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피 문화가 세계를 휩쓸던 1960년대.춥고 배고픈 이 땅에도 청년문화가 꽃피었다.
- 그 중심에 섰던 ‘쎄시봉’과 ‘청개구리집’멤버들. 한국 쇼비즈니스 생성기에 혹은 별이 되고 혹은 사라져간 재기와 순수의 청춘, 그 짧은 기록.
1964년 경 TBS TV의 ‘굳 이브닝쇼’를 진행할 때의 모습. 맨 왼편이 나
첫째는 물 끼얹은 듯 조용했던 객석의 ‘숙연함’이다. 어떻게 청중의 소리 듣는 분위기가 그토록 조용할 수가 있을까. 고복수씨의 은퇴공연, 이제는 더 이상 정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그리도 가슴 아팠던 것일까. 극장 안은 객석의 응시와 경청으로 공연 내내 숙연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여관에서 극장으로, 극장에서 여관으로 이동할 때 당시 스타들의 걸음걸이다. 지방도시 길가 건물들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일까. 길 한가운데를 횡렬로 걸어가는 그들의 걸음걸이는 난쟁이 나라의 걸리버나 도시를 짓밟고 가는 ‘용가리’ 바로 그것이었다. 조금 뒤떨어져서 따라가는데 그들은 길가의 전주보다 더 높아 보였다.
남인수, 현인, 루이 암스트롱
서서히, 그러나 지체없이 50년대는 지나가고 60년대가 시작됐다.
1960년 4·19 의거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1961년 5·16 쿠테타가 일어나던 그 해 12월 문화방송 라디오가 개국했고 같은 달 KBS TV도 개국했다. 1963년 동아방송 라디오국 개국, 이듬해 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개국, 그리고 그 해 12월4일에는 TBC TV(동양방송)가 개국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아야 한다던가, 잇단 민간 상업방송 개국으로 우리 시청각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클래식, 가곡, 국악 위주로 방송하며 품위를 중시하던 KBS 주변에서 민방들이 새 리듬과 창법의 음악들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1961년 루이 암스트롱이 워커힐 개관기념 공연을 위해 방한했다. 그는 “레이디스 앤드 젠틀멘”이라는 인사 대신에 “Hello Folks!” 라고 했다. 트럼펫도 불고 노래도 불렀다. ‘블루베리 힐’ ‘헬로 달리’ 등. 쉰 소리에 서민적인 미소, 눈이 무섭게 컸고 볼과 입술이 두툼했다. 나는 대학 때부터 구독하던 재즈 격주간지 ‘다운 비츠(Down Beats)’를 통해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무대가 끝나고 나는 그와 둘이서 짧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전통 재즈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했더니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었다. 쿨, 모던, 프로그레시브 모두 좋아하며 음악이면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고 했다. 늘 다음 순간의 소리를 생각하는 것이 음악 아니겠냐고도 했다.
1962년 6월26일 오후 2시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38선’ ‘이별의 부산 정거장’ ‘산유화’ ‘청춘고백’ 등을 남겼다. 푸른 하늘보다 더 푸르게 하늘로 메아리치던 그 낭랑한 소리가 사라졌다. 눈부신 소리였다. 고복수 은퇴공연 무대에서 반주를 하던 내가 가장 좋아한 곡은 ‘청춘고백’이었다. 장례는 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우리 악대가 행렬의 앞에 섰다. 필동에서 종로로 접어들고 다시 화신백화점을 끼고 조계사로 들어섰다. 나는 악단 맨 앞자리에서 대고(큰북)를 쳤다. 종로 길은 그렇게도 넓었고 연도에 늘어선 애도객들의 눈은 허공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좋은 날씨였다.
한국일보 문화부 이명원 기자가 가수평을 매주 8매씩 써달라고 부탁했다. ‘한많은 미아리 고개’를 부른 이해연씨의 남편이자 길옥윤씨의 서울치대 선배이며 흥업주식회사 상무였고 트럼페터 겸 가수였던 김영순씨가 나를 추천했다. 주로 미8군 출신 가수에 대해 썼다. 최희준, 유주용, 위키 리, 박형준, 현미,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그리고 현인 선생에 대해서도 평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현인 선생을 뵙게 되었다. “이백천씨, 미리 좀 알려주지 않고…”라며 섭섭해하시는 것이었다. ‘베사메 무초’가 여자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과 선생의 굵고 진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결례를 각오하고 한마디했던 것이 서운했던 것이다. 당시 내 나이가 30세도 안되었을 때였다. 그때 결심을 했다. 앞으로 20년 간은 아무것도 안 쓰겠다고. 그리고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하지 말자고. 나중에서야 ‘비평은 올바른 칭찬’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기사로 이명원씨는 내게 새 칭호를 주었다. ‘경음악평론가’였다.
이제 쎄시봉 시절로 이야기를 옮겨도 될 것 같다.
1964년 4월 중순의 어느 날 오후. 나는 무교동의 음악감상실 쎄시봉에 들어섰다. KBS 라디오의 일요일 아침 프로그램 ‘선데이 리퀘스트’에 사용할 음반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구성대본을 맡았는데 레코드실에 내가 원하는 음반이 거의 없었다. 팝송 레코드가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오래된 것들이었고 최신곡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예산 부족으로 그 많은 신곡들을 때맞춰 구입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프로그램의 담당 프로듀서도 없이 외부의 객인 나 혼자 라디오의 한 시간을 책임져야 했던 까닭이 있었다. 새 민방 TV(동양방송)가 곧 발족하는데 마침 대학 동기 김규가 그 프로젝트의 중심 인물이었다. 내가 그에게 쇼파트에 내가 있어야하지 않겠느냐고 자청했더니 그는, 방송 일은 처음이니 TV로 직행하기보다 우선 라디오를 경험해 보는 편이 좋겠다며 구성작가 자리를 잡아놓은 것이었다.
