.
요즘도 부친의 산소에 갈 때면, 난 속으로 ‘제가 불효자식입니다’라고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곤 한다. 자식으로서 걱정만 끼치고 서울 구경 한번 제대로 못시켜 드린 불효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아버지께서 환갑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으나 나의 어머님(朴順今)은 1907년 12월26일 출생하여 1997년 3월10일 90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으니 장수를 하신 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금슬이 좋아 늘 함께 새벽기도를 나가셨다. 두 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특히 어머님께서는 신앙심이 깊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매일같이 새벽기도를 가셨다.
어머니께서는 산에 올라가 큰 짐승을 두 마리 잡는 꿈을 꾼 뒤 날 낳으셨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도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8선 의원을 지내고 국회의장을 두 번씩이나 역임했으나 이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기도와 정성 덕분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정치하는 아들 때문에 평생 가슴 졸이며 사신 어머니셨고, 또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유세장에 나가 청중에게 깔고 앉을 헌 신문지를 손수 나눠주시던 어머니셨다.
나는 그때마다 연설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그 모습에 남몰래 감사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전 대구 영남대 부속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나는 거의 매일같이 병원에 들렀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여기 일보다는 국회 일이나 잘 보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내 귓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만 같다.
불효에 대한 회한
옛말에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는 글귀가 있다. 요즘 들어서 이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 살아계시다면 서울구경이라도 제대로 시켜드릴 텐데….
조선시대 가사(歌辭)의 제1인자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지은 시조에 이런 것이 있다.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시조가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이제야 내가 철이 든 탓일까….
나의 가슴속에는 늘 부모님께 씻지 못할 불효를 저질렀다는 아쉬움과 회한이 남아 있다. 그래서 더욱 부모님이 그리워지고 가슴이 저려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