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홍준씨는 청소년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가담해 몇 차례 옥고를 치르다가 20대 중반이 돼서야 의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민주화에 대한 신념은 그를 다시 거리로 이끌어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 때는 전남도청 앞에서 역사의 현장을 함께했다. 다시 의사의 자리로 돌아온 그는 10년간 의대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했지만 1987년부터는 대체의학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전라남도 광주의 외곽을 돌아 무등산 초입인 운림동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길을 따라갔더니 그의 사무실이 위치한 무량회관이 보였다. 건물 앞으로는 무등산 줄기를 따라 내려온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건물 3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에는 ‘의식과 생명 아카데미’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다.
수도원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사무실에서 만난 전홍준(58)씨의 첫인상은 마치 엄격한 계율을 지키는 사제나 승려 같았다. 언뜻 세상의 욕심을 초월한 듯한 표정도 엿보였다.
-매우 엄격한 산사의 스님처럼 보이는군요.
“얼마 전 단식을 했어요. 일주일 정도 단식을 하면 정신이 맑아져요. 체내의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마음의 찌꺼기들을 걸러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현대인은 영양과잉과 화학물질 위주의 식습관, 환경공해등으로 인해 몸이 비대해지고 이상 체질로 변했어요.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 단식을 하는 게 좋습니다. 신체의 노폐물을 뽑아주기 때문이죠. 단식을 하면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깨끗해져요.”
-그것도 대체의학 프로그램의 하나입니까.
“그렇습니다. 주요한 프로그램 중 하나죠.”
-여러 대학에서 대체의학을 강의하고 있는데 대체의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솔직히 ‘이거다’라고 짚어주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의학이란 자연치료의학, 심신의학과 같은 전체성 의학을 말하죠. 일본이나 미국, 유럽에서는 이미 상당한 진전을 보고 있어요. 저도 일본과 미국에서 연구하면서 많은 임상 경험을 쌓아왔습니다.”
고교때 보안법, 반공법 위반해 투옥
전씨는 ‘개인의 삶과 문명이 변하지 않는 한 건강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본성에 정합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여겼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개발의 도구인 아바타(avatar)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아바타 프로그램이란 무엇입니까.
“1986년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해리 팔머가 체계화시킨 의식개발과 영적 진화를 위한 코스인데, 1998년 현재 61개국에 보급되어 있습니다. 아바타란 고대 신화에서 유래된 말인데, 우주와 생명의 본성을 깨닫고 스스로가 우주에 내려온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은 편안하고 고요한 의식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명상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간의 수련과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명상과 다르죠.”
-특정한 종교나 심리학과 관련된 것처럼 비쳐지는군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종교나 철학, 심리학과도 모순되지 않고 함께 정합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하고 있는 일인 대체의학을 화두로 삼았지만 사실 전홍준이란 사람의 남다른 삶이 더욱 흥미롭다.
-광주 지역사회에서는 ‘전홍준 교수’ 하면 ‘운동권 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운동권 의사가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습니까.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해야겠군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대상황이 저를 운동으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죠.”
전씨가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때 4·19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그는 친척 형(전만길 전 대한매일 사장)과 함께 자취를 했는데, 형이 고교 학생회장에 광주 학생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래서 어린 그는 시내 고교 학생회 간부들에게 형의 심부름을 다니는 전령이 되어서 본의 아니게 학생운동 분위기를 접하게 된다.
“중학교 2학년 때 4·19가 났어요. 그후 민족통일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형성됐죠. 어린 저도 형의 영향을 받아 민족통일을 절실한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5·16이 났어요. 형은 학교에서 퇴학을 맞았죠. 저는 형편이 어려운 지방 학생들이 많이 지원한다는 서울의 철도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하지만 광주에서 이미 의식화된 저는 학교 공부보다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대학생 선배들이 지도하는 교육을 받았을 정도였죠.”