쎄시봉의 주인 ‘이선생님’을 만났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이선생은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승낙하셨다. 원하던 일을 쉽게 해결하고 커피를 마시며 실내를 둘러봤다. 플로어에 약 150석, 계단 몇 개를 올라가는 반층 위에 80석이 더 있었다. 위층의 안쪽에는 레코드가 빽빽이 들어찬 DJ 박스가 있었다. 실내 네 귀퉁이에 높이 걸린 네 개의 스피커에서는 부드럽고도 힘찬 사운드가 울려나왔다. 알 마티노의 ‘아이 러브 유 모어 앤 모어 에브리데이’, 짐 리브스의 ‘아디오스 아미고’,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 폴 앤 폴라의 ‘영 러버스’….
찾아간 시간이 오후 두 시쯤이었다. 음악은 싱싱했지만 감상실 안의 풍경은 좀 달랐다. 소곤거리는 친구들, 허공을 쳐다보는 친구, 책 보는 친구 옆에서 도시락을 먹는 손님도 있었다. 머리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있는 남녀, 테이블을 옮겨다니는 친구…. 음악은 실내에 가득 차 흐르는데 정작 그 음악을 듣는 쪽은 홍수가 할퀴고 지나간 뒷자리처럼 황량했다. 대개가 스무 살 문턱에 막 올라선 젊은이들. 음악이 좋아 찾아온 학생이 태반이었지만 건달기가 묻어 있는 손님도 적지 않아 보였다. 주인에게 “누군가가 음악 해설도 하고, 영어 가사 풀이도 해주면서 친구처럼 어울려주면 좋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그렇게 해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신다. “찾으면 있겠죠”라는 나의 대답에 “얘기 꺼낸 사람이 하시죠, 그게 좋지 않겠어요”라고 이선생이 말했다.
다음 수요일 오후 다섯시. ‘데이트 위드 쁘띠 리’의 예정시간이 되었다. ‘데이트’는 영어, ‘쁘띠’는 불어. 굳이 우리말로 바꾼다면 ‘작은 이가(李)와의 만남’이었다. 일주일 동안 나름대로 광고도 하고, 입구에 포스터도 붙이고 했더니 쎄시봉은 제법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 날 내가 준비한 곡은 루이 암스트롱, 냇 킹 콜, 마할리아 잭슨, 빌리 할리데이, 튜크 엘링턴 악단, 그리고 흑인영가였다. 중앙계단 위쪽, 실내 어디서든 보이는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한 곡씩 진행을 하고 있었다. 아래 플로어 정면의 젊은 친구 네댓 명이 우루루 일어나 출구 쪽으로 가면서 그 중 하나가 나직이 내뱉었다.
“개새끼, 지랄하네.”
그러자 잇달아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일어섰고 내 쪽을 흘겨본 뒤 나가버렸다.
쎄시봉, 청춘과 낭만의 절정
털퍼덕 계단에 주저앉았다. 일부가 빠져나간 쎄시봉에는 침묵만 남았다. 모두의 시선이 굳었고 그 속에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만하자 결심하고 남은 손님들에게 사과했다. 아직 내가 수양이 모자라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했다고, 기왕 준비한 음악이니 듣자고 하며 허둥지둥 맺음을 했다. 그렇게 끝내는 시점까지 남아준 손님은 절반 정도.
주인과 마주앉았다. 얼굴이 벌개져 죄송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포스터도 바로 뜯어달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선생은 생각이 달랐다. “여기가 바로 종로구 우범지대 일번지고, 그리고 중간에 나간 사람도 많지만 그대로 끝까지 남아 들어주었던 학생들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선생의 부인과 아드님(후에 TBC TV PD가 된 이선권)까지 계속해보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쎄시봉 주인 일가의 의견에 선뜻 응할 마음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며 혼자서 자문자답을 해봤다. 내 작은 지식 자랑하려고 그들 앞에 선 것이 아니지 않은가. 어딘가 지쳐 보이는 그들과 동무하고 싶어서 나서지 않았는가. 다음주는 어떻게 할 것인가….
‘쇼쇼쇼’ 녹화 현장. 맨 오른쪽에서 조명 설치를 지시하고 있는 이가 나다
DJ 박스에서 신청곡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은 20초 내외, 테이프에 수록된 곡을 찾자면 적어도 l분은 걸린다. DJ의 손이 올라오면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다. 마이크를 들이댈 때 옆에서 다른 친구가 끼여 들 수도 있다. “얘, 지난주에는 다른 여학생이랑 왔어요”. 인터뷰하는 동안만은 실내가 조용했다. 모두 마이크 주변에 시선을 모았다. 마이크가 찾아가는 곳이 객석 안의 작은 무대였다. 곡이 끝나면 무대가 옮겨졌다. 무대마다 흥이 났다. 어느 틈엔가 쎄시봉은 젊은이의 광장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또래 친구들의 ‘입김’을 서로 여과 없이 받아주고 있었다.
당시의 쎄시봉 식구들을 소개해야겠다. 주인 이선생과 아름다운 사모님, 아드님 이선권 외에 DJ실 스태프는 조용호(서울대 미대 출신, ‘하얀 손수건’의 우리말 가사를 썼고 TBC TV ‘쇼쇼쇼’의 PD와 국장, m-net의 전무 역임) 구자홍(서울 문리대 철학과, 후에 ‘실험극장’ 멤버, 현재 의정부 예술의전당 관장)이었고, 신청곡에 적힌 사연을 읽어주는 성우로 피세영(영문학자이자 수필가인 피천득 교수의 자제, ‘실험극장’ 멤버, 라디오 DJ, 현재 캐나다 거주)과 이장순(TBC 라디오 성우, 맑은 눈, 맑은 소리, 낭독이 일품이었다. 후에 영화감독과 결혼했고 3년 전 미국에서 작고)씨가 있었다. 쎄시봉에 출입하는 전 스태프는 보수 없이 일했다. 분위기와 음악이 좋아 모인 것뿐이었다.
‘데이트 위드 쁘띠 리’를 서너 달 진행하다 ‘대학생의 밤’을 시작했다. 피아노와 스포트 라이트를 준비하고 대학생들의 노래마당을 펼쳤다. 피아노는 입구 옆 공간에 놓았다. 피아노 반주는 김강섭(전 KBS 악단장), 김용선(TBC 악단 편곡자 겸 피아니스트)씨가 교대로 맡아주었다. 조명은 단골 손님이 담당했다. 음악감상실에서 라이브 무대를 갖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마이크가 하나밖에 없어 누가 기타로 노래를 하게되면 옆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어야 했다.
하나둘씩 기타를 들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익균, 이장희, 그리고 맏형격인 박상규, 장우(장영기)….
조영남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했다. ‘언더 더 보드워크’ ‘돈 워리’ ‘시 오브 하트브레이크’ ‘고향생각’. 더벅머리에 검은 교복. 얼마나 오래 입고 있었던지, 그것이 대학 교복인지 고등학교 교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노래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장육부에서 발성이 되는 듯했다. 그가 처음 쎄시봉에서 노래를 부른 그 날의 마지막 곡이었다.
“해애는 저어서 어어두우운데 차아자아오오는 사아람 없어..”
해질 무렵이었다. 출출할 때 듣는 소리는 마음에 더 깊이 스며드는 것일까. 조영남의 소리는 레코드나 테이프에서 나오는 소리와는 달랐다. 살아서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가 어렸을 때에 본 고향의 황혼 빛이 배어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송창식은 기타를 치며 이탈리아 가곡 ‘까라 마마’ ‘셉템버 송’, 자니 마티스의 ‘투엘브스 오브 네버’를 불렀다. 성당 안에 앉은 기분이었다. 기타의 통나무 소리와 클래식 발성이 참 잘 어울렸다.
윤형주는 바비 다린의 ‘로스트 러브’를 잘 불렀다. 감미롭고 맑은 소리였다. 흑인영가 ‘스칼레트 리본’도 잘 불렀다. 기독교 집안의 자제였고 찬송가가 잘 어울리는 소리를 가진 그가 팝송을 부르면 노래들이 오리지널보다 더 신선하게 들렸다. 무대를 응시하며 그의 노래를 경청하던 학생들의 침묵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장희는 막내였다. 여드름이 많아 ‘해삼’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기타를 치면서 장만영의 시 구절을 읊기도 했는데 그것이 일품이었다. 흙 속에서 올라온 것 같은 부드러운 소리, 그러나 쩌렁쩌렁 울리는 맛도 있었다. 그의 큰 눈동자는 늘 눈물이 글썽했다. 하루는 그가 ‘서니’라는 곡을 진짜 울면서 불렀다. 마이크를 내밀었다. 사연인 즉, 사귀는 아가씨의 이름이 선희였다. 동네 목욕탕집 딸이었는데 왕자와 공주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요즈음 잘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음을 달래려고 인천 앞바다 모래 사장에서 한줄 편지를 써 그녀에게 보냈다고 한다.
“아이 저스트 크라이드 바이 더 씨”
그랬더니 그녀가 잘 만나 주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서니’를 앵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상규, 장영기의 듀엣 ‘코코’는 라틴 곡 ‘콴타나 메라’ ‘베사메 무초’ ‘라밤바’에 팝송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키프 온 러닝’ ‘딜라일라’ ‘예스터데이’. 박상규의 말에 의하면 장영기는 그 당시 이미 1000곡 가까운 팝송의 가사를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코코’의 노래 중간에는 박상규의 즉흥시도 한몫을 했다. 그 중의 하나. 숨을 고르고 침을 삼킨 다음 천장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발한다.
“달아! 빈대떡같이 둥근 달아. 초간장이 있다면 널 찍어 먹을텐데…, (검지와 중지를 치켜들며) 아… 젓가락이 짧구나!”
‘대학생의 밤’이 시발점이 되어 갖가지 프로그램이 생겼다. ‘즉흥 스테이지’ ‘삼행시 백일장’ ‘주간한국’의 ‘성점(星點)감상실’과 ‘신곡감상회’ 그리고 명사초청 강연.
‘즉흥 스테이지’. 아무라도 좋았다. 나와서 무엇인가를 보여주면 되는 코너였다. 계단 위 기둥 옆의 좁은 공간을 무대로 정했다. 첫날 조금 일찍 쎄시봉에 들어섰다. 학생들은 가득했지만 아무도 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신청자가 없다고 그냥 프로그램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남자 한 사람 나와 달라니까 한 친구가 손을 들며 앞으로 나왔다. 그러나 단상에 남자 하나만 세워놓으니 뭔가 빈 것 같았다. 실내의 모든 여자들이 내 시선을 피했다. 다른 곳을 보고, 남자 친구 등뒤로 숨고…. 내 바로 앞 테이블의 여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남학생 옆에 세웠다.
“일어나 보시겠어요”
“세 발짝만 옮겨 저 남학생 옆에 서 주시겠어요?”
스포트라이트 조명 속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선 순간 박수가 터졌다. 계단 상단에 놓인 빈 의자에 둘을 앉혔다. 시놉시스는 그 자리에서 나왔다. 1막 3장.
1장. 둘은 여기서 처음 만났다.
2장. 그들은 결혼했다.
3장. 그로부터 15년 후.
도리스 데이가 부른 ‘케 세라 세라’를 서곡으로 해서 그들이 숨을 가다듬을 여유를 주었다.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곡이 끝나자 대뜸 남학생이 밑도 끝도 없이 첫 대사를 여학생에게 던졌다.
“야! 너 나 좋아하는구나!”