-사회운동을 하다가 의대에 진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사회적으로 꽤 조숙했어요. 10대 때부터 억압된 사회구조를 변혁해서 민중이 주인 되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경기고에 다니던 조영래(변호사)군과도 고교생 연합시위에서 만나 평생 동지로 지내게 되었지요. 고교시절에는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SOFA)을 개정하는 운동을 폈어요. 물론 서울대 문리대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서였죠. 그때가 1962년의 일입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격한 급진주의자였어요. 굴욕적 한미행정협정 반대, 나중에는 월남 파병 반대 운동을 펼쳐 고교생으로는 최초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갔지요. 석방된 후에는 육사를 가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좀 남달랐죠. 당시 저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흠모했어요. 쿠데타를 일으켜 진보적 정권을 세운 인물이지요. 저도 군인이 돼 나세르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진보적 민주정권을 세우고 통일을 달성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저의 학생운동 경력은 육사 지원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1967년 전남대에 진학한 후 월남 파병 반대운동을 계속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도했다. 당시 그는 데모를 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베트남 사지에서 양키의 총알받이가 될 수 없다. 한일 매국 협정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라는 성명을 낸 후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고 제적됐다. 1학년 때였다. 그후 반정부 지하결사에 참여하다가 다시 체포돼 목포와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고법 항소심에서 심상찮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운명이란 것이 묘합니다. 항소심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재판장이 유심히 저를 살피더니 집행유예로 석방을 해주는 거예요. 김용근 부장판사님이었는데, 이미 정보부로부터 중형 지시를 받았으면서도 저를 집행유예로 풀어주셨죠. 그런데 판사님이 훗날 제 아내 된 사람의 고모부님이셨어요. 제 결혼식날 다시 뵈었는데 그분도 놀라시더군요. 그때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은 나중의 인연을 대비해 어떤 힘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석방되고 나서 얼마 후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전남대 의대에 재학중이던 동생이 전남 신안군 도서지역 의료봉사에 나섰다가 쓰러진 것. 그는 견딜 수 없는 자책감과 좌절감에 빠졌다. 동생은 광주일고 재학 당시 형의 영향을 받아 학생시위에 가담하다 담벼락에서 떨어져 뇌를 다쳤는데 그 후유증으로 갑자기 사망했던 것이다.
전씨는 동생의 길을 대신 가기로 마음먹고 도서관을 찾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가지 않으면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에 매달렸다. 이듬해인 1971년 그는 조선대 의과대에 지원, 전체 수석합격을 차지했다. 다른 학교도 진학할 수 있었지만 시위 가담 전력으로 정치학생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그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진학이 용이한 지방대학 쪽으로 선회했던 것. 그러나 정보부가 제동을 걸었다. 학교에서는 감옥을 드나들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연루된 학생을 받아도 되는가를 두고 연일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수석’이라는 것이 신문에 보도된 마당에 입학을 취소시키면 더욱 큰 문제를 부르리라는 판단에 따라 그의 입학은 어렵사리 허용됐다.
-다시 들어간 대학에서는 데모와 거리를 뒀나요. 시대적으로는 박정희 폭압 정권이 유신을 비롯해 강권 통치를 강화하던 시기였는데요.
“노회해졌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데모와 완전히 거리를 둔 것은 아닙니다. 민청학련 사건도 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학순 주교님, 김지하, 여영남, 조영래, 이철, 유인태, 원혜영 등과 연대해 광주에서 주로 활동했죠. 저는 조영래와의 연락책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지역에서 3선 개헌반대, 교련 반대 시위를 저희가 주도했죠. 또 조씨가 도피생활을 하면서 전태일 평전을 쓰는 공간도 제가 확보했습니다.”
그의 지나온 삶의 궤적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 싶어 다른 질문을 했다.
조선조 전통정원인 전남 담양 소쇄원의 한 정자에서 아바타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명상을 실현하고 있는 전홍준씨
“졸업 후 몇 군데 개인병원으로부터 초빙을 받았어요. 그러나 저는 물질적인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졸업후 1977년부터 1981년까지 광주 기독병원 외과 의사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운명인지 거기서 1980년 5월을 맞이했습니다.”
광주 5·18을 체험한 사람들은 좀처럼 그때를 회고하려 하지 않는다. 그 무게와 가치를 말로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지, 표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전홍준씨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로서 5·18을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그 무렵 세속적으로는 안락하게 살고 있었어요. 마침 광주시 양림동에 집을 하나 장만해서 1980년 5월초 집들이를 했죠. 이때 찾아온 사람들이 김시현 4·19동지회장을 비롯해 민자통 민통련 인물들, 6·3세대인 유인학, 이홍길 교수가 왔고 광주 운동권의 중심인 박석무, 박관현, 정동년, 윤한봉, 윤상원, 정상용, 김영철 등이 찾아왔어요. 그때 그 자리가 광주 5·18의 모태가 되었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요.