둘은 천천히 학교, 취미, 가족 얘기를 나누었다. 한쪽은 마릴린 먼로를 좋아한다고 했고, 다른 한쪽은 유주용을 좋아한다고 했다. 얘기는 막힘없이 흘렀다. 둘은 순발력이 뛰어났다. 2장이 되자 호칭이 바뀌었다. 너에서 ‘당신’으로. 회사출근 상황 연기에선 “뽀뽀해주고 가야지!”가 나왔고, 귀가 늦지 말라고 당부하고….
MC가 저녁으로 시간을 바꾸었다. 남자가 잠시 눈알을 굴리다가 상대방의 손을 잡으면서 한마디를 한다. “불 끄자”. 정말 실내등이 꺼졌다가 다시 들어왔다. 3장은 여자의 바가지로 시작됐다. 남들은 다 잘사는데 우리는 뭐냐는 것이었다. 이럴 거면 왜 그 날 쎄시봉에서 나를 꼬셨냐고 따지고 들었다. 책임도 못 질 거면서 왜 셋씩이나 애들을 낳게 했느냐 추궁했다. 남자가 여자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그 애들 만들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있는 힘 다해서 노력한 줄 자기는 모를 거야!”
그 둘은 실제로 친해져서 자주 같이 모습을 보였다. 한동안 보이다가 그들은 사라졌다. 37년 전의 일이다.
‘즉흥 스테이지’. 하루는 단골 전유성이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하고 와서 가위를 준비해달라고 했다. 자기가 솔로 액트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액트는 5초를 넘기지 않았다. 매고 왔던 새 외제 넥타이를 목 아래 10cm 정도에서 싹둑 잘라냈다. 그리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그뿐이었다. 부잣집 아들같지 않았던 전유성.
전위행위예술가 정강자씨도 즉흥 스테이지에 모습을 보였다. 정강자씨는 미술가로 가수 남일해의 누이동생이었다. 음악을 따로 가져와 한판을 벌였다. 흰 망토 같은 의상을 입고 간단한 분장을 하고는 거의 나체로 바디 랭귀지를 보여주었다. 학생들과 같이 보는데 왠지 가슴이 무거웠다. ‘해프닝’ ‘스트리트 퍼포먼스’ 같은 단어들이 주변에 떠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 날의 퍼포먼스는 관중의 역할보다 ‘행위자의 감성 체험’에 더 의미를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삼행시 백일장’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어서 인기가 좋았다. 재치 넘치는 글들이 많았는데 수작에는 쎄시봉 입장권을 상품으로 주었고 범작은 혹평을 맞고 머리 뒤로 버려졌다. 얼마간 진행을 맡다가 당시 홍익대 학생이던 이상벽에게 바통을 넘겼다. 훗날 이 프로는 CBS 라디오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성점(별의 개수로 평가를 한다는 뜻) 감상실’. 하루는 TBC TV로 정홍택 기자가 찾아왔다. ‘주간한국’이 창간되는데 좋은 아이템이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대학 때부터 계속 읽어오던 미국의 재즈 전문 격주지 ‘다운 비츠’에서 본 ‘블라인드 폴드 테스트’를 해보자고 제의했다. 새로 나온 음반을 유명 재즈 뮤지션에게 설명 없이 들려주고 각 파트의 연주자가 누구이며 평가를 한다면 별을 몇 개 줄 것인가 하는 특이한 칼럼이었다. 별 다섯 개에서 별 하나까지 채점을 하고 그 음악에 대한 자기 평을 쓰기 때문에 연주자, 제작자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페이지였다. 눈을 가리고 한다는 뜻으로 사전 정보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시청(試聽) 소감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말 ‘성점감상실’이란 제목으로 연재가 결정됐다. 다운 비츠는 유명 재즈 평론가가 입회한 상태에서의 1인 평이었지만 성점감상실은 쎄시봉에서 공개로 하기로 하고 학생들에게 용지를 돌려 의견과 별 개수를 적도록 했다. 최고점은 별 다섯 개였다. 자신의 평이 주간지에 실린다고 하니 학생들의 참여가 왕성했다.
메인 게스트로 유명 가수들이 초대되었는데 3주차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봉봉사중창단이 손님이었고 주어진 곡은 ‘동백아가씨’였다. 봉봉은 이 곡에 평점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왜색조라는 이유였다. 기사가 나가고 신문마다 왜색가요 시비의 기사가 올라왔다. 결국 공연윤리위원회에서 이 곡을 금지곡으로 묶고 말았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 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성점감상실’은 1970년대까지 장수했다. 짧은 몇 줄의 의견이었지만 학생들이 시중 잡지에서 평론가의 역할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주간한국’의 정홍택씨와는 ‘신곡합평회’, ‘시인만세’도 같이했다. 쎄시봉은 ‘주간한국’ 전용 젊은이의 광장이었던 셈이다. 신곡합평회는 레코드 제작에 들어가기 전 대학생들의 반응을 알아보는 프로그램이었고, 시인만세는 시인들을 모시고 그분들의 말씀과 자작시 낭송을 듣는 기획이었다. 아마추어 시인들도 참가해서 자작시를 낭송할 수 있었다. 첫 손님으로 서정주 선생을 모셨고 박목월 선생, 박재삼 시인 등 쟁쟁한 분들이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와는 별도로 ‘명사특강’도 했는데 국회의원 김대중, 정광모씨등 각계 분들이 와주었다.
‘대학생의 밤’에서 구봉서씨를 초청한 일도 있었다. 방송국에서 구봉서씨를 만나 쎄시봉에 한번 얼굴을 비쳐 달라고 부탁했다. 뭐하는 곳이냐는 반문에 음악감상실인데 대학생들이 모이는 장소라 설명을 하자 막동이 구봉서씨는 “어이쿠, 안 돼요. 나 세상에서 대학생들이 제일 무서워요. 그 친구들 길에서 날 보면 ‘막동이구나’ 하고 막 부르면서 콧방귀 뀌어요. 난 대학생 보면 미리 도망가요. 걔들은 날 사람으로 안 봐요. 사절하겠습니다”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와주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약속한 날 나는 학생들과 작전을 짰다. 보초가 길에 나가 기다리다 구봉서씨의 모습이 보이면 알리기로 했다. 그가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전원 기립박수로 그를 맞았다. 무대중앙 좌석에 앉을 때까지 그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구봉서씨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시지 말고 같이 있어만 주세요.” 그는 더욱 의아해했다.
학생들이 차례로 나와 노래를 부르고 개그도 했다. 손님을 위해 모두 일어나 주먹을 흔들며 빨간 마후라도 불렀다. 학생들의 구봉서씨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쎄시봉 전체가 무대였고 그 날의 유일한 관객은 구봉서씨 혼자였다. 끝에 가서 마이크를 잡은 구봉서씨는 감격의 답사를 해주었다.
“이럴 줄 몰랐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고, 대학생들이 이렇게 귀여운 줄도 몰랐다. 꿈을 꾸는 기분이다. 마치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다. 정말 고맙다.”
끝난 후에도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그가 사라질 때까지 기립박수는 이어졌다.
프로가 없던 가을날 밤이었다. 실내에 바깥의 냉랭한 공기가 스며드는 여덟 시쯤 여기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신청곡을 받고 있는데 한 학생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선생님, 생각나세요? 매일 저 베란다 바로 아래 자리에 혼자 와서 음악 듣던 여자 아이.”
그는 빈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걔가 나가면서 말했어요. 이젠 쎄시봉에 오지 못하게 됐다고. 부산 술집에 팔려서 간댔어요. 서울역에 빨리 나가야 한다면서 아까 나갔어요.”
그 여자아이가 신청하던 곡은 늘 티미 유로가 부른 ‘허어트(Hurt)’였다. 빈자리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고 티미 유로의 처절한 가락이 찢어질 듯이 쎄시봉 안을 메아리쳤다. 음악이 계속되는 동안 실내는 조용했다.
서울대생 김종철, ‘여두목’ 윤여정
1964년에서 1969년까지는 그렇게 흘렀다. 쎄시봉 6년. 조영남이 먼저 매스컴을 타고 이어서 줄줄이 방송에 진출했다. 소위 통기타 1세대들. 모두들 소리의 결이 좋았다. 통기타의 통나무 숨결에 자기 소리를 싣자니 그 소리가 순박할 수밖에 없었다. 객석에서 무대 쪽으로 향하던 젊은이들의 순박한 마음의 바이브레이션도 그들 노래에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쎄시봉 단골 학생 중에는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언론인 김종철군, 홍대생 이두식군(전 미술협회장), 가수가 아니면서 여두목 역할을 한 윤여정양도 있었다.
쎄시봉 식구들이 자주 가던 장소들이 있다. 주말마다 무리지어 몰려가 라면이며 잼을 바닥내가며 드러눕고 뒹굴던 김성수 신부의 인천 성공회 사제관, 회현동 최영희(연대종교음악과, 짧은 기간 영화배우와 가수로 활동하다 미국 이주)의 집, 며칠씩 그냥 가서 거저 먹고 자고 해도 늘 친절했던 청평 안전유원지의 최사장 일가.
한번은 겨울에 여럿이 조영남의 고향 삽교에 간 일이 있었다.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윤여정, 최영희와 서울대 음대 학생이던 전혜숙과 이숙영. 조영남이 어린 시절 살았다는 집에서 본 학창 시절의 앨범 사진, 트럼펫을 불면 동네 소들이 모두 화답을 했다는 나지막한 앞산 언덕, 삽교국민학교의 자그마한 교정. 일행은 온 김에 수덕사를 들러 뒷산 마애불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내려올 때 있었던 일이다. 계단이 좁아 한사람씩 내려오고 있는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후미에서 내려가던 내가 소리를 질렀다. “가까운 사람하고 손을 잡고 내려가자!” 좁은 계단의 왼쪽은 낭떠러지였다. 내가 최영희와 손을 잡자 앞에 가던 조영남과 윤여정도 손을 잡았다. 송창식은 이미 평지에 내려가 있었다. 세 발짝을 움직였을까. “어머!” 소리와 함께 윤여정이 비명을 지르며 위태롭게 조영남에게 매달렸다. 낭떠러지 쪽을 가던 윤여정 발 밑의 돌이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둘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발이 네 개니까 살았지 혼자서 그 돌을 밟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평지에 도착한 다음 누군가가 벌받은 것이라고 놀렸다. 올라가기 전 모두들 불당에 들어가 예불을 드렸다. 주지 스님도 특별히 나오셔서 젊은이들 앞날에 좋은 일 있으라고 기원해주셨는데 유독 윤여정만 들어오지 않고 옆문 밖에 서서 법당 안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불당의 마루바닥이 몹시 차가워 스님이 독경하는 동안 모두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덜덜 떨고 있어야 했다. 윤여정은 그것이 싫었던 것 같았다.
쎄시봉 시절 청평의 한 수영장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골수 멤버들. 왼쪽부터 윤여정, 조영남, 윤형주,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서울대 음대 여학생
‘굳 이브닝쇼’는 명사 초대 토크 프로그램이었고 담당 PD는 임창수씨와 나 두 사람이었다. 주말은 쉬는 주5일 평일 프로였는데 임창수씨가 자기는 연출할테니까 당신은 MC를 하라고 지시해왔다.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연장자였다. 시간은 20분, 앞뒤에 가수의 노래가 붙으니 시그널 시간, 광고시간 제하면 손님과 얘기할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첫 손님은 이방자 여사였고 미8군 부사령관, 김현옥 서울시장, 외국사절들이 출연했다. 살롱 스타일의 토크 프로그램이었다. 이때만 해도 나는 겁도 없이 진행했던 것 같다. 드라마를 연출하던 허규씨의 말에 의하면 MC가 대학생의 말투로 손님을 대한다는 것이었다.