“구체적으로 ‘광주가 어떠해야 하는가’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논의했기 때문이죠. 1980년 민주화의 봄, 즉 ‘서울의 봄’이 이대로 묵인되지 않을 것이다. 곧 폭압구조가 도래할 것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특히 광주가 타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을 많이 했어요.”
-5·18 광주항쟁이 났을 당시 어디에 있었습니까.
“의사니까 당연히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었죠. 그런데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곧바로 거리로 나왔습니다. 거리에 부상자들이 많았어요. 닥치는 대로 부상자들을 치료했는데, 갈수록 ‘치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월21일부터 시민들이 총기를 휴대하고 시가전을 벌였고 22일엔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했죠. 저는 보통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 광주 지역 재야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에 참석했어요. 그런데 저는 퇴장당했습니다.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처벌당한 제가 참여하면 모임이 악용될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제가 5·18 공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반공법 때문이었어요. 핵심적 활동에 자제 권고를 받았으니까요.”
그는 부상자를 치료하고 시신을 검시하는 일을 직접 지휘했다. 머리가 날아가버린 시신, 가슴이 없어진 여자의 시신도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했다.
“5·18의 공포는 표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왜소하며 비겁한 존재인지 알 수 있었죠. 한마디로 자괴심뿐이었어요. ‘목숨 걸지 않고 감히 지도자라 할 수 있나’ ‘두려움 없이 용감할 수 있나’. 생각할수록 제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남도청 안에서 결사항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외경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5월26일 도청 현장에서 사살된 윤상원과 닷새 동안 가졌던 대화를 잊지 못한다.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윤상원을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계엄군은 엄청난 화력으로 곧 도청을 점령하려 들어올텐데 소총 하나로 버틴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역부족이었거든요. 그래서 그가 죽기 이틀 전 비밀 안전지대를 찾아서 제2의 지도부를 마련하자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이라도 도청에서 최후를 맞겠다고 담담하게 말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죽어간 사람들의 역할에 비하면 자신이 한 일은 너무나도 하잘것없다는 거였죠. 그러면서 저더러는 도청에 들어오지 말라더군요. 반공법 연루자가 들어오면 군부정권에 얼마든지 빌미를 줄 수 있다는 거죠. 물론 그가 저를 살리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전홍준씨는 민주화 이후 광주를 대하는 일반인들의 시각에 대해 가슴 아파했다. 광주 5·18을 지역분열의 행태로 여기고 지역불만의 표출로 보는 시각도 그렇지만 공명심을 부각하는 광주시민들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민주화 이후 5·18 기념식 때마다 재야 인사들이 망월동에 찾아와 광주 시민을 영웅시하고 찬양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5·18을 지역주의의 발로로 왜소화하고 폄하하는 세력보다야 고맙지만 ‘영웅의 도시여’라고 말하는 것에선 너무 계산된 논리라는 인상을 받아요. 저는 말로만 하는 운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1983년 광주 기독병원을 그만두고 목포 성골롬반 병원으로 옮겼다. 의사의 재량권인 무료치료나 감액치료를 너무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5·18 부상자나 그 가족들은 갈 곳이 없었어요. 폭도로 몰리고 모두들 죄인시했으니까 맘대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죠. 정말 처절한 때였어요. 그때는 부상자를 치료해주는 의사가 정보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것이 다반사였죠. 그러나 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에는 상대적으로 재량권이 많이 주어졌어요. 광주 기독병원, 목포 성골롬반병원은 의사가 ‘저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하면 무료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제가 ‘프리 사인’이라고 하는 이 배려를 다른 의사들보다 훨씬 많이 썼어요. 목포 성골롬반 병원으로 옮긴 것도 광주 기독병원에서 워낙 프리 사인을 많이 사용해 병원측에 미안해서였죠. 하지만 목포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또 할인을 해줘도 돈을 낼 처지가 못되는 경우 저는 환자에게 새벽에 몰래 뺑소니치는 방법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5·18 부상자들의 의료수가를 사정없이 깎아준 적도 있었죠. 하지만 어떻게 보면 병원의 고귀한 재산을 제 맘대로 썼던 거예요. 저 혼자 인도주의를 실천하고 정의롭게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했던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었죠. 어느 날 자책감이 들더군요. 그래서 ‘내가 병원을 차려서 봉사 활동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1984년 고향인 나주에 외과의원을 개업했어요.”
-직접 개업을 하면 돈을 먼저 벌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때는 돈도 많이 벌었어요. 왜냐하면 고향에서 개업을 하니 지인은 물론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환자나 가족들이 문전성시였던 거죠. 전국에서 운동하던 선후배들이 저의 병원을 많이 방문했던 것도 바로 그때였습니다.”
-후원을 많이 해주었습니까.
“도망 다니는 동지들이나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자연환경을 통해 질환을 치유하는 자연요법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농촌의 환자들에게는 만성질환이 많습니다. 만성 두통, 간질환 등으로 평생 약에 의존하는 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런 환자를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간디의 어록이 떠오르더군요. 인간의 환부를 외과적으로 치료하는 것은 부패한 쓰레기를 천으로 덮어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 말 말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의대에는 ‘풀 하우스’라는 일종의 요양원 치료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자연환경을 통해 암, 당뇨, 고혈압, 심장병 같은 만성 퇴행성 질환을 치유해 가는 과정이죠. 서양의학적 치료가 아니라 단식이나 효소치료, 수치료, 또는 마사지, 침, 부황으로 치료를 하는 겁니다. 동양의학의 일종인 명상치료법을 쓰면서 긴장이완을 시키고요. 서양의학은 열이 있으면 해열제, 설사가 있으면 지사제를 쓰는 등 증세 제거식입니다. 그래서 서양의학에서는 근본적인 치유책은 없어요. 저는 ‘인간 전체를 치료하는 방법은 없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대체의학의 권위자 마아카 요시오 박사가 기타사토 대학에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1987년부터 일본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마아카 박사로부터 특강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살아 있는 의성(醫聖)’으로 불리는 오사카 의과대학의 고다 미쓰오 교수에게 사사하기도 했다. 지난해 노벨의학상 후보에 오른 고다 미쓰오 교수는 단식 등 자연요법만으로 치료를 하는 의사다.
“환자 네 명 중 한 명은 암으로 죽습니다. 이렇듯 서양의학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몇 년 후에는 그런 질병군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이는 자연에서 이탈한 현대문명이 만들어낸 결과죠. 인류가 생명을 소홀히 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영양을 섭취한다고 소나 양, 돼지 등 엄청난 생명을 살육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삶이 자연에서 이탈하면서 대기오염, 산성비, 사막화, 오존층 파괴 등과 같은 환경파괴가 진행됩니다. 인간의 탐욕과 잘못된 생활양식이 난치병을 불러들이는 거죠. 결국 인간의 의식을 개혁해야 합니다. 생태주의적 구조 속에서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환경파괴를 줄이고 질병을 예방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이는 고다 선생의 의견이고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국내 의사 임상회에서 고다 선생의 자연요법으로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종전에는 약물로 치료했다면 이젠 식생활 개선과 자연친화적 삶의 방식을 택한 거죠. 치료의 중심도 의사에서 환자로 옮기도록 했고요.”
-그런 임상실험이 실제로 효과를 본 적이 있습니까.
“1980년대 말 세브란스 병원 암센터에서 말기 간암 진단을 받고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사는 분을 돌본 적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라는 말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오다 고통이 심해져 진통제를 맞으려고 저희 병원에 들렀던 거죠. 이때 제가 시도하던 대체의학 요법을 소개하고 ‘한번 해보자’고 권유했습니다. 가족들이야 큰 병원에서 안 되니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매달리게 되었지요. 종래의 서양의학과는 완전히 달리 명상법과 생식, 찜질, 뜸, 부황 등의 방법을 썼어요. 그리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환자 스스로 하도록 했죠. 열흘쯤 지나니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이분이 너무도 열심히 자가치료를 한 결과 한 달 후에는 외관상으로는 거의 정상이 됐죠. 그리고 3개월 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CT 촬영을 했는데, 암세포가 말끔히 사라졌다더군요. 그후 많은 사람들이 저희 병원을 찾아와 암환자의 성소가 되다시피 했어요.”
-돈은 많이 벌었습니까.
“문전성시였지만 막다른 골목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돈을 제대로 받을 수가 있나요. 1988년 봄 광주에 전인치유클리닉을 차렸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10년간 조선대 교수로 있었습니다.”
한때 민주화 운동을 함께했던 이돈명 변호사가 조선대 총장으로 부임한 후 그에게 교수로 와달라고 부탁한 것. 그리고 1991년 그는 미국의 위스콘신대학으로 떠났다. 전인치료술을 좀더 확장해보자는 취지였다. 그곳에서 한 수많은 임상활동은 그의 전인치료술을 발전시키는 데 큰 힘이 됐다.