‘힛 게임쇼’는 연예인들과 명사들의 개인 경쟁게임과 직장대항전을 합친 프로그램이었다. 직장응원단이 출연했고 사회는 김동건, 응원단장은 송해·박시명 두 사람이 맡았다. 송해씨는 판정에 불복하면서 심심찮게 김동건 사회자를 박치기로 들이받아 다운시켰다. 그럴 때마다 폭소가 터졌다. 응원단장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다가도 사회자가 “차렷!” 하고 호령만 하면 반드시 그 앞에서 말단졸병이 되어야 했다. 극단의 무질서와 극단의 군기가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어느 해이던가 연말 특집에서 MC가 금년의 국내 톱뉴스로 무엇을 꼽겠는가하고 묻자 정광모씨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야 물론 ‘한비(한국비료) 사건’이죠”.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이 다 웃었다. 다음날, 화장실에서 김규 상무와 마주쳤다. 그는 대뜸 “왜 그런 질문을 시켜?” 하고 말했다. 삼성 본부에서 질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루는 게임중에 물통이 넘어져 스튜디오 바닥이 물바다가 됐다. 빨리 누군가 물을 닦아야 했다. 밤 시간의 생방송이라 세트 담당자가 없었다. 자루 달린 물걸레를 구석에서 가져와 내가 바닥을 닦아냈다. 그것이 그대로 방송이 되었고, 어린 조카가 제 아빠에게 “삼촌이 높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방송국 청소부야?”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림에 노래 싣고’. 피세영이 여자 아나운서와 함께 DJ를 맡고 만화가 신동우씨와 나는 이젤에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음악이 나가는 동안 즉흥그림과 즉흥낙서를 했다. 1년 정도를 계속했는데 언제나 글보다 그림이 좋았다.
‘쇼 파노라마’. 야외녹화가 많았다. 어느 날 정릉 근처 한 수영장에서 녹화를 하는데 MC가 펑크를 냈다. 내가 대타로 들어갔다. 그 날 밤 ‘굳 이브닝쇼’, 심야에 ‘그림에 노래 싣고’까지 하루에 세 번 카메라 앞에 서게 됐다. 지금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 때는 방송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플로어 매니저(진행감독), 연출, 대본, 구성, 출연자 섭외, MC, 때로는 부족한 영어로 통역도 했다.
‘골든벨쇼’. 신곡을 낸 가수들을 무대 뒤에 세워놓고 레코드를 틀었다. 심사위원들이 한 줄로 앉아 의견을 말하고 앞에 놓인 종을 쳤다. 다섯 번이 울리면 만점이었다. 아마추어 심사위원까지 포함해 네 사람이었으니 만점을 받으려면 종이 스무 번 울려야 했는데 전원 만점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훈희의 데뷔곡 ‘안개’였다.
조영남의 엽기코믹쇼
‘아베끄 노래자랑’. 서영춘씨가 사회를 맡았다. 남녀가 혼성팀으로 출연하는 노래경연 프로그램이었는데 항상 출연자가 부족해 길에 나가 행인들을 잡고 애원해야 했다. 어느날 게스트 가수가 펑크를 냈다. 마침 방송국에 찾아온 조영남을 밀어넣었다. 당시 한양대 음대를 장학생으로 다니던 조영남은 출연 후 학교에서 봉변을 당했다. 교수와 학생들이 일제히 비난했던 모양이었다. 조영남은 곧 서울대 음대로 편입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리저리 뛰는 사이에 훌쩍 5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침 일찍 출근해 맡은 일이 끝나면 쎄시봉으로 달려갔다. 기본적으로 방송 일이 우선이었지만 쎄시봉엔 방송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싱싱함과 자유로움. 그곳에는 싹을 자라게 하는 기운이 있었다. 누구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잘난 척하거나 못난 척할 수가 없었다. 통기타 1세대들은 그렇게 자생했다. 그들은 쎄시봉을 거쳐 명동 ‘OB’s 캐빈’으로 갔고 다시 방송으로 진입했다.
조영남이 부른 ‘딜라일라’가 라디오에서 히트했다. 그는 이어 단 한번의 출연으로 시청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노래의 내용은 변심한 애인이 불꺼진 창안에서 딴 남자와 하나 되는 것을 보고 밖에서 개탄하는 것이었다. 조영남은 TV에서 그 장면을 직접 설정하고 연기했다. 웃통을 벗고, 머리띠 하고, 부엌칼을 치켜들고 침대 쪽으로 다가가며 이렇게 노래 불렀다.
“오 나의 딜라일라 / 왜 날 버리나요 / 애타는 이 가슴 달랠 길 없어 / 복수에 불타는 마음만 가득하네”
납량특집 프로그램에서는 해변에서 노래하던 그가 물 속으로 들어가 잠수해버린 일도 있었다. 립 싱크였기 때문에 노래는 계속 나가는데 가수는 물 속에서 나오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이었다. 그런 조영남은 1967년 서울시에서 수여하는 ‘서울시 문화대상’을 탔다.
조영남에 이어 트윈 폴리오가 공전의 히트곡을 내놓았다. ‘하얀 손수건’. 번안곡이었지만 우리말 창작곡으로 생각될 만큼 잘 불렀다. 통기타 음악을 모든 세대가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한대수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KBS 레코드실에 근무하던 정은영씨가 한대수를 내게 소개했다. 연대 창설자 집안의 손자고 사진작가이며 미국에서 영시도 발표한 적이 있다는 그가 노래도 잘하니 TV에 세워보라는 것이었다.
장발에 동안이었고 그때 나이가 만 20세. 살짝 경상도 사투리를 썼는데 목소리가 뚜렷했다. 김동건씨가 사회를 보던 ‘명랑백화점’에서 자작 노래를 불렀다.