“서양의학의 중심 사상은 특정 병인설입니다. 모든 질병에는 특별한 원인이 있으므로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해야 낫는다는 원리죠. 하지만 병원균도 날로 지능화하고 있는 마당에 특정한 원인을 찾아내는 것은 일시적인 효과에 불과합니다. 암, 고혈압, 신장병, 당뇨, 정신병 같은 질환이 특정한 원인을 찾아낸다고 고쳐집니까.
물론 대체의학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생식요법과 단식이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죠. 어떤 사람은 오히려 나빠진 경우도 있습니다. 질병의 진행이 자기 치유력을 넘어선 경우도 있고요. 환자의 의지가 약하고 대체의학 자체를 신뢰하지 않아 실패한 경우도 많습니다. 환자의 마음속에 근심이 가득하다면 그만큼 성공 확률도 낮습니다. 질병을 만드는 것도 마음이요, 회복시키는 것도 마음이기 때문이죠.”
그는 질병의 근본 원인도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 신념, 의식이 지배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오늘날 난치병이 많은 것은 반생명적 문명이 가져온 이 시대의 역병이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세상을 치유하는 것, 대중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대체의학의 주요 요소다.
“지구상에서 살인무기를 없애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싸우려는 본능이 남아 있는 한 살인무기는 다시 만들어집니다. 물질세계의 오염은 정신오염의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오염된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건강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개개인이 생명의 본성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질병치료에서 건강증진 의학으로
전씨는 현재 병원 중심의 질병 치료에서 생활 중심의 건강증진 의학으로 가고 있는 것에 대해 나름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
“최근 한국건강연대라는 시민운동단체가 결성됐습니다. 김숙희 전 교육부 장관과 함께 제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서양의학, 동양의학, 대체의학 3자 통합의 연구기관인 자연의학 아카데미도 탄생했습니다. 저는 내년 광주에 통합의학 아카데미를 세울 계획입니다. 단순한 치료보다는 건강 계몽운동, 새로운 의학 연구·개발, 환자 스스로 건강을 지키는 생활의료운동 등을 펼쳐나갈 겁니다.”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 활동에도 깊이 관여했지요?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회의는 1985년 창립멤버로 가담했습니다. 양심적이고 윤리적인 의료활동을 벌이는 모범적인 의사단체죠. 또 지금은 한국건강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핵전쟁방지 국제의사회 국제이사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1986년 하버드 보건대학에 가서 노벨의학상 수상자인 버나드 로운 박사를 만났어요. 그와 상의 끝에 핵전쟁방지 국제의사회 한국지부를 만들었습니다. 1989년에는 스톡홀름에서 남북한 의사들이 최초로 만났는데, 이때 북한 의사들과 한반도 비핵화문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였지요. 지금도 북핵 문제로 한반도가 전쟁 위기로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의사가 질병의 퇴치에 혼신을 다한다고 해도 핵무기 한 발이면 그 모든 생명이 물거품이 됩니다. 그럴 경우 하나하나의 치료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전홍준씨는 화가인 부인 이정원(46)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전씨의 이런 활동에 대해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내는 제 인생의 최고 반려자입니다. 명색이 의사면서 돈도 못 벌어오는 ‘못난’ 남편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아빠보다도 대체의학, 생명운동, 환경운동 등에 대해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의사로서의 인생관을 소개해주시죠.
“의학사상 단일이론은 영원히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단편적인 체계를 가지고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죠. ‘제2의 히포크라테스’라고 불리는 파라켈수스(르네상스 시대의 의학자) 교수는 독일 바젤 대학 의과대 교수로 부임하던 날 성서처럼 존경하던 의학서를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워버렸어요. 정통의학이 의학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거죠. 당시 의사들은 의학 교과서만 달달 외우고 있었어요. 파라켈수스는 ‘오직 환자만을 지켜보고 진실만을 추구하며 자연을 배우라’고 설파했어요.
한 예를 들면 사스라는 전염병은 이라크전쟁이 일어난 직후 나왔습니다. 역병은 지구상 대중들의 분노와 적대감정이 모여서 나오는 겁니다. 사스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죠. 이런 질병을 단순히 서양의학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하면 제대로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전남 곡성 태안사에 있는 청화스님을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꼽았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과학 사상을 통합해 자신만의 일관된 사상을 세운 생명학자라는 것. 전홍준씨 역시 일관된 생명관, 우주관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생명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진실된 의사이자 생명학자로 보였다.