“장막을 걷어라 /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 창문을 열어라 /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그의 소리는 여리면서도 카랑카랑했다. 어떻게 들으면 공기를 곧장 찌르는 목소리 같을 때도 있었다. 미국에서 막 돌아온 스무 살 청년이 ‘자신이 만든 노래’를 ‘자신의 소리’로 부른 것이었다. 차림새는 거의 히피에 가까웠고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노래를 불러서 듣는 사람은 그저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말, 명령조의 가사를 외치는 소리로 노래했다.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아주 힘든 역경을 거치며 삶을 이어오다가 그 날 그 자리에 선 것이었다. 한 살 때 부친이 미국으로 유학 가 연락이 끊긴 후 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쳐 재혼해 집을 나갔다. 이후 할아버지 집에 살다 중학생 시절 미국에 단신으로 건너가 힘들게 아버지와 상봉했지만 아버지는 이미 어떤 백인여성과 결혼해 자식을 둔 ‘남’이었다. 그 집에 오래 머물 수 없었던 그는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다가 돌아와 고국의 TV에 출연해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한대수의 반향은 컸다. 2주일 후쯤 다시 출연시키려는데 제작국장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장발은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할 수 없이 그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아니 어떻게 이백천씨가 그런 말을…”하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설명하는 나도 장발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머리를 빡빡 밀고 출연했다. 그리고는 TV를 아주 떠나버렸다 . 그러나 그 해 말 그와 나는 무대에 같이 섰다. 남산 드라마센타에서 ‘한대수 리사이틀’을 기획한 것이다. 입추의 여지없이 청중이 몰려들었다. ‘행복의 나라’ ‘옥의 슬픔’ ‘과부타령’ ‘마지막 꿈’ ‘여치의 죽음’ 등 창작곡만을 연주하고 불렀다. 특이한 공연이었다. 같이 박수 치고 흥겨워하며 듣는 노래가 아니었다. 청중은 한 소절 한 소절을 음미하며 들어야 했다.
한대수의 공연에 이어 트윈 폴리오의 은퇴 공연이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윤형주의 학업문제가 원인이었기 때문에 은퇴라기보다는 해체였던 셈이다. 단 한 장의 음반을 냈을 뿐이지만 ‘축제의 밤’ ‘하얀 손수건’ ‘에델바이스’ ‘낙엽’ ‘슬픈 운명’ ‘웨딩케이크’ ‘사랑의 기쁨’ 등 거의 전곡이 사랑을 받았다. 이틀에 걸친 공연에 남성은 억지로 찾아서 한두 명이었을까, 거의가 여대생 여고생이었다.
‘청개구리집’ 아이들
미국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이 열린 1969년 8월에 우리나라에서는 MBC TV가 개국했고 다음해 청평 안전유원지에서는 기독교방송 주관으로 3일간의 포크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통기타 1세대들과 신중현, 히식스, 키보이스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그룹사운드까지 참가한, 당시로서는 큰 규모의 행사였다. 수중에 무대가 설치되고 낮부터 밤늦게까지 공연이 계속됐는데 출연자들은 배를 타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밤에는 드럼통에 장작을 태워 무대주변을 밝혔다. 별도보고 흐르는 물에 비치는 불빛도 있는 정취 있는 페스티벌이었다.
그 행사가 끝나고 며칠 지나서 충무로 YWCA에서 연락이 왔다. 젊은이들을 위한 노래광장을 열자는 것이었다. 명동 YWCA 안뜰 구석에 큰 버드나무 그늘 아래 단층 건물이 있었다. 물가에 서있는 것이 어울리는 버드나무에서 착안해 ‘청개구리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내 이름이 흰개울(白川)인 것과 내가 그 일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쾌히 승낙하고 매주 수요일 밤 쎄시봉에서 사용하던 ‘데이트 위드 쁘띠 리’의 이름을 다시 내걸며 시작했다. 바닥엔 푸른 카펫을 깔고 입장하는 사람은 모두 신발을 벗게 했다. 메뉴는 단 한가지 콜라뿐. 셀프서비스 콜라 한잔 값으로 99원을 받고 저녁 7시에 개장했다.
청개구리집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나타난 이름들이 화려하다.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방의경, 김도향, 손창철, 은희, 한민, 최안순, 김영세. 여기에 가끔씩 찾아와 어울리던 김세환과 왕년 자니브라더스 멤버이자 현재도 재즈 가수로 활동중인 김준. 김도향과 손창철은 후에 투코리안스를 결성했고 김민기와 김영세는 잠시 ‘도비두’라는 듀엣을 결성해 활동했다.
카펫만 깔았을 뿐 청개구리집엔 별다른 시설이 없었다. 의자도 테이블도 음향, 조명시설도, 심지어 방석도 없었다. 창고에 카펫만 깔아놓은 모습이었다. 만원이 되면 100명 정도였을까. 콜라를 마시며 잡담하듯이 대화를 하는 것이 시작이었고 아직 손님이 몇 명 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기타 치고 노래하는 친구들이 한두 명 있게 마련이었다. 마이크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기타 주위로 모인다.
“장난감을 갖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셔버리는 /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 오- 아름다운 나의 사람아” (헤르만 헤세의 시, 서유석 곡 : 아름다운 사람)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 대포집은 열 / 학교 앞에 책방은 하나 양장점은 열”(파란 많은 세상)
‘아름다운 사람’ ‘파란 많은 세상’을 부른 서유석은 유난히 바다나 산을 좋아해 친구들과 몰려다녔는데 그렇게 여행을 다녀올 때면 자신의 소리에 해조음(海潮音)이나 심산의 솔나무 냄새를 묻혀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이크 깨지니 멀리서 불러달라”
김도향, 손창철은 육군에서 막 제대한 부대 친구였다. 둘 다 성량이 대단했다. 그들은 톰 존스의 ‘키프 온 러닝’ ‘아이 캔트 스탑 러빙유’ 같은 곡을 잘 불렀다.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투코리안스의 대표곡 ‘벽오동’을 그곳에서 처음 들었다. G 마이너 하나의 코드로만 진행되는 우리 가락이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 어이타 봉-황은 꿈이었다 안 오시뇨” (황진이의 시를 기초로 김도향 작사, 김도향 작곡)
거의 천지개벽하는 소리였다. 나는 어느날 광화문 지하도를 걷다가 ‘투코리안스’라는 듀엣 이름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방송에 그들을 소개하기 위해 청개구리집에서 그들의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하고는 그것을 들고 방송 PD들을 찾아 나서게 했다. 1970년 8월이었다. 9월부터 방송출연을 시작한 투코리안스는 한 달간 60여 회의 방송출연을 하게된다. 그들을 안 부른 쇼프로가 없었다. 패티김쇼, 최희준쇼, 쇼쇼쇼, 그랜드쇼…. 물론 그들이 내세운 곡은 ‘벽오동’이었다. 우렁찬 성량 때문에 방송국 오디오 담당자가 마이크 깨진다고 멀리 떨어져서 불러달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김도향, 양희은, 방의경, 은희…
양희은은 경기여고 졸업 후 재수하던 때에 청개구리집에 나타났다. 긴 머리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선머슴아였다. 그녀는 맑고 힘있는 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주디 콜린스의 ‘퍼프’를 잘 불렀고 ‘일곱 송이 수선화’ ‘세노야’ ‘검은 장갑 낀 손’도 불렀다. 당시 미국에서는 존 바에즈가 인기였지만 양희은의 소리는 존 바에즈보다 훨씬 고왔고 노래에 신념이 느껴졌다.
“세노야 /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세노야를 부르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양희은은 서유석, 김민기, 임문일을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하루는 그녀가 청개구리집에서 자신의 리사이틀을 하겠다고 나섰다. ‘형’들이 도와주었다. 공연하는 날, 경기여고 동창생들이 몰려와 대성황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그녀는 내게 물었다.
“어땠어요?”
그런데 나의 대답은 그녀가 기다렸던 것이 아니었다.
“너무 흥분한거 아냐? 좀 들떠 보였어.”
그러자 “나 노래 안 해! 다신 노래 안 해!” 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달래느라고 애를 썼다. 그 날 나는 겨우 열아홉 살의 그녀에게 매몰차게 얘기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있었다.
방의경이라는 이대 미대 학생도 단골중의 한 사람이었다. 둥근 얼굴에 조용한 미소,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여린 소리. 그녀는 외국곡의 가사를 우리말로 번안하는 일에 빼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꽃잎 끝에 달려 있는 작은 이슬 방울들 / 무엇이 이 숲속에서 으음 이들을 데려갈까…”(메일 해밀턴의 노래에 방의경 작사: 아름다운 것들)
방의경은 ‘불나무’라는 곡도 남겼다.
“오, 그대는 아는가 불꽃송이여 / 무엇이 내게…”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가사와 곡으로 족적을 남긴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사랑해 당신을’은 라나에로스포의 노래로 알려졌지만 처음에는 은희가 혼자 부르던 노래였다. 어느 대학생이 애인을 떠나보내고 술집에서 한숨에 가사를 적었다는 곡이었다. 눈이 크고 아리따운 소녀 은희. 그런 그녀의 소리에는 물러서지 않는 제주도 특유의 강한 기가 숨어 있었다.
“사랑해 당신을 / 정말로 사랑해…”
그녀는 청개구리집에서 한민을 만나 듀엣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었다. ‘꽃반지 끼고’도 청개구리집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최안순은 원래 한민의 파트너였다. 청개구리 집에 가끔 왔는데 ‘산까치’를 불렀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도 옆 사람과 얘기하는 일이 드물었다.
“산까치야 산까치야 어디로 날아가니 / 네가 울면 우리 님이 오신다는데 / 너마저 울다 저산 넘어 날아가면 / 우리 님은 언제 오나 / 너라도 내 곁에 있어다오”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청개구리집 옆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까치가 날아올 것만 같았다.
김민기가 ‘친구’를 만든 날
김민기는 서울대 미대 회화과 1학년이었다. 서유석의 말에 의하면 김민기는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러닝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명동길에서 마주치면 구두닦이로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내 기억에는 실내에서 본 그의 인상만 남아있다. 두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고이고 있던 그의 특이한 자세, 점잖게 눈으로 웃으며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어주던 표정. 처음에는 혼자가 아니고 친구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듀엣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파트너는 물러나고 김민기 혼자 노래를 했다. 보브 딜런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는데 중저음의 음색과 기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미국 음악이 부럽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어느 날, 노래 사이에 이야기를 섞어가며 진행을 하는데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제기랄, 영어 안 쓰면 말못하나?”
돌아보니 김민기였다. 그때 김민기의 나이 스물, 나는 서른일곱. 영어 좀 안다고 자랑삼아 영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몇 마디가 들어갔을 것이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겨우 누르고 넘어갔다. 다음 주였다. 김민기가 노래를 했다. ‘Don’t think twice, it’s alright’라는 보브 딜런의 곡이었다. 아주 잘 부른 노래였다. 내가 한마디했다. “영어 노래말고 뭐 우리말 노래 없을까?”
2주일 정도 지난 후 김민기가 다시 와서 노래를 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요 /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오 / 눈앞에 떠오르는 친구의 모습 /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오 / 저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물가에 친구들과 놀러갔는데 한 친구가 익사를 했단다. 그 일로 만든 노래라고 했다. 뱃속에서 감돌다가 나온 것만 같은 낮은 음성의 노래였다.
그는 청개구리집에서 ‘세노야’도 부르고 ‘아침이슬’도 불렀다. ‘아침이슬’은 김민기가 먼저 불렀지만 ‘친구’보다 박수가 적었다. 그 후 이 곡은 양희은이 불러 세상에